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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남에게 보이려고 금식하지 마라
마6:16-18
■ 이야기 속으로
감리교 장로이자 협성대 총장을 역임하신 최문자 시인의 ‘공복(空腹)’이라는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꼭 삼일만 금식하고 싶었다. / 내 몸에 걸쳐진 것들을 다 치우고 / 세상이 켜놓은 몸속의 전원을 다 내리고 / 어디를 짚어도 출렁거리지 않는 / 빈 내장을 갖고 싶었다. // 너무 환한 발가벗은 / 알몸의 달빛 / 그 말씀 아래 서 있기만 해도 / 마를 것 마르고 / 부풀 것 부풀면서 / 공복과 시간이 / 같이 돌아가는 사이사이 / 포만의 가루가 / 부슬부슬 삭아 떨어지는 / 육질의 털들이 다 뽑혀 나가는
그런 / 그런 배고픈 기도를 / 드리고 싶었다.”
이 시는 욕망으로 가득한 세상, 욕망으로 포만된 기도의 자세에 경종을 울리는 시입니다. 어쩌면 내 자신의 빈 내장을 위향가 아니라 같이 돌고 돌아야할 이웃의 공복을 위해 진정한 금식 기도를 드려야 하는 신앙인의 금식기도에 대한 겸허한 자세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 먼저 확인해 볼 질문
당신은 어떤 때 금식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까?
■ 주제 속으로 “금식과 기도”
구약에서 ‘금식’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촘’ 이라는 명사로 쓰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먹는 음식을 중지한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음식의 절제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단어는 ‘아나 네페쉬’ 라는 동사로 쓰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자신의 영혼을 괴롭힌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음식 먹는 것을 절제하며 자신을 다스리거나 자신의 영혼에 결단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는 행위” 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1년에 한 번 지키는 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이 다 금식 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6장29-31절에 보면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이는 너희에게 안식일 중에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레23:26-32).” 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29장7절에 보면 “일곱째 달 열흘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너희의 심령을 괴롭게 하며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기간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잘 이기게 하심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금식 할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스가랴 7장5절과 8장19절을 보면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70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국가적인 차원의 금식 외에 흩어진 집단이나 또는 개인의 차원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금식이 행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주야 금식한 것을 염두에 두고(출24:15-18),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날로 여겨지던 목요일과 내려온 월요일에 정기적으로 금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금식을 표현하는 단어로서 ‘네스테이아’ 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궁핍으로 인한 굶주림을 의미하였습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같은 뜻으로 사용했는데 같은 어근에서 파생한 ‘네스티스’ 라는 단어는 식량이 없다는 뜻으로 “굶주림, 먹지 못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사용하고 있는 금식이라는 말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음식을 멀리하고 민족이나 자신에게 처한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는 행위.” 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즉,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겸손을 나타내기 위해서 했으며(느9:1-2,시35:13, 욘3:5), 헤어 날 수 없는 큰 번민과 위기와 절망에 빠질 때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하기 위하여 행하였습니다(출24:18,삿20:26,에4:6). 그리고 신앙훈련을 위하여 유용하게 실시되었으니, 금식하므로 마음을 괴롭게 하여, 스스로 절제하고, 스스로 고치는 생활을 하므로 자신의 신앙 훈련에 효과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25절 27절을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해롭게 하거나 방해하는 것을 금하고 절제하는 것이며, 영의 생활은 물론 자신 스스로 몸을 잘 관리하고 절제함으로 신앙의 올바른 자세를 가지기 위하여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신령한 몸입니다. 이 주신 몸을 바로 세우기 위해 금식하는 것에는 입 금식입니다. 입을 금하여 술 담배 먹지 말아야 합니다. 입을 금하여, 음란패설이 나오지 않게 살고, 남을 해하는 살인적인 찌르는 말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눈 금식입니다. 눈을 금하여야 합니다. 눈으로 들어오는 죄악이 많습니다. 그것으로 속에 병들고, 마귀의 흉악결박이 일어나고, 죄를 짓고 옥에 갇히고, 병들어 아파하는 것입니다. 귀 금식입니다. 귀를 금하여 남의 허물, 남을 험담하는 것은 듣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귀를 통하여 죄악의 말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자신의 귀에 들어오는 말들을 잘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코 금식입니다. 코를 금해야 합니다. 향락의 냄새를 맡지 말아야 합니다. 여리고 성에서 나는 남자냄새, 여자향수 냄새를 맡고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술 냄새, 쾌락의 냄새를 맡고 타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은 코의 냄새를 따라가다 보면 남는 것은 고통뿐입니다. 손발의 금식입니다. 손이나 발을 금하여, 범죄를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감옥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손으로 범죄 하여 무형의 옥에 갇히지 말고, 발이 탕자같이 걸어서, 돼지 치는 움막까지 가지 말고, 천대멸시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물을 도적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인같이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피부접촉을 금해야 합니다. 남녀피부접촉으로 독한 병에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적 타락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생활에 삼가조심하고, 금하여 더 손해 가는 일이 없도록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에는 기도가 수반되었습니다(렘14:11-12, 느1:4, 스8:21,23). 특별히 회개의 기도가 따랐습니다(삼상7:6). 그래서 금식하는 사람은 애곡하는 자의 자세를 종종 취하였습니다(왕상21:27).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겸허한 자세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금식의 심오한 의미는 사라져 갔습니다. 점차 금식은 경건의 공적으로만 간주되었습니다. 이같이 금식이 변질 되는 것을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논리적으로 반박했습니다(사58:3-7, 렘14:12). 그러나 이같은 금식의 행위는 예수님 당시의 자신들의 종교에 열심이었던 사람들, 특히 바리새파인 형식주의 자들은 매주 이틀씩의 금식일을 지키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2장18절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금식이 형식적이고 하는 사람들의 보이는 요식행로만 나타나는 것을 예수님은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주제에 대한 확인
누군가 금식기도를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고, 당신은 금식기도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 말씀 속으로 “금식에 대한 바른 자세”
마태복음6:16-18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 남에게 보이려는 금식은 행하지 말라
16-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금식 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 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적 금식을 비난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하는 금식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식을 할 때 자신의 행위를 보이려는 독특하게 행동을 취하였습니다. 얼굴을 일부러 씻지 않았습니다. 슬픈 기색을 하면서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재를 뿌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염을 쥐어뜯기도 했습니다. 물론 금식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책망을 받는 것은 고도의 전략을 사용한 것입니다. 남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남에게 자신이 이렇게 금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즉,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야! 정말 경건하구나!” “애통하면서 금식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연극을 하는 것과 같이 행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행동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금식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는 표를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이미 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름을 바르라는 것은 그 기름을 바르는 행위를 통해서 어떤 특별한 기쁨을 나타내는 행위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 같이 몸단장을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평상시의 몸단장을 할 때도 기름을 발라서 자신의 몸을 단장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전도서 9장8절에 보면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고 하였으며, 룻기 3장3절에도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다윗은 사무엘하 12장15-20절을 보면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이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그 아이의 병을 위해서 금식하다가 그 아이가 죽자 다윗은 금식을 중단하고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발랐음을 볼 수 있습니다. 20절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가아입고...”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름을 더구나 머리에 바른다는 것은 자신이 금식하고 있다는 행위를 밖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는 구체적인 대응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씻으라는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금식을 금하라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금식을 필요성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역을 시작 하실 때에 40일을 금식기도 하시면서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9장14-15절을 보면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단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 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 할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즉, 금식을 해야 할 시기가 이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너희들은 그렇게 금식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사명을 다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게 되면 너희들은 금식을 해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금식은 너희들의 문제를 안고 하나님을 향하여 하여야 하는 것이고 그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렇게 금식하고 있다는 자랑을 하기 위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 같이 근심과 슬픔의 기색을 하면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18절을 보면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즉, 금식은 자기 부정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고통의 따르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진정한 영적인 교제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의 필요한 것을 단절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온갖 세상의 욕망과 혈기를 죽이고 더욱더 거룩하고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금식을 해 보신 분들이 우리교회도 많으실 것입니다. 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정말 장기 금식을 하면 정말 참기 힘든 시간을 지낼 때가 있는 것을 압니다. 자신의 육체의 아픔과 괴로움은 지나치고라도 배고픔과 목마름과 그리고 먹고 싶어도 물 한 모금 잘 넘어가지 않는 것을 잘 참아내야 하는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커도 나의 마음의 욕망이 아무리 살아나도 나는 간 곳 없고 내 안에 주님만 사모하고 오직 내가 하나님 아버지만을 생각하면서 드리는 금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정리와 확신
금식은 내 자신이 바로 믿기 위하여 자신을 이기는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하면서 약한 믿음일 때는 몰랐지만 장성한 믿음이 되니 이같은 행동은 잘 못되었다고 그 생활을 끊기 위하여 금식을 해서라도 끊어내는 것입니다. 이같은 행동은 바로 태중의 아이가 세상이 나와서 살려면 그 아이의 탯줄을 잘라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 나온 아이는 엄마의 뱃속에서 자신을 성장하게 하고 생명을 이어주었던 탯줄을 인정사정없이 잘라야 살 수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통이 사건들을 모르고 세상풍파를 모르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정말 천국같이 아늑한 곳에서 탯줄을 통해 공급하는 영양가를 섭취하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이라고 하여도 기한이 차서 세상에 나오면 아프더라도, 고통스럽더라도 탯줄을 잘라내야만 사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신앙이 어린아이 같을 때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 생활을 잘 하는데 아직도 세상 생활이나 세상 일이 즐거워서 끊어버리지 못하고 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은 세상의 유혹을 잘 이겨내지 못하고 또한 세상의 물들었던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구원을 받아 믿음의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감격이나 기쁨을 모르고 감사를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재미있어도 즐거워도 언젠가는 사정없이 잘라 버려야 구원받은 진정한 성도가 될 수 있고 믿음의 성장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신앙인으로 살려면 세상 줄을 과감히 잘라버리고 성령의 줄을 잡아야 살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4절을 보면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고 하였고, 마태복음 6장2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성공은 삼가 스스로 조심하고, 세상의 얽매였던 생활을 잘라내고, 금하는 생활을 하고, 진리의 말씀을 실행하려고 금식하면서 이겨내며 살 때 약속된 축복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 확신의 질문과 결단의 기도
1. 이제 당신은 금식의 참 의미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2. 신앙인에게 금식기도가 왜 필요할까요?
3. 금식과 동일한 절제는 무엇이 있을까요?
■ 함께 드리는 기도
주님, 우리의 기도가 자기 신앙의 자랑이 아니라 내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는 기도가 되게 하시고, 인간적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민족과 교회공동체와 이웃을 위하여 금식하는 기도의 용사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