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으며 소설가와 사회사업가를 생각합니다.
사람의 인생을 마주한다는 데서 소설가와 사회사업가는 닮았습니다. 온전한 인물을 그려내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소설가와 당사자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사회사업가. 소설가의 이야기를 그려낸 여러 책을 읽으며 사회사업가다운 사회사업가가 되길 원하는 제 생각과 자세를 다잡습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가의 일’, 김영하 작가의 ‘말하다’, 정혜신 선생님의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를읽고 쓴 ‘사회사업가와 소설가’.
소설 따위ㅡ‘소설 따위’라는 말투는 약간 난폭하긴 합니다만ㅡ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거의 누구라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소설이라면 문장을 쓸 줄 알고 볼펜과 노트가 손맡에 있다면, 그리고 그 나름의 작화 능력이 있다면, 전문적인 훈련 따위는 받지 않아도 일단 써져버립니다.
(…) 소설이라는 건 누가 뭐라고 하든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폭이 넓은 표현 형태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폭넓음이야말로 소설이 가진 소박하고도 위대한 에너지의 원천의 중요한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쓸 수 있다’는 건 내가 보기에는 소설에게는 비방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입니다.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14-16쪽.
사회사업가의 전문성을 떠올렸습니다. 소설가란 직업은 누가 보기에도 전문성 있는 직업입니다. 그럼에도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다는 한 소설가의 당당함에 위엄이 느껴집니다.
한편 한 마디로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없는 ‘전문성’을 찾아 헤매는 사회사업가의 상황을 생각했습니다. 전문성 있는 직업으로서 존중 받길 원하지만 정작 제 일의 전문성을 딱 집어 정의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기운 빠지기도 했고, 나름 정의해 보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사업가만이 붙잡을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렸습니다. 당사자를 만나며 갖춰야 할 인격적 소양도 생각해봤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사회사업가 여서 특출하게 잘 하는 일인지 생각하니 주춤 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전문성의 굴레에서 해방된 기분을 만끽했습니다. 풀리지 않았던 오랜 숙제를 해낸 기분이었습니다.
소설 한두 편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은 일단 못할 짓, 이라고 말해버려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거기에는 뭐랄까, ‘어떤 특별한 것’이 점점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16쪽.
「사회사업 실천하기,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사회사업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는 것, 사회사업으로 먹고사는 것, 사회사업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단 못할 짓, 이라고 말해버려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거기에는 뭐랄까, ‘어떤 특별한 것’이 점점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사회사업가의 전문성은 사회사업을 지속적으로 해 내는 꾸준함에 있었습니다. 그 일로 먹고사는 것, 사회사업을 제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 그 자체에 전문성이 있습니다. 사회사업을 사회사업답게 꾸준히 실천하는 일이 제 스스로의 전문성을 기르는 일이 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데 주어지는 어떤 ‘자격’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정의할 바 없으나 어찌 됐건 소설가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냉엄한 일인지, 소설가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소설가를 사회사업가로 고쳐 읽어도 자연스럽다, 생각했습니다. 소설가와 사회사업가의 닮은 점이 고맙고 반가운 순간입니다.
제로섬 사회
소설가가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는 문학계가 제로섬 사회가 아니라는 점도 얼마간 관계가 있는지 모릅니다. 즉 신인 작가가 한 명 등단한다고 해서 그 대신 현역 작가 한 명이 직을 잃는다는 식의 일은 (거의) 없다는 얘기입니다. (…) 어떤 소설이 10만 부가 팔리는 바람에 다른 소설의 매출이 10만 부 떨어졌다는 등의 일도 없습니다. 18쪽.
제로섬 사회. 미국의 경제학자 서로(Thurow. L.C.)가 제창한 말로 경제 성장률이 낮은 사회에서는 정책에 의해 혜택을 입는 층이 있으면 반드시 손해를 보는 층도 있게 된다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누군가가 일어서면 누군가는 넘어지는 사회의 안타까운 모습을 피해가는 문학계의 문학다운 면모가 좋습니다. 사회사업도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실천을 잘 한다고 해서 또 다른 누군가의 일이 손해를 볼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의 작품으로 인해 문학계 전체가 활황을 보이듯 사회사업의 윤기, 질도 함께 돋아날 겁니다. 그런 사회사업이 좋습니다. 함께 익어가는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명쾌한 결론 보다 머릿속에 생생하게 담아두기
책 읽으며 여러 번 몸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깊은 공감, 배움, 감동이었습니다. 언젠가 저도 제가 하는 일을 이렇게 담담히 써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가득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좋은 소설가가 되는 다양한 조건이 있지만 그 가운데 ‘결론짓지 않기’를 중요한 자세로 삼았습니다. 스스로도 사물이나 사상을 보고 ‘그건 이런 거야.’. ‘저건 이러저러해.’하고 결론 내리지 않고 그 일의 원래 모습을 소재로서 최대한 현상에 가까운 형태로 머릿속에 생생하게 담아두는 방법을 택하는 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사회사업가의 자세도 그래야합니다.
저도 모르게 제가 만난 당사자의 하루, 한 면, 한 이야기만 듣고 ‘이런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겠지.’하고 단정 짓기도 했습니다. 반면 궁금해 하고, 궁금한 것을 잘 물었을 때 들은 답은 제 예상을 빗나간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을, 저 한 사람의 그 것에 대입하지 않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결론을 내릴 필요에 몰릴 만한 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121쪽.
이 한 문장이 깊이 와 닿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에 대해 즉각 어떤 결론을 내리는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목격한 광경을, 만난 사람들을, 혹은 경험한 사상을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례’로서, 말하자면 표본으로서,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기억에 담아두려고 노력합니다. 121쪽.
사회사업가가 사람을 만나고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좋은 자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기억에 담아두기. 실천해야겠습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을 사랑하는 자세가 멋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져갈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 힘껏 일했다는 노동의 증거, 그것뿐이다. 168쪽.
그런 마음으로 사회사업 하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쓰며, 글과 제가 어울리는지 고민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이 더 큽니다. 잘 실천하는 사회사업가, 되고 싶습니다.
첫댓글 170쪽. 유감스럽기는 해도 부끄러워해야할 일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