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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면장산리 출신 해광 송재민 선생 생애사에 최우수상 수상
2010 해광 송제민의 생애와 업적 Ⅰ. 머 리 말 Ⅱ. 해광 송제민의 가계와 생애 Ⅲ. 해광 송제민의 의병사적 1. 호남․호서의병 창의 2. 소모호남의병문(召募湖南義兵文) 3. 남원성전투와 해광 송제민 4. 군비확충과 지원 - 군량미, 의약, 구휼미 Ⅳ. 후대의 평가와 추숭 Ⅴ. 맺 음 말 제출자 : 송 병 완 해광 송제민의 생애와 업적 송 병 완 Ⅰ. 머 리 말 필자는 향토문화 연구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인물연구에서 역사서에 널리 알려진 인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문제가 있고, 특히 호남의병사에 있어 민간인의 역할과 그 성격을 올바로 조명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왔다. 주지하듯 이순신장군은 “약무호남”이라고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에서 보여준 호남 민중들이 보여준 나라를 위해 충절정신은 제대로 다 알려졌다고 말하기 힘들다. 공과를 논하는 과정에서 민간인들은 드러나지 않고 官과 관계 된 인물들이 중심인 것으로 역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토대로 이번에 필자는 가문사로 전해 내려온 해광 송제민의 의병사를 연구하고자 한다. 해광 송제민의 사적은 필자가 본고에서 상세히 논급하는 것처럼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등 관찬사서에는 한 군데도 기록되어 보이지 않고 있다. 후일 趙平이〈題海狂萬言疏後〉를 쓰면서 뛰어난 자질과 학문을 가졌으나 끝내 쓰이지 못했던 아쉬움을 적은 것도 바로 그러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위인 권필이 祭宋聘君文에서 아아! 하늘은 이 백성들로 하여금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고자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공께서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뜻을 두었는데도 끝내 그 뜻을 펼쳐 보이지 못하였는가. 하늘이 선한 사람을 돕는 것이 이렇게 아득하기만 하여 믿을 수 없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공께서 어진 덕업을 쌓고 품행을 깨끗이 닦아 온 바가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1) 라고 공의 탁월한 덕행과 박식한 의론이 세상에 널리 펴지지 못함을 한탄한 것도 바로 이러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특히 해광 송제민이 이끄는 민간 선단이 서해와 한강을 장악하여 왜군들의 목줄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강 등 서해의 해상을 봉쇄하여 그들 군수물자의 수송까지 차단되어 왜군에게 공포심을 갖게 함으로써 이후의 작전에 큰 혼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것은 호남출신 의병장들의 격문이나 그를 의병활동의 실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지만, 해광 송제민의 호남 소모 격문의 내용의 문장은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대목이다. 김 경노가 선조에게 “전라도 사람들은 평소에 왜의 이름을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필자는 2000년 광주전남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창간호에 해광 송제민의 만언소를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이에 뒤이어 2006년에는 함평문화원에서 ‘대굴포 전라도 수영 고찰’이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함평문화원에서 조사연구한 상선과 병선 조달 및 활용은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다고 보며 ‘함평 대굴포에서 해군들의 거북선에 대한 연구가 기대된다.‘고 한 당시 이현석 선생의 지적도 주목할 대목이다. 그런가하면 김천일 의병장 제415주기 추모제에 참석하여 필자는 송강 후손 정 승2) 한편 본 연구는 앞에서 거론하였듯이 관찬사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호남출신 민간인 해광 송제민의 의병활동을 다룬다. 본 연구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활용되었다.
양응정, 松川集 장 유, 溪谷集 이긍익, 연려실기술, 日月錄(난중잡록 중) 유희춘, 眉巖日記 권 필, 石州集, 祭宋聘君文(권필), 해광공 유사 趙 平, 雲壑先生集 卷六 題海狂萬言疏後 趙慶男, 亂中雜錄 1 임진년 상, 宋濟民의 격문 송시열, 宋子大全 권193, 狂處士宋公墓表 박세채, 南溪先生集 卷83, 處士海狂宋公傳 성해응, 硏經齋全集 함평문화원, 대굴포 전라도 수영고찰(2003) 金鍾秀, 夢梧集 海狂集序 등이 바로 그것이며, 이밖에도 임진-정유 양 전란에 관련된 의병활동사적을 기록한 기정익, 박세채. 박종정, 송시열, 정개청, 정철. 최상중 등의 문헌도 찾아 이를 부분적으로 이용하였다. 부족한 연구이지만 본 연구를 토대로 하여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민간인 의병 해광 송제민의 사적이 역사의 한 폭으로 재조명되는 계기가 된다면 더없는 다행이겠다. Ⅱ. 해광 송제민의 가계와 생애 해광 송제민(1549~1602)은 본관은 홍주이며 처음 이름은 濟民이요, 字는 以仁이었는데, 훗날에 ‘濟’자를 ‘齊’자를 고치고 자를 士役이라하였다. 1549년(明宗 4) 담양 대곡3) 해광의 선조는 고려조에 나주목사와 전라감사를 지내고 고려 말 관음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송문중이며, 조선 중기의 학자로 문과를 거쳐 홍문관 정자를 지내다가 윤원형에게 피화되어 요절한 송정황의 아들이다. 공주, 나주, 함평, 영광 등지에서 우거하였다.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구제하라’는 뜻으로 제민(濟民)이라 이름 지었다고 하며, 성품은 충직하고 효성스러웠으며, 학문은 천문과 인사를 兢懼하였다. 河西 金麟厚4) 선생이 칭찬하였듯이 아버지 宋庭篁은 처음에 권력을 잡은 貴人에게 거슬려 교서관에 예속되니,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으나 뒤에 槐院5)6)7) 송제민은 광주 황개에 살면서 이지함8)硏經齋全集에서 宋齋民을 周易에 深究하셨는데 土亭 李之菡선생께서 공에게 이르길 “세상에 한 글자가 만 번 변하는 이치가 있는데 자네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라고 묻자 공은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 해답을 얻지 못했었다. 후에 端石山[무등산]에서 오랫동안 靜坐하여 마침내 그 뜻을 깨달아 “이는 洛書法, 즉 周易이다. 소위 朱子가 말하는 천지만물이 끊임없이 변하는 원리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라고 한 것이 그것을 일컫는 것이다.9) 그러나 3대를 걸쳐 정치적으로 피화된 가문사적 비애와 속박되기를 싫어하는 호방한 성격 때문에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송제민은 發解試에 합격하여 장인의 뜻에 따라 會試를 응시하려 하였으나 친구의 병간으로 서울에 들어가지 못하여 마침내 과거를 포기하였다. 송강 정철은 송제민의 성품에 대하여 그 마음은 물속에 비친 달과 같고 그 지조는 서리와 눈같이 냉엄하였으며 그 가슴에 품고 있는 바는 曾點(증점)과 같았고 그 큰 절의는 魯仲連(노중연)과 같았다. 고 칭송한 바 있다. 또 하나 해광 송제민의 사상과 경세관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미암 유희춘의 眉巖日記에 보인다. 즉 미암일기 을해년 12월조에는 을해년(선조 8년 1575년) 12월 5일 ; 아침에 宋濟民을 불러다가 그가 망령되이 영광에 결코 되지 못할 바다 堰의 일을 일으켰다고 꾸짖고 또 감사에게 말하여 금지시키겠다는 뜻을 말했으나 그는 잘못 생각하기를 깊이 하여 결코 깨닫지를 않았다. 을해년(선조 8년 1575년) 12월 16일 : 宋濟民이 와서 말하기를 “영감께서 가르쳐주심을 받아 깜짝 놀라고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는 다시는 바다에 연을 막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그가 잘못을 고친 것을 고맙게 생각하여 먹과 신 두 가지를 상으로 줬다.10) 는 기사가 있다. 그리고 뒤이어 병자년(선조 9년 1576년) 2월 15일조에는 宋濟民이 와서 고하기를 근일에 右水營에 간다면서 구해줄 편지를 받기를 원하므로 나는 즉시 들어줬다. 그것은 濟民이 전년에 망년된 계책을 세워 영광에 海堰을 막으려하여 山木 1천 條를 샀는데 이제 관에 잡혀가게 되어 친필의 대가를 물리게 될까 두려워 이를 모면케 해달라는 것이다.11) 라는 기사가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기록으로는 사위 석주 권필이 쓴 해광 송제민의 유사12)에는 “무안 현에 神祠가 있고 신사 뒤에 소나무가 심히 오래된 것이 있었다. 선생이 그것을 베어서 배를 만들고자 하니 읍인 들이 모두 신이 있어 베지 못한다고 하여 앞을 다투어 와서 만류 하였다. …… ‘하늘이 큰 제목을 낼 때에는 반드시 쓰일 곳이 있기 때문이며,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드는 것은 황제 때부터 있어온 일이다.’라고 말한 기사가 있다. 일찍이 해광 송제민은 양명학에 심취하였고, 빈민구휼과 애민사상 고취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영광 앞바다에 제방을 쌓아 해일의 피해를 막는 공사였다. 당시 해일로 인해 영광군 일대의 농토가 큰 피해를 입었는데 해광 송제민이 함평, 무안현 일대의 소나무를 베어 제방공사를 총감독한 것이다. 「미암일기」등 당시의 기록은 해광의 행동이 그르다는 평을 하고 있으나 조선 사대부 가문의 덕망 있는 유학자로서 경전 연구에만 몰두하지 않고 實事求是를 행하고자 했던 해광 송제민의 경세사상은 오늘날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43세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광 송제민은 금성의 선비인 양산룡, 양산숙 등과 함께 창의사 김천일 장군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또한 前 都事 趙憲을 추대하여 左義兵將을 삼고 前 察訪 朴春茂13)를 추대하여 右義兵將으로 삼아 스스로 종사관이 되어 召募湖南義兵文을 돌려 의병을 쉽게 모집하여 경기일대와 서울 왜적 축출과 충주와 금산 전투를 통해 국난극복의 발판을 마련했다14) 일찍이 곤재 정개청은 해광에게 상선을 이순신에게 주어라하여 대 선주인 해광은 29척을 이순신 장군에게 주어 이를 병선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으며, 일찍이 상선을 전함으로 개장하여 강화도 연해와 양해도 해전을 이끌었고, 전란 이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의료 기관인 醫局을 개설하여 백성을 구휼하는데 대선주인 해광의 협조가 아니면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대굴포 전라도 수영고찰」(함평문화원, 2003)에서 아주 상세하게 언급이 되어 있다. 이를 조금 인용해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곤재 정개청 문하생으로 대학자이며 무역 선단의 대 선주였던, 해광 송제민이 대굴포 서쪽 1㎞ 지점인 사포의 언덕에 백일홍 당을 짓고 우거하였으며, 그의 아들 송타가 대곡마을 앞 창동 득량 골 벼랑에 층층이 쌓은 바위돌이 있는데 이 바위 돌을 해전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적의 배를 격침시키기 위해 송타가 주도하여 쌓았으므로 사람들이‘송 장군 바위’라 불렀다고 전한다. 1597년 9월 5일 왜적 수군 7,000여명이 사포에 상륙하여 이곳 일대에서 무안 함평의 의병들과 대접전을 벌렸고 불행히 의병이 패하였으며 송 타는 밤에 포로가 되어 한산 바다까지 끌려갔고 배안 사람들과 밀모하여 적의 무기를 빼앗아 모두 베었으나 적 하나가 부상한 채 피하여 이 사실을 알리자 왜선 수십 척이 몰려들었다. 송 타는 “나는 광주에 사는 송 해광의 아들이다.”라고 크게 외치고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 일을 같이 타고 있던 창평 사람 이 신이 일본에서 영광 사람 수은 강항에게 알렸고, 강항이 1600년에 귀국하여 송 씨 가문에 전했다. 초혼하여 대곡 마을 앞산의 묘 좌에 있는 부인 성주 김씨 묘에 곁에 장례하였다.15) 한편 송 제민 셋째 딸을 安東 權韠(안동 권필)에게 시집보냈는데, 사위 권필은 강화에 살면서 장인과 교통으로 서해와 한강 해상권장악으로 김천일 의병장을 도와 수원에서 왜적의 북진에 예봉을 꺾어 서울과 경기지방 왜적을 토척하여 몽진한 선조임금으로 하여금 창의사 군호를 받게 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위의 각종 자료를 통하여 살핀 것처럼 민간인 해광 송제민의 활약은 일개 장수 이상으로 지리와 밝은 정보, 전략이 돋보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에 해광은 김천일, 고경명, 김덕령16) 그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정에서 백성들에게 전쟁과정에서 국민들의 고통과 의견을 듣고자 방을 부쳐 의견을 수렴하였다. 이때 해광 송제민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잔악한 행위에 복수의 대의를 밝히고 추진 할 것을 임금에게 만언소로 광주 부사와 전라 도사 등 方伯에게 올릴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범하는 말이 많다” 중간에서 저지당하여 임금님에까지 올라가지 못하였다. 그러자 해광은 강호에 몸을 숨기고 ’海狂‘이란 자호를 짓고 몇 년 있다가 송제민은 병이 위독하자 후사를 외종제인 崔尙重17) 사위인 권필이 祭宋聘君文에서 공의 아들들을 훌륭하게 가르쳐 마침내 그들이 성인이 되어 공의 뜻과 덕행을 드날려 후세에 전하게 하고자 하니, 그렇게 한다면 혹시 조금이라도 이전의 허물을 덮을 수 있는 것인지를 공께서는 알고 계신가 알지 못하고 계신가. 라 한 바 있듯이 송제민의 큰 아들인 화암 송타 장군도 영산강 사포전투에서 순절하였으며, 둘째 아들인 복은 송장도 정유재란에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으나 회유와 협박을 거부하며 朝鮮 男兒의 기개를 떨치다가 제2차 포로쇄환에 귀국하였다18) Ⅲ. 해광 송제민의 의병사적 1. 호남․호서의병 창의 임진년 5월 전라관찰사 이광이 전라도 근왕 군을 이끌고 공주까지 북상하였으나 이미 임금이 서천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여 김천일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송제민은 스스로 종사관이 되었다. 당시를 회고하여 김천일은 제장들의 호응에 병 중임에도 ‘칼을 차고 말을 타니 거뜬하여 날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의 사정을 계곡 장유는 그의 溪谷集에서 宣祖朝 임진 의병 : 義士 宋濟民․梁山龍․梁山璹․ 林懽․李光宙․徐廷厚 등과 피를 마시며 맹세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金千鎰이 평소에 몸이 약하고 병들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기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칼을 차고 말을 타니 거뜬하여 날고 싶다.”고 하였다.19) 고 적고 있다. 나주의 김천일 의병장이 주축을 이룬 전라도 3,000명의 의병군이 경기도까지 북진을 하였으며 송제민은 수원 독산성에서 본진을 두고 서울과 경기지역 일대의 왜적을 평정하였다. 그 때에 도성에는 왜적의 형세가 아직도 성하였으며, 또 淸鎭(청진)의 경계를 나누어 점검하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은 “외로운 군대로 적과 대치하면 다만 일을 실패할 뿐이니, 다시 호서의 군사와 말을 모집하여 兩湖를 제압하여 왜적을 막는 형세를 만드는 것만 못하다. 이는 宋모[송제민을 일컬음]가 아니면 할 수 없다.”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송천 양응정은 송제민을 호서로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는 적임자로 추천하고 있다. 즉 양응정은 松川集에서 그해 6월 羅州를 기점으로 군마를 조발하여 西로 올라가 勤王의 길을 걷기로 하였는데 공의 아우 산숙은 副將으로 진열을 통솔케 하고 아우 산숙은 그곳에 머물러 어머니를 모시게 하였다.……그 길로 길을 떴는데 도중에 공이 김 공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계획이 원대하지 못하면 반드시 코앞에 걱정을 당하기 일쑤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宋濟民을 湖西로 보내 그 곳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길을 가로 막고 있는 것들을 몰아치우는 한 편 응원군 길을 트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여 김 공이 그 말대로 하였다가 과연 2천명의 병력을 추가로 얻어 뒤따르게 하였다. ……20) 라 적고 있다. 그리하여 송제민은 호서로 가서 사대부들을 연결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20일 사이에 무리가 2천 명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송제민은 두 진영에서 주선하여 일을 조치하기를 채 반도 못 하였는데, 討賊使 高敬命이 금산에서 패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송제민은 말을 돌려 남쪽으로 가서 고경명 의병군 중에 아직 흩어지지 않은 자들과 함께 다시 병력을 불러 모을 계책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은진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 병력이 이미 해산되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2. 소모호남의병문(召募湖南義兵文) 김천일 의병은 1592년 5월 16일 창의하여 6월 3일 수원성을 향해 북진을 하였고 6월 23일에 수원성에 들어갔으나 관군의 잇따른 패배로 김천일 의병군은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김천일 장군은 종사관 송제민의 본관이 충청도 홍주이며 충청도 출신인 토정 이지함의 제자로 일찍이 이 지역의 사대부들과 교분이 있는 점에 착안하여 충청도 지역의 의병을 모집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송제민은 필마로 충청도로 내려가 토정 이지함의 동문제자인 중봉 조헌과 화천당 박춘무를 만나 의병 봉기를 촉구하니 순식간에 2,000명의 의병이 모이게 되었다. 이에 고무된 송 제민 선생은 다시 호남지방에 격문을 보내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소모호남의병문(召募湖南義兵文)이다. 송제민은 마침내 호남에 소모 호남 의병문(召募湖南義兵文) 격문을 돌려 흩어진 의병을 모으는데 열성을 다했다. 이 내용이 다으의 격문이다. [자료] 召募湖南義兵文 선조 25년 7월 21일 전라도 의병종사관 송제민은 삼가 통곡하여 제배하고 본도 열읍의 수령과 유향소 향교 훈도와 당장과 유사 등에게 통문을 하나이다. 엎드려 말씀드리건대 제민은 지난날 23일에 김 의병장(김천일)을 따라 수원부에 이르러 산성에 유둔한 지 5일이 되었는데, 서울의 적이 오히려 왕성하고 청주와 진천에 머물러 있는 적도 방자한데 孤軍이 깊게 들어갔으니 군량미를 보급하는데 이용하는 도로가 염려되므로 一軍이 함께 나를 추대하여 충청도 의병을 모집하여 길을 막는 적을 소탕하고 원병이 오는 길을 통하도록 하라고 보냈습니다. 충청도에 와서 士友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니, 20일 사이에 2천여명 병사를 얻었습니다. 대중의 여망에 따라 전에 都事를 지낸 趙憲을 左義大將으로 함께 추대하여 黃澗과 永同 이하의 적을 막도록 하고 전에 察訪이었던 朴春武로 右義大將을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습니다.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갑자기 錦山에서 고경명 장군의 패함이 들려오니 시운인가, 천명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사를 극진히 잘못한 탓인가. 말을 돌려 남쪽으로 와서 의병이 흩어지기 전에 다시 소집할 계획으로 恩津에 이르렀으나, 비로소 대군이 이미 흩어져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사람이 누군들 죽지 아니 하리오만은 그 죽을 곳에 죽는 것이 어려우니 倭奴가 심히 극성할 때 驍師와 悍將[효사는 사납고 날쌘 사람이며 한 장은 사납고 날쌘 장수를 말함]이 또한 관망만 하고 달아나 삶을 구해서 구차히 살고자 하나 高霽峰은 유학을 한 문신으로 軍旅의 일을 알지 못하는데도 하루아침에 衆人들의 추대를 받아 장수가 되어 순국함으로 임금님에게 보답하고 아들도 아버지 따라 죽음으로 충효가 한 집에서 아울러 났으니 죽어도 남은 영화가 열렬하게 빛이 납니다. 사람마다 한 번은 죽는 것이므로 제봉은 그 도를 다하여 죽을 곳에서 죽었으니, 어찌 침착하지 못하게 눈물을 뿌리고 깊이 슬퍼하겠습니까? 임금님께서는 서쪽으로 蒙塵을 하시고 종묘사직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七道가 모두 흉적들에게 유린 되었으나 단지 호남 한 도만 다행하게도 보존되었습니다. 장래에 興復할 기약이 참으로 이곳에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게으른 장수와 교만한 병사는 움직이면 반드시 무너지고 흩어집니다. 한번 창의한 뒤에 인심이 처음으로 안정되어 모두 적에 대하여 분개함을 느끼지만 한 번 싸워 패하고 나면 의기가 꺾이고 막혀 수습할 수 없으니 도리어 게으른 장수와 교만한 병사의 조소가 되었습니다! 아! 오직 저 頑夫와 浪卒[어리석은 완악한 사람과 사나운 졸개]은 공을 즐기고 이익을 탐하는 무리라 이익을 보면 나아가고 해로움을 보면 피하니 이것은 자기 몸만을 돌보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무엇을 나무라며 무엇을 꾸짖겠습니까? 예부터 호남은 예의의 고을이라 祖宗으로부터 休養한 은혜를 입은 지 수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선비로서 자처하여 인을 드러내고 의로 현혹된 자가 되어 모두 이름만 얻고 험한 일을 피함으로 수천 명의 군사가 일시에 모두 무너져 한 사람도 그의 장수의 죽음을 구하지 아니하나 이것이 어찌 庸人과 俗夫들에게만 조소거리가 되겠습니까? 참으로 왜노들에게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 피를 발라 秋成[병조]의 府庭에서 장수로 임명을 받을 때 하늘과 땅에 맹세한 마음은 천지 백일에 밝게 비치니 장차 어떤 면목으로 천지 사이에 용납하려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仁義의 근본인 마음을 하늘에서 처음 받았을 때는 너와 내가 같아서 진실로 피차의 구분이 없었으나 사욕이 해쳐서 착한 마음을 막고 가리어 그 본심을 잃어버린 채 있게 되면 얼굴은 사람의 탈을 쓰고 마음은 짐승인 자가 있어 오직 충과 효를 사람마다 하게 할 수는 없지만 이 왜놈을 토벌하는 일에 있어서는 비록 불충하고 불효한 자라 할지라도 함께 원망할 것이니 어찌 충효자들의 사사로운 원수라 하겠습니까?(중략) 그러나 호서 의병이 은진, 진천, 옥천을 두루 수비하는 데 법제가 있고 대장인 趙憲과 참장인 李天駿은 모두 때를 타고난 人傑이라 천문을 헤아리고 시세를 살피며 적을 헤아려 승리로 이끄는 움직임이 옛사람과 부합됩니다. 따라서 적의 형세가 서쪽으로는 가지 못하고 북쪽으로만 달아날 수 있음으로 반드시 무주로 달아날 것입니다. 영남은 金誠一과 郭在祐 두 장군이 군대를 쓰는 것이 귀신과 같아 그 위엄이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니 반드시 嶺을 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할 것이며, 명나라 군사 五萬이 우리 勤王兵과 함께 하늘을 치솟고 땅을 진동하는 기세로 북에서 동으로 내려와서 松溪에서 적을 잡는다면 충청도에 흩어져 있는 적이 몰려와서 돌아갈 곳이 없어서 반드시 금산의 적과 합세하여 닥치는 대로 칠 것입니다. 궁한 도적이 생명을 걸게 되면 후퇴를 잘하는 장수와 도망가기 좋아하는 군대로 어찌 이곳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 하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호남의 父老와 士庶 들의 더없는 근심이올시다. 혹시 늙고 어리고 파리하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사람은 각각 무기와 돈과 식량을 내어 이바지하는데 도울 것이며, 만약 사리에 어두워 완고하여 몸소 움직이지 않는다던지 또 군량을 내어 돕지 아니 한다면 이것은 不仁하고 不義한 사람으로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금수와 같은 마음으로 왜적을 돕는 무리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각 관적에 성명을 기록하여 놓았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면 외국으로 추방하여 우리나라에 더러운 물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21) 소모호남의병문(召募湖南義兵文)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즉 선조조 임진의병 : 趙憲의 부하 宋濟民이 호남에 격서를 보냈는데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전 도사 조헌이 좌의 대장이 되어 황간과 영동의 적을 방어하고, 전 찰방 朴春茂가 우의 대장이 되어 금강 이상의 적을 방어하기로 하더니, 일의 조치가 끝나기 전에 갑자기 금산에서 패전하였다는 기별을 듣고 말고삐를 돌려 남쪽으로 돌아와서 다시 군사를 모집할 계획이다.”22) 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 격문은 수원성 북상이후 김천일 의병군의 역할과 활동상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으며 충청도 지역의 중봉 조헌 의병군의 봉기가 김천일과 종사관 송제민에 의해 실현되었음을 알려주는 임진왜란 의병사의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앞에서 인용하였듯이 해광 송제민은 이 격문의 말미에서 무릇 우리 전라도 각 읍의 부형들은 아버지는 자식을 돕고 형은 동생을 격려하여 지절을 갈고 닦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의 흉봉을 막아 임금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부모에 효도하고 처자를 보존하여 길이 그 집을 편하게 한다면 천만번 다행한 일입니다. 혹시 늙고 어리고 파리하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사람은 각각 무기와 돈과 식량을 내어 이바지하는데 도울 것이며, 만약 사리에 어둡고 완고하여 몸소 움직이지 않는다던지 또 군량을 내어 돕지 아니 한다면 이것은 불인(不仁)하고 불의(不義)한 사람으로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금수와 같은 마음으로 왜적을 돕는 무리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각 관적에 성명을 기록하여 놓았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면 외국으로 추방하여 우리나라에 더러운 물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역설 하고 있다.23) 왜군의 앞잡이가 되거나 눈치를 보는 사대부를 향한 이 서슬 퍼런 격문은 의병봉기 목적이 정치적 출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처자식을 보전하고 종묘사직과 가문을 보전하는 것에 있으며 일을 위해서는 목숨에 연연하지 않았던 김천일 의병군의 살신성인의 호국정신을 엿볼 수 있다. 3. 남원성전투와 해광 송제민 1597년(선조 30) 정유년에 왜적이 다시 대거 침략해 왔는데, 먼저 호남 지방을 유린하려 했다. 명나라 부총병 楊元이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송 제민이 찾아가 그를 만나보고 수호의 계책을 말하니, 양 원방은 송 제민의 머리가 본래 벗겨져 있었으므로 양원이 그를 왜군 첩자로 의심하여 잡아서 군대 안에 매어두고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송제민은 정신이 평상시와 같아서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양원이 매우 의심하였다. 마침 감찰 閔純이 양원의 병영 내에 있다가 송제민이 구류 된 것을 보고 들어가서 양원에게 말하기를 “東國의 高士인 宋某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니 양원이 놀라 일어나서 그 묶인 것을 풀어주고 윗자리로 맞이하여 계책을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군대에서는 지형을 얻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지금 遙天(요천=남원시로 흐르는 하천)의 물이 매우 많고 성이 그 아래 지역에 있으니 결단코 적을 방어 할 곳이 못됩니다. 바라옵건대 빨리 진영을 옮기도록 하시오. 라고 하니 양원은 그 계책이 간사하다고 여겨 듣지 않았다. 적이 밤에 사람을 시켜 강둑을 쌓아 성으로 물을 따 대니 양원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고, 宣陵과 靖陵 두 곳의 陵24)25) 이에 송제민은 이를 돌이켜 생각함에 비분강개하여 하루도 그 일에 대한 복수를 잊은 날이 없었다. 송제민은 한 匹夫로서 국가가 혼란을 당하여 스스로 힘쓸 수가 없었다. 오직 의병을 불러 모아서 건재 김천일과 중봉 조헌을 격려하여 이들을 의지하여 일 분의 충의를 바치려고 하였지만, 불행하게도 두 분이 모두 죽었다. 송제민은 미처 의병들을 거두어 모으기도 전에 조헌공이 또 죽었단 말을 들었으며, 倡義使가 적을 추격하여 진주에 이르렀다가 또 죽었단 말을 듣고는 송제민은 기로에서 방황하여 한갓 스스로 피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물론 송제민은 군영을 떠나 병력을 모집하느라 함께 죽지 못한 것이었다. 그 후 김덕령 장군 또한 모함의 죄망에 걸려 죽었으며, 楊元의 인품으로는 함께 무슨 일을 함께 도모 할 수 없으니, 이에 송제민은 또한 그만 둘 만하였으나 봉기한 전라도 의병의 활약 때문에 그 마져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4. 군비확충과 지원 - 군량미, 의약, 구휼미 해광 송제민의 의병으로서 군비 확충과 해산물을 구입 공급한 가문사적 기록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김천일 의병장이 서울 지역 왜적을 토적시에 구휼미 일 천석을 풀었다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가하면 제주에서 준마를 구입하여 김덕령26)에게 지원한 것27) 송제민은 해밝은 지리와 정보 교통으로도 유명했다. 토정 이지함 선생과 곤재 정개청 선생과 사제 간으로 주역 등 서해지방의 우거와 교통으로 지리에 밝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남에게 얽매이지 않았으며, 간혹 사람들에게 놀라게 하는 일이 있었다. 공이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음식을 먹지 않으며 도보로 달려 닷새 날에 성인처럼 상례를 집행했으며, 공의 仲父인 휘 정순도 문과에 급제하여 금산 군수에 제수되자 공을 친자식처럼 길렀다. 성장하면서 經書(경서)와 史書(사서), 諸子百家(제자백가)에 힘을 다하였고, 문장에 능통하여 선배와 長者(장자)에게 從遊(종유)하다가 성현의 책과 역학에 정력을 쏟았다. 한편 웅치방어전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김천일이 이끄는 의병은 적세가 치성했던 서울 근교까지 북상하여 도성의 배후인 강화도에 장기간 주둔하면서 서울 내에 특공대로 의병항쟁을 그치지 않았다. 지리에 밝은 송 해광 송제민은 사위 권필이 강화도에 살고 있어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의 교환으로 서해와 한강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Ⅳ. 후대의 평가와 추숭 사암 박순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송 모는 실천으로 진실을 삼으며 무예가 뛰어나니 만약 그로 하여금 때를 만나서 일을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세도에 커다란 유익이 될 것이다.”고 송제민을 평가하였고 송강 정철은 송제민의 자질과 품행을 평하여 “물과 달 같은 마음이요. 서리와 같이 깨끗한 지조를 가졌고, 높은 실력을 지니고 있으며 충신과 같은 절개를 가졌다.”고 하였다. 또한 중봉 조헌은 남에게 보낸 글에 “송 모는 천하에 내놓을 만한 훌륭한 선비이다. 나로 하여금 그의 藍輿를 메라고 해도 전혀 기분 언짢을 일이 아니다.”하였다고 한다. 서애 柳成龍도 선생의 명성을 듣고 조정에 薦擧하려고 하니 李山海28)와 鄭仁弘등이 배척하기를 “宋 某는 자취를 박 사암에 의탁하여 송강과 교우를 맺었으며 지난날 조 중봉의 鬼蜮[귀신과 불여우라는 뜻으로, 음흉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의 상소는 송모가 격동시켜서 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는 실속 없는 사람들과 접촉하니 채용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그만 두었다. 해광은 스스로 말하기를 “토정은 공자를 배우다가 잘못된 사람이고 나는 토정을 배우다가 잘못된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고 하며, 海上에 이주하여 살면서 海狂이라 自號한 것에서도 그 뜻을 볼 수 있듯이 스스로의 학문과 경세사상을 제대로 활용해 보지 못한 분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과 강화조약을 반대하는 내용의 만언소는 임진, 정유재란의 의병활동과 당시의 사대부들의 의식을 이해하는데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평은 해광의 만언소를 읽은 후에 그 소감을 장문으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 古今을 살펴보건대 燕石이나 魚目과 같은 보잘 것 없는 것도 광채를 내면서 빛을 뿜으면 세상의 珍寶가 되고 夜光珠나 明月珠같은 진귀한 보석도 瓦礫 속에 혼잡 되면 흙에 묻히고 만다. 개연히 탄식하기를 “천하의 눈은 같아서 옥을 가려서 쓰는데 버리는 장님도 있으니 이것은 옥이 때를 만남과 만나지 못한 데서 나는 차이이다. 어찌 사람의 죄라 할 수 있을까?”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재주를 가지고도 때를 만나지 못하여 飢寒과 困窮으로 凡夫들과 더불어 하고자 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야광주와 명월주가 혼잡 되어 沙土에 파묻혀 버리는 것과 같으며 반드시 그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도 그 믿음을 얻지 못하는 일이 있다. 해상에 이주하여 살면서 海狂이라 自號한 것에서도 그 뜻을 볼 수 있다. 때가 되지 않아 공의 글이 상소되지 못한 것을 공이 어찌 몰랐을까? 이를 알고도 방백에게 가서 청한 것은 공의 문장이 상소되어 벼슬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고 위태로움을 바로 잡고자 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 중에 하나라도 상소되어 진다면 그것은 공의 자질이 넓고 크기 때문일 것이다. 29) 해광 송제민은 사후 100여 년만인 1706년(숙종 32) 광주 운암서원에 제향 되었고30), 운암서원은 다시 중수가 있었던 듯 蘆沙의 雲巖書院重修上樑文31)실 영모재를 화암리에 건립했는데, 현재는 그곳에 운암서원이 복설되었다. 1783년(정조 7)에는 유고집인 『海狂集』이 간행된다. 해광집은 목판본. 2권 2책으로 5대손 전 정랑 益中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상권은 召募文·만언소 · 上李體察書 등이 실려 있고, 하권은 부록으로 遺事 · 輓詩 · 祭文 · 墓誌銘 · 傳 · 墓表 ·行狀 · 記文 등을 수록하였다. 책 끝에 그의 아들 花庵 宋柁의 행장이 수록되어 있고, 책머리에는 1783년에 쓴 金鍾秀32) 곧이어 1788년(정조 12)에는 사헌부 지평을 증직받았다. 2002년 한국 족보학 연구소에서 증보 지장록을 집대성하였으며 국제간 비교를 위해 일본어로 번역 병제하여 미국 하버드 대학 동양학 연구소, 일본 동경 제대, 중국 남경대, 상해 복단대, 북경대 도서관에 각각 소장하였다. Ⅴ. 맺 음 말 이상 미흡하지만 해광 송제민의 생애와 활동, 특히 민간인 의병으로서의 활동상을 살펴 정리하였다. 필자는 다시 강조하지만 역사적으로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에서 보여준 호남 민중들이 보여준 나라를 위해 충절정신은 제대로 다 알려졌다고 말하기 힘들며, 인물연구에 있어서도 역사서에 널리 알려진 인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문제를 극복하여 보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호남의병사에 있어 민간인의 역할과 그 성격을 올바로 조명하는 방편으로 해광 송제민을 택하여 연구하였다. 해광 송제민의 사적은 조선왕조실록 등 관찬사서에는 한 군데도 기록되어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본고에서 상세히 논급한 것처럼 여러 인사들의 기록 속에서 해광 송제민의 행적은 정확히 나타나고 있다. 후손으로서, 향토사연구자로서 본인은 이 작업을 완료한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 역사의 뒷면에 묻혔던 해광의 행적을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물론 아직도 부족한 점이나 보완할 점은 수없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는 선배, 학계의 지도와 충고를 토대로 좀더 보완하려고 한다. 1) 권필, 石州集, 祭宋聘君文 2) 정승은 송강 정철의 13대 후손으로 담양향토문화연구회원이다. 3) 대곡: 지금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장동 마을 4) 金麟厚(김인후):1510~1560 호 하서, 조선 명종 때 학자 저서: 하서집, 주역 관상집, 서명 사천도, 백연초해 5) 槐院(괴원):承文院(승문원) 조선 시대에, 외교에 대한 문서를 맡아보던 관아, 태종 10년(1410년 설치 고종 31년에 폐하였다. 6) 光山 金氏(광산김씨):金允敬(김윤경)의 딸이고 현감 金珝(김후)의 손녀이다. 7) 겹눈동자: 고대 成人(성인) 순임금은 눈동자가 둘씩 있었다. 8) 토정 이지함(1517-1578) : 자는 馨佰, 형중, 호는 토정, 水山, 시호 文康 본관 한산 조선 선조 때 학자이며 서경덕의 문인이다. 선조 6년(1573) 백성들의 천거로 청하현감이 되어 임진강 범람을 예측하여 생명을 구제하였다. 9) 성해응, 硏經齋全集 草射談獻 宋齋民條 10) 유희춘, 미암일기 을해년(1575) 12월조 11) 유희춘, 미암일기 병자년(1676) 2월 15일조 12) 石洲 권필(1569-1612):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 안동 자, 여장 호 석주, 정철의 문인, 詩酒로 석주집이 있음. 13) 朴春武(박춘무) 조선중기의 문신, 의병장, 1592년(선조 25)임진왜란 때 창의사가 되어 의병을 일으키고 조헌과 함께 호서지방을 지키는데 큰 활략을 하였다. 침구술이 뛰어나 의관으로도 활약하였으며, 뒤에는 지방관으로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임천 군수, 인천부사를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부평 부사를 지낸바 있으며, 官階(관계)가 嘉善(가선)까지 이르렀다. 참찬에 추증되고, 시호는 민양이다. 저서로 ‘화천당집’이있다. 14) 임진왜란의 영웅 문열 공 김천일 선생(한국족보학연구소 문열 공 김천일 선생 연구회 발행)31Page 참조 15) 대굴포 전라도 수영고찰」(함평문화원, 2003) 16) 忠壯김덕령(1567-1596): 본관 광산(광주로도 기록),자 경수,,시호 충장, 光州출생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다. 전주의 광해분조로부터 익호장군의 군호를 받았다. 17)崔尙重(최상중): 1551~1604 본관 朔寧(삭령),자 여후, 호 未能霽(미능제) 1576(선조9) 사마시에,1589년 增廣文科(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檢閱(검열)이 되고 1592년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1600년 지평,1602년 司諫(사간)으로 마지막 벼슬, 도승지 추증, 아들 연의 공로로 대사헌이 가증, 남원의 노봉서원에 제향 되었다. 18) 임진왜란의 영웅 문열 공 김천일 선생 32Page 참조 19) 장유, 溪谷集, 선조조 임진의병 20) 양응정, 松川集 21) 『홍주송씨 지장록』 2권 22페이지. 임진 잡록, 난중잡록에도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22) 李肯翊, 燃藜室記述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 조헌ㆍ영규ㆍ변응정 조 (난중잡록 ; 日月錄) 23) 이 사료는 난중 잡록, 대동 야승, 중봉집 등 고문헌에도 수록 되어 있으며, 최근 10편의 학위 학술논문이 발표되었다 : ‘임진왜란의 영웅 문열공 김천일 선생’ 한국족보학연구소, 2006 참고 24) 宣陵은 성종 계비 정현 왕후, 靖陵은 중종의 陵임. 25)『남원지』(남원지편찬위원회, 1992) 26) 김덕령은 1661(현종2)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08년에 병조 참의에 추증,1678(숙종4)벽진서원에 제향 되었고, 1681년 병조판서에 가중, 영조때 의암사에 형 덕흥, 아우 덕보와 병향, 1788년(정조 12)좌 찬성 가증, 1974 광주 충장사를 복원 충훈을 추모하고 있으며, 연대 미상의 ‘김덕령전’이 있다. 27) 金德齡이 모친상을 당하여 집에 있었는데 송제민의 中表弟[송제민의 내외종제를 말함]로 말하기를 국난을 우선으로 하고 사사로운 喪을 뒤에 함은 오직 지금이야말로 그러한 때라고 여겨서 급히 가서 세상에 나올 것을 권하였으며, 또 제주도에 들어가서 駿馬를 구하여 그에게 주어 적이 감히 근접하지 못하였다 한다 28) 李山海(이산해):1539~160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韓山(한산), 자 汝受(,여수), 호 鵝溪(아계), 시호 文忠(문충).진사를 거쳐 명종 16년(1561) 문과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兩司(양사)로부터 국정을 그르치고 왜적을 들어오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 白衣(백의)로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강원도에 귀양 갔다가 敦寧府領事(돈령부영사)로 복관되고 1600년 영의정에 재임, 鵝城府院君(아성부원군)에 봉해졌다. 6세 때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書畵(서화)에 능하여 大字(대자)와 山水墨圖(산수묵도)에 뛰어났다. 29) 조평, 운학집, 제해광만언소후 30) 연려실기술 서원총론에는 雲巖書院이 병진년에 세워졌고 宋濟民과 아들 운宋柁와 사위 權韠이 배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31) 蘆沙先生文集 卷25, 雲巖書院重修上樑文 32) 金鍾秀(1728-1799)는 호가 夢梧, 率翁, 본관은 청풍이며 시호가 文忠이다. 老論 僻派를 대표하는 인물로 正祖 廟庭에 배향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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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십니다. 고생하신 남천님의 업적으로 영원히 남을 겁니다. 대덕면장산리 출신 해광 송재민 선생 생애사를 확실하게 저술하였기에 최우수상을 수상하실 만 합니다. 축하하고 축원합니다. 부디 건강 챙기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