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46번지 |
전화번호 |
사무실 : 031-749-8522~3 팩스 : 749-8524 |
미사안내 |
미사시간 : 화~토 오전 11시 / 주일 오후 2시 성 시 간 : 매주 목요일 밤 12시 ~ 3시 * 본당, 단체의 순례예정(30명 이상)이 있을 때는 성지사무실로
연락하여 성지소개와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 레지오 단체가 기도할 수 있는 성모상이 준비되어 있으니 많은 단체가 참여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이메일 |
namhan-hl@casuwon.or.kr |
성지 홈페이지 |
http://www.nhss.or.kr
남한산성 순교성지 click
| |
| |
|
한덕운 토마스(1812~1868년)
남한산성 최초의 순교자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 토마스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만집 아우구스티노가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5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순교하였다. 한편 김만 집의 형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셋째인 김문집 베드로는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으나 다시 체포되어 아들과 조카와 함께 순교했다. 이곳 남한산성에서 다시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로 그해 겨울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거주하던 정은 바오로로 6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재종손 정 베드로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라고 부르던 백지사로 순교하였다. 이처럼 구산과 단 내에서 시작된 신앙을 천상영복으로 영글게 한 남한산성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이름 없는 순교자들 의 애환과 몸부림이 어려 있다.
|
|
* 이밖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계시지만 우선 그분들의 성명만을 소개한다
서태순, 이조녀, 이학록, 이정현, 엄쾌길, 서상철, 이기좌, 권경보, 김준원, 오선장,김하상, 정원명, 정성재, 한동원, 이재금, 한경조, 이장복, 정오복, 윤재현, 김상희,송일지, 송칠지.
|
승용차 이용시 ▶ 남문 진입로 1) 잠실 - 복정 사거리 - 약진로 - 남문 - 산성 로타리 2) 경부고속도로 양재 IC - 헌인릉 앞 - 세곡동 - 복정사거리 - 약진로 - 남문 - 산성 로 타리 3) 분당 - 모란 - 태평사거리 - 시청앞 - 신흥주공 - 남문 - 산성 로타리 4) 수원 - 신갈 - 분당 - 모란 - 태평사거리 - 시청앞 - 신흥주공 - 남문 - 산성 로타리 5) 안양 - 의왕시 - 분당 - 모란 - 태평사거리 - 시청앞 - 신흥주공 - 남문 - 산성 로타리
▶ 동문 진입로 1) 워커힐 - 천호대교 - 길동 - 중부고속도로 상일동 IC - 황산 삼거리(국도 43번) - 엄미리(은고개) - 광지원 - 동문 - 산성 로타리 2) 중부고속도로 경안IC(서울, 하남시 국도 43번) - 광지원 - 동문 - 산성 로타리
버스노선 안내도 시내버스 9번 : 산성역에서 내리시면 정시에서 5분사이와 매 30분~35분 사이에 있음.
지하철노선 안내도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하차 - 산성역에서 9번 승차 2번 출구(지하철역 지도)
- 야외 미사터
현재 야외미사터는 성지 소성당이나 기념관터로는 부적당하지만 주변의 토지와 건물들을 매입하면 가능하다. 성지 개발 기금 마련이 시급하다.
- 소성당
성체가 현시되어 있으며 두 분의 성인 유해가(김성우-안토니오, 최경환-프란치스코) 모셔져 있고 성 지순례 미사 전례시 양형 영성체를 하고 있다.
- 포도청과 군뢰청의 순교터
현 중부파출소 부근에 옛 포도청이 있었고, 그 뒤로 군사들이 신자들을 고문하던 군뢰청(軍牢廳)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남한산성 안의 가옥수가 1,700여 세대나 되었고, 광주 유수가 아주 넓은 지역을 다스렸던 만큼 포졸과 군사들의 수도 많았을 것이다.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나와 이곳에서 갖가지 형벌과 문초를 받거나 장형, 백지사 등으로 순교하였다.
- 연무관
남한산성은 군사적 요충지로 병자호란 때는 인조 임금이 피신했던 곳이다. 따라서 이곳 연무관 앞에서는 언제나 군사들이 훈련을 하였고, 그 때마다 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무술 연마 대상으로 삼아 목검으로 찌르고, 매로 때리곤 하였다. 그러다가 실신하면 옥으로 데려가고 죽으면 그대로 동문 옆의 수구문 골짜기에 내다 버렸다.
- 옥터
로터리 주차장 옆 천일식당 앞이 옛 옥터이다. 그 당시 옥은 네모진 가장자리에 허리춤 정도로 고랑 을 판 다음에 짚이나 숫대 등으로 대충 지붕을 해얹고, 소나무 기둥과 거적으로 벽을 만들었다. 비가 오면 물이 새고 겨울이면 찬바람이 그대로 몰아치는 이러한 옥안에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모진 고 문과 매질로 찢기거나 피멍이든 몸으로 마지막 기도를 드리면서 순교할 그날을 기다리곤 하였다.
- 수구문과 골짜기(동문 오른쪽)
남한산성의 물이 나가던 수구문은 성안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이 이곳 골짜기에 버려지면서 시구문(屍軀門)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 흔적은 골짜기의 물과 함께 흘러가 버렸지만, 박해 시대 때는 순교자들의 시신이 수십일씩 방치되면서 사람들이 꺼려했던 곳이다. 당시 군교자들의 시신은 짐승들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때로는 그 시신이 잠자는 듯 평화스러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 동문 밖 (현 주차장)
남한산성의 형장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한덕운(토마스)이 참수 당한 순교터이다. 이후 박해가 거 듭되면서 체포되어 오는 신자 수가 많아지게 되자, 동문(좌익문) 밖 형장 대신에 주로 성내에서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 수어장대
남한산성의 유수가 군사를 다스리던 수어영의 높은 장대로,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서도 지도층으로 이 름이 있거나 양반인 경우에는 이곳에서 문초를 당한 후 순교자하거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 서문
서문은 한양이 잘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수어장대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은 주로 이곳에 버려졌다.
- 저자거리
남한산성의 옛 장터가 있던 곳, 포졸들은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끌고 다니며 시위하거나 사람들을 모아놓고 처형함으로써 누구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았다.
- 북문(전승문)과 남문(지화문)
죄인 아닌 죄인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온 문이요, 한 번 들어오면 죽어 나가야하는 문이였다. 순교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모습으로 포졸들에게 포박되어 이 문을 통과하면서 기쁨에 겨워했고, 죽어 나가면서도 하늘의 문으로 들어가는 영광에 또 기뻐했을 것이다. | | | |
첫댓글 제가 아무리 좋은 pc로도 열어볼라고 해도~완벽하게 열리질 않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