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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을 고작 대게의 고장 정도로 알고 있지는 않은지. 영덕과 영해는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구한말 항일의병운동사에서 이곳을 빼놓을 수 없다. 신돌석과 문명기는 한 시대, 영덕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국난의 시기에 신돌석은 항일의 길을 선택했고, 문명기는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로인해 후손들의 삶이 어떻게 엇갈렸는가.
경북 영덕의 의병장 신돌석과 친일파 문명기
애국자 신돌석…사후 90년만에 평가받았으나
독립운동 하면 3대가 어렵다는 말 입증
친일파 문명기…천수ㆍ명예ㆍ부ㆍ후손 번창 모든 영화 누려
국가가 주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을 때 애국과 매국이라는 상반된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후대가 이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보답을 할 것인가는 ‘국가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런 데서 국가정체성을 세우지 못한다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들에게 희생하고 봉사하라고 요구하기 어렵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신상필벌을 분명하게 하는 일은 우리들의 ‘미래’의 문제다.
조선이 몰락의 길을 걷던 1878년(고종15년) 우리 근대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두 인물이 태어났다. 경북 영덕이 주 활동무대였던 이들은 애국과 매국이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한 사람은 평민출신 항일 의병장 신돌석(1878~1908). 또 한 사람은 일제하 대표적 매판 자본가인 문명기(1878~1968).
1878년 생의 엇갈린 삶
‘태백산 호랑이’라고 불리며 2년 8개월 동안 영덕 일대에서 일제에 당당히 맞섰던 신돌석. 신돌석이 서른 짧은 생을 마친 후 그의 부인 한재여(1878~1952)는 44년 동안 가난과 고통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다. 외아들은 어려서 사망해서 대가 끊겼다.
일제로부터는 애국옹(愛國翁)이라는 호칭을, 식민지 민중으로부터는 야만기(野蠻琦)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았던 문명기.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위해 비행기와 군함 헌납운동에 앞장 선 문명기와 그의 후손들은 최고의 권력과 부를 가졌다. 해방 후에도 그의 장손인 문태준은 영덕에서 4선 의원을 지냈고, 노태우 정권에서 보건사회부장관을 역임했다.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2년8개월간 일제와 맞서
신돌석의 본 이름은 태호(泰鎬)다. ‘돌석’은 아명이다. 1878년 음력 11월 3일 태어났다. 오늘의 영덕군 축산면 도곡동이다. 신돌석의 부인 청주 한씨도 축산면 출신이다. 이들은 1902~1903년 무렵 결혼을 했다. 둘 다 만혼이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제1차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신돌석은 18살의 나이로 김하락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지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주권을 강탈했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신돌석은 1906년 3월 고향마을 주막에서 ‘영릉(寧陵)의병’을 일으키고, 스스로 ‘영릉의병장’이 되었다. 의병 규모는 최소 100명, 최대 200~300명으로 추정된다. 평민출신인 그의 휘하에는 양반도 다수 있었다.
신돌석의 신분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린다. 몰락양반의 후예, 평민, 천민, 향리 등 다양하다. 신돌석의 아버지 신석주는 재산을 축적하여 아들을 양반 댁 서당에 보내 신분상승을 도모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신돌석을 몰락양반의 후예라고 신분을 격상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평민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휘하에 양반까지 두었다는 것이 그의 명예를 온전히 지키는 일일 것이다.
신석주는 신돌석 의병에 상당한 군자금을 대기도 했다. 신돌석의 매형 박수찬, 손위처남 한용수, 동생 신태범 등도 항일운동을 하다 순국하거나 투옥됐다.
신돌석 의병부대는 울진 평해 영양 영해 영덕 청송 등지에서 관아를 공격하고, 일본군 토벌대와 전투를 치렀다. 경주 접경지와 강원도 삼척 남부까지 진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출귀몰’ ‘태백산 호랑이’ ‘축지법을 쓴다’는 말이 그의 뒤를 따라 다녔다.
게릴라전법을 쓴 신돌석 부대는 규율이 엄격해서 민폐를 끼치지 않아 가는 곳 마다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양반 출신 의병장들은 평민출신인 그를 백안시 하였다.
1907년 11월 이인영이 전국 각 지방 의병장에게 “의병부대를 통일해서 연합사령부를 창설하고 서울을 향해 경기 지역으로 진군하자”는 격문을 보냈다. 이 때 신돌석은 경상도 대표인 ‘교남 창의대장’에 천거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
신돌석이 평민이라서 유생 중심으로 편성된 의병연합부대에서 배제됐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신돌석이 지역활동을 강조해서 연합군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
신돌석 의병장의 영정.
신돌석은 만주에서 새로운 투쟁을 계획했다. 그러나 1908년 전국의 의병항쟁이 크게 위축됐다. 일본군의 ‘토벌대작전’이 벌어지고 ‘귀순법’이 발표되자 투항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신돌석은 1908년 7월 만주로 이주해 새로운 투쟁을 벌일 계획을 세우고 일단 의병을 해산했다.
신돌석은 1908년 12월 12일 지품면에 있는 옛 부하 김상렬 형제 집에 은신했다가 일제가 내 건 현상금을 탐 낸 이들에게 살해된다.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은 애국적 삶을 이렇게 마쳤다. 그의 순국 직후 외아들 ‘만이’도 사망했다.
남편이 순국한 후 부인 한씨는 신돌석의 동생 신태범의 아들인 신병욱(1927~ )을 양자로 입양해 대를 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입양된 신병욱씨는 “어머니가 소작을 붙일 힘도 없어서 어렸을 누룩을 빻아서 먹기도 했다”고 말했다. 신씨는 “1940년 고향을 떠나 영양군으로 이주해서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고 들려줬다. 신씨는 현재 청송군 진보면에서 살고 있는데, 그나마 요즘은 지역사회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대접을 받고 있다.
진보면은 소설가 김주영의 고향이다. 그의 소설 ‘천둥소리’의 무대가 진보면이다.
‘야만기’ 문명기, 비행기 군함 헌납운동 앞장
문명기의 아버지 문승환은 평안남도 안주 출신이다. 문명기는 조실부모하고 14살 때 경북 영천으로 흘러들어왔다. 문명기의 비문을 보면 문승환이 선비였다고 주장하나, 당시 온전한 선비가 고향을 떠나 수천리 떨어진 곳에 정착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렵다.
어쨌든 어려서 영덕으로 이주한 문명기는 영덕 바닷가에서 도부꾼과 생선장수를 했다. 문명기는 영덕 경찰서장의 집 앞에 큰 방어를 달아놓음으로써 권력자에 끈을 댈 수 있었다.
문명기는 1907년 제지공장을 차리고 만주로 수출도 했다. 신돌석이 영덕 일대에서 의병항쟁을 벌이던 시기에 문명기는 매판적 예속자본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문명기는 1932년 광부 규모가 100명에 달하는 금광을 인수, 큰 돈을 벌었다.
중일전쟁(1937~1945)을 앞둔 1935년 문명기는 금광을 처분한 돈 12만원 중에서 10만원을 일본 육군과 해군에 ‘문명기호’ 구입비용으로 헌납했다. (일제에 10만 원 이상을 헌금한 조선인은 19명 정도이다.) 이어서 1936년 1군(郡) 1대 헌납운동을 벌이며 자신도 수차례 거액을 헌납했다. 태평양전쟁(1941~1945)이 한창인 1943년에는 헌함(獻艦) 운동을 제창하고 동광(銅鑛) 3개를 헌납 했다.
기마다나 비치운동으로 조선혼 말살 나서
문명기는 친일의 대가로 큰 사업권을 따냈다. 그는 1938년부터 ‘가미다나(神棚) 비치’ 운동을 전개했다. 가미다나란 일본 개국신 ‘아마데라스 오미카미’의 영부를 안치한 것이다. 조선민중들은 지방 비슷한 것을 나무함 속에 넣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절을 해야 했다. 조선의 혼을 앗아가는 치욕의 의식이다. 문명기는 가미다나 보급운동을 벌이며, 그 독점판매권을 가졌다.
뼈 속까지 일본인이 되고 싶어 했던 그는 집을 일본식으로 꾸미고, 일본 옷을 입고 처자식에게 항상 일본말을 쓰게 했다는 이웃의 증언이 있다.
1945년 해방이 된지 4년이 지난 1949년 1월 29일 그는 반민특위법에 따라 체포, 기소됐다. 당시 재판기록은 유실되었지만 신문기사가 그의 행적을 보여준다.
이 날 문명기 피고에 대한 증인으로 국회의원 오택열(53)씨와 문 피고의 고향사람인 한주열(63)·최희출(44) 양 씨가 출두하여 피고의 반민 죄상을 일일이 증언하였는데 피고는 과연 정신이상에 걸렸는지 피고가 오늘 반민자 공판정에 서게 된 것을 황송하게 알며 영광으로 아는 동시에 이렇게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라고 진술하여 또 한번 폭소를 자아내게 하였다. (동아일보 1949년 5월 10일자)
보석으로 석방된 그는 1949년 10월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의 활동이 중지되며 일반 법원으로 넘겨졌다. 그 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면 6.25전쟁으로 재판이 흐지부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돌석 의병장의 사당
친일파의 문명기의 무덤. 봉분은 무너지고 풀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
신돌석 후손… “교육 못 받아 집안에 공무원 한 명 없어”
1945년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됐지만 또 하나의 비극이 시작됐다. 대한민국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취약한 국내기반을 보완하기 위해 ‘친일파’들을 부활시켰다. 숨을 죽이고 있던 친일파들이 다시 활개를 치고, 독립유공자들은 땅을 쳐야했다.
반면 북한은 1947년 만경대혁명자유학원을 설립, 항일투쟁 참가자 유자녀들을 모아 교육을 시켰다. 북한은 만주 각지에 사람을 파견해 유자녀들을 모았다고 한다. 북한 정권은 이들은 이른바 ‘혁명2세대’로 키워서 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의 공고한 기반으로 삼았다.
북한은 한국전쟁 때 죽은 장병의 유자녀를 위한 강반석혁명자유학원과 해주혁명유자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신돌석의 부인 한씨는 1952년 사망할 때까지 곤궁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돌석 생가마을의 주민 최병덕(70)씨는 “어렸을 때 일이라서 어렴풋이 생각나는데 신 장군 부인이 불타다 만 문풍지도 없는 집에서 어렵게 살았던 것 같다”고 들려줬다.
최씨는 10년 전 신돌석기념사업을 시작할 때 추진위원으로 참여한 사람이다. 그는“일제 때는 물론 해방 후에도 큰소리 치고 살던 사람들은 신 장군을 ‘화적’으로 비하했다”며 “마을주민들도 일제에게 너무 시달려서 피해의식이 컸다”고 말했다. 일제 기록은 신돌석을 ‘화적두령’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해방 후에도 신돌석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신돌석은 1962년에야 비로서 건국훈장 2등급인 복장이 추서됐고, 호적이 복원됐다. 1971년에는 국립묘지(131호)에 안장됐다.
문명기 장손… 영덕에서 4선 의원 지내고 장관도 역임
반면 문명기는 해방 후 잠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부 권력 천수를 모두 누리고 91세가 되는 1968년 8월 15일 사망했다. 5남7녀를 두었으며, 그의 큰아들은 해방 직후 행방불명 됐다. 문명기의 무덤 옆에 큰아들의 가묘가 있다. 그의 행방불명을 둘러싸고 지역사회에 소문이 무성할 뿐이다.
문명기는 여기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장손 문태준을 미국에 유학 보내 의사를 만들었다. 문태준은 1967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문태준 1967년부터 10여 년 동안 영덕청송울진에서 여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노태우 정권 때는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냈고, 대한의사협회장도 역임했다.
신돌석 생가마을에서 만난 권성달(71)씨는 “친일파 자손에게까지 연좌제를 물을 수는 없다”며 “그러나 문명기가 친일 대가로 벌은 돈으로 그의 후손이 공부하고 정치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말했다.
문명기 무덤은 무너져도 지역에 영향력 여전
신돌석이 영덕군에서 온당한 대접을 받기 까지 사후 90년이 걸렸다.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는 신돌석의 초가삼간 생가가 복원(1995년)되고, 근처에 기념관과 사당(1999년)이 들어섰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기념비도 이곳에 모아놓았다. 부지 규모가 6000평인 기념관에는 평일이면 100여명, 주말이면 400~500명이 찾아온다. 2001년부터는 ‘신돌석장군배 전국씨름대회’가 열리고 있다.
한 때 영덕 일대를 호령했던 문명기의 사후는 외견상 초라해 보인다. 영덕군 강구면에 소재한 문명기의 무덤을 기자가 찾았을 때 봉분은 앞부분이 크게 무너지고 떼는 잘 자라지 못했으며, 잡초가 무성했다.
문명기의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썼다. 노산도 친일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비문에는 그가 일제하에서 누렸던 직함은 없다. 단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다리나 도로를 놓았았다는 내용만 나열되어 있다.
역사적 평가 달라졌어도 ‘가난과 부’는 변한 것 없어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옛말이 있었다. 이 말은 신돌석과 문명기의 후손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아무리 역사적 평가가 달라졌어도 그 후손들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다.
신돌석의 양자 신병욱씨는 현재 청송군 진보면 진안동에 살고 있다. 신씨는 “문명기의 후손이 국회의원에 출마한다고 할 때 참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신씨는 월 100 여 만원의 유족연금을 받고 있다. 유족연금은 신씨의 아들대 까지 지급 된다.
신씨는 2남4녀를 두었다. 신씨는 “생활이 어려워 교육을 제대로 못시켜 신돌석 장군 후손 중에는 공무원이 한 명도 없다”고 한탄했다.
폭염이 전 국토를 달구던 날 아침, 신돌석 생가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정자나무 밑에서 노인 6명이 보신탕을 끓여 아침을 먹고 있었다. 기자도 한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마을 노인들은 “신 장군이 양반출신이었다면 이런 대접을 받았겠냐” 며 “나라를 위해 가족 재산 생명을 다 버렸는데 그 후손의 생활이 어렵다는 것은 국가가 잘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문명기의 장손은 2000년 16대 총선에 김종필씨가 이끄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려다 ‘영덕 지역후보 단일화론’에 밀려 포기한 적이 있을 정도로 정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주중호(47, 영덕문화원 이사, 여행사 대표)씨는 “문씨 집안의 영향력이 지역사회에 아직까지 남아 있어 지금도 어른들은 문명기에 대한 평가를 꺼린다”고 말했다. 문씨 집안으로부터 도움을 받았거나, 이들이 지역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노년층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주씨는 “지역사회에서 문명기의 친일행각을 공식 거론한 적이 없었다”며 “영덕지역 분위기가 신돌석 문명기 두 사람을 비교 평가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그러나 후세에 교훈을 삼기위해서 올 봄 지역의 청년들이 결성한 ‘향토문제연구회’가 두 사람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고 들려줬다.
<영덕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 서울에서 안동까지 가는데 주말에도 거의 교통체증이 없다. 안동에서 영덕은 34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임하호를 끼고 달리는 길이 아름답다.
안동에서 215리를 가면 영덕군이다.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는 신돌석의 초가삼간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초가가 너무 번듯해서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까운 곳에 기념관과 사당이 있다. 축산면에 들어서면 표지판이 곳곳에 있어 찾기가 쉽다.
강구면에 있는 문명기의 무덤이나, 신돌석이 피살된 마을, 문명기가 운영하던 금광 터, 문명기의 집 등은 전문답사팀이 아니면 찾아가기 어렵다.
안동과 영덕 사이에 낙동정맥 줄기인 주왕산 국립공원이 있다. 이곳까지 갔으니 주왕산 ‘주산지’는 꼭 봐야 한다. 주산지는 김기덕 감독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촬영한 곳이다.
영덕은 대게와 복숭아가 유명하다. 4월 이면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8월 중하순에는 갓 수확한 복숭아를 맛볼 수 있다.
<신돌석 연보>
- 1878년 경북 영덕에서 출생
-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1차 의병운동 일어났을 때 김하락 의병부대의 중군장 지냄
- 1902년 한재여와 결혼
- 1905년 을사늑약(勒約)
- 1906년 4월 영릉에서 의병 일으키다
- 1908년 7월까지 영덕 일대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름, 이후 만주로 망명계획
- 1908년 12월 12일 영덕군 지품면에서 보상금을 노린 동포에 의해 살해됨.
- 1952년 한씨 부인 사망
-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福章) 추서 (이후 상훈법이 바뀌어 건국훈장 2등급인 대통령장), 파기된 호적 복원
- 1971년 국립묘지 131호로 이장
- 1999년 성역화사업에 따라 신돌석 기념관과 사당 건립
<문명기 연보>
- 1878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
- 1892년 경북 영천으로 이주, 이후 영덕으로 이주
- 1907년 영덕군 지품면에서 제지공장
- 1932년 영덕군 지품면 도계 소재 금은광산 인수
- 1935년 포항소주회사 설립
- 1935년 일본 육군과 해군에 ‘문명기호’ 비용으로 10만원 헌납 (금광을 팔아 비용 충당)
- 1936년 1군 1대 헌납운동을 벌이며 수차례 거액을 헌납
- 1943년 헌함(獻艦) 운동을 제창하고 동광(銅鑛) 3개 기부
- 1943년 황도선양회 조직해 회장 취임
- 1949년 1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체포되어 기소 됐으나 보석으로 석방
- 1967~1980년 장손이 영덕청송울진에서 7~10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
- 1968년 90세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