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휴전협정 조인으로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전쟁은 세계의 정치 지형에 혁명적 변동을 가져왔다. 러시아에 유태인 볼셰비키 정권이 들어섰고 패전국 독일의 정권은 유태인이 장악하였다. 승리한 영국과 프랑스는 당당한 위세에도 불구하고 파산지경이었지만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유태인 재벌들은 더 큰 부자가 되었다.
미국은 세계에 군림하는 채권국에 올라섰으며 전쟁의 최대 수익자는 유태인 금융재벌들이었다. 유태인의 정치적 기반인 집권 민주당의 앞날은 밝아 보였다.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려는 시오니즘 운동은 영국의 승인으로 그 성취가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수천만 사상자의 유혈 뒤에 숨은 진정한 승자는 유태인이었다.
천민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러시아의 통치권을 장악한 유태인 볼셰비키는 러시아에 유태인의 지상낙원을 건설했다. 혁명 직후 유태인 차별과 박해를 금지하고 위반자는 극형에 처했다. 모든 재산을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하며 모든 권력이 공산당 수뇌부에 집중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아래 유태인은 모든 것을 차지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유태인이 소련 체제를 부러워하고 찬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수도를 이전하고 트로츠키의 지도 아래 붉은 군대(Red Army)를 창설하여 국내외 적대세력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윌슨대통령이 선언한 평화원칙 제6조가 파리 강화회담에서 승인됨으로써 공산주의 체제에 대하여 국제적 인정을 받았다. 볼셰비키는 귀족세력과의 내전에서 승리했으며 신생국 폴란드의 침략에 영토 일부를 내어주고 서부국경의 안정을 확보하였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제국 판도의 거의 전부를 망라하는 소비에트연방이 창설되었다.
혁명기와 내전시기는 말할 것도 없고 체제가 확립된 후에도 볼셰비키 유태인들은 반혁명분자라는 죄목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러시아인을 살해했고 광범위한 지역에서 식량을 몰수하여 지역주민 전체를 조직적으로 아사시켰다. 통계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여서 학자에 따라서는 살해당한 사람이 3천만을 넘어가기도 한다.
레닌 사망 후 국내파와 해외파 사이의 권력투쟁에서 국내파 스탈린이 승리했다. 세계대전 중에 레닌, 트로츠키와 함께 입국하여 볼셰비키혁명을 주도했던 해외파 혁명가는 스탈린에 의해 모조리 처형되었다. 피로 일어선 자, 피로 망할진저!
유태인 레닌
유태인 트로츠키
그루지아인 스탈린
독일의 유태인들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대신 점진적 사회주의를 선호했으며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에 동조한 유태인은 극소수였다. 유태인 라살레와 베른슈타인이 개량주의와 수정주의를 창시한 후 그들의 사상을 계승한 독일 사회민주당은 유태인이 주도했다. 패전 후 수립된 공화국의 연립정부를 사회민주당이 주도함으로써 많은 유태인이 고위직에 올랐다. 승전국 유태재벌의 압력으로 독일의 중앙은행인 라이히스방크가 1922년 5월 26일에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처럼 민영화되었다. 소유주는 독일의 유태인 금융재벌 바르부르크 가문 그리고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국제유태 금융재벌이었다.
민영화된 라이히스방크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7월부터 지폐를 마구 발행하여 1달러에 320 마르크로 안정되었던 환율이 12월에 9,000 마르크, 다음 해 1월 49,000 마르크, 7월 110만 마르크, 11월초 2조5천억 마르크, 11월 23일에는 4조2천억 마르크로 미친듯이 오르면서 독일의 화폐가치는 미친듯이 폭락했다. 이로 인해 독일 국민의 예금은 휴지가 되어 중산층은 빈곤 속으로 추락했고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여 국제유태자본에게 헐값에 매각되었다. 이 사태로 유태금융자본에 대한 독일국민의 분노가 확산되어 후일 나치스 집권의 동력으로 작동했다.
1923년 11월 23일 독일 정부는 달러 환율을 4조2천억 마르크로 고정시키고 1조 대 1의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단기금리를 대폭 인상하여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다. 이 시기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대하여 역사학과 경제학에서 많은 연구를 해왔으나 한결같이 유태금융자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본질에서 벗어난 해설을 하고있다. 유태인이 관련된 사건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전쟁 중에 영국은 아랍인의 독립을 약속하여 오스만제국에 대한 반란을 부추기는 한편 팔레스타인에 유태인의 독립국을 건설해주겠다고 약속하는 벨푸어 선언을 공표했다. 독일에서의 유태인 반란을 선동하기 위해서였다. 종전 후 아랍인의 반발로 입장이 난처해진 영국의 식민성 장관 윈스턴 처칠은 1922년 6월 3일 의회에 제출한 이른바 '처칠 백서'에서 팔레스타인을 유태인 국가로 만들 계획이 없으며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민 숫자를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팔레스타인의 유태인 숫자가 얼마 안 되는 상황에서 처칠의 선언은 벨푸어 선언을 무효화시키는 완전한 배신이었다. 1930년 10월, 영국 식민성 장관 패스필드는 '처칠 백서'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더 엄격히 제한하였다. 벨푸어 선언을 받아낸 로스차일드가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 중에 발표한 윌슨의 평화원칙에는 이스라엘 건국에 관한 대목이 없다. 14개조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추가하여 15개조로 해서 안될 것이 없는데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 시기에 미국의 유태인 사회가 이스라엘 건국에 무관심했다는 뜻이다.
종전 2년 후 1920년 11월 2일 치러진 미국의 선거에서 민주당은 역사상 유례없는 참패를 기록했다. 무명에 가까운 공화당 상원의원 워렌 하딩은 60.3%의 놀라운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민주당 후보의 득표는 34.2%에 불과했다. 하원은 302 대 131, 상원은 59 대 37로 역시 공화당이 휩쓸었다. 8년 간의 민주당 집권, 다시 말해서 유태인 금융재벌의 집권은 이렇게 파멸적 패배로 막을 내렸다. 하딩의 병사(病死)로 쿨리지가 출마한 1924년의 선거와 황금빛 번영 속에 치러진 1928년의 선거에서도 처참한 패배를 반복한 민주당은 빈사상태로 추락하고 말았다. 암담한 상황에 몰린 영국과 미국의 유태인 세력은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손을 잡게된다.
첫댓글 재미있게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