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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어거스틴의 삶과 사역에 나타난 복음적인 영성” 기독교학술원 영성 수사학 과정 (2018.5.10 오후 2시 온누리 교회 믿음의 홀)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복협 명예회장) 성 어거스틴은 저의 신학적인 사고와 목회적이고 선교적인 삶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리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오늘의 저로 만들어진 데는 저를 가장 사랑하신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의 손길과 저를 가장 귀중하게 보시면서 격려해주신 아버지의 순교 신앙의 손길이 있었고, 저의 어린 소년 시절 저의 몸과 마음에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 신앙을 심어주신 평양 서문밖교회 주일학교의 이인복 선생님, 명선성 선생님, 최병목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이 있었으며, 중학생과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 저의 몸과 마음에 깊은 영적인 감화와 감동을 미치시면서 기도와 사랑과 가르침의 손길을 펴신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이 계셨고, 후에는 신학적이고 사역적인 가르침의 손길을 펴신 한철하 박사님, 펠리칸 박사님, 조동진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등이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의 신학적인 사고와 목회적이고 선교적인 삶에 있어서 저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분은 북 아프리카의 신학자였던 성 어거스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저로 하여금 “양면성”의 사고와 “종합성”의 사고를 지니고 많은 사람들을 품고 협력하면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세에 충실하도록 힘쓰면서도 종말론적인 비전을 품고 사는 법도 가르쳐주었습니다. 진솔한 고백과 참회의 삶이 얼마나 귀중한 삶인 것도 가르쳐주었습니다. 제가 교회사를 전공할 수 있었고 특히 성 어거스틴을 전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학문과 사역과 인생의 관점에서 볼 때 저에게 주어진 큰 축복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고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을 지혜와 행복을 추구하며 육체의 향락과 이단 사교와 희랍 철학 등에 탐닉해보았으나 아무것도 그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결국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로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는 가운데 울며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므로 참된 평안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32세 때 무화가 나무 밑에서 개종의 체험을 한 이후 76세 때 히포의 감독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가 믿게 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진리 탐구로 평생을 보내며 하나의 포괄적인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수립했습니다. 그는 “무지개 색깔”의 "통합적인" 신학체계를 수립했다고 하겠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성 어거스틴은 고대의 모든 신학적 전통을 “종합”하는 자리에 서 있었으며 중세와 그 이후의 모든 신학 전통을 수립 발전시키는 관문에 서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한철하 박사님이 지적한 대로 “고대와 중세와 현대를 통해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발견되지 않는 어떤 중요한 사상이 있는지 모를” 정도로 어거스틴의 신학 체계는 "다양하고" "포괄적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 어거스틴을 알지 못하고 고대나 중세나 현대를 바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저의 사고와 삶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성 어거스틴의 삶과 사역과 교회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의 삶과 사역에 나타난 복음적인 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성 어거스틴에 대해서 석사 학위 논문을 썼고 박사 학위 논문도 썼기 때문에 제가 성 어거스틴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긴 내용을 줄이고 줄여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어거스틴의 출생과 유 소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3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아프리카의 소도시 타가스테(Thagate)에서 주후 354년에 출생했습니다. 어거스틴이 흑인이었는지 백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한마디로 북 아프리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Patricius)는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한 시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에 대한 자랑과 기대가 대단했습니다. 파트리키우스는 그의 총명한 아들을 칼타고로 보내기에 충분한 돈을 긁어 모은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거스틴이 17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어거스틴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그녀는 항상 “하나님의 음성” 이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그녀를 통해서 당신은 나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녀의 권면을 거절한 것은 곧 당신을 거절한 것이었습니다.” 모니카는 인내와 온유의 성품으로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인내와 눈물의 기도로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비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모니카는 불성실하고 불 같은 성품의 남편에게 즉시 대드는 대신 조용히 참고 기다리다가 그의 분이 가라앉은 후에 비로서 자기가 정당했음을 설명하곤 했습니다. 아주 유덕한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결국 모니카는 인내와 기도와 전도로 그의 남편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모니카는 자기를 오해하고 미워하던 시어머니도 인내와 온유로 굴복시키고 말았습니다. 결국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자기와 며느리를 이간시키던 종들을 붙잡아 매를 때리라고 간청하기까지 했고 그래서 시모와 자부는 놀라운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모니카는 참으로 훌륭한 여인이었습니다. 모니카는 싸우는 사람들의 화해자로 등장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사랑하게 되곤 했습니다. “그녀는 우리 모든 사람을 섬겼는데 마치 그녀가 우리 모두의 딸인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아들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니카는 누구보다도 어거스틴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아들의 영적 생명을 출생시키기 위해서 어머니는 해산의 고통을 거듭거듭 겪었습니다. 모니카는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되 폭포수 같은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습니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격렬한 사랑 가운데는 “세상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들에 대한 애착이 좀 심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나를 그 옆에 두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어머니가 그렇지 않으랴 만 나의 어머니는 더 심했습니다.” 아들의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모니카를 생각할 때마다 저를 지극히 사랑하신 저의 어머니를 생각하곤 합니다. 저의 어머니는 네 자녀들 중 저를 제일 가까이 두고 살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너무너무 사랑했는데 저 없이는 못 살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11살 이후부터 저는 어머니를 한 평생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저를 만든 여러 가지 요소들 중 가장 값진 요소는 어머니가 쏟아 부은 희생적인 사랑의 눈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은 어머니 모니카의 사랑의 품 속에서 자랐고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의 눈물을 받아 먹으면서 성장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자기의 유아시절을 회상하며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천진난만한 아기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몸을 붙여 게걸스럽게 빠는 아기였습니다. 자기의 의사가 전달되지 않을 때 분노를 터트리는 아기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자기의 모습을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어린 아기가 천진난만하게 보인 것은 몸이 연약했기 때문이지 그의 마음이 천진난만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시기에 가득 찬 어린 아기를 보았습니다. 말은 할 줄 몰랐지만 다른 아기가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것을 보면 분이 치밀기도 했습니다.”(「참회록」 1권 7장 11절). 어거스틴은 예리하고 진솔한 마음과 눈과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타가스테에서 예민한 소년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 받으려고 애를 썼고 다른 소년들을 경쟁에서 물리치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매를 맞는 굴욕을 당할까 봐 애써서 공부했지만 공부하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 교육의 풍조에 따라서 어거스틴은 웅변의 대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교육의 내용은 보잘것이 없었습니다. 버질, 시세로, 살루스트, 테렌스 등의 이교 작품들을 줄줄이 암기하는 방식의 교육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받은 교육의 목적은 “화술을 배우는 것, 사람들을 설득시켜 자기의 생각을 따르게 하는 웅변술을 습득하는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교육으로 자기 표현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스스로 눈물을 흘릴 줄 알았을 뿐더러 남들을 울릴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43세의 감독 어거스틴은 자기 소년 시절의 교육 방식을 이렇게 서글프게 회고했습니다. “오 나의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 그때 나의 웅변이 다른 학우들의 것보다 더 많은 박수 갈채를 받은 것이 지금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은 실제로는 모두 연기와 바람뿐이 아니었습니까?” 둘째로, “어거스틴의 청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참으로 진솔한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그의 출생 때부터 저술 당시까지의 그의 전 생애의 내면 생활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묘사한 “영혼의 자서전” 이었는데, 그는 「참회록」을 저술하면서 그 초두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지와 재 같은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긍휼을 바라보고 말씀 드리옵니다.” 그는 어둡고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드러냈습니다. 그것이 「참회록」의 위대성이었습니다. 16세의 어거스틴은 정욕의 노예였습니다. 정욕의 파도가 결혼이라는 해변에 도달할 수 있었던들 그렇게도 미치게 날뛰지는 않았을 것이었습니다. “내가 육체의 나이 열 여섯 살 되었을 때 욕정의 미치광이가 나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법에 의해 금지된 부끄러운 짓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의 부모는 나를 결혼 시키므로 파멸에서 구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내가 웅변술을 배워 설득력 있는 웅변가가 되는데 있었습니다.”(「참회록」, 2권 2장 4절). 어거스틴은 또한 배 도적질 같은 짓궂은 장난을 즐기곤 했습니다. 그는 불량배 청 소년들과 함께 밤에 남의 집 배 나무에 가서 나무를 흔들어 배를 따서 돼지들에게 던지곤 했습니다. “내게는 도적질하고 싶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가난 때문은 아니었고 선행을 멸시하고 죄를 추구하는 강한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날 늦은 밤 소년들과 함께 배나무를 흔들어 배를 도적질한 후 돼지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오, 하나님! 그것이 나의 마음의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추구한 것은 죄악 자체였고 잘못 자체였고 부끄러움 자체였습니다.”(「참회록」, 2권 4장). 저는 어거스틴의 배 도적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어릴 때 신의주에서 동내 친구들을 데리고 중국사람들이 재배하는 토마토 밭에 가서 몰래 토마토를 따 먹으면서 좋아하던 장난꾸러기의 일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17살 나던 해인 371년 칼타고로 갔습니다. 수사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나는 불륜의 사랑이 가마처럼 들끓고 있는 칼타고로 왔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실은 어거스틴 자신의 가마가 들끓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칼타고의 생활은 자유분방했고 흥겨웠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사랑을 갈망했습니다. “나는 아직 누구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으나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내게 가장 달콤한 것은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내가 사랑하는 자의 육체의 쾌락을 맛보았을 때는 더욱 더 달콤했습니다. 나는 그만 내가 추구하던 사랑 속으로 돌진해 버렸습니다”(「참회록」, 3권 1장 1절). 그 당시 어거스틴은 그의 감정의 고삐를 마음껏 풀어 놓았습니다. 그는 연극에도 맛을 붙였습니다. 극장은 “자신의 불행을 비추어주는 거울이었고 자신의 분노에 불을 붙이는 연료로 가득 찬” 세계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연인들의 이별 장면을 즐겼습니다. “불행한 나는 눈물을 좋아했습니다. 나는 나를 울게 해 줄 그 무엇을 찾아 다녔습니다. 배우의 연기가 나를 기쁘게 했고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참회록」, 3권 2장 4절). 어거스틴이 칼타고에 온 첫 해인 371년 말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어거스틴의 교육을 떠맡게 될 무렵 어거스틴은 무명의 여인을 정부로 취하는 “이류”(second class)의 결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거스틴은 385년 그녀를 버리기까지 15년 동안 줄곧 그녀와 동거 생활을 했습니다. “나는 그 수년 동안 정부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나의 정욕이 발동할 때 내가 발견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유일한 여인이었고 나는 그녀에게 계속 충실했습니다.”(「참회록」, 4권 2장 2절). 한편 어거스틴은 그 당시 율법과 수사학의 대가가 되어 명예를 얻고 있었으며 명예를 즐기는 교만으로 그 마음이 부풀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가 19세 나던 해인 373년에 그의 생애의 심각한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소위 종교적 “회심”(conversion)을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삶의 불안을 느끼던 그 때 나는 웅변에 관한 책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의 과정들을 밟아가던 어느 날 나는 시세로의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철학에 대한 권면서였는데 그 이름이 호르텐시우스 (Hortensius) 였습니다. "그 책은 나의 태도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습니다. 오 주님, 그것은 나의 기도를 당신께로 향하게 했고 새로운 소망과 염원을 나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의 모든 소망이 무가치하게 보여졌고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면서 불멸의 지혜를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나는 일어나 당신께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는 세속적인 일들을 떠나 당신께로 날아가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희랍어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부르는데 그 책이 그와 같은 사랑으로 나를 불붙게 했습니다.”(「참회록」, 3권 4장 7절). 애지 추구에 불붙은 어거스틴이 지혜를 찾기 위해 관심을 돌이킨 곳이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 고전의 교양미와 세련미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라틴어 성경은 수 세기 전에 비천한 무명 작가들이 번역한 것이어서 은어와 속어투성이였습니다. 게다가 어거스틴이 성경을 읽어 본 바로는 시세로가 말한 고도의 영적 지혜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구약을 보니 세속적이고 부도덕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적혀 있었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혜의 화신인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그토록 지루하고 모순된 족보들이 나오다니, 어거스틴의 실망은 대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성경으로 돌이켰을 때 성경은 시세로의 품위에 비해 아주 무가치하게 보였습니다.… 성경은 겸손한 자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인데 나는 겸손해지기를 거부하고 교만에 부풀어 있었습니다”(「참회록」, 3권 5장 9절). 더욱이 아프리카 교회는 유별나게 편협하고 보수적이었습니다. 그 제도와 의식들이 대부분 유대인 회당에서 직접 따온 것이었습니다. 구약과 절반쯤 혼합된 그런 식의 종교였습니다. 목회자들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포용적이기 보다는 배타적이었습니다. 감독들은 자기들의 권위에 대한 여하한 도전에도 지나치게 민감했습니다. 청년 어거스틴은 그 당시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아프리카 기독교에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셋째로, “기독교에 실망한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추종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환경은 청년 어거스틴을 비롯한 일부 아프리카 교인들의 극단적인 반발을 샀습니다. 이 즈음에 “새롭고” “영적인” 기독교의 강한 조류가 전통교회의 거대한 율법주의에 역류해오고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기독교”는 구약을 비 영적인 혐오의 대상으로 낙착시키는 “이원론적인 기독교” 였습니다. 이런 “기독교”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히브리 선지자들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직접 영혼들에게 말씀하시는데 그의 고상한 메시지와 지혜와 기적을 통해 직접 영혼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단은 형식적인 교회의 제단이 아닌 마음의 제단이었습니다. 특히 어거스틴과 같은 젊은이들의 마음의 제단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상이 297년부터 칼타고에 들어와 퍼지기 시작했는데 370년경에는 많은 기독교인들과 지식층 사이에 활발하게 나돌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칼타고로 왔던 바로 그 즈음이었습니다. 이 사상은 페르시아의 교주 마니(Mani)로부터 유래하여 로마 기독교 세계로 파급된 이원론적 혼합 종교인 마니교(Manichaeism) 였습니다. 마니교는 하나의 혼합적이고 절충주의적인 종교였고 이원론적인 종교였습니다. 마니는 그의 고향인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로부터 이원론을 빌어왔고, 엘카사이트파와 노스틱파로부터 금욕주의를 빌어왔으며, 불교로부터 환생의 교리를 빌어왔고, 기독교로부터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예수 존중을 빌어왔습니다. 마니는 구원의 메시지가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져 왔는데 이제는 마니 자신이 이 모든 선포들을 한 복음으로 종합해서 온 세계에 선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통일교의 문선명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칼타고에서 마니교를 전파하는 선교사들은 금식과 복잡한 타부들에 매여 창백한 모습을 한 남녀들로 구성된 “선택된 자들”(Elect)로 주변에 “청도자들”(Hearers)을 끌어 모으고 있었습니다. “청도자들”은 그들의 영적인 영웅들인 “선택된 자들”의 금욕 생활을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며 그들을 찬탄하였습니다. 그들은 불가항력적인 신비감을 풍기고 있었고 복잡한 비밀 기도를 하였고 커다란 양피지로 된 마니교의 책들을 지니고 다녔으며 “빛”(Light)과 “어두움”(darkness)이란 용어 밑에 베일로 가려진 깊은 메시지를 넌지시 던지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기독교에 실망한 청년 어거스틴에게 새롭고 순수하고 신비하고 열린 진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칼타고로 온지 2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어거스틴은 후에 「참회록」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가운데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교만 가운데 지껄이는 육에 속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입은 마귀의 덫과 같았습니다. 당신의 이름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경의 이름의 음절들을 섞어 만든 마귀의 올가미였습니다. 그들의 입술에는 항상 그 이름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가슴에는 진리가 없는 공허함뿐이었습니다.”(「참회록」, 3권 6장 10절). 그러나 그 당시 어거스틴에게는 마니교가 그를 줄곧 괴롭혔던 정욕과 악의 기원과 자기 인식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같이 보였습니다. 마니교는 이 세계 안에는 빛의 원리와 어두움의 원리가 뒤섞여 있는데 악한 것은 모두 어두움의 원리의 소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악의 원리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악한 행동을 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악행의 책임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작용하는 어두움의 세력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어거스틴은 마니의 “창시 선언문”을 듣기 위해서 마니교의 비밀 집회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창시 선언문”(Letter of the Foundation)을 듣는 순간 “청도자들”은 빛으로 충만해지는 소위 “조명”이란 종교적 체험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깊은 잠 속에 빠졌던 자가 멀리서 들여오는 외침에 잠이 깬 것과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잠에서 깨어난 마니교도는 자기의 참된 정체는 자기의 일부분에 불과한 자기의 “선한 영혼”인데 정욕과 격분과 성욕 등으로 발동하는 육체에 의해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본래의 완전한 상태인 “빛의 왕국”으로 돌아 가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니교도가 된 어거스틴은 전통적 기독교의 편협한 사상들을 일시에 떨쳐버릴 수가 있었고 진리에 대한 확신을 소유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제 보다 엄격하고 “영적인” 생활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29세가 된 어거스틴은 아직 육체적 쾌락에 매력을 느끼며 그것을 계속 추구하면서도 때 묻지 않은 자기의 선한 영혼을 깨끗이 보존하기를 소원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죄를 짓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어떤 다른 성품이라는 견해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잘못을 나에게 돌리지 않고 내가 아닌 다른 것에게로 돌리기를 좋아했습니다.”(「참회록」, 5권 10장 18절). “주여, 나에게 정절과 절제를 주시옵소서. 그러나 지금은 안됩니다.”(「참회록」, 8권 7장 17절). 어거스틴은 9년 동안 (373-382) 마니교의 함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너무 쉽게 이단에 빠져서 방황하는 것은 너무너무 위태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항적이고 불순종하는 인간들은 여러 가지 죄악과 이단의 수렁에 빠졌다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의해서 그리고 누군가의 눈물의 기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주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길선주 목사님을 “한국의 어거스틴” 이라고 부릅니다. 넷째로, “어거스틴이 칼타고를 떠나 로마와 밀란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382년에 칼타고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는 칼타고에서 난폭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싫증이 났고 결국 마니교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이 무렵 로마에 있는 어거스틴의 가까운 친구들이 어거스틴에게 “더 나은 수입”과 “더 높은 명예”를 약속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칼타고를 떠나 로마로 가고자 할 때 어머니 모니카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어머니는 실로 내가 떠나간다는 말을 듣고 죽음과 같은 괴로움에 사로잡혀 해변까지 나를 따라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부여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든지 로마로 가려면 같이 가든지 하자고 애걸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친구가 안전하게 항구를 떠나는 것을 전송해야겠다는 구실을 들어서 어머니를 속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나의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어머니인데!... 어머니는 나 없이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어머니를 간신히 설득시켜 그 근처에서 밤을 지내시도록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마침 성 키프리안(St. Cyprian)을 추모하는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 나는 어머니 품을 빠져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계속 기도하시면서 우셨습니다.… 바람이 불어 돛을 때렸습니다. 해변이 시야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고향으로, 나는 로마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참회록」, 5권 8장 15절). 어거스틴은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불행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위험한 질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참회록」에서 몹시 괴로운 어투로 그 질병을 어머니 모니카를 속이고 버린 죄 값으로 온 “질병의 채찍”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완전한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해 말에 그는 시마쿠스(Symmachus)의 관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의 장관(Prefect)이었던 시마쿠스가 밀란에 있는 황제의 궁전으로 보낼 수사학 교수 한 사람을 선택하도록 황제의 명령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지위였습니다. 시마쿠스는 이 중요한 직책을 위하여 어거스틴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거스틴이 시마쿠스 앞에서 너무나 훌륭한 연설을 해 보였기 때문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마니교에 몸담고 있는 시마쿠스의 친구들이 마니교도를 그 직책에 세워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마니교도들은 시마쿠스와 같은 이교도와 함께 카톨릭 교회의 세력에 대항하고 있었습니다. 384년 가을 이교도의 대표격인 시마쿠스가 그러한 중요한 지위에 어거스틴과 같은 반 카톨릭교도를 세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해 초에 그는 황제에게 진정서를 제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수 년 전에 로마의 전통적 이교를 폐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었는데 그 결정을 취소해줄 것을 요구한 진정서였습니다. 시마쿠스의 진정은 이교에 대하여 관용을 보여 주도록 요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람이 그토록 위대한 신비(Mystery)에 도달하는 데는 오직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이러한 진정은 암브로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암브로스는 밀란의 감독으로서 궁중 세력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년 황제 발렌티니안 2세에게 직접 편지하기를 황제가 어릴 때 카톨릭교회의 세례 지원자였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여러 나라의 신들은 악마들이라고 말하면서 만일 황제가 시마쿠스의 진정을 받아들인다면 황제의 교회 출석 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결국 시마쿠스는 전통 종교에 대한 푸대접에 격분한 나머지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을 내세워 황제 앞에서 말할 수 있는 대변자로 만드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었습니다. 시마쿠스가 본 어거스틴은 충실한 마니교의 추종자였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시마쿠스의 천거를 받아 384년 밀란으로 갔습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밀란은 새로운 관심과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성공의 기회를 의미했습니다. 30세의 청 장년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밀란은 새로운 성공을 기약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알았던지 몰랐던지 간에 밀란은 그에게 있어서 그 중심에 그의 영적인 아버지가 될 암브로스 감독이 서 있던 도시였습니다. 그는 후에 「참회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내가 밀란으로 온 것은 바로 암브로스 감독에게 온 것 이었다.”(「참회록」, 5권 13장 23절). 이 한 마디 말 속에는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요소와 환경에 의해서 이곳 저곳으로 떠밀려 다니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안에서 떠밀려 다닌다는 것입니다. 384년 가을 밀란에 도착한 어거스틴은 환멸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과거에 확신하던 것들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환멸과 절망도 때론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자기가 믿던 모든 것에 대해서 환멸과 절망을 느끼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아주 필요합니다. 이런 형편에서 그는 다시 한번 시세로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시세로는 “신학파”(New Academy)의 “회의주의”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신학파의 회의주의는 우주의 본질에 관한 지식이 쉽게 획득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추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신학파의 회의주의를 통하여 참된 “지혜”야말로 오랜 세월을 두고 추구해야 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마니교는 어거스틴에게 “이미 만들어진” 지혜를 제시해 주었으나 이제 어거스틴은 지혜는 필생의 철학적 훈련을 통하여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지혜를 부단한 추구 과정으로 깨달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또 다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어떻게” “어떤 권위”를 따라서 추구할 것이냐 하는 점이었습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 주는 “권위”(authority)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권위를 찾기 위해 밀란 교회를 찾았고 결국 밀란 교회의 세례 준비자(catechumen)가 되었습니다. 다섯째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개종의 체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이 384년 가을 밀란에 도착한 후 암브로스를 만난 것은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암브로스는 감독으로서 형식적으로 인사하지 않았고 아주 친절하게 인사하며 어거스틴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나는 내게 친절을 보여준 그를 처음으로 사랑하게 되었다.”(「참회록」, 5권 13장 23절). 그 만남이 어거스틴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인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후암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했는데 한 번은 길 가던 청년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나중에 목사가 되었는데 지금 수지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인사를 친절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암브로스 감독은 처음 만나는 어거스틴에게 아주 친절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것이 어거스틴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암브로스는 어거스틴보다 14년 연장으로 밀란의 감독으로 11년 동안 교회를 봉사해 오고 있었습니다. 암브로스는 키가 작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연약한 체구에 이마가 넓고 얼굴은 길고 침울하며 큰 눈을 가지고 있었고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바로 암브로스의 “연약한” 체구였습니다. 연약한 체구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연약한 체구를 지녔었습니다. 암브로스는 헬라 기독교 학자들의 전통을 송두리째 섭렵하여 당시 라틴 세계에서 가장 유식하고 초 현대식 설교를 할 수 있었는데 어거스틴은 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암브로스는 구약을 마니교의 비판으로부터 변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거스틴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학문적 자질을 갖추는 것은 필요합니다. 물론 성 프랜시스는 학문적 자질을 갖추지 못했는데 그도 어거스틴에 못지 않은 놀라운 감화와 감동을 세계 교회에 끼쳤습니다. 이제 어거스틴은 암브로스의 설교를 통해서 구약의 족장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스의 설교를 통해서 구약은 진정한 “철인들”의 당당한 행진이 기록된 책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듬 해인 385년 봄에 어머니 모니카가 밀란에 도착하자 어거스틴은 암브로스와의 관계가 보다 깊어졌습니다. “어머니는 전보다 더 열심히 서둘러 교회에 갔다. 그리고 암브로스의 말씀을 마치 생수처럼 들이켰다. 어머니는 그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사랑했다. 내가 이렇게 마음이 움직이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그 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참회록」, 6권 1장 1절). 암브로스가 어거스틴에게 미친 영향은 그들이 직접 접촉했던 회수에 비하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컸습니다. 어거스틴은 한 편지에서 암브로스가 한 말을 기억하며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마치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탁인 것처럼 취급했다.” 들을 수 있는 귀와 배울 수 있는 가슴을 지닌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또한 밀란에 있을 때 14년 동안 동거해온 그의 정부와 이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모니카가 아들의 정식 결혼을 주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가슴을 찢어 유혈이 낭자하게 한 커다란 충격이었다.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했었는데… ”(「참회록」, 6권 15장 25절). 무명의 여인은 울며 밀란을 떠나 아프리카로 가야만 했습니다. “다시는 남자를 알지 않기로 맹세하면서…” 아마 그녀는 어거스틴과 함께 사는 동안 훌륭한 카톨릭 신자로 생활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그와 같은 서약을 한 것은 세례를 받거나 성찬에 다시 참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386년 여름 밀란에서 마지막으로 플라토의 철학, 특히 플로티누스의 철학에 탐닉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철학적 자율성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며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고민과 갈등 가운데서 그가 눈을 돌린 곳이 바로 바울 서신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성경을 지혜의 권위 있는 원천으로 삼게 될 것이라고 암브로스가 이미 확언한 바가 있었습니다. 386년 8월 아프리카 출신의 친구 폰티키아누스가 어거스틴을 방문했을 때 어거스틴의 책상 위에서 바울 서신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개종의 사건을 자세하게 기술했습니다. 386년 8월 어거스틴이 머물고 있던 밀란의 어느 집 정원 무화과 나무 아래서 일어났던, 아니 어거스틴의 가슴속에서 폭풍처럼 일어났던, “개종의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좀 길지만 너무 중요하고 너무 감동적인 대목이기 때문에 그대로 길게 인용합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우리가 숙박하고 있는 집에는 조그만 정원이 붙어 있었습니다. 나는 내 가슴 속을 찢어대는 고뇌에 밀려 이 정원까지 피해 나오고 말았습니다. 거기서는 아무도 나의 피맺힌 투쟁을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와 나 자신만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머리칼을 쥐어 뜯고 주먹으로 이마를 쳤습니다. 손가락을 쥐어 틀며 무릎을 껴안았습니다. 나는 그저 사소한 것 때문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가장 시시한 실없는 일, 과거의 온갖 애착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버리실 건가요? 그러면 이순간부터 영영 이별이에요. 다시 볼 수 없어요. 이제부터 이런 저런 일을 영원히 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나의 하나님, 그것이 내게 ‘이런 저런 일’이라고 속삭인 것은 무엇입니까? 너무도 지저분하고 부끄러운 일들이오니, 주님, 주의 긍휼을 베푸사 주의 종의 영혼을 그런 일로부터 풀어주소서…’ 그리고 다시 절제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육신의 더러운 속삭임에 귀를 막으라.’ 나는 이런 식으로 내 마음 속에서 나 자신의 자아에 관해 나 자신과 입씨름을 했습니다. 그 동안 알리피우스는 내 곁에서 내속에서 일어나는 소요의 결말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영혼이 숨겨진 깊은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나는 내 영혼 속으로부터 부끄러운 비밀을 짜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들을 고스란히 내 마음의 눈 앞에 집합시켰습니다. 그때 내 속에서는 커다란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내 눈에서는 홍수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나는 일어나서 알리피우스 곁을 떠났습니다. 속이 후련할 때까지 울고 부르짖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는 알리피우스에게 방해 받지 않을 만큼 떨어진 곳으로 갔습니다. 나는 무화과 나무 아래 몸을 던지고 눈에서 강물처럼 흐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흐르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그것은 당신께 드려진 합당한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죄의 포로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비통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언제까지 내일내일 하여야 하는가? 왜 지금은 안 되는가? 나는 왜 이 순간에 나의 추한 죄를 청산하지 않는가?’ 나는 내내 울면서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가장 비통한 슬픔이 눈물로 쏟아진 것입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나는 근처 어떤 집에서 들려오는 어린 아이의 노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소년의 음성인지 소녀의 음성인지 모르겠으나, ‘집어서 들고 읽어라, 집어서 들고 읽어라’ (Tole, lege, tolle, lege. Take it up and read it, take it up and read it)는 후렴이 계속 연거푸 들려 왔습니다. 그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며 노는 어떤 게임이 있었던가 하고. 그러나 전에 그런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나는 눈물을 그치고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펴서 내 눈이 처음으로 머무는 구절을 읽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일 것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전에 안토니(Anthony)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 봉독 시간에 우연히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그것이 자기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받아드리게 되었습니다. ‘집에 가서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그와 같은 말씀에 의해서 그는 당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급히 알리피우스가 앉아 있는 곳으로 뛰어갔습니다. 내가 그 곁을 떠날 때 바울 서신이 수록된 책을 내려놓고 떠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책을 움켜쥐고 폈습니다. 나는 조용히 내 눈이 처음으로 닿는 곳을 읽었습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더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내가 그 구절을 읽는 순간 확신의 빛이 밀물처럼 내 마음속으로 밀려 들어오고 모든 의심의 어둠이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 구절을 손가락으로 표시했는지 혹은 다른 것으로 표시했는지 하여간 표시해 놓고 책을 덮었습니다. 알리피우스에게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말했을 때, 내 표정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그도 역시 자기에게 일어난 바를 말해주었는데 나는 그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읽은 구절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읽었던 것보다 더 읽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는 그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했습니다. 이 경고의 말씀을 통해 그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항상 나와 달랐고 나보다 나았습니다. 그는 아무 불안함이나 주저함이 없이 나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내 어머니에게 가서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셨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말씀 드렸더니, 어머니는 승리의 기쁨에 겨워 당신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모든 희망과 꿈이 산산조각이 날 때도 당신의 목적을 이루실 만큼 충분한 능력, 아니 그보다 더 넉넉한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그녀는 당신께서 그녀가 가엽고 슬프게 탄식하며 간구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허락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께로 돌이키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내를 사모하거나 이 세상에 애착을 두지 않게 되었고 다만 신앙의 규칙에 굳게 서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여러 해 전에 이미 내 어머니에게 꿈을 통하여 내가 신앙의 규칙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어머니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어떤 숙원이 이루어질 때 보다 훨씬 더 풍성한 기쁨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내 몸에서 날 육체의 자식들에게 얻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어떤 기쁨보다 더 아름답고 순수한 기쁨이었습니다.”(「참회록」, 8권 12장 28-30절). 이렇게 해서 어거스틴은 옛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때는 주후 386년 8월 말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자기의 개종이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라고 기술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주저 없이 인정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진리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마음, 그 밖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 밖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밖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도록 된 마음을 주신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입니다. 그렇게 큰 유익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어머니의 기도였던 것을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질서론」, 2권, 20장 52절).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눈물의 회개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개종의 체험이 얼마나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또 말해도 부족합니다. 여섯째로, “어거스틴의 카시키아쿰에서의 명상과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개종 후인 386년 여름에 어거스틴은 가슴에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 “가슴의 병”이 아마 천식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음성도 변했고 웅변가로서의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슴은 교만의 처소인데 그 교만의 처소를 내리치는 고통을 당했다고 어거스틴이 기술했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386년 9월 카시키아쿰(Cassiciacum)이란 산 속 시골로 물러가 소위 “기독교적 한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개종 후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진 것과 비슷했습니다. 눈 덮인 알프스가 멀리 보이고 연못과 숲에 쌓여있는 카시키아쿰의 별장은 어거스틴에게 휴식과 아울러 명상과 기도와 대화의 장소를 제공하는데 알맞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어거스틴은 6개월 동안 어머니 모니카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신의 선물”이란 뜻), 친구 알리피우스, 그리고 그의 제자 리켄티우스 등과 함께 명상과 기도와 대화와 저술에 종사했습니다. 어거스틴은 386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그 곳에서 네 개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신학파 반박」 「행복한 생활」「질서론」 「독백론」을 저술했습니다. 「독백론」(Soliloquia)은 어거스틴과 이성과의 대화의 형식으로 저술되었는데 그것은 실상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였습니다. 어거스틴은 「독백론」을 긴 기도로 시작했는데 그는 여기서 하나님과 자신을 “알기를” 소원하며 믿음으로 받아드린 신앙의 조항들을 이성으로 “이해하기를” 소원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하되, 믿음으로 받아드린 하나님에 관한 신앙의 조항들을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믿음의 조항들을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어거스틴의 신학 활동이 바로 여기 카시키아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387년 3월 아데오다투스와 알리피우스와 함께 밀란으로 돌아왔습니다. 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월 10일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부터 세례 지원자들에 대한 암브로스 감독의 엄숙한 교육이 실시되었습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쳤고 다신론과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엄중한 경고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신 방법도 가르쳐졌습니다. 불신자들이 받을 사후 형벌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고난주간에 들어서면서 어거스틴의 가슴은 더욱 빨리 뛰었습니다. 4월 22일 목요일이 되자 그날 밤부터 목욕을 금하고 금식에 들어갔습니다. 토요일에 어거스틴은 성당으로 돌아와 암브로스 감독이 베푸는 축사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사탄을 거부하고, 자기 일을 거부하고, 허영을 거부할 것을 서약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느냐는 감독의 질문에 어거스틴은 “나는 믿습니다” 라고 엄숙하게 대답했습니다. 부활주일 전야, 4월 24일 밤 어거스틴과 다른 남녀노소의 세례 지원자들은 암브로스 성당의 본당 옆에 있는 세례관으로 몰려갔습니다. 어거스틴은 커튼 뒤로 가서 알몸으로 깊은 물속으로 내려갔습니다. 옷을 완전히 벗은 것은 세속적인 것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암브로스는 세 번 세차게 솟구치는 물속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 넣었습니다. 물 속에서 올라온 후 그는 깨끗한 흰 옷을 입고 촛불이 밝게 켜진 본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와 그의 동료 새 신자들은 회중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약간 높은 좌석에 앉았습니다. 그것은 제단 곁에 있는 것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최초로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다”는 주제, 중생과 부활의 주제,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으로 인한 영혼의 천국 승천의 주제들이 어거스틴의 머리 속에서 계속 반향 되었습니다. 387년 4월 25일 부활 주일은 어거스틴의 생애에서 잊지 못할 높고 거룩한 날이 되었습니다. 일곱째로, “오스티아에서의 이별”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이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 그곳에서 주님을 섬기기를 뜨겁게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 모니카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387년 가을 밀란을 떠나 로마를 거쳐 항구 도시 오스티아(Ostia)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찬탈자 막시무스의 함대가 로마의 항구들을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일행은 며칠 동안 오스티아에 머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어거스틴은 어머니와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집에서 정원을 바라보는 창 문턱에 기댄 체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어머니와 나 둘이서만 그윽한 기쁨을 나누며. 우리가 ‘그분의 지혜’를 애기하면서 그것을 헐떡거리며 사모하고 있을 때 한 순간 우리는 진심을 기울여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어떤 소리도 아니요 천사의 소리도 아니요 천둥 소리도 아니요 비유의 어두운 의미도 아닌 바로 그 분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음성만을” (「참회록」, 9권 10장 23-25절). 그로부터 보름 이내에 모니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9일간 병상 생활을 하는 동안 모니카는 간혹 눈을 떠서 자기 아들을 축복하고, 어거스틴에게서는 평생 싫은 소리 한번 듣지 않았다고 말하고, 나비기우스(Navigius)에겐 이제는 남편 파트리키우스 곁의 고향 땅에 묻히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나는 내 손으로 어머니의 눈을 감겨드렸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슬픔에 가슴이 메었습니다. 하마터면 눈물이 펑펑 쏟아질 뻔 했습니다.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내 아들 아데오다투스는 통곡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 어머니가 주는 커다란 위로를 잃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내 영혼은 상처를 입고 내 생활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과거에는 어머니와 내가 한데 엉킨 생활이었기에… 아데오다투스가 진정하고 울음을 그쳤을 때 에보디우스(Evodius)는 시편 찬가를 들어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온 식구들이 화답하며 찬양했습니다.” (「참회록」, 9권 12장 31절). “모친이 매장되던 날, 나는 눈물없이 장지를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날 종일 속으로 무거운 슬픔을 참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내 고통을 치유해 주시기를 내 나름대로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치유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문득 목욕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비통한 슬픔이 마음 밖으로 땀 방울처럼 흘러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깨고 나니 조금도 슬픔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뒤에 나는 차차 조금씩 주님의 여종에 대한 과거의 감정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친이 주님과 대화할 때 얼마나 경건하고 사모하였는지를 기억했습니다. 모친이 나와 대화할 때 얼마나 부드럽고 자상하셨는지를 기억했습니다. 그런 기억을 되살리며 주님 당신 앞에서 모친에 대해서, 또 모친을 위해서, 나에 대해서, 또 나를 위해서 울면서 위로를 얻었습니다.”(「참회록」, 9권 12장 32-35절). 어머니 모니카와 아들 어거스틴과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그림인지 모릅니다. 결국 모니카는 오스티아에 묻혔습니다. 이제 어거스틴은 어머니를 오스티아에 묻고 고향인 칼타고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으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참회”의 아들 어거스틴(386년 8월)이, 세례를 받아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 “환희”의 사람 어거스틴(387년 4월)이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주님과 동족들을 섬기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제일 먼저 고향에 돌아가서 이웃과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방법이었고 사도들이 실천한 방법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목에서 사랑하는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하나님을 붙잡는 깊은 영적 교제의 “기쁨”을 누렸고 어머니와 사별하는 극도의 “슬픔”을 경험했습니다(387년 말). 그런데 “참회”와 “환희”와 “기쁨”과 “슬픔”은 모두 거름이 되고 자양분이 됩니다. 이제 어거스틴은 388년 고향 칼타고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덟째로, “타가스테에 돌아와서 하나님의 종으로 살게 된 어거스틴”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의 일행이 388년 말경 칼타고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카시키아쿰의 은둔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신앙 공동체의 삶에 뛰어든 “하나님의 종들”(Servi Dei)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어거스틴의 출생지 타가스테(Thagaste)에 가서 “하나님의 종들”로서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인 그들은 그 지방 성직자들의 예방을 받았고 어느 경건한 관리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존경받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량한 카톨릭 평신도들은 그들에게 기도 요청을 하곤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내세운 이상은 “은둔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타가스테에서 어거스틴은 아프리카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밀란에서는 이방 나그네였지만 타가스테에서는 지역 공동체의 주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타가스테 교회는 이교도와 이단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습니다. 이교도들, 마니교도들, 도나티스트 분파주의자들이 북아프리카 카톨릭 교회의 대적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여기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단들을 반박하는 저술 활동도 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저술된 어거스틴의 마니교 반박서들은 “교회론적”인 저술이었습니다. 마니교를 반박하는 그의 창세기 주석은 그가 최초로 발간한 “교회론적”인 팜플렛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간결하고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문체로 썼습니다. 「참된 종교에 관하여」란 책은 마니교의 잘못을 지적하는 그의 입장을 약술한 명저인데 로마니우스와 같은 상류층의 마니교 동조자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 세심하게 집필하여 출판한 저서였습니다. 어거스틴이 타가스테에서 2년간 지내는 동안 의미심장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처음에는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창조일들(Days of Creation)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 자신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비추어주는 거울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궁창의 빛들”과 그것들의 “영적인 의미들”을 명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이런 깊은 명상의 생활이 공허하게 보였습니다. 이러던 중 갑자기 죽음의 사건이 그의 삶에 개입되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 네브리디우스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죽은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수년 전에 그가 가장 사랑하던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경험했고 지금 또 다시 가장 사랑하고 아끼고 자랑하던 아들을 잃는 “슬픔”과 함께 그가 가장 사랑하던 친구를 잃는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네브리디우스는 어거스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달콤한” 고향 친구였습니다. 그는 어거스틴을 따라서 칼타고를 떠나 밀란까지 갔었고 다시 어거스틴을 따라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왔던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지금 삼중적인 “슬픔”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그 “슬픔”이 그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동족을 위해서 온 몸을 불사르는 헌신의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슬픔은 좋은 것이다”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도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잃는 “슬픔”이 결코 헛되지 않았고 오히려 주님과 사람들에게로 달려가는 활력소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강변교회에서 사역하던 김세영 전도사가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저는 다음과 같은 두 마디 말을 했습니다. "많이 슬프지. 슬픈 건 좋은 거야!" 그런데 그 짧은 두 마디가 그에게 가장 큰 위로의 말이었다고 나중에 그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슬픈 건 좋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제 더 이상 “마음으로 달콤하게 사는” 명상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조용한 명상의 삶 이상의 삶을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신앙 공동체들을 책임지는 활동적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391년에 완전한 변화가 왔습니다. 1년 전만해도 그의 죽어가는 친구 네브리디우스를 보려고 여행하는 것조차 거부했던 어거스틴이 언덕길을 넘어 옛 항구도시인 히포로 발걸음을 옮겨놓은 것이었습니다. 히포(Hippo)는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1000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였습니다. 200여 년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는 동안 로마식 생활 양식의 양향을 받았습니다. 5,6천 여명이 앉을 수 있는 극장이 세워졌고 커다란 공중 목욕탕이 세워졌고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어거스틴이 히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수도원을 설립할 장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파 묻혀 수도원 생활을 하므로 아프리카 교회에서 적극적인 생활을 보다 더 완전하게 할 수 있도록 무장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거스틴이 391년 봄 히포에 도착했을 때 어거스틴은 중년에 접어든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과거의 많은 부분을 상실한 사람이었지만 새로운 정복의 땅을 더듬어 찾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홉째로. “어거스틴이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396년 히포(Hippo)의 감독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감독으로 선출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주인을 거스를 수가 없어서” 감독으로 선출된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이 히포에 도착하여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36년 후에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은혜로 감독이 된 나는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이 아시는 대로 이 도시에 올 때는 청년이었습니다. 나는 수도원을 세울 장소를 찾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의 형제들과 같이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했었습니다. 내가 어떤 인물이 될 수도 있었지만, 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현재 감독직에 있습니다만 감독이 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죄인들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집에서 초라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교인들을 다스리는 자들과 동등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성찬식에서 나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도 않았습니다. 낮은 자리, 구석진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나는 감독직을 두려워했습니다. 나의 명성이 하나님의 종들 사이에 퍼지면서부터 나는 감독이 공석인 지역으로는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행여나 감독으로 뽑힐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감독이 되지 않으려고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높은 직책에 위험하게 있는 것보다 낮은 자리에서 구원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말씀 드린 대로 종이 그 주인을 거스를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 도시에 들어올 때는 친구를 만나 그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수도원에서 우리와 함께 살도록 하려는 마음에서 들어왔습니다. 나는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미 감독이 들어서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꼼짝없이 잡혀서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후 신부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설교, 355권 2장). 어거스틴은 히포에서 설교와 목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의 감독 저택을 중심으로 수도원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어거스틴은 그들에게 가난과 독신의 생활을 할 것을 서약하게 했고 엄격한 규칙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경만을 가르쳤습니다. 그 당시 사회가 부에 대해 사치와 낭비의 경향을 띠고 있었는데 어거스틴은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구제를 강조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기도 했고 방문자들을 친절하게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때로 부자들을 공박하는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엄격한 수도원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채식을 하게 했고 여자들이 남자 수도원을 방문하는 것을 엄금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의인 아벨이 죄를 범했을 수 있었다면 무슨 죄를 범했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아마 너무 크게 가슴을 흔들며 웃었던지, 자기를 잊고 너무 장난을 쳤던지, 사과를 너무 많이 먹었던지 그래서 너무 많이 먹고 소화불량에 걸렸던지 한 일들이었을 것이다”(「자연과 은총」, 38권 4장). 그러나 어거스틴의 수도원이 애굽의 수도원처럼 지나친 금욕주의로 흐르지는 않았습니다. 책을 읽게 했고 연구를 하게 했고 그리고 학문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몰려들어 더 큰 집을 지어야만 했습니다. 남자 수도사들이나 여자 수녀들을 모두 “하나님의 종들”(servants of God) 이라고 불렀습니다. 어거스틴은 히포에서 수도원 운동뿐 아니라 저술과 신학 활동을 하면서 하나의 “포괄적인” 기독교 진리의 체계를 수립했습니다(34년간, 76세 되던 430년까지). 그의 위대한 공헌이야말로 여러가지 이단들과 극단적 기독교 사상들과 싸우며 하나의 “포괄적인” 복음적 기독교 진리 체계를 수립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어거스틴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까지 하고 이제부터는 “어거스틴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열째로, “어거스틴이 고대의 모든 신학적 전통을 종합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의 신학 체계는 "다양"하고 "포괄적"인 것이었습니다. 사고와 삶에 있어서 한 편으로 치우치는 우리들에게 어거스틴의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사고와 삶은 깊은 도전과 교훈을 던져준다고 하겠습니다. 어거스틴은 여러가지 이단 사상들과 대항해서 싸우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은 하나의 “성경적”이고 “복음적”이고 “역사적”이고 “균형 잡힌” 신학을 수립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가 9년 동안이나 몸 담고 있었던 마니주의 이단과 싸우면서는 모든 피조물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심을 강조했습니다.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지적하면서 악은 어떤 절대 악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의지에서 비롯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또한 도나티스트 분파운동과 싸우면서 균형 잡힌 교회론을 정립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보편성”과 “일체성”과 함께 “거룩성”을 강조하면서도 교회 안에는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고 지적하며 교회의 “불완전성”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또한 펠라기안주의와 싸우면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아울러 하나님의 전적 은총을 강조하는 은총론을 전개했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죄의 유전을 받아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예정에 관한 어거스틴의 견해는 후에 종교 개혁자들 특히 칼빈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거스틴은 또한 이 세상 역사의 의미를 “하나님의 도성”과 “마귀의 도성”과의 관계의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이 세상의 역사는 두 도성간의 싸움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하나님의 도성”의 승리로 마무리되어 영원한 천국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열한째로, “어거스틴이 신학의 절정기에 이르러서 바울의 실제주의를 지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32세 되던 해인 386년 밀란에서 개종의 체험을 했고, 37세 되던 해인 391년에는 히포의 장로로 안수를 받았고, 42세 되던 해인 396년에는 히포의 감독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개종한지 10년 만에 감독이 된 셈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며 모든 정력을 쏟아 “하나님의 종” 으로서의 사역을 충성스럽게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나면서 그의 신앙의 자세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즉 “플라토주의적 이상주의”에서 “바울적 실제주의”에로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명상과 은둔의 생활을 통해 신을 닮는 완성에 이를 수 있다는 낙관적인 이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나면서 이와 같은 플라토주의적인 기독교의 이상이 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간 의지의 무력함을 절감하게 되었고 점차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를 높이게 되었습니다. 마니교의 숙명론을 비판하며 인간의 자유 의지를 변호하던 자신의 입장을 재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자신 속에 완성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과 죄악의 세력이 자리잡고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변화된 입장이 396년에 저술한 「심플리키아누스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과 397-8년에 저술한 「참회록」10권에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다시 사도 바울에게로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서신들은 어거스틴이 개종의 체험을 하던 순간부터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개종 초기의 어거스틴은 사도 바울을 “플라토주의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이해했습니다. 즉 어거스틴은 사도 바울을 영적 상승의 옹호자로 보았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사도 바울의 승리감을 맛보았습니다.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라는 승리감을 만끽했습니다. 초기의 어거스틴은 아마 오늘날 오순절파에 속한 열정적인 신자에 비할 수 있었을 지 모르겠습니다. 영적인 생활을 수직적 상승으로 보는 사상은 초기 어거스틴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종 후 10여 년이 지나면서 이제 어거스틴은 사도 바울 속에서의 육과 영의 갈등을 심각하게 느끼면서 사도 바울의 고백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 아래서의 무기력을 절감하게 되었고, 은혜 아래서의 전폭적인 의존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거스틴이 인간을 전적으로 무기력한 존재로 보는 이원론적 금욕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와 같은 두 입장에서의 “망설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심플리키아누스는 397년 암브로스의 후임으로 밀란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이때 어거스틴은 성경해석에 관해 심플리키아누스 감독의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한 답변을 써서 보냈는데 「심플리키아누스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란 글에는 당시 어거스틴의 신앙의 입장이 잘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이 글은 먼저 로마서 7장에 기술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의 문제를 취급했는데 여기서 영육의 갈등을 경험하는 무능한 인간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죄책감을 부여하므로 의의 길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상태가 율법 없는 상태보다는 월등하지만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선과 의를 행할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후에 어거스틴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 심지어는 사도들까지도 이 땅에서는 항상 죄악의 충동을 받기 때문에 완전한 평안과 완전한 의를 소유할 수 없다는 반 펠라기안적 “실제론적인” 인간관을 내세웠습니다. 이 작품이 취급한 둘째 문제는 로마서 9:10-29에 나타난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혜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인간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것을 능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은혜가 선행을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앞서 행하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믿음 자체도 자랑할 것이 못 되는 것은 믿음에 앞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비가 선행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비가 효력을 발생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효력을 발생하지 않는데, 어째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달리 취급하시는가에 대한 어거스틴의 답변은 바울의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이 자기의 숨은 뜻에 따라 인간을 취급하시는데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불의가 없고 인간은 하나님에게 불평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우리 속에 동기와 능력을 부여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의지를 발동할 수도 없고 달려갈 수도 없다.” 결국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의 절대성을 높이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칭의를 받게 될 사람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은 실로 숨겨져 있으며 우리들은 그것을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알 수 있다 할지라도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무능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와 같은 구원에 이르는 선택 방법을 생각해 본다면 나로서는 지능이 높은 자나 죄가 적은 자를 선택할 것이다. 또 덧붙인다면 고상하고 바른 교리를 가진 사람들을 선택하겠다… 그러나 내가 그와 같은 판단의 기준을 설정하는 즉시 하나님께서는 나를 비웃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약한 자를 택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미련한 자를 택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 그것을 믿자.… 그의 판단은 측량할 수 없고 그가 하시는 일은 우리의 추적을 초월한다. 우리는 할렐루야 라고 말하며 함께 그를 찬양하자. ‘이것이 무엇이고’ ‘저것이 무엇이냐?’ 라고 말하지 말자. 만사는 각기 적당한 때에 지음을 받았다.” 「심플리키아누스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1권 2장 22절) 개종 후 10년이 지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의 절대성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카시키아쿰에 있을 때의 어거스틴은 자기의 미래를 확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책들은 온통 미래에 대한 계획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10년 후의 어거스틴은 확실한 미래를 모두 상실한 불확실한 인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의 현재 상태에서는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가 가장 열렬하게 염원하던 것도 그저 희망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현세를 지나 모든 갈등이 최종적으로 해소될 때까지 완전한 실현이 연기된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을 “갈망”하고, 그 상실을 “절감”하고 그것을 “사모”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가슴을 깊게 하는 것은 열망뿐이다”(It is yearning that makes the heart deep.). 이것은 “고전적인 완전의 이상”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어거스틴의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멋지고 화려한 낙관적인 신학 사상을 이야기 하는 대신 어둡고 불확실한 비관주의적인 신학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옛날 학위 논문을 쓰면서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지극히 낮아진” “비관적인” “참회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으며 깊이 공감을 했고 지금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열두째로, 「참회록」에 나타난 성 어거스틴의 “지극히 낮아진” “비관적인” “참회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이 개종한 후 11년 되던 해인 397년 그가 43세 되던 해에 저술한 「참회록」(Confessiones)은 회심 초기의 “플라토주의적 이상주의”에서 “바울적 실제주의”로 변화된 어거스틴의 “지극히 낮아진” “비관적인” “참회의” 모습을 잘 드러낸 작품인데, 어거스틴의 전 생애의 내면생활의 변화 과정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파헤쳐 묘사한 “영혼의 자서전”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갓난아기 때 어머니의 젖을 게걸스럽게 빨던 탐욕과 시기가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비롯하여, 십대 소년으로 남의 집 배나무에서 배를 몽땅 털어 따서 돼지에게 던지며 좋아하던 장난꾸러기의 모습 그리고 정부와 동거하다가 그를 내버리는 육욕에 얽매여 있던 청장년 시절의 방탕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했으며 마니교, 신플라토주의 등을 추구하다가 결국 롬13:13을 읽고 극적 회심을 경험한 회심 사건과 카시키아쿰에서 은거의 생활 등 자신의 내면생활을 솔직하게 묘사했습니다. 「참회록」은 인간을 상대로 쓴 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상대로 쓴 글이었습니다. 「참회록」은 단순한 한 인간의 자기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아뢰며 참회와 감사와 찬양을 돌린 한 영혼의 “고백서” 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1권 초두에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러면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지와 재와 같은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를 조롱할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긍휼을 바라보고 말씀 드리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 능력이 크시며 지혜가 무궁하시나이다. 인간이 당신을 찬양하기를 원하는 것은 당신께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비록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며 죄악의 흔적을 나타내며 다닐지라도 여전히 당신을 찬양하기를 원하는 것은 당신께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당신을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당신 안에 쉼을 얻기까지는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어거스틴은 386년 무화과 나무 밑에서의 개종의 체험을 하므로 육체에 사로잡혀 살던 옛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개종의 체험으로 모든 것이 바꾸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거스틴이「참회록」을 8권으로 끝내지 않고 13권까지 계속한 것도 개종의 체험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개종자가 도달한 은혜의 항구에는 아직도 폭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는「참회록」10권에서 개종 후의 자기의 내면상을 아직도 갈등과 어두움에 싸인 불완전하고 무능한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오, 주님이시여! 내 속에 있는 것을 어찌 당신에게 숨길 수 있나이까? 나는 내 자신에게 만족을 느끼지 못하므로 아직껏 탄식하고 있나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나 자신을 거부하고 당신을 택하옵니다.”(10권 2장 2절).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참회록」10권 28장 39절 이하에서 자기 내면의 병들고 추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악한 슬픔이 나의 선한 기쁨과 싸우고 있는데 승리가 어느 편에 돌아갈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 보시옵소서 나는 내 상처를 감추지 않습니다. 당신은 의사이시며, 나는 병든 사람입니다.”(39). “나의 모든 소망은 당신의 넘치도록 크신 자비에만 있습니다. 당신께서 명하시는 것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그리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에게 명하시옵소서.”(40). “분명히 당신께서는 내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벗어나라’ 라고 명하십니다. 당신께서는 음란을 삼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나의 옛 습관이 고착시켜 놓은 그와 같은 것들에 대한 영상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와 같은 영상이 내 속에 들어와 나에게 즐거움을 제공할 뿐 아니라 나의 동의를 얻어내고 그리고 실제 행동과 매우 유사한 행위를 유발하고 맙니다. 오,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그와 같은 때에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41)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의 모든 병을 고칠 수 없으십니까? 당신의 크고 넘치는 은혜가 잠잘 때의 음란한 움직임을 제지할 수는 없으십니까?”(42). 결국 성 어거스틴은 사도 바울처럼 죄성으로 인한 심각한 고민 가운데서 이리 저리 도망갈 생각을 하다가 결국 십자가로 달려가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구속의 은혜를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죄악들과 불행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나는 공포 가운데서 빈들로 도망갈 생각을 했으나 그러나 당신께서는 그것을 금하셨습니다. 오! 주님이시여 나의 모든 근심을 당신께 맡깁니다. 당신께서는 나의 무능과 약함을 아십니다. 나를 가르치고 나를 고치시옵소서. 당신의 독생자가 그의 피로 나를 구속하셨는데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사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나의 마음에 꼭 붙잡으며 나의 음식과 음료인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를 먹는 자는 충족하게 될 것이고 그를 찾는 자는 그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0권 43장 70절). 성 어거스틴은 11권 초두에 가서는 “주시옵소서, 계시하시옵소서, 완전케 하시옵소서,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라고 처절하게 부르짖으며 두 손 들고 항복을 했습니다. “당신께 바칠 수 있는 것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오, 주님이시여! 나를 완전케 하시고 당신의 비밀을 나에게 계시하시옵소서, 당신의 목소리는 나의 기쁨이며 나의 모든 즐거움을 초월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나는 그것을 사랑합니다.… 오,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의 간구를 들으소서.”(11권 2장 2-4절). 성 어거스틴은 참회록 마지막 권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천국을 바라보며 천국의 평화를 다음과 같이 간절하게 간구했습니다. “오, 주 하나님! 당신의 평화를 주시옵소서. 평온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안식의 평화를 주시옵소서. 저녁이 없는 평화를 주시옵소서.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모든 것들은, 그것들이 모두 매우 선하지만, 그것들은 그들의 과정이 지나면 다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거기에는 모두 아침과 저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없고 석양이 없습니다. 당신께서 그 날을 영원한 날로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창조의 사역 후에 일곱째 날 안식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영생의 안식의 때에 당신 안에서 쉬게 될 것입니다.”(제13권 35장 50절). 위대한 신학자 성 어거스티의 신학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사람이 감히 다음과 같이 그의 신학 사상을 요약해 봅니다. 그의 신학 사상은 고대의 다양한 신학 사상을 모두 종합한 것인데, “성경적”이고 “복음적”이고 “역사적”이고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신학 사상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또한 이 세상 역사의 의미를 “하나님의 도성”과 “마귀의 도성”과의 관계의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이 세상의 역사는 두 도성간의 싸움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하나님의 도성”의 승리로 마무리되어 영원한 천국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현세와 인간에 대한 어거스틴의 이해는 “우울한” “실재론적” 이해이며 따라서 종말론적 완성을 바라보고 갈망하는 “종말론적” 신앙이 그의 두드러진 신학 사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사람이 “두 도성에 대한 어거스틴의 교훈에 나타난 종말관의 기능”(The Function of Eschatological Perspective Upon St. Augustine's Teaching About The Two Cities)이란 제목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섰습니다. 열세째로, “성 어거스틴의 말년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430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목회 사역과 저술 활동을 끊임없이 계속했습니다. 사실 그에게는 은퇴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421년에는 칼타고 총회에 참석했고 「줄리안과 펠라기안주의 론박」 「엔키리디온-신앙요강」 등을 저술했으며, 422년에는 「둘키티우수의 여덟 가지 질문」과 「신의 도성」의 일부를 저술했습니다. 어거스틴은 424년과 425년에 「신의 도성」과 「기독교 교리」를 완성했고 히포에서 일어났던 많은 지역 문제들을 다루며 설교도 계속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426년 9월 25일 히포의 평화의 성당에 교직자들과 회중들을 모은 가운데서 에라클리우스(Eraclius)를 그의 후계자인 히포의 감독으로 지명했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나는 에라클리우스를 나의 후계자로 지명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선언했을 때 회중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돌릴지어다” 라고 23번이나 반복하며 우레와 같이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에게 장수를” 이라고 16번 반복했습니다. 성 어거스틴을 향해서는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의 감독입니다” 라고 8번 외쳤습니다. 에라클리우스는 앞으로 나아가 다음과 같은 말로 설교를 시작했다. “귀뚜라미는 찍찍거리며 울고 백조는 고요히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426년에 「은혜와 자유 의지」 및 「권면과 은혜」를 저술했고, 그가 평생토록 저술한 모든 작품들을 회고하고 논평하며 수정한 「회고록」(Retractationes)을 집필했습니다. 428년에는 「막시미우스의 반박」 「쿼드볼트데우스에게 보내는 서한」 「성도의 예정」 그리고 「견인의 은총」 등을 저술했고, 429년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답변」을 저술했습니다. 429년 여름 겐세릭이 이끄는 반달족이 스페인을 넘었고 430년 봄에 이르러는 마우레타니아와 누미디아를 침공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의 로마 제국의 통치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없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카톨릭 교회도 침략군들을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감독들은 분열되었고 사기가 저하되었으며 신자들도 수동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 세계의 멸망을 바라보며 순교할 의욕마저 상실했습니다 그 해 겨울 반달족은 히포를 포위했습니다. 반달족은 카톨릭 감독들을 고문하여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아프리카에서 이룩한 그의 평생의 사역들이 폭력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모든 도시들이 공략을 당하고 교회당이 파괴되고 감독들과 성직자들이 체포되고 수도원의 신부들과 수녀들이 고문을 당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 학대를 당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430년 8월 열병으로 드러누웠습니다. 그는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마지막 시간을 조용히 있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의 참회의 시 4편을 써서 자기가 앓아 누워있는 방 벽에 붙여 놓게 했습니다. 그 시들은 시편 6편과 32편과 38편과 51편이었을 것입니다. 날마다 그 참회의 시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깊이 통회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시38:4).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이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51:1). 성 어거스틴이 마지막 열흘 동안 처절한 참회의 기도를 드린 것은 후에 성 프랜시스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나는 작은 벌레입니다” 라고 고백했고, 칼빈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나는 망할 자 이옵니다” 라고 부르짖은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와 기도가 방해 받지 않기 위해 마지막 열흘 동안 의사가 그를 진찰할 때나 식사를 가져올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방에 들어와 그를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의 분부는 그대로 지켜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시간들을 기도와 참회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히포의 모든 교회들과 특히 평화의 성당에 모여든 신자들이 그를 위한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성 어거스틴은 430년 8월 28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사모하던 천국으로 옮겨졌고 그가 그렇게도 추구하던 의에 도달한 것이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시신은 그가 세상을 떠난 그날 히포에 매장되었습니다. 지금 성 어거스틴에게서 남아 있는 것은 그의 저술 뿐입니다. 포시디우스(Possidius)가 그의 저술들을 완전한 목록과 함께 편집했습니다. 그러면서 포시디우스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 그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얻은 사람들은 그를 실제로 보았던 사람들이었고 그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삶의 인격에 접촉했던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자기의 생을 어떻게 마감하는가가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평생 주님과 많은 사람들을 섬기면서, 전도와 설교와 목회와 수도와 봉사와 저술 사역에 헌신하다가, 공식적인 사역을 마감하며 아름답게 은퇴하고, 그리고 남은 시간을 설교와 저술에 바치다가, 마지막 열흘 동안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가운에, 자기가 사랑으로 돌보던 양무리들의 사랑과 슬픔의 기도를 받으며, 세상을 떠나 그가 그렇게도 사모하던 천국으로 들려 올라가 주님의 품에 안긴, 성 어거스틴이야말로 가장 축복 받은 사람이요 가장 행복한 하나님의 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열네째로, 끝으로 저의 박사학위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아주 간단하게 줄이고 또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저는 아이오와 대학에 그대로 머물면서 아이오와 대학, 아퀴나스 신학원, 드뷰크 장로교 신학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박사학위 프로그램에 새로 등록을 하고 리써치 위주의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교부신학” “라틴신학”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종교개혁과 카톨릭의 반응” “현대교회론” “어거스틴 연구” 등의 강의를 택하여 들으며 학위논문 작성을 위한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교부신학 전공의 매고니글 교수는 젊은 교수였지만 옥스포드 대학 출신의 박식하고 유능한 교수로 제가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친절한 지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매고니글, 포렐, 드러먼드 교수 등의 지도를 받아 완성한 철학박사(Ph.D.) 학위 논문의 제목은 「두 도성에 대한 어거스틴의 교훈에 나타난 종말관의 기능」(The Function of Eschatological Perspective Upon St. Augustine's Teaching About The Two Cities)이었습니다. 학위논문에서 제가 취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종교적 욕구(visio Dei)의 성취 가능성의 관점에서 본 현세에 있어서 인간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인간이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발전해 가는 역사의 한 점을 점유하고 있는 데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두 도성의 관계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영속하는 종교적 문제”의 하나를 다룸에 있어 어거스틴을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어거스틴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사상 발전의 전체적 흐름(lager picture)을 이해하는데 불가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거스틴 이전에 다양한 해석들이 제시되었으나 그 해석들은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것들이었습니다. 어거스틴에 와서 비로소 일방적인 견해들을 거부하면서 변증법적 통일을 유지하는 그래서 다양한 요소들을 하나의 체계 안에 종합하는 포괄적이고 균형잡힌 해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거스틴의 종말론적 역사관의 특징은 양면성을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미래적이면서도 현세 실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종말론적 역사관의 양면성은 그의 구속사의 개념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의 인간관에 의해 형성되었고 특징지어졌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미래에 가서 완성되지만 현세에서도 부분적으로 실현되어 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양면성은 어거스틴의 두 도성에 대한 개념, 현세관, 교회관 및 국가관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① 어거스틴은 두 도성을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실재로 보면서도 동시에 부분적으로 역사 안에서 실현 되어가고 있는 역사적 실재로 보았습니다. ② 역사적 현세의 중립성, 모호성, 내지 비참성을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역사적 발전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종말론적 완성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역사적 현세의 구속론적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③ 역사적 교회는 한편으로는 신의 도성과 구별되며 동일시 될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신의 도성의 역사적 형태요 신의 도성으로 성장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신의 도성과 동일시 됩니다. ④ 정치 체제에 대한 어거스틴의 교훈도 양면성을 내포합니다. 국가는 지상(마귀)의 도성과 근사하며 따라서 기독교적 사회의 이상을 실현할 능력이 없음을 지적하면서도 국가는 악을 견제하고 지상의 평화를 유지하는 제한된 기능을 신으로부터 부여 받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양면성"과 “포괄성”은 저의 사고와 삶에 평생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 존경하고 사랑하는 김명혁 박사님 귀하, 이번 글은 박사 학위 내용을 정리한 훌륭한 내용입니다. 많은 부분을 다시 배웠습니다. 어거스틴은 구교와 신교를 아울려는 거대한 지식과 갚은 영성를 소유한 학자입니다. 김 박사님의 글에는 해박한 지식과 와 닿는 영적 감동이 들어 있읍니다. 지식을 능가하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강의를 목회자들이 받으면 저들의 목회와 영성이 달라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김박사님이 한복협 큰 업무에서 이선으로 은퇴하셨으니 이제 학술원에서 목회자 영성 수련시키는 일에 관심을 가지시도록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김박사님의 강의를 매학기 한번씩 영성 수사학 과정 목사님들이 학술원에서 듣도록 했으면 합니다. 어제 전화에서 수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학술원 수사과정 강의 제목은 영성에 관한 것인데 제목은 여태까지 연구하신 것(길선주, 이기풍, 주기철, 손양원, 이성봉, 한경직, 박윤선의 영성 등)가운데서 자유로 선택하여 다음학기 강의 제목으로 주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감사드립니다. 김영한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