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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 and Eve,
ceiling fresco from the Stanza della Segnatura.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페루자 화가인 베르나르디노 핀투리키오를 따라
시에나로 갔다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하고 있는
작업(그들은 시뇨리아 궁을 장식하기 위해 각기 앙기아리 전투와 카시나 전투를
주제로 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The en:Mond Crucifixion,
1502-1503. London, National Gallery ,
very much in the style of Perugino
라파엘로는 1504년 가을까지는 피렌체에 도착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피렌체 방문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처음으로 실질적인 접촉을 갖게 된 것은 1504년경이다.
피렌체 문화는 그가 이미 갖고 있던 모든 개념을 더욱 강화시켜준 동시에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이것은 수동적인 흡수가 아니라
The visitation,
1517. Madrid, Prado Museum.
그리고 전성기 르네상스의 보편화된 이상주의를 지지한 피렌체 화가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작품만이 아니라, 고딕 양식으로부터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신기원을 이룩한 자연주의의 선구자인 '마사초의 옛 작품'도 연구했다고
라파엘로가 남긴 스케치들 가운데 일부는 그가 조각가인 도나텔로와 베로키오
및 판화가인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의 작품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들은 모두 인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방법을 열심히 연구했었다.
The Holy Family and young St. John the Baptist,
circa 1513-1514
특히 〈오색방울새의 마돈나 The Madonna of the Goldfinch〉·
〈에스테헤의 마돈나 The Esterházy Madonna〉·
〈아름다운 정원사 La Belle Jardinière〉 같은
마돈나 연작에는 1480년부터 회화 분야에 커다란 혁신을 이룩하고 있었던
Madonna of the Rose (Raphael),
1518-1520. Madrid, Prado Museum.
이 그림들은 다 빈치의 구도·인물배치·몸짓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15세기 작품에서는 보기 드물게 편안하고 단순한 배경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라파엘로는 또한 다 빈치의 명암법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다 빈치의 명암대조법(chiaroscuro : 자연광이나 고정된 광원으로 인해
특히 다 빈치의 스푸마토(sfumato : 선 대신 극도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음영을 이용하여 형태나 이목구비의 윤곽을 나타내는 기법)에서
그러나 라파엘로는 다 빈치를 능가하는 새로운 인물 유형을 창조했는데,
그가 창조한 둥글고 온화한 얼굴은 단순하고 전형적인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지만
1507. Rome, Galleria Borghese,
drawing from Roman sarcophagi
1504~08년 라파엘로는 피렌체에 계속 거주한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향인 우르비노에 갔었으며 당연히 페루자에도 들렀다.
1507년 그에게 오늘날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Deposition〉를 그려달라고 주문한 사람은
이 그림에는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 있지만,
circa 1507-1508. Paris, Louvre Museum.
라파엘로는 1508년말경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갔다.
브라만테가 같은 고향 사람들을 교황청으로 데려오고 싶어서
이 젊은 화가는 로마에 오자마자 변덕스러운 율리우스와 교황청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대가로서의 권위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는 로마에 동화하려고 애쓰는 한편 로마 귀족들의 정신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화가 중의 왕자'라고 불릴 만큼
인문주의자 첼리오 칼카니니는 나중에 라틴어로 쓴 경구에서
"로마를 건설하는 데에는 고대의 수많은 영웅과 오랜 세월이 필요했고,
로마를 파괴하는 데에는 수많은 적과 수백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제 라파엘로는 로마 안에서 로마를 되찾았고 그것을 발견했다.
찾아내는 데에는 위대한 이가 필요하지만 발견은 신이 주관하신다.“
Raphael, The Mass at Bolsena, 1512
이 경구는 라파엘로의 품행이 로마 전체의 존경을 얻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로마 귀족들은 그를 그들 자신과 동등한 인물로 여겼고,
비비에나 추기경은 1514년 자기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율리우스 2세의 후계자이자 위대한 메디치 로렌초의
Raphael, The Expulsion of Heliodorus from the Temple, 1511-12
라파엘로는 짧은 생애의 마지막 12년을 로마에서 보냈는데
이는 열에 들뜬 듯 한 정력적인 활동으로 잇따라 걸작을 낳은 시기였다.
모든 일을 겸손과 신중으로 대했지만 매번 새로운 높이에 도달하는 것을
바티칸 궁의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를 장식하는 일은 1508년 말에 시작하여
3년도 채 지나기 전에 완성했는데, 율리우스 교황의 이념과 교양을 반영하고
School of Raphael - Donation of Rome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는 그에게 이 일을 주문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거처하고 집무하기로 되어 있던 바티칸 교황청의 수많은 방들 가운데 하나였다.
율리우스 2세는 매우 교양 있는 사람이어서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뛰어난
그는 4세기에 지은 원래의 교회를 허물고 새로운 성베드로 대성당을
미켈란젤로는 원하지 않았으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을 장식하게 했다.
The Baptism of Constantine
또한 라파엘로의 천재성을 꿰뚫어보고, 궁정의 인문주의자들과 토론한
철학적 주제를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의 프레스코화로 그리는 일을
이 프레스코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작품은 〈성체에 관한 논쟁〉과
과거와 현재의 로마 교회 대표자들이 모여 있고 그 위로 천상에
성부와 성자가 예언자 및 사도들과 함께 있는 거룩한 광경을 그린
〈성체에 관한 논쟁〉은 그 도상을 통하여 교회의 승리와
School of Raphael - Vision of the Cross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과거와 현재의 철학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속세의 지식 또는 철학을 복잡하게 그려낸
The Coronation of Charlemagne
교황의 거처를 장식하는 작업은 1513년에 율리우스가 죽고
후계자 레오 10세가 즉위한 뒤인 1517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중요하고 큰일을 맡고 있으면서도 라파엘로는 작업의 마지막 부분은
완전히 제자들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다른 야심작들을 한꺼번에 시작했다.
(여기에 그린 그의 온화한 성자들과 성모는 새로운 종교적 유형을 낳게 했음),
태피스트리의 밑그림, 접시 도안, 무대의 배경그림 등 지극히 다양했다(내러티브).
그는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의 작업을 하는 동안, 산 엘리 조델리오레피치 교회를
설계했는데 이것이 건축과 관련한 그의 첫 번째 작업이었다.
The Fire in the Borgo
1513년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는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에
자신의 장례식용 예배당을 설계하고 장식해달라고 라파엘로에게 부탁했다.
라파엘로는 키지의 저택인 빌라 파르네시나를 이미 장식한 적이 있었다.
1514년 레오 10세는 브라만테와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을
그해 말에 브라만테가 죽자 이 작업을 감독하게 된 라파엘로는
교회 설계를 방사상의 그리스 양식에서 길쭉한 라틴 양식으로 바꾸었다.
브라만테는 바티칸 궁의 로지아(loggia : 한쪽만 벽이 있는 복도)들을
장식하는 일도 맡고 있었는데, 이 일도 라파엘로가 이어받았다.
이 서정적 장식에 나타난 감미로운 단순성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The Battle of Ostia
The Battle of Ostia was inspired by the naval victory of Leo IV
over the Saracens at Ostia in 849.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제작한 많은 작품들에는 철학적 깊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인문주의자이며 신플라톤주의자라는 평판이 로마 전역에 널리 퍼졌다.
그가 로마에서 사귄 친구들 중에는 수많은 미술가들뿐만 아니라
카스틸리오네, 벰보 추기경, 풍자 작가인 피에트로 아레티노,
1519년에는 이탈리아의 서사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가 쓴 희극
〈바뀌어진 아이들 I suppositi〉의 무대장치를 설계했다.
라파엘로는 유능한 학자였고 특히 고대 유물에 관심이 많았다.
1520, unfinished at his death.
1515년 8월에 교황 레오 10세는 그에게 귀중한 라틴어 글귀가 새겨진
라파엘로는 2년 뒤에 로마의 유물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그러나 말년의 라파엘로는 오랜 과거의 것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고대 유물 보존계획을 감독하는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벗어난
이 건물에 대한 그의 설계도는 이후 이탈리아 건축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되는 새로운 건축학적 개념의 본보기였다.
마지막 작품인 〈예수의 변모 Trans figuration〉(1517 의뢰)에서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신비로운 후광이 그를 둘러쌌고,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의 변용〉이 그의 관 앞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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