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용의 세 번째 시집인 『흐린 저녁의 말들』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다음이 아닐까 싶다.
나의 노동은 고향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 노동과 생산은 너무 위험해졌다는 말이다. 노동의 권리는 발전의 가치와 다르다는 말이다. 나는 노동력을 판매하면서 노동을 소진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윤에 지배당한 생산은 파괴적 종말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_「나의 노동으로」 부분
이번 시집에서도 임성용 시인의 시적 감각은 ‘노동 현장’에 대해 예민한데 그것은 ‘노동 현장’의 ‘여전한’ 비극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비극에 대해서 다른 눈을 추가한 것처럼 보인다. (임금)노동 그 자체에 더해 자본주의 노동이 나무를 베고, 땅을 파헤치고, 목숨을 해치는 무기를 만드는 등 지구와 지구에 깃들어 사는 목숨들을 앗아가고 있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런 인식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집에서 노동자뿐만 아니라 다른 목숨들, 존재들을 부단히 호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고 했던 고향에 대한 기억들이 여전히 시인에게 강력하기도 하다. 4부에 실린 작품들은 거개가 고향의 산천과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고향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는 진술은 그 이면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꿈이 웅크리고 있다고 읽어도 무방하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노동”이 가로막고 있다. 이 말은 “나의 노동”에 밴 어쩔 수 없는 비극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서 ‘비극’은 두 가지 모습을 지닌 것 같다. 하나는 「나의 노동」에서 나타나듯 화자가 행하고 있는 자본주의 노동이 고향을 파괴, 삭제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노동이 구체적인 삶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노동은 살아가기 위한 실존적, 역사적 조건이다. 그런데 그 조건이 지금도 ‘여전히’ 말할 수 없이 비극이다.
우리는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죽고 싶어도 사는 사람들 우리는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들이다 살고 싶어도 죽는 사람들 _「잘 가라, 세상」 부분
피 묻은 손이 피 묻은 기계를 붙잡는다 목숨은 멈출 수 있어도 공장은 멈출 수 없다 매일 반복되는 비극은 증거를 지우지 않는다
살아 있는 눈에 마지막 노동의 흔적이 그어진다 나도 언젠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날이 있으리라 _「비극을 위하여」 부분
인용한 구절만으로도 임성용 시인이 인식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노동이 어떤 상황인지 여실하다. 무엇보다도 임성용 시인의 시는 시인 자신의 노동으로 지어진 것이기에 실감이 작품마다 꿈틀댄다. 그것이 이 시집을 읽으면서 가슴에 물리적인 흔적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