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조동화 그는 누구인가? 전쟁의 포성이 한창인 6.25 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삶이 무엇인가 고뢰하며 즐거운 인생을 꿈꾸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속에 지나온날들이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흘러보낸 세월은 다시오지 않기에 지나간 시간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무상한 삶의 여정을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인간의 삶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왔으니 삶에 이유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과 폭력의 역사인 것 같다.
권력, 식민화, 제국 건설등 영향력과 영토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혁명, 대학살, 고문이 자행되여 왔다.
일제로부터 대한민국도 36년동안 나라를 빼앗긴 세상을 살아왔다.
영상을 통한 인간의 만행을 더듬어 보자.
러시아
국토 면적이 17,125,407km²로 국가별 국토 면적 순위 1위를 자랑한다. 러시아의 면적은 유럽, 오세아니아, 남극 대륙 전체보다 넓은 나라이며 남아메리카 대륙보다는 조금 작다. 국토 최서단인 칼리닌그라드에서부터 최동단인 추코트카까지 총 11개의 시간대를 사용하며, 국토가 넓은 관계로 도로 수송보다 항공, 철도 수송에 의존한다. 국토가 비옥해 국토 면적 중 경작지가 1,237,294 km²로 전세계 4위이다. 아울러 천연자원에 있어서도 세계 최대 천연가스 매장국, 석유 매장량 8위, 석탄 매장량 2위를 자랑하는 등 경제의 많은 부분을 천연자원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인구도 꽤 많아서 세계 9위다.
===나무위키옮김===
러시아 면적의 크기
세계면적의 1/8로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넓다.
남한의170배
광대한 국토를 지녔다는 캐나다가 998만 평방킬로미터, 중국이 960만 평방킬로미터인데 비해 러시아국토면적은 두 배에 가까운 1,712만 평방킬로미터나 됩니다. 소련이었을 때는 2천2백만 평방킬로미터나 되었었습니다.
소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러시아어: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 СССР 소유스 소베츠키흐 소치알리스티체스키흐 레스푸블리크 / 에스에스에스에르[*], 문화어: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 약칭 소비에트 연방(러시아어: Сове́тский Сою́з 소베츠키 소유스[*]) 또는 소련 은 1922년 12월 30일부터 1991년 12월 26일까지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하였던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였다.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였다. 소련의 영토 면적은 무려 22,402,200 km² 였다. 지구의 전체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덮는 이 면적은 북아메리카 전체에 비견할 만하였다. 유럽 부분은 영토의 4분의 1에 해당하였고, 이 부분은 소련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이었다. 동쪽의 영토는 태평양에,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 달하였다. 아시아 부분의 인구는 유럽 부분 보다 적었다. 소련의 영토는 동서로 1만 킬로미터에 11개의 시간대에 걸쳐 있었으며, 4개의 기후대(한대 기후, 냉대 기후, 온대 기후, 건조 기후)가 걸쳐 있었다.
소련의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길어 약 6만 킬로미터에 달하였는데, 이는 지구를 1바퀴 반 돌 수 있는 길이이다. 국경선의 길이 중 3분의 2는 해안선이 차지하고 있었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국경은 아프가니스탄, 중화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헝가리, 이란, 몽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르웨이, 폴란드, 루마니아, 터키와 접하였다. 해상 국경으로는 베링 해협으로 미국의 알래스카와 마주보고 있었으며 소야 해협을 두고 일본의 홋카이도와 접해 있었으며, 북극해를 두고 덴마크의 그린란드 및 캐나다와 접했다.[1]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은 러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혁명 이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 정부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붕괴하였고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지만 볼셰비키는 백군을 쳐부수고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통합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하였다.
소련의 초대 지도자 레닌은 1924년 1월 21일에 사망하였고, 스탈린이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소련은 스탈린의 경제 정책과 강력한 정치 억압을 통하여 거대한 규모의 산업화를 이루어 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인 대조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소련은 1945년 5월 9일 대조국전쟁에서 승리하였고 1945년 8월 대일전에 참전하여 승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이후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를 이끌어 가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소련과 중앙유럽 위성 국가들은 서방 세계에 맞서 냉전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졌다. 1986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소련의 경제를 중흥시키려 하였다.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가 소련 국민들의 반발로 실패한 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위키백과옮김===
러시아의 역사
☞시기
초기 동슬라브족 선사-8세기
불가르족 7-13세기
하자르족 7-10세기
루시 8-9세기
키예프 공국 9-12세기
블라지미르-수즈달 공국 12-14세기
노브고로드 공국 12-15세기
몽골 침략기 1220-1240년대
몽골 점령기 1240-1480년대
모스크바 대공국 1340년-1547년
모스크바 러시아 1547년-1721년
러시아 제국 1721년-1917년
소비에트 러시아 1917-1922년
소련 1922-1991년
1917-1927;(러시아 혁명 · 러시아 내전)
1927-1953 · 1953-1985 · 1985-1991
러시아 연방 1991년-
러시아의 초기 역사는 다른 많은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주민족과 고대왕국의 역사이다. 사실상 초기의 러시아는 지금의 '러시아'와는 달랐지만, 여러 도시가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점차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9세기 초반 바이킹족(Varangians)으로 알려진 스칸디나비아인이 발트해를 건너 동유럽에 정착했다. 바이킹족의 지도자는 862년에 자신의 민족을 볼호프 강변의 노브고로드 시로 이끌고 간 전설적인 용사 루릭(Rurik)이었다. 루릭이 무력으로 그 도시를 점령했던지 아니면 그 도시의 지배자로 자연스럽게 추앙되었던지 간에 그는 그 도시를 크게 발전시켰다. 루릭을 계승한 올레그(Oleg)는 노브고로드의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시켰다. 882년에 올레그는 드네프르 강을 따라 5세기 경에 발생한 슬라브족의 도시인 키예프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여 키예프 루시를 건설했다. 올레그의 키예프에 대한 지배권 획득은 그 지역에 최초의 통일된 왕조국가를 확립시켰다. 키예프는 스칸디나비아와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키예프 루시 간의 무역로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후 300년 동안 번영했다.
989년에 이르러 올레그의 손자인 블라디미르 1세가 지배하는 왕국은 남쪽으로 흑해, 코카서스 산맥, 볼가 강 하류에까지 확대되었다. 국교를 정하기로 한 블라디미르 1세는 여러 가지 종교를 신중하게 고려한 후 그리스정교로 결정하고는 콘스탄티노플 및 서유럽 국가와 동맹을 맺었다. 블라디미르 1세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이유는 음주를 금지하는 종교 하에서는 자국민이 생활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블라디미르 1세는 야로슬라프 현제(賢帝)로 계승되었으며 이때 키예프 루시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야로슬라프는 법전을 편찬하고 다른 국가와 유리한 동맹을 체결하고 예술을 장려하는 등 지혜로운 군주가 하는 각종 과업을 수행했다. 야로슬라프는 자신의 왕국을 자식들에게 분할하여 서로 협력하여 발전을 꾀하도록 했지만, 1054년 그가 죽은 후 키예프 루시는 상속제도를 둘러싸고 격렬한 분쟁이 휘말렸다.
야로슬라프가 죽은 지 불과 수십 년 만에 키예프 루시는 내분에 휩싸였으며 지역별 세력중심지로 분할되었다. 쿠만족(Cumans)[키프차크`(Kipchaks)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의 침략과 약탈행위로 내분은 더욱 심화되었다. 지역 군주인 유리 돌고루키가 모스크바와 네글리나 강의 합류점을 내려다보면서 언덕 꼭대기의 사냥터에서 연회를 베풀었던 것이 이 당시(정확하게는 1147년)였다. 한 연대기 작가가 그 연회를 기록하여 당시 조그마한 거류지에 불과했던 모스크바에 대한 최초의 인상을 남겼다.
몽고의 침략과 모스크바의 등장
키예프 루시는 13세기까지 어렵게 버텨 나갔지만 결국 몽고의 침략에 의해 붕괴되었다. 1237년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칸은 볼가강 하류의 수도(현재의 카잔)로부터 키예프 루시를 침략했다. 그 다음 3년에 걸쳐 몽고(혹은 타타르)는 키예프 루시의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를 제외한 모든 주요 도시를 파괴했다. 지역 영주가 폐위되지는 않았지만 타타르 국가에 정기적인 공물을 바쳐야 했다. 이 기간 동안 러시아는 서유럽으로부터도 침략을 받았는데, 먼저 스웨덴 민족으로부터(1240년) 그 다음엔 리보니아족의 군사동맹으로부터(1242년) 침략을 받았다. 결국 양 침략세력은 노브고로드의 영주이자 러시아의 위대한 용사인 넵스키에 의해 패배했는데, 그의 이름은 네바 강변에서 스웨덴 민족에 승리를 거둔 데서 유래되었다.
그 다음 몇 세기 동안 러시아에는 별로 특별한 사건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러시아는 타타르 민족이 요구한 공물로 인해 건물을 짓거나 전쟁을 준비하는 데 사용할 자금이 없었다. 타타르 민족이 남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북동쪽의 도시는 점차 더욱 커다란 영향력을 얻었다. 트베르 시에서 시작하여 14세기를 지나면서 모스크바 시가 그러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모스크바는 러시아 정교회 대주교의 자리를 부여받았으며 러시아의 정신적인 수도가 되었다.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모스크바는 타타르족을 직접 대적할 만큼 강력해졌으며, 1380년 모스크바의 영주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대담하게도 타타르족을 공격했다. 2년 후 타타르족의 보복으로 모스크바가 다시 지배되었지만, 쿨리코보에서의 승리는 즉각 그를 대중적인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1세기 후인 1480년에 이르러서야 모스크바는 타타르족의 지배를 벗어날 만큼 강력해졌다. 그 당시의 지배자는 이반 대제로 더욱 잘 알려진 이반 3세였다. 이반 3세는 모스크바의 주변 도시를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타타르족에 대한 공물을 중지시키고 전체 국가를 효과적으로 지배했다. 그러나 그의 손자인 이반 4세(이반 뇌제)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러시아는 통일된 국가를 형성했다.
1533년 이반 뇌제는 3살의 나이에 아버지인 바실리 3세를 계승하여 모스크바의 대공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섭정을 행했으며, 이때 이반 뇌제는 8살이었다. 어린 대공은 그 다음 8년 동안 섭정을 위해 선출된 여러 명의 귀족을 두어야 했다. 1547년 마침내 그는 차르의 칭호를 채택하고 귀족의 세력을 물리쳤으며, 군대를 재편하고 타타르족을 쳐부술 준비를 갖추었다. 1552년 그는 카잔을 정복하고 수중에 넣었으며,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도 정복함으로써 세력을 잃어가고 있던 황색유목민족을 격퇴했다. 이반 뇌제의 군사행동은 러시아의 팽창을 위한 새로운 거대한 영지를 개척했으며, 그가 지배한 시기에 시베리아 정복과 식민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반 뇌제는 지배 초기에는 전혀 폭정을 실시하지 않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의 성격은 난폭해졌으며 1560년대에 이르러 귀족에 대해 소름끼치는 행동을 시작하여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귀족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했다. 1581년에는 화가 난 나머지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를 쇠몽둥이로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
1584년 이반 뇌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표도르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표도르는 독재적인 지배에는 전혀 맞지 않는 성품을 갖고 있었다. 표도르는 왕국 대부분의 관리권을 자신의 매부인 보리스 고두노프에게 맡겼으며, 고두노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왕위계승권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1591년 그는 고대 도시 울리치에서 표도르의 동생 드미트리를 살해했는데, 오늘날 그 장소는 '피의 상트 데메트리우스 교회'(Church of St. Demetrius on the Blood)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1598년 표도르가 죽고 나서 고두노프는 차르로 등극했지만 그의 통치는 결코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폴란드에서 드미트리라고 하는 한 왕족이 성장하여 1604년에 러시아를 침략했다. 다음 해에 고두노프가 갑자기 죽었으며 '고난의 시기'(Time of Troubles)가 시작되었다. 다음 8년 동안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가짜 드미트리는 모두 침략한 폴란드 군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왕위를 요구했다. 마침내 1613년 폴란드 군대는 모스크바에서 쫓겨났으며 귀족계급은 만장일치로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로 선출했다. 로마노프 왕조는 그 때부터 러시아 혁명이 차르 국가를 종식시킬 때까지 304년 동안 러시아를 지배했다.
➡로마노프 시대
첫 수십 년 동안 로마노프 왕조는 러시아의 현상유지에 만족했다. 그들은 계속하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지만, 당시 유럽 전역에서 진행되었던 경제-정치분야의 급속한 변화를 러시아에 도입하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표트르 대제에 이르러서야 러시아를 서구화하는 개혁이 시작되었다.
➡표트르 대제
표트르는 막내였으며 두 번째 부인의 아들이었는데, 이 중 어느 것도 별로 내세울 게 없었다. 또한 차르 알렉시스는 첫째 부인에게서 세 명의 아이를 두었는데, 허약한 페오도르, 소피아, 그리고 약간 저능한 이반이 그들이었다. 1676년 알렉시스가 죽고나서 페오도르는 차르로 등극했지만, 병약한 체질로 인해 1682년 젊은 나이에 죽었다. 표트르 어머니와 황실이 이반을 제쳐두고 표트르를 차르로 선출함으로써, 10살 된 소년은 유년기를 보낸 시골영지 콜로멘스코예를 떠나 크렘린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표트르가 차르에 오르자마자 이반의 가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크렘린 친위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표트르는 자신의 측근과 가족이 거대한 성의 꼭대기에서 친위대가 치켜든 창 끝으로 던져지는 끔찍한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그 쿠데타의 결과 차르의 지위는 약화되었으며, 표트르와 이반은 이반의 누나이자 표독스런 소피아의 섭정을 받게 되었다. 표트르는 모스크바에서 편안한 시절을 보내지 못했는데, 그 때문에 일생 동안 그 도시를 싫어하게 된 듯하다.
소피아가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표트르는 다시 콜로멘스코예로 보내졌다. 표트르는 그곳에서 군사훈련과 공격기술을 비롯해 전쟁게임에 대한 취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유럽병사로 이루어진 소규모 집단과 가깝게 지냈으며, 그들로부터 서유럽의 전략과 전술을 익혔다. 하지만 소피아뿐만 아니라 크렘린 친위대는 이러한 사실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1689년 표트르가 성인이 되자마자, 소피아는 또 다른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쿠데타가 실패로 끝났으며 그녀는 노보제비치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6년 후 이반이 죽은 후 표트르는 독자적으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표트르는 모스크바에서 직접 통치하지 않고 장기간의 유럽여행에 나섰다. 그는 거기서 약 2년을 보내면서 여러 왕들을 만나 외교를 행했을 뿐만 아니라 신분을 숨기고 여행을 했는데, 네델란드에서는 선박의 목수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서유럽의 산업기술과 국가통치에 관해 상당히 많은 지식을 축적하면서 러시아에 근대화와 서구화를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1698년 아직 여행 중에 있었던 표트르는 크렘린 친위대가 노보제비치에 감금된 소피아의 충동으로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했다. 표트르는 여행을 중지하고 돌아와 유럽식으로 훈련된 자신의 군대로 크렘린 친위대를 결정적으로 물리쳤으며, 살아남은 반란군에 대대적인 사형집행을 명령하고는 소피아가 감금된 수도원의 창문 밖에 내걸도록 했다. 소피아는 그것을 보고 미쳐 버렸다. 그 다음날 표트르는 러시아를 서유럽의 이미지로 개조하는 프로그램에 착수했으며, 스스로 귀족신분을 나타내는 턱수염을 깍아 버렸다.
표트르의 러시아 귀환과 권력 장악은 러시아에 태풍과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모든 남자에게 전통적인 모스크바식 복장을 금지했으며, 징병제도를 도입하고 기술학교를 설립하고 교회제도(church patriarchy)를 자신에게 적합한 종교회의(holy synod)로 대체했으며, 알파벳을 간소화하고 재판절차의 개선을 시도했으며, 책력을 바꾸고 자신의 지위를 차르에서 황제(Emperor)로 바꾸었으며, 수많은 개혁조치와 제한조치 및 새로운 구상을 도입했다(이러한 모든 조치는 보수적인 성직자에게 표트르가 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시켰다). 1703년 표트르는 자신의 개혁 가운데 가장 극적인 조치에 착수했다.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작정하고 핀란드 만에 인접한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9년에 걸쳐 엄청난 인명과 물질적 비용을 들여 상트 페트르부르크 시가 건설되었다.
표트르는 자신의 지배기간 내내 현상유지를 원하는 보수적인 성직자와 귀족계급으로부터 커다란 저항을 받았다. 표트르의 정책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비판자 중 한 사람이 아들인 알렉시스였는데, 그는 자연히 반대파의 음모의 초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사실상 알렉시스는 그러한 위치를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1716년에 그는 황제 승계권을 포기하고 비엔나로 피신했다. 다른 사람을 거의 믿지 못했던 표트르는 알렉스가 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피신한 것으로 의심했다. 알렉스를 설득하여 귀국시킨 후 표트르는 자신의 아들을 체포하여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했다. 1718년 알렉스는 처형 판결을 받았지만, 고문의 상처로 인해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죽었다.
표트르는 1725년에 죽었지만, 그는 러시아의 역사에서 가장 논란을 일으킨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비록 그는 러시아를 근대적인 유럽의 새로운 강력한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 힘썼지만, 그의 개혁이 일반대중의 생활을 크게 개선시켰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가 러시아의 군대와 행정구조를 근대화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양 개혁에 필요한 자금은 소농의 희생을 통해 조달되었으며 소농은 어쩔 수 없이 점차 농노로 전락했다. 표트르가 죽은 후 러시아는 아주 짧은 시기를 집권한 여러 명의 지배자를 거쳤는데, 그들 중 누구도 오랜 인상을 남길 만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표트르 개혁의 많은 부분은 러시아에 뿌리를 내리는 데 실패했으며, 러시아를 유럽의 거대한 강국으로 만들려고 한 그의 희망은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에 이르러서야 달성되었다.
➡예카테리나 대제
1761년 12월 25일 표트르 대제의 손자인 표트르 3세가 차르로 즉위했다. 그 때 표트르 3세의 나이는 34살이었는데, 그의 생활은 방탕했을 뿐만 아니라 분별력이 결여되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인 예카테리나와 자리를 함께 갖지 않았는데, 예카테리나는 한 살이 어렸지만 훨씬 더 분별력이 있었으며 방탕하지도 않고 청교도적이지도 않았다. 표트르 3세가 즉위했을 때 그들 부부의 결혼기간은 18년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10대에 러시아 궁중에 새로 들어왔으며 결혼 후 몇 년 동안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762년 이후 그들의 관계는 오랫동안 명목상으로만 유지되었다. 표트르 3세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광적으로 변한 반면, 예카테리나는 지성과 인간적 매력을 갖춘 완벽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들이 생활한 궁중의 환경은 이전보다 훨씬 더 국제적인 분위기를 띠었지만, 언제나 정치는 방심할 수 없는 대단히 중대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제 모든 사람들은 예카테리나가 더욱 유능한 정치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해 여름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간의 충돌은 대단히 심각했다. 겨우 6개월을 지배하는 동안, 표트르는 외교적인 거드름으로 사실상 왕실 전체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며 교회에 대한 적대감과 러시아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로 대다수 대중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그에 따라 예카테리나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었으며 표트르에 대해서는 미심쩍어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6월 28일 이른 아침, 예카테리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외곽의 표트르호프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떠나 그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모든 것이 미리 준비된 것이었으며, 그녀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지지군대와 대중은 환호를 보냈다. 다음날 아침 대세가 기울었음을 파악한 표트르 3세는 미리 준비된 퇴위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주일 후에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예카테리나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로 떠올랐다. 그녀는 표트르 대제가 착수한 러시아 국가의 개혁을 이어갔으며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예카테리나의 외교술은 많은 특출한 외교가를 배출한 그 시대에서도 놀라운 것이었다. 동-중부 유럽을 포함하여 유럽의 사건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예카테리나는 또한 예술에 대한 열광적인 후원자였다. 그녀는 에르미타쥐 박물관을 건립하고 러시아 전역에 건물을 설립하여 학술기관(아카데미), 저널출판, 도서관으로 사용하게 했으며, 프랑스의 백과사전학파인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등과 서신을 교환했다. 사실 예카테리나는 많은 연애상대를 가졌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신임 받는 조언자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그녀가 지나친 성적 욕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얘기들은 별로 근거가 없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예카테리나는 눈에 띄게 보수주의적으로 변했으며 자신의 정책에 대한 비판에 점점 적대적으로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부터 죽을 때까지 지배 초기의 여러 가지 자유주의적 개혁을 파기했다. 이에 따라 결국 예카테리나도 표트르 대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농민의 상태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1796년 예카테리나 대제가 죽고 나서 아들인 파베르 1세가 계승했다. 사실상 예카테리나는 파베르 1세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그녀의 감정은 그대로 아들에게 표출되었다. 불과 5년 간 지속된 파베르 1세의 지배 기간은 누가 보더라도 철저한 불행이었다. 그가 받은 가장 주목할 만한 유산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뛰어나면서도 비극적인 엔지니어 성(Engineer's Castle)이었다. 파베르 1세는 아들인 알렉산드르 1세로 계승되었는데, 그는 나폴레옹이 침공했을 때 러시아의 군주였던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스스로의 파멸을 불러온 러시아 침공을 시작했는데, 그 일은 파괴적인 결과를 기록한 전쟁 역사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실상 대륙 유럽 전체는 나폴레옹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러시아 침공은 차르인 알렉산드르 1세를 다시 항복하게 만들어 4년 전에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강요한 조약에 따르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유럽의 모든 속국에서 거의 50만 명의 병사를 모아 어느 때보다 가장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진격했다. 마샬 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 군대는 직접적인 교전에서 프랑스 군대를 격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없었다. 그 대신에 그들은 후퇴하면서 토지를 황폐화시키고 프랑스 군대의 측면을 쉴새 없이 괴롭히는 전략적 후퇴라는 방어적인 작전을 이용했다. 여름이 지나면서 나폴레옹의 대규모 보급로는 훨씬 더 취약해졌으며 군대의 사기는 저하되기 시작했다. 9월에 이르러 프랑스군은 치열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한 채 피로와 굶주림, 병영이탈, 러시아 군대의 습격 등으로 그 규모가 2/3 정도로 감소되었다.
그렇지만 러시아 군대가 주요한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면 모스크바는 수 주일만에 나폴레옹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다. 차르는 교전을 주장했으며, 9월 7일 겨울이 다가오고 프랑스 군대가 모스크바에서 70마일(110km) 떨어진 곳으로 접근하자 양 군대는 보로디노 전장에서 마주쳤다. 그 날의 전투에서 10만 8천명이 죽었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는 못했다. 쿠투조프는 더 이상의 모스크바 방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모스크바 시민에게 대규모의 갑작스런 이주를 재촉하면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9월 14일 나폴레옹의 군대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도시는 텅 빈 상태였으며 보급품은 떨어졌고 다가오는 겨울을 견딜 방한수단은 부족했다. 문제를 훨씬 더 악화시킨 일은 그 날 밤 도시에 화재가 발생하여 다음 날 프랑스 군대는 추위를 피할 은신처조차 찾기 힘들게 된 것이었다.
알렉산드르 1세와의 협상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자, 나폴레옹은 군대에 본국으로 행군을 시작하도록 군대에 명령을 내렸다. 남쪽 루트는 쿠투조프 군대가 봉쇄했기 때문에(그리고 프랑스 군대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형편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퇴각은 멀고도 황폐화된 침략루트를 다시 거슬러갔다. 퇴각을 위해 10월 중순까지 기다렸기 때문에, 프랑스 군대는 지칠대로 지쳤으며 이윽고 유달리 이르고 특히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었다. 기온은 곧 결빙점 훨씬 아래로 떨어졌으며, 식량은 거의 바닥났고 그 행군은 500마일에 이르렀다. 코사크 병사들이 패잔병과 고립된 부대를 공격했으며, 결국 1만 명만이 살아남았다. 이 전쟁은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러시아로 하여금 나폴레옹 이후 유럽에서 주요 강국의 지위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 러시아는 더욱 강력한 국가로 등장했지만, 다른 한편 러시아의 내부적인 긴장은 점점 증가되어 갔다.
➡러시아 혁명의 과정
이반 뇌제의 지배시기 이래 러시아의 차르는 대단히 일관되게 정치권력을 귀족으로부터 빼앗아 자신의 수중에 집중하는 정책을 펼쳤다. 러시아 국가에서 중앙집권화는 대개 한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단순히 귀족으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반대파를 억누르든지(이반 뇌제가 이 방법을 아주 잘 사용했다) 혹은 귀족들의 감소된 지배권한을 보상하기 위해 토지 및 토지에 딸린 농민에 대한 더욱 커다란 권한을 귀족들에게 부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가운데 후자의 방법으로 알려진 농노제는 이반 뇌제가 그 제도를 만들어낸 이래 러시아에서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예카테리나 대제에 이르러 러시아의 차르는 사실상 귀족에 대한 전제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사실상 차르는 농노에 대한 전제적인 권력을 귀족들에게 부여함으로써 이러한 권력을 사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차르와 귀족간의 이러한 암묵적인 관계는 공격을 받게 되었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일으킨 일단의 개혁적인 젊은 장교들은 니콜라스 1세의 즉위를 막고 러시아에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병력을 동원했다. 그 시도는 전적으로 실패했으며 니콜라스 1세는 유럽에서 가장 반동적인 군주가 되었다. 니콜라스 1세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2세는 전임자와는 대조적으로 개혁을 받아들이는 듯이 보였다. 1861년에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를 폐지했지만, 사실상 농노해방은 농민의 상태에 어떠한 중대한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다. 러시아의 산업화가 더욱 진행됨에 따라 정치체제는 훨씬 더 커다란 변형을 겪었다. 더욱 많은 자유를 얻기 위한 하층계급의 시도는 무정부 상태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켰으며, 따라서 정치체제는 대단히 보수적인 상태로 유지되었다. 러시아가 더욱 산업화되고 영토가 확대되고 훨씬 더 복잡해짐에 따라 전제적인 차르 지배체제의 부적절성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20세기에 이르러 중대한 격변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한편 러시아의 영토와 세력은 19세기에 걸쳐 크게 팽창했다. 러시아의 국경은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에까지 이르렀으며 태평양 해안의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러시아는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와 아더항을 건설하여 상업에 유리한 통로를 개척했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1891-1905년에 건설)의 건설은 유럽쪽 러시아 영토와 새로운 동쪽의 영토를 연결시켰다.
1894년 니콜라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유능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그의 신하들은 거의 한결같이 반동적이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러시아가 점점 더 극동으로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일본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일이었다. 1905년 1월에 일본이 공격을 개시하여 러시아는 잇단 패배를 겪었으며, 이로 인해 이미 평판을 잃은 니콜라스 2세는 거의 모든 지지세력을 상실했다. 니콜라스 2세는 헌법과 의회(두마)를 도입하는 등 개혁세력에 대한 양보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개혁운동의 힘은 러시아의 정치에 들어온 새롭고 강력한 세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주요 서구도시의 산업화와 바투 석유지대의 개발은 러시아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집중시켰으며, 그들은 곧 지역정치평의회 즉 소비에트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스 2세로 하여금 1905년의 개혁조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것은 대부분 사회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통합한 소비에트 세력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이 종결된 후, 니콜라스 2세는 새로운 자유를 역전시키려고 했으며 그의 정부는 전보다 더욱 반동적으로 되었다. 대중의 불만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니콜라스 2세는 강경한 진압을 통해 지배를 유지했지만 대중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12년 사회민주당은 급진적인 볼셰비키와 상대적으로 온건한 멘셰비키라는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1914년 또 다른 불운한 전쟁이 다시 한번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러-일 전쟁은 커다란 희생을 초래한 인기 없는 전쟁이긴 했지만, 적어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러시아 서쪽의 인접국가에서 일어났다. 군사적으로나 산업적으로 준비를 갖추지 않았던 러시아는 패배를 경험하면서 사기를 잃었으며 심각한 식량부족을 겪고 곧 경제붕괴를 경험했다. 1917년 2월에 이르러 노동자와 병사들의 불만은 혁명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했다. 당시 페트로그라드라고 불린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그곳의 주둔군은 반란을 일으켰다. 노동자 소비에트가 결성되었으며 두마는 수도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수립을 승인했다. 니콜라스 2세가 지지를 상실했다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으며, 3월 2일 그는 자신의 동생 미하일에게 넘겨주기로 하고 왕위를 포기했다. 바보가 아닌 미하일은 다음날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두마의 승인을 받아 결성된 임시정부는 온건한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질서회복을 주장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개혁을 약속했다. 그러나 두마는 전쟁의 즉각적인 종결이라는 소비에트의 가장 긴급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했다. 그 후 9개월 동안 (처음에는 르보프 왕자가 그 다음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끌었던) 임시정부는 권력을 확립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볼셰비키는 불만에 가득 찬 소비에트로부터 점점 더 많은 지지를 확보했다. 10월 25일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는 겨울궁전을 밀고 들어가 케렌스키 정부를 물러나게 했다.
볼셰비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지만 전국적인 통제권은 확보하지 못했다. 그들은 (비록 아주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러시아를 전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전역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볼셰비키가 1920년에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기까지 10월 혁명 이후 3년 동안 러시아는 내전으로 황폐화되었다.
➡소비에트 시대
소비에트가 지배한 최초의 몇 년 동안은 유례 없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의 분출로 특징지어지는 시기였다. 내전의 시기 동안 볼셰비키가 경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유지했지만, 내전이 종결된 후 레닌은 시장경제로의 부분적인 복귀가 지난 3년 간의 파괴로부터 러시아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NEP)은 상대적인 번영의 시기를 가져옴으로써 미숙한 소비에트 정부로 하여금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고 인프라를 재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이 시기에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풍조가 절정에 달함으로써 구성주의(Constuts), 미래주의(Futuris), 절대주의(Suprematism)라는 새로운 진보적인 사조가 발전한 시기이기도 했다. 러시아는 여전히 수많은 도전에 직면했지만 낙관주의와 기회에 대한 적극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1924년 레닌의 죽음은 공산당 내에서 권력을 둘러싼 광범하고 극히 분열적인 투쟁으로 이어졌다. 1920년대 후반 스탈린이 승자로 등장했으며, 그는 즉각 러시아를 아주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NEP는 중단되었으며 상부에서 명령하는 경제계획으로 대체되었다. 농업용 토지는 집산화되어 국가가 운영하는 대규모 농장으로 바뀌었다. 산업발전은 비정상적인 속도로 추진되었으며 생산활동의 중심은 거의 전면적으로 소비재 부문에서 자본설비 부문으로 전환되었다. 예술과 문학은 훨씬 더 엄격한 통제 하에 놓여졌으며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진보적인 에너지는 장중한 권위를 띤 소비에트 리얼리즘으로 대체되었다. 종교는 극심하게 억압되어 교회는 폐쇄되거나 파괴되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다른 용도로 전환되었다. 스탈린은 러시아 내의 당 정책에 대한 모든 반대파뿐만 아니라 당 내의 모든 반대파를 숙청했다. 1930년대 말, 소연방은 예전의 어느 때보다 대중의 삶이 더욱 엄격하게 규제되는 국가가 되었다. 이제 실험은 끝났으며 통제가 일상의 규칙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소연방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정치적 숙청은 군대 내의 많은 유능한 지도부를 상실하게 만들었으며, 민수생산에서 군수생산으로의 산업생산 전환은 느린 속도로 이루어졌다. 독일과의 불가침조약(1939년)은 잠시동안 히틀러의 침략을 막는 데 기여했지만, 1941년에 소비에트는 갑작스런 공격을 받았다. 그 해 말에 이르러 독일군은 서쪽의 소비에트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라고 불렸다)를 포위했으며, 모스크바에서 불과 수백 마일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러시아는 치열한 반격으로 독일군이 수도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했지만, 1942년 여름 독일군은 볼가의 철도 중심지인 스탈린그라드와 전략적 요충지인 코카서스 석유지대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기 위해 남쪽 전선에서 새로운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의 군대는 압도적인 수적 열세와 뒤떨어진 무기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독일군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다. 결국 11월에 러시아 군대가 독일군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전쟁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 때부터 줄곧 러시아 군대는 공세를 유지했다. 1944년에 그들은 독일군을 폴란드로 몰아냈으며, 1945년 5월 2일 마침내 베를린이 함락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연방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친 후 전쟁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국가로 등장했다. 러시아는 엄청난 참화를 겪고 2천만 명 이상의 인명을 잃었지만 상당한 영토를 확보했으며 미국과 나란히 세계의 양대 강대국 중 하나로 부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전반적인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공업생산은 또 다시 중공업에 집중되고 농업의 실패는 광범한 기근을 유발했으며 정치적 자유는 훨씬 더 제약되고 또 다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었다. 냉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소연방 자원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군사적 용도로 돌려졌으며 생활조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스탈린은 1953년 뇌출혈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스탈린이 죽자마자 그가 시행한 많은 억압적인 정책은 철회되었다. 흐루시초프의 지배 하에서 정치적 통제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반대파가 공산당 내에서 점차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1964년에 그는 축출되었다. 러시아의 역사적 전통과는 달리 흐루시초프는 조용히 물러날 수 있었다. 흐루시초프에 이어 브레즈네프는 1970년대 내내 소연방 공산당(CPSU) 서기장으로서 소비에트를 지배했다. 그의 집권기간은 국내적 안정과 공세적 대외정책을 분명하게 강조하는 시기로 특징지어졌다. 브레즈네프 집권기간 동안 러시아는 십 여 년에 이르는 정체의 시기를 겪었다. 경직된 러시아 경제는 서서히 쇠퇴해 갔으며 정치적 분위기는 점점 더 비관적으로 변해갔다. 1982년 브레즈네프가 죽은 후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의 지위를 계승했으며 그 다음에는 체르넨코로 이어졌는데, 이들 양자는 중대한 변화를 시도하기에 충분한 기간 동안 생존하지 못했다. 1985년 3월 고프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을 때에야 개혁에 대한 긴급한 필요가 현실화되었다.
소비에트의 개혁에 고르바초프의 주장은 글라스노스트(공개, 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구조재편)라는 잘 알려진 두 가지 개념으로 집약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신사고를 표방하면서 사회적-경제적 통제를 완화하는 등 전반적으로 신선한 분위기를 이끌면서 소비에트 경제를 재생시키려 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관료주의의 과감한 청산과 부패의 철저한 감시를 강조하면서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그러나 1986년 4월 소연방 정부가 체르노빌에서 발생한 악명 높은 핵사고(러시아의 광범한 지역을 방사능 물질로 오염시킨 핵발전소의 폭발)를 수일 동안 숨겼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글라스노스트는 신뢰성을 상실했다. 체르노빌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고르바초프는 모든 신문기사에 대한 통제를 철폐하는 조치를 내놓았다. 이 때부터 소비에트에 신선한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수십 년에 이르는 소비에트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각종 문제가 공개적인 대중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빈곤, 부패, 자원의 비효율적인 관리, 아프간 전쟁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그 외의 각종 문제가 들추어지고 불만이 제기되었다. 모스크바의 새로운 지도자인 옐친을 비롯해 급진적인 개혁파 지도자가 등장했으며 사하로프와 같은 유명한 반체제인사가 처음으로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소연방 정부는 각종 비판의 표적이 되었지만, 더 이상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으며 사태의 흐름을 그대로 수용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1989년 초 소비에트 군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1989년 봄에는 1927년 이래 최초로 인민대의원대회 대의원에 출마한 복수의 후보에 대한 선택을 허용하는 공개적인 선거가 실시되었다. 동유럽 여러 국가의 정부들도 쇄도하는 대중적인 비판에 직면하면서 잇따른 혁명으로 차례로 붕괴했으며 베를린 장벽으로 그 절정에 달했다.
1990년 소연방은 스스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각 구성공화국들은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화국에서는 옐친이 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 움직임을 주도했다.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여 공산당이 노동계급의 대표기관이라는 전통적인 주장에 타격을 가했다. 정부와 당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경제상황은 악화되고 식량부족은 심각해졌으며 범죄율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고르바초프는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대중의 요구와 엄격한 통제의 재실시를 주장하는 당의 요구 사이에서 시달리면서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1991년 여름 급진적 개혁운동은 정부를 공개적으로 무시할 만큼 강력해졌다. 고르바초프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강화된 반면, 옐친은 6월의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8월 18일 당의 보수파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모험을 감행했다. 국방장관 야조프와 부통령 야나예프가 이끄는 세력은 고르바초프를 크리미아의 휴양별장에 억류했다. 다음날 아침 쿠데타 지도자들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고르바초프가 사임했다고 발표했다. 신 정부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었지만 옐친과 각 공화국 대통령이 이끄는 엄청난 대중적 저항에 직면했다. 결국 3일 후 쿠데타 기도는 좌절되고 고르바초프는 복위되었지만 이미 그의 지위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 해 말 소연방은 투표를 통해 소멸되었으며 독립국가연합(CIS)으로 대체되었다. 마침내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소연방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며, 12월 31일 자정 크렘린 꼭대기의 소비에트 국기는 러시아의 삼색기로 바뀌었다.
러시아의 변천사
►고대의 러시아
러시아라는 지명이 역사상 나타나기 훨씬 전에 중앙아시아, 트랜스코카서스, 흑해 연안 등지에는 발달된 문명이 존재하였다. 러시아의 초원지대에서는 사르마티아인, 고트족, 흉노족, 불가족, 아바르족, 카자르족 등이 차례로 지배하였으나 러시아역사의 주인이 되지는 못하였다. 반면 러시아의 삼림지대, 즉 동북부지대에 살고있던 슬라브족이 서쪽 유럽으로 이동한 서슬라브족과 동쪽으로 이동한 동슬라브족이 동서방향으로 확장하면서 오늘날 러시아의 주류민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8세기 경 동슬라브족은 드네프르강과 볼호프강 및 볼가강 상류지역으로 유입하여 정착하고 있었으며, 작은 도시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9세기 경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바이킹의 후손인 바랑고이(Varangian)족이 이 지역으로 확장해 오게 되었고, 이들은 슬라브족을 자주 침탈해오는 유목민인 카자르족을 막아주기도 하면서 북쪽의 노보고르드(Novgorod)와 남쪽의 키예프(Kiev)를 중심으로 분리하여 슬라브족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바랑고이족은 서서히 슬라브 원주민과 동화되어 나갔다. 부족 형태 및 대륙 이동 시기를 거쳐온 슬라브인들은 882년 바랑고이족의 올레그(Oleg)에 의해 최초의 국가 형태인 키예프 공국으로 통합되어 역사에 등장한다.
►러시아와 키예프공국
키예프 공국은 뛰어난 전략적 위치를 바탕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 도시국가 형태의 주변 공국들을 지배하였다. 988년 키예프의 왕 블라디미르가 동방정교회로 개종한 후,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국가통합수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054년 키예프 왕가의 분열로 블라디미르·모스크바·노브고로트 등 여러 도시국가가 독립하면서 키예프 공국은 크게 쇠퇴하였다. 그후 키예프는 여러 이민족으로부터 침입을 받다가, 13세기 타타르인(몽골인)의 침입으
로 결정적으로 멸망하였다.
►몽고지배와 모스크바공국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몽고족의 징기스칸을 계승한 오코타이칸은 바투에 명하여 유럽 원정을 시작하였다. 바투는 1223년 아조프 근처의 칼카강의 전투에서 키예프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유럽으로 계속 진군하였으나 칸의 계승문제로 회군하였다. 그러나 1238년에서 1240년에 걸친 재침입으로 키예프 전역은 240년간에 걸친 몽고족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몽고의 지배는 각 지역의 통치자들이 공물과 세금을 바치고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몽고족의 지배는 그동안 러시아와 유럽과의 연결을 단절시켜 유럽의 시대적 흐름에 뒤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몽고의 지배하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한 것은 모스크바 공국이었는데, 모스크바 공국의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몽고의 침입 때 저항하지 않고 몽고의 지배를 인정함으로써 몽고로부터 대공의 칭호와 다른 공국들보다 월등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그는 공국 간에 대공위를 번갈하가면서 물려주던 키예프 공국의 전통적인 윤번제(로타제) 방식에 따르지 않고 부자세습을 함으로써 키예프 공국과 분리되고 특별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러시아가 몽고족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부터이다. 그는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과 혼인을 함으로써 비잔틴의 계승자이고 그리스정교의 수장임을 주장하였으며, 북쪽의 전통적인 공국인 노보고로드 공국을 지배하는 등 러시아 지역을 합병해나갔다. 마침내 1480년에는 몽고와의 주종관계를 공식적으로 종결하는 선언을 하였으며, 러시아 전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함으로써 전제군주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법률과 행정조직을 만들고 새로운 토지소유제를 도입하였으며 크레믈린 궁을 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다음 세대의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이 시기에 도입된 토지소유제는 제정러시아시대까지 사회적 불만의 근간이 되었던 농노제의 탄생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반 4세는 쯔아(짜르:Tsar)라는 전제군주의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귀족세력과의 권력투쟁을 위해 귀족회의체인 두마(Duma)에 대항할 성직자, 도시자본가 등으로 구성된 회의체를 만들면서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의 사후에 벌어진 왕위계승전, 농민반란으로 모스크바 공국은 위태로워진 상태에서 1610년 폴란드의 침입으로 망하게 된다. 폴란드는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등 위세를 떨쳤으나, 러시아인들은 국민군을 조직해 저항하면서 폴란드군을 물리치게 되며 로마노프 왕조를 열게 된다.
►로마노프왕조와 표트르대제
폴란드의 침입으로 모스크바 대공국이 무너지고 국민군과 젬스키 소보르(zemskii sobor)라는 국민회의체에 의해 새로운 왕으로 옹립된 인물은 이반 4세의 조카인 17세의 미카엘 로마노프였으며, 이때부터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된다. 국민군과 의회의 지지속에서 1613년에 출발한 로마노프왕조는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에 형성된 짜리즘 혹은 쯔아리즘(tsarism)으로 불리우는 전제군주 체제로 서서히 복귀하였으며, 1905년의 입헌군주제로 왕조를 유지하다가 1917년 소비에트정권에 의해 멸망하였다. 미카엘의 즉위 10년 뒤에는 왕조가 안정되면서 회의체의 대의기구의 역할이 약화되고 이후의 왕들은 전제권이 강화하면서 폴란드에 의해 점령당했던 영토를 회복하거나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로마노프 왕조의 4대 왕(짜르)인 표트르(피터) 대제(재위 1689~1725)는 대대적인 영토확장 정책을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대대적인 조선사업을 일으키고 크리미아 반도쪽으로 남진정책을 폈으나 성공적이지 못하였고, 이후에 북진정책을 실시하여 스웨덴을 굴복시키고 발틱연안으로 나아가 서구로 나가는 수로를 확보하였다. 그는 다시 서쪽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표트르 대제는 현재의 러시아 영토 대부분을 지배하는 최초의 러시아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1703년 네바강 하구 부근에 상트페테르부르크(후에 레닌그라드로 바꾼 후 최근에 다시 원래의 지명으로 복귀)를 건설한 뒤, 1713년 제국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한편, 표트르 대제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개혁을 단행하면서 유럽과 본격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가 외부세계로 진출하는 창구역할을 하였으며, 이곳을 통해 무역이 성행하였다. 또한 이 무렵부터 우랄산맥 일대에 철강과 군수공업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해군의 창설과 군의 근대화 및 행정조직개혁 등이 표트르 대제 때 이루어졌다. 그의 대외적인 개혁정책의 핵심은 서구화정책이었다. 대내적으로 1721년 러시아 정교의 교구를 폐지하면서 신성종교의회로 대체함으로서 교회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공고히하였다.
►로마노프왕조와 전제군주제
표트르 대제의 사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극도의 혼란상이 나타났고, 이 틈을 타서 귀족층은 그들의 힘을 확대하였고 농노제가 확대되는 등 농촌과 농민의 피폐가 더 심각하여 농민들의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남편인 표트르 3세의 왕위를 계승한 예카트리나 여제(재위 1762~1796)는 독일 출신으로, 당시 유럽의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재위 기간 중 푸카초프의 반란과 같은 대규모 반란을 겪었고 프랑스혁명과 같은 대변혁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수적인 전제정치를 강화하였다. 심지어 그는 국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을 사유화하고 농노로 전락시키기도 하여 농민들의 반감을 샀다. 대외적으로 표트르 대제의 팽창정책을 계승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렸는데, 1783년 크림반도를 장악하고 1791년 오스만투르크를 굴복시켜 흑해 캅카스 지방과 지중해로 진출하였고,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의 분할(1772년, 1793년, 1795년)에 참가하면서 서쪽으로 영토를 더욱 확장시켰으며, 동쪽으로도 우크라이나·시베리아·극동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의 알래스카까지 진출하였다. 19세기 로마노프 왕조는 알렉산드르 2세 전까지 강력해진 전제군주체제를 유지하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경찰을 만들고, 자문기구인 국가회의와 각료회의를 설치하였다. 그 시기 대외적으로는 나폴레옹 1세가 유럽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하였던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시키기 위해 베를린칙령(대륙봉쇄령)을 발표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에 대해 영국과의 통상을 금지하였다. 영국에 농산물을 수출하여 외화를 획득하였던 러시아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마침내 대륙봉쇄령을 깨뜨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을 촉발시켰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르 1세는 여세를 몰아 비엔나 회의를 주도하면서 핀란드, 베사라비아 등을 획득하면서 유럽에서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러시아에 자유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농노해방 등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유럽의 시민혁명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12월 장교단의 반란과 같은 소규모 반란들이 일어났다. 특히 니콜라스 1세 때는 러시아의 전제군주제와 농노제에 회의를 품는 지식인들이 늘어나고 서구의 합리주의에 근거하여 러시아의 낙후성에 대한 비판이 강해졌다.
►로마노프왕조의 몰락
19세기 중반에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러시아의 개혁은 크림전쟁의 패배로 인한 국제적인 위상의 추락에서 나왔다. 크림전쟁(1853-1856)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차지하여 흑해로의 진출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었으나,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는 프랑스·영국·이탈리아가 오스만투르크에 가세하면서 러시아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전쟁은 러시아의 패전으로 파리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종결되었지만 러시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이때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국내적으로 개혁과 근대화를 약속하였다. 그는 1861년 농노를 해방하고 1864년 지방자치기구를 설치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인 개혁은 오히려 농민이 더욱 지주에게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이러한 불만은 브나르도운동과 같은 농촌개혁운동이나 나로드니크(인민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싹트게 하였다.
전제군주제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음에도 이후의 러시아의 전제군주(짜르)들은 비밀경찰에 의한 감시와 통제, 암살과 같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지하 반체제 세력은 사회혁명당을 만들어 토지의 공동소유, 소수민족의 자치권 인정 등을 주장하였다. 러일전쟁패배(1905) 이후 전제군주제의 몰락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1905년 1월의 ''피의 일요일''사건은 시위·폭동·총파업 등 총체적인 혼란을 가져와 로마노프 왕조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였다. 니콜라스 2세는 1905년 ''10월 선언''을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인정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 형식상 입헌군주제이지만 여전히 황제는 절대권을 행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프랑스와 삼국협상을 맺고 있던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하였으나, 독일침입에 대비한 초토화작전의 실패로 경제가 파탄이 나고 반전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그 결과 국민적 불만이 폭발하여 일어난 1917년의 3월 혁명(구력 2월)으로 니콜라스 2세가 퇴위하면서 로마노프왕조는 막을 내린다.
►러시아의 소비에트정권 수립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패배로 인해 빈곤에 찌든 인민들의 시위와 파업이 계속되었다. 1917년 3월혁명(구력 2월)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자, 이에 대항하는 노동자와 병사들의 대표들로 구성된 볼셰비키혁명 세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마침내 1917년 11월 7일(러시아 구력으로 10월 25일)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파가 임시정부를 전복시키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성공하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레닌은 혁명 직후, 주요 산업 및 은행의 국유화, 신분제 폐지, 인민재판소 설치, 의회의 해산 등과 같은 혁명적 입법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신생 소비에트 정권은 부르주아와 지주 등 우익 백군(白軍), 즉 반(反)혁명세력의 봉기와 연합국(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의 개입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에 레닌은 모든 기업의 국유화·노동의무제·곡물징발제·식량배급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전시(戰時) 공산주의’ 정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소비에트 적군(赤軍)을 동원하여 내란을 종식시켰다.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농민의 반발과 경제복구의 실패 등으로 오히려 신생 소비에트 정권을 위기상황으로 몰았다. 이에 1921년 레닌은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lan:NEP)’을 채택하면서, 자유농 인정·농산물 판매 허용·사기업 인정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신경제정책으로 경제가 신속히 복구되었고 인민의 생활수준도 다소 향상되었다. 한편 레닌은 고전적인 마르크스의 명제에서 벗어나 러시아 한 나라만이라도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전개하였다. 이는 러시아혁명 후 주변국가에서 기대했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소비에트 정권의 안정 자체가 시급한 현실에 대한 전략적 대응으로서 나온 이념 수정이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과 일국 사회주의론은 격렬한 이념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당내 갈등의 와중에 22년 스탈린은 당 총서기로 임명되었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캅카스(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아르메니아)로 이루어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소련)’이 탄생되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을 거치는 동안 신생 소비에트 정권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서부지역의 상당한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때 상실한 영토는 1939~1945년에 소련이 회복하는 영토보다 많았다.
►스탈린시대의 러시아
러시아에서는 1924년 레닌의 사망으로 권력을 잡은 스탈린이 트로츠키파(派)를 숙청하고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그는 일국 사회주의 건설과 소련의 온전한 경제적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도시와 농촌에서의 자본주의적 요소를 제거하는 한편, 공업화와 농업근대화를 추구하였다. 이를 위해 사기업을 폐지하고 국가 주도의 제1차 5개년계획(1928∼1932)과 농업의 집단화가 실시되었다. 이는 신경제정책의 실질적인 폐지를 의미한다. 스탈린은 계속된 2·3차 5개년 계획기간에 중공업 중심의 공업화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또한 1937년에는 농업집단화를 완료하여 토지의 99%를 콜호스 소유로 만들었다.
한편 스탈린은 정치부문에서는 강권정치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확고히 하였다. 즉 1936년 스탈린헌법이라 부르는 소비에트 헌법을 제정하고, 공산당 지도자·인텔리겐치아·농민 등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전까지, 1924년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 1929년 타지키스탄, 1936년 키르키스스탄·카자흐스탄, 1940년 몰디비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가 각각 소련연방에 가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후로 스탈린은 매우 현실적인 외교노선을 취했다.
즉 1939년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중립을 취해, 서부 지역에서 상당한 영토를 얻었다. 그러나 1941년 독일이 침공하자 순식간에 모스크바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스탈린은 서부의 공장시설을 소개(疏開)하여 우랄·시베리아에 군수산업을 일으키는 한편, 새로운 군부대를 창설하여 반격하였다. 1945년 5월 독일의 패전 이후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벌여 북한과 사할린 및 쿠릴열도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였지만, 2000만 명 이상이 희생당하고 국가재산의 약 30%가 손실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은 전쟁 복구에 나서 1950년대 초에는 경제가 전전(戰前)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한편 종전 후 동유럽과 중국의 공산화가 진행되면서 세계는 미·소를 양극으로 하는 ‘냉전체제’로 전환되었다.
►브레주네프시대의 러시아
러시아는 1953년 스탈린에 이어 흐루쇼프가 집권하였다. 그는 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격하시키고, 여러 부문에 걸쳐 탈(脫)스탈린 정책을 전개하였다. 즉 스탈린 체제하 희생자들의 복권, 거주제한의 완화, 집단지도체제로의 전환, ''평화공존'' 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경제회복의 실패, 헝가리의 반소운동(1956) 등으로, 흐루쇼프는 결국 1964년 실각되고 대신 브레즈네프가 집권하였다. 브레즈네프는 사회주의 국가들과 유대를 강화하고 제3세계의 민족해방전쟁을 지원하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는 등 전세계에 걸쳐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비록 1968년 무력충돌로 발전하였지만 중국과의 화해를 시도하였고, 서독과 상호협력조약,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협정), 헬싱키협정 등 ''데탕트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화해무드는 사라지고 ''신(新)냉전'' 구조로 바뀌었다. 한편 브레즈네프의 집권기간에 나타난 경제성장률의 둔화, 소비재의 부족, 지나친 관료화, 과학기술의 비효율적 발전 등으로 그의 통치시대는 ''정체의 시대''로 평가받고 있다.
►고르바초프시대의 러시아
1982년 브레즈네프가 사망하자 집권한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 정권은 기본적으로 브레즈네프 노선을 답습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명에 그쳤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은 소련사회에 대변혁을 초래하였다. 그는 경제침체와 외교적 고립이라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내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대외적으로는 글라스노스트(개방)라는 실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국내 경제발전을 위해 국가통제체제를 완화하고 기업과 지방의 자율권을 확대하는 동시에, 시장경제제도 도입과 무역확대를 추진하였다. 또 관료주의의 축소, 권력의 지방분산, 인민대표회의 창설, 대통령제의 도입 등 정치개혁을 실시하였다. 1989년 최초로 다당제 선거가 실시되었고 1990년 고르바초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국내 개혁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외교적 부담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 군축회담, 동유럽 민주화에 대한 불개입, 미·소정상회담 등을 통해 새로운 데탕트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책은 외교면에서는 큰 성과를 얻었지만 국내정치 및 경제에서는 부분적인 성과에 그쳤다. 오히려 경제의 혼란과 연방 내 공화국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러시아의 연방 출범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 아래 소련 내 각 공화국의 독립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다. 1990년 2월 구소련 공산당 중앙위총회에서 ''인도적·민주적인 사회주의를 꾀하며''라는 정치강령을 채택함으로써 공산당 일당독재가 부정되고 복수정당제가 열렸으며 당과 국가를 분리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1990년 3월에는 임시 인민 대의원대회에서 헌법개정이 이루어지면서 대통령직이 신설되었고 고르바쵸프는 구소련 공산당서기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구소련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싹터온 개별 공화국의 민족주의와 자립요구는 러시아중심의 구소련공산당을 등식을 깨고, 1990년 6월 러시아가 독자적인 러시아 공산당을 출범시키고 주권선언을 하는 데 기여하였다. 당시 러시아 최고회의의장이었던 옐친은 제28차 공산당대회 토론회에서 확실한 복수정당제로의 이행, 당명의 변경 등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대회폐막 하루전인 1990년 7월 12일에 공산당 탈당을 선언하였다. 이 사태 이후 구소련연방의 해체가 촉진되었다.
1991년 6월 러시아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옐친은 공산당의 이념적 독재를 폐기하고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없애는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보수파 및 구소련 연방의 대통령인 고르바초프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1년 8월 19일 보수파의 쿠테타시도가 옐친에 의해 진압되면서 옐친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옐친은 연방정부를 무력화하고 러시아공화국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하여 1991년 10월 러시아공화국의 독자적인 경제개혁을 추구할 수 있는 3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들은 대통령 포고령이 헌법 및 기타 법률과 동등한 권한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무효화할 수 있도록 하여 옐친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확대시켰다. 또한 공화국 간 거래에 국제가격을 적용하고 연방에 대한 재정지원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연방정부를 기능불능상태에 빠지도록 하였다. 마침내 1991년 12월 11개 공화국이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에서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독립국가연합) 결성에 합의함으로써 구소련은 완전히 해체되고 1992년 1월 1일자로 러시아를 비롯한 각 공화국은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다.
►러시아공화국과 옐친
옐친은 1992년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위해 상품이나 서비스 가격을 자유화하고 중앙집중식 자원분배제도의 폐기하였다. 그러나 생산의 독점화 등의 이유로 물가상승과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이러한 경제사정의 악화를 이유로 1993년 보수세력들은 옐친 탄핵안을 제출하였다. 옐친은 가까스로 탄핵안이 부결되자, 국민투표를 통하여 국민들의 신임을 재확인하고 사유화와 경제자유화를 더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렇지만 보수파가 입법부인 두마(Duma)를 장악하여 개혁을 거부하자, 옐친은 의회를 해산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하면서 민영화 또는 사유화를 위한 지속적인 개혁을 진행하였다. 1995년 러시아의 경제는 안정을 찾고 약간의 성장을 보이면서 긍정적인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1997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1997년 불어닥친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국가부채시스템을 손상시키면서 러시아 경제를 붕괴위기까지 몰고 갔는데, 러시아의 엄청난 해외부채는 과거 구소련의 부채였다. 실업과 국민생활수준의 저하 문제가 심각해진 가운데, 1999년 체첸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체첸반군의 활동이 거세졌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러시아 안보회의 서기가 된 푸틴은 체첸분리주의자들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둠으로써 옐친의 천거로 총리가 되었다. 옐친은 1999년 12월 31일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푸틴을 대통령 권한대행에 임명함으로써 푸틴시대를 열어주었다.
►중앙집권화와 푸틴
푸틴은 2000년에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위대한 러시아'', ''강력한 러시아 국가''라는 슬로건 아래 경제적 안정화와 사회적 안정화를 꾀하였다. 푸틴은 서방세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루블화의 평가절하를 실시하여 대외부채를 조정하고 부채의 분할상환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동시에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러시아 경제는 급격히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석유수출로 막대한 외화수입이 생기면서 경제가 안정되었고 사회 각 분야로의 투자가 진행되었다. 입법부도 개혁을 거부하는 보수강경파보다 중도파들이 다수 형성되면서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다. 푸틴은 권력을 중앙 정부에 집중시키면서 석유·가스 등 전략적 자원을 다시 국유화하는 등 강력한 개발독재식 모델을 택하여 산유국가들 중에서 특별한 경제성장을 이루게 된다. 푸틴은 2004년 재선에 성공한 후 강력한 통치력을 바탕으로 시장의 자유화를 추구하고 에너지산업의 국유화를 실시하였다.의회와 법원의 활동을 축소하고 정당을 재편하고 미디어장악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푸틴의 재임기간 동안 러시아는 연평균 6%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2005년 외환보유고 2257억달러로 세계 4위를 기록하였다.
쏘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련방, 줄여서 소련(蘇聯)
►역대 소련의 지도자들
블라디미르 레닌 (1917-1924)
이오시프 스탈린 (1924-1953)
게오르기 말렌코프 (1953년 3월에서 9월까지)
니키타 흐루쇼프 (1953-1964)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64-1982)
유리 안드로포프 (1982-1984)
콘스탄틴 체르넨코 (1984-1985)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5-1991)
1922년 12월 30일부터 1991년 12월 26일까지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하였던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이다.
소비에트 연방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였다. 소련의 영토 면적은 무려 22,402,200 km² 였다. 지구의 전체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덮는 이 면적은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비견할 만 했다. 유럽 부분은 총 영토의 4분의 1에 해당했고, 이 부분은 소련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이었다. 동쪽으로의 영토는 태평양에,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 달했지만, 이 지역의 인구는 유럽 부분 보다 적었다. 소련의 영토는 동서로 1만 킬로미터에 11개의 시간대에 걸쳐 있었으며, 5개의 기후대(툰드라, 타이가, 스텝, 사막, 고산)가 걸쳐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길었으며, 약 6만 킬로미터에 달했고, 이는 북극해 해안 총 길이의 3분의 2에 달하는 것이었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국경은 아프가니스탄, 중화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헝가리, 이란, 몽골, 북한, 노르웨이, 폴란드, 루마니아, 터키와 접했다.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은 러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혁명 이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 정부는 10월 혁명으로 붕괴했고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지만 볼셰비키는 백군을 쳐부수고 내전에서 승리했고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통합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하였다.
소련의 첫 번째 지도자 레닌은 1924년에 사망하였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소련은 스탈린의 경제정책과 강력한 정치 억압을 통해 거대한 규모의 산업화를 이루어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 6월, 독일과 그 동맹국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였다. 약 4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후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를 이끌어가는 2개의 '슈퍼 파워'가 되었다.
소련과 유럽 위성 국가들은 미국과 서방 세계에 맞서 냉전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로 인해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졌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소련의 경제를 중흥시키려 하였지만, 소련은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가 소련 국민들의 반발로 3일 천하로 실패한 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명칭은 소비에트 (러시아어: Совет) 에서 나왔는데, 이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 노동자의 조직인 소비에트는 간접민주제를 거부하고, 작게는 각 직장에서부터 크게는 모스크바의 최고 소비에트 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걸쳐 설치되어 있었고, 소련의 성립기와 말기를 제외하면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였다.
러시아 혁명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고 러시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혁명 이후 성립한 임시 정부는 점진적인 개혁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1914년 7월 28일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 특히 독일과의 전쟁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이 먹을 우유가 모자랄 정도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임시 정부에 휴전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7년 11월 7일에 레닌의 지도하에 11월 혁명이 일어났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위군을 조직해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장악했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과 외국 열강이 볼셰비키를 공격해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백군 및 외국 열강의 군대에 대항하려고 레온 트로츠키는 적위군을 적군으로 개편했다. 적군은 외국 열강과 백군을 쳐부수고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했으며, 모든 반대파를 숙청해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어 1922년 12월 30일의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연합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성립이 선언되었다.[1]
1924년 레닌의 사후 집권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세계혁명론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와는 달리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우며 1928년에는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트로츠키를 외국으로 추방했고,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독립국가연합(獨立國家聯合, 러시아어: Содружество Независимых Государств (СНГ)
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독립한 11개 공화국의 연합체 혹은 동맹이다. 그루지야·러시아·몰도바·벨라루스·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우즈베키스탄·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이 회원국이다. 투르크메니스탄는 2005년 8월 26일 탈퇴 후에 준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1991년 가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가 시작되자, 12월 8일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지도자가벨라루스의 브레스트 북쪽 50 km에 있는 휴양림에서 만나 독립국가연합을 만들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새 연합은 같은 목표를 가진 옛 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공화국에게 문호가 개방되어있다고 공표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 모임을 "불법적이고 위험한" 헌법적 구테타라 선언했지만 이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91년 12월 21일, 옛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 중 11개 공화국의 지도자가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에서 만나 헌장에 서명하였다.
이미 1991년 9월 6일 독립을 승인받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과 더불어 그루지야는 독립국가연합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독립국가연합의 헌장에는 모든 회원국이 독립 주권국임을 명시하고 있어 사실상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었다.
처음 11개 회원국은 러시아·몰도바·벨라루스·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우즈베키스탄·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이다.
아제르바이잔은 1992년에 탈퇴하기도 하였으나 나중에 재가입한다.
1993년 12월, 그루지야도 러시아의 군사적 압력 아래 가입하게 된다.
발트 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지금도 이 단체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데다가 자기 의사도 없이 1940년에 소련에 강제 합병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군다나 반러시아 성향이 강한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몰도바 등은 이 단체를 탈퇴하고 서방 세계와 친숙해지려고 하고 있다.
===참고; 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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