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불교(祈福佛敎)>
‘기복(祈福)’이란 "복을 빈다, 혹은 복을 내려주기를 기원한다"는 말로서, 이러한 행위를 추구하는 불교를 '기복불교(祈福佛敎)'라 한다. 기복과 불교의 합성어인 ‘기복불교’를 풀이하면 복을 비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뜻인데, 실제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없다. 따라서 기복불교란 경전에는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굳이 표현한다면 불자들의 기복적 신행 혹은 기복신앙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기복불교란 말이 경전에는 없지만 불교사전에는 등재돼 있다. 그렇다고 역시 올바른 불교용어라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불교라는 단어 앞에 별도의 형용사를 덧붙이는 것은 불교의 본질에 어긋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즉, 기복이라는 말을 종교 앞에 붙일 경우에는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기복불교’라는 말 대신 ‘기복신행’ 혹은 ‘기복신앙’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기복불교라는 말이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은 불교 본래의 이타적(利他的) 입장을 도외시한 채 오로지 당장의 이기적 성취를 위해 불교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불교 본질적 요소가 비본질적 요소로 전도된 입장을 취하는 것이 기복불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복을 기원함을 목적으로 믿는 미신적인 신앙이 기복신앙이라서 기복불교라는 용어는 어느 정도 폄하성 내지는 비판적 용어이다. 중생의 미혹한 마음을 깨달아 참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에서 오직 개인이나 가족의 안녕과 복만을 빌기 위해 기도하는 기복신앙 - 기복불교는 불교가 민간신앙을 습합하는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 같은 기복불교는 진정한 불교적 가치를 훼손하는 표층신앙(表層信仰)이어서 자칫 불교 본래의 이타적(利他的) 성격을 도외시할 우려가 있다.
헌데 흔히 기복적인 신앙이라고 비판할 때, 다른 종교와 다르게 유독 불교만 그렇다고 비판을 하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는 복을 줄 신(神)을 설정해 두고 있으며, 복(福)이라는 말을 행복이나 안녕이라고 이해 할 때 복을 추구하지 않는 종교는 있을 수 없다. 기복이란 말이 복을 빈다, 구한다는 뜻이므로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기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2017년 5월 24일 독일 아이슬레벤(Eisleben)의 성 베드로ㆍ바울 교회 곳곳에는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제 이름과 아빠, 엄마, 가족 그리고 친구들 이름과 소망을 적은 종이쪽지가 곳곳에 놓여 있었고, 주변엔 소망을 적은 천 조각이 세례반(盤)에 덮여 있었다. 이 교회는 마르틴 루터(1483~1546)가 유아세례를 받은 곳이다.” 이것은 어느 신문기사의 한 구절인데, 소망이나 소원이나 같은 말일진대, 복을 기원하는 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주술적일 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생활은 복을 기대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복이란 행복이나 안녕을 비롯해 넓게는 사람이 바라는 ― 소망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어떻게든 빌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또한 그 ‘복’이라는 것을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정신적인 차원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만약 정신적인 경우라면 수행자나 철학자나 예술가까지도 처음 시작은 복을 바라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비록 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복을 비는 행위는 어떤 방식이라도 행할 수 있다. 심지어 곤궁한 처지에 처하면 비록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지푸라기를 잡고 싶은 심정이 돼서 나무나 바위와 같은 자연물에 대해서조차 의지하고 싶은 것이 연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다.
원래 불교는 포용의 종교이고, 관용의 종교이다. 그래서 인도에서부터 이미 불교는 민간신앙의 요소를 흡수해 왔다. 그것은 불교의 민중화 대중화의 관점이기도 했다. 이것은 고도의 지적수련을 요구하는 불교가 대중 사이에 생활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불교 지도자로서는 민간신앙과 힌두교에서 소원성취를 비는 행위를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방향에서 스스로의 생활을 바로잡는 데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안과 고뇌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불교로서는, 인간의 욕망성취를 직접적으로 기원하는 것이나 주술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은 불교 본의와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기복신앙이 불교가 아니라는 입장은 초기 불교에서부터의 일이다. 초기불교는 당시 널리 성행하고 있던 각종 기복행위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모습을 드러낸 종교였다. 즉, 초기불교는 처음부터 믿음[信]이 아닌 지혜의 도[道, 종교]로 출발했다. 초기불교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지혜를 통한 이해를 중요시했다. 초기불교는 처음부터 신앙이나 믿음이 아닌 보고ㆍ알고ㆍ이해함을 강조했다. 초기불교에서는 언제나 앎과 봄의 문제이지,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와서 보라’고 당신을 초대하는 것이지, ‘와서 믿어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초기불교에는 처음부터 기복신앙이 발붙일 여지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니다’는 주장은 초기 붓다 가르침에 근거하는 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근기(根機)가 높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 큰 장벽이었다. 붓다께서도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법을 망설였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붓다 가르침의 핵심을 정확히 그리고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불자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그랬는지 실제에 있어서는 교리적 변용을 통해 세간적 차원의 주술적 요소나 소원성취를 비는 기복적 요소가 있었다. 결국 불교가 민간신앙의 요소를 흡수하고 기복적 의례를 도입했던 것은 불교를 민중생활에 접목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따라서 민중을 위한 기복적 요소가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불교 본질적 요소를 능가하게 되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자취를 감추게 된 것도 밀교가 너무 힌두교화 하고 민간신앙을 지나치게 받아들여 불교 본질이 희석됐기 때문이다.
밀교 이전에 흥기했던 대승불교 역시 기복적 요소를 많이 도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재했던 것은 대승경전 자체가 대승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불교의 본질을 지켰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관세음보살을 지성껏 염불하면 일곱 가지 난을 당하더라도 그 화를 면할 수 있다고 했다. 즉, 큰불, 큰물을 만나도 타죽거나 빠져 죽는 일이 없을 것이며, 바다에서 태풍을 마나 바다 밑 귀신의 나라에 빠지는 한이 있어도 죽지 않을 것이며, 원수나 도적을 만나도 그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라는 등이다. 그리고 특히 아미타불의 염불을 강조하는 정토교 계통의 경전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용납되는 것은 이들을 통해 이타적 자비와 구제라는 대승불교의 이념이 더욱 고양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관음신앙의 경우, 관심사는 내세보다 현세에 있다. 민중이 일차적으로 염원하는 것은 현세의 이익이 때문이다. 따라서 기복신앙은 주로 현세의 이익을 염원하는 신앙이다. 그래서 관음신앙은 기복신앙의 양태로 민중의 저변에까지 확산됐다. 그러나 깨달음에 의한 성불을 목표로 추구하는 불교의 전통노선으로 보면, 기복신앙은 정도에서서 벗어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기복신앙을 암암리에 또는 공공연히 허용한 덕분에 불교는 대중적인 종교로 확산될 수 있었다. 특히 대승불교의 일부 경전들에서는 거의 공공연히 기복신앙을 허용하고 있다. 이것은 대승불교의 이념상으로도 예정된 수순이다. 이 수순의 선도적 위치에 있는 경전이 바로 <법화경>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갖가지 고통과 곤경이라는 병에 시달리는 민중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이 모든 병을 단번에 치유할 수 있는 약일 것이다. 종교에서 기복신앙은 이러한 약의 효혐을 믿고 약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기복신앙에서는 그런 약의 효험을 영험(靈驗)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입장이 무속적 민간신앙과 심하게 습합되면서 본래의 입장이 전도되는 데에 있다. 우리나라 경우엔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한 정도에 이르렀다는 데에 기복불교의 문제성이 지적된다. 우리나라 사찰엔 불교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산신(山神)과 칠성신(七星神)을 모시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그리고 사찰에 찾아가서 비는 내용의 거의 대부분이 사업성공, 입시, 영전 혹은 승진, 남아생산, 질병 등과 관계돼 있다. 그리하여 심지어 심한 경우엔 승려를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복풍조가 만연됨으로써 불교를 빙자한 사이비 종교인, 점쟁이, 무당이 등장해 불교를 왜곡시키고 있는가 하면, 사찰에서조차 타락한 승려들이 기복을 이용해 장사치처럼 부적들을 팔아 치부하는 양태로 전락한 면이 있다. 이와 같이 본래 불교전파의 방편으로 수용됐던 기복적 신앙이 우리나라에서는 무속신앙과 습합해 더욱 깊이 심화돼 주객이 전도된 경지가 횡횡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불교의 기복신앙은 비리의 상징이요, 미신의 샘터요, 현실영합과 현실회피의 통로이며, 세속주의 물질주의의 기수요, 돈과 명예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는 통인이 돼 있다고 비판받고 있는 것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영문목록을 완성하는 등 한국불교에 정통한 미국 버클리대 루이스 랭커스터(Lewis Lancaster) 명예교수는 말했다. “한국불교의 특징을 굳이 꼽는다면, 주술적인 색체가 강하다는 점이다. 전세계 어느 불교나 샤먼적인 요소는 있다. 하지만 한국은 독특하다. 한국의 샤먼(무당)은 오히려 불교에서 더 많은 것을 가져다 쓴다. 많은 무당이 불교의 관세음보살을 섬긴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복의 복(福)이란 자기밖에 모르는, 제 식구 제 자손의 번영밖에 모르는 철저한 개인주의 경향이다. 따라서 세속적 가치와 영합한 기복신앙은 맹목적 신앙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기복을 지향하는 불교도들 - 사실은 불교도도 아닌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현실적 고통의 해결을 위해 불교를 신앙하고, 부처님을 현실 구제자로 맹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이 봉착하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잘못된 사회구조와 본인의 잘못에 기인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신앙도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며, 물질적 보상을 바라는 극히 왜곡된 신앙일 수밖에 없다.
원래 불교의 복이란 중생이 바른 도리와 바른 이상을 향해 자신을 사심 없이 내던지는 마음가짐 속에서 근원적으로 자기구제가 열린다는 의식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 흔히 기도는 불ㆍ보살의 가피에 의해 성취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기도의 성취 원리는 자기 정화를 통해 얻게 되는 자기발현(自己發顯) 혹은 자기계발(自己啓發)이다. 이와 같이 기도란 마음의 개혁이며, 그것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영험이 있는 것은 불교적 가치의 상승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물질주의와 결탁할 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도를 이렇게 이해한다고 하면 기복신앙이 불교를 타락으로 이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기복에서의 기도가 이타적 실천의 맹세인 서원(誓願)으로 바뀔 때 기복불교는 대승 방편으로서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물론 종교에 있어서 기적이나 영험(靈驗)•주력(呪力)•참회(懺悔)•정진(精進) 등을 통해서 놀라운 가피(加被)를 받는 예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하나의 수행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고, 기도의 가피나 영험 등에 의존하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절에 가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서 그 절에 몰려갔다가 또 다른 절에 영험이 있다면 그곳으로 몰려간다. 그러다가 어떤 기도원에서 난치병을 치료했다면 또 그곳에 간다. 이와 같이 해서 영험이나 기적을 쫓는 사람들은 이교도로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그래서 교리적 이해 없는 무속적•미신적 혹은 맹목적인 기도는 경계해야 한다.
따라서 “신행(信行)을 수행(修行)으로 바꿔야 한다. 수행의 결과로서 원력을 세우는 것이지 수행 없는 원력은 모순이다. 예컨대 뭘 바라고 빌기 전에 수행이 앞서야 하고, 그럴 때 기복하고 바라는 신행은 수행으로 전환돼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 수불스님
헌데 “한국의 괜찮은 사찰에 가면 전국구 보살, 왕 보살님 등등이 계신다. 30~40년 절에 다니신 분들이다. 하지만 이 분들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을 보면… 솔직히 실망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분들이 사찰을 찾아가면… ”왜 왔어? 누구냐? …“ 이런 식으로 쳐다본다. 혹 스님이라도 뵈려고 하면 찬바람이 씽씽 분다. ”왜 내 스님 찾아… ?“ 라고 하면서… 시기심으로 뭉쳐져 있는 보살들이 많다. 특히 절에 오래 다니신 분들이 더한 것 같다. 이것이 모두 다 기복불교의 민낯일 것이다. 나만 복을 받아야 하고 나만 잘 돼야 하는데… 남이 끼어들까봐… 혹시 내 복 가로챌까봐… 낯선 사람들에게 쌀쌀하고 퉁명스럽게 대한다.” - 실론섬
이런 유의 왕보살들이 ’치마불교=여성불교=기복불교’로 등식화하는 장본인들이다. 따라서 불교 발전의 입장에서도 이런 풍토는 없어져야 하는데, 이런 인사들에게 기대는 승려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이와 같이 기복신앙 문제는 한국불교의 해묵은 과제다.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신행할 것인가, 이상과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큰 숙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불교 특유의 포용성의 발현해 의해 불교에서는 일단 기복적 신행을 굳이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기복신앙에 매몰되지 말고 복을 비는 행위에서 복을 짓는 행위로 나아가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복(祈福)과 작복(作福)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의 하나이다. 기복(祈福)은 ‘복을 비는 것’이고, 작복(作福)은 ‘복을 짓는 것’이다. 전혀 차원이 다른 말이다. 기복은 복을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고, 작복은 복을 내부에서 찾고 양성하는 것이다. 복을 외부에서 구하기 때문에 이러한 신앙형태는 타력적(他力的)이며 비불교적인 것이다. 반면 복을 내부에서 구하는 것은 자력적(自力的)이며 불교적인 것이다. 사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기복이지 작복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기복의 대안이 곧 작복이다.
그러므로 작복행위 다음엔 다시 복을 베푸는 이타행위로 나아가라고 한다. 그리고 수행이 절정에 이르면 복을 베푸는 행위마저 집착일 수 있으니 놓아버리라고 가르친다. 이와 같이 불교는 신앙보다 수행으로서의 신행에 중점을 둔다. 사람들의 바람은 끝이 없다. 그러나 잘못된 바람은 고통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바른 바람을 설정하는 발원(發願)이 필요한 것이고, 그 발원에 따라 노력하는 정진(精進)이 필요한 것이다.
유사 이래 오늘날까지 인간사회에서 기복적인 현상은 있어왔다. 세계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기복적인 신앙 형태는 존재한다. 아마 이러한 기복적인 현상은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먼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인간의 무지(無智)와 무명(無明)이 완전히 제거되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의 모든 유정(有情)이 깨달음을 얻어 열반을 증득할 때까지 기복신앙의 형태는 존속될 것인데, 어떻게 모든 유정이 열반을 증득하겠는가.
그래서 붓다께서는 갠지스 강가에 가서 목욕한다고 해서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지금도 갠지스 강가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목욕을 통해 죄업을 씻겠다고 몰려오고 있다. 이처럼 뿌리 깊은 민간신앙은 의도적인 노력으로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청화 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과거 무수 생(生) 동안의 도둑마음이 우리 잠재의식의 소(沼)에는 꽉 차있다. 금생에도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대체로 ‘있다 없다’ 그러한 것만 가르치고 배운다. 그러하기 때문에 모두가 속이 비어있다. 반야(般若)사상을 다소라도 알아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겠는데, 하지만 그것도 그 순간뿐인 것이지 그냥 그 ‘있다 없다’에 걸려버린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 공부가 정념(正念)공부가 지속적으로 상속된다고 하면 삼독오욕(三毒五欲)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삼독오욕의 침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개인적인 이익에 매몰된 불교는 기복불교이지만, 정진수행을 통해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자리에서 본다면 수행 속에 모든 공덕이 녹아 있어 기복이 작복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말이다. 기복을 작복으로 승화시켜야 하지만 작복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세속적인 행복과 불교의 궁극적 목표를 동일시하는 것은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개인적 기도이든 국가적 행사이든 어떤 절대자에게 기원하는 것이라면 극복돼야 할 기복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