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계(北界)-(서북면, 서북로, 서북계)란 어디인가?
고려(高麗) 때 의주(義州) 인주(麟州) 일대(一帶)의 국경(國境)의 변화(變化)와 홍복원(洪福源 : 1206~1258)과 그 가문(家門)을 신뢰(信賴)하고 따르던 40여 개 이상(以上)의 성(城)은 홍복원(洪福源)이 몽골에 망명(亡命) 귀화(歸化)할 때도 같이 따랐는데 그 성(城)들은 다음과 같이 분석(分析)한다.
고려(高麗) 때 북계(北界)-(서북면, 서북로, 서북계)
시대 고려
성격 고지명, 지방 행정구역
유형 지명
소재지 평안도
분야 역사/고려시대사
요약 고려시대의 지방 행정구역.
개설
동계(東界)와 더불어 양계(兩界)를 이루었으며, 서북면(西北面)·서북로(西北路)·서북계(西北界)라고도 한다. 대체로 오늘날의 평안도 지방에 해당한다. 고려 초부터 군사적인 변경지역으로서 중시되었으며 남도에 비해 조직적인 행정조직이 갖추어졌다.
형성 및 변천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에 북진정책(北進政策)이 추진됨에 따라 평양에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영주(寧州 : 지금의 安州)에 안북부(安北府)를 둔 것을 비롯해 군사적 거점으로서 통덕진(通德鎭 : 지금의 肅州)·안정진(安定鎭 : 지금의 順安)·안수진(安水鎭: 지금의 价川)·흥덕진(興德鎭 : 지금의 北倉)·마산진(馬山鎭)·강덕진(剛德鎭 : 지금의 成川)·통해진(通海鎭 : 지금의 平康) 등을 두고 진두(鎭頭)를 파견하였다.
994년(성종 13)에는 청천강(淸川江) 이북(以北)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討伐)하고 이곳에 구주(龜州 : 지금의 구성(龜城))·곽주(郭州 : 지금의 곽산(郭山))·용주(龍州 : 지금의 용천(龍川))·통주(通州 : 지금의 선천(宣川))·철주(鐵州 : 지금의 철산(鐵山))·흥화진(興化鎭 : 지금의 의주(義州)) 등 이른바 강동 6주(江東 六州)를 설치함으로써 서북(西北)쪽 경계(境界)가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게 되었다.
다음 해에는 전국(全國)에 10도 제(十道 制)가 실시(實施)되어 패서도(浿西道)로 되면서 평양(平壤)이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칭(稱)해지고 운주(雲州 : 지금의 운산(雲山))·연주(延州 : 지금의 운산(雲山))·박주(博州 : 지금의 박천(博川))·가주(嘉州 : 지금의 가산(嘉山))·무주(撫州 : 지금의 영변(寧邊))에 방어사(防禦使)가 파견(派遣)되는 등 모두 14주(州)·4현(縣)·7진(鎭)이 설치(設置)되었다. 그 뒤 이 지역(地域)을 북계(北界)라 하였으며, 1102년(숙종 7)부터는 서북면(西北面)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고려사』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서경(西京)과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를 비롯해 구주·선주(宣州 : 지금의 선천(宣川))·용주(龍州)·정주(靜州 : 지금의 의주(義州))·인주(麟州 : 지금의 의주(義州))·의주(義州)·삭주(朔州)·창주(昌州 : 지금의 창성(昌城))·운주(運州)·연주(漣州)·박주(博州)·가주(嘉州)·곽주(郭州)·철주(鐵州)·영주(靈州 : 지금의 의주(義州))·맹주(孟州 : 지금의 맹산(孟山))·덕주(德州 : 지금의 덕천(德川))·무주(撫州)·순주(順州)·위주(衛州)·태주(泰州 : 지금의 태천(泰川))·성주(成州 : 지금의 성천(成川))·은주(恩州)·숙주(宿州)·자주(慈州) 등 25개 방어군(防禦郡)과, 영덕진(寧德鎭 : 의주(義州))·위원진(威遠鎭 : 지금의 의주(義州))·정융진(定戎鎭 : 지금의 의주(義州))·영삭진(寧朔鎭 : 지금의 의주(義州))·안의진(安義鎭 : 지금의 구성(龜城))·청새진(淸塞鎭 : 지금의 희천(熙川))·평로진(平虜鎭 : 지금의 희천(熙川))·영원진(寧遠鎭 : 지금의 영원(寧遠))·조양진(朝陽鎭 : 지금의 개천(价川))·양암진(陽岩鎭 : 지금의 양덕(陽德))·수덕진(樹德鎭 : 지금의 양덕(陽德))·안융진(安戎鎭 : 지금의 안주(安州)) 등 12개 진, 그리고 강동현(江東縣 : 지금의 강동(江東))·강서현(江西縣 : 지금의 강서(江西))·중화현(中和縣 : 지금의 중화(中和))·순화현(順和縣 : 지금의 순안(順安))·통해현(通海縣 : 지금의 용호(龍湖))·영청현(永淸縣 : 지금의 영유(永柔))·함종현(咸從縣 : 지금의 강서(江西))·용강현(龍岡縣 : 지금의 용강(龍岡))·삼화현(三和縣 : 지금의 용강(龍岡))·삼등현(三登縣 : 지금의 성천(成川)) 등 10개 현(縣)이 이에 속하였다.
총 25+12+10=47개 방어군(防禦郡) 진(鎭) 현(縣)
이 가운데 서경은 사실상 북계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지방 행정조직이므로, 안북대도호부를 유일한 주목(主牧)으로 해서 예하의 주·진·현 들이 일원적인 영속 관계를 이루었다. 이는 남도와는 달리 이 지역에 대한 통일적인 파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서경에 속한 강동현·강서현·순화현을 제외하고는 속현(屬縣)이 전혀 없는 것도 특징적이다. 같은 양계이지만 동계에 비해 북계가 주현의 수효나 지방관의 지위 등에 있어서 좀 더 상위에 있었다.
지방관으로는 방어군에 5품 이상의 방어사 1인, 진에는 방어사 또는 7품 이상의 진장(鎭將) 1인, 현에는 역시 7품 이상의 현령(縣令) 1인을 각각 두었다. 이들을 총괄하기 위하여 3품의 병마사(兵馬使)가 파견되었다.
본래 이 병마사는 989년(성종 8)에 처음 설치되었으나 이때는 상설된 외직(外職)이 아니라 비상시에 출동, 주둔하는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졌다.
뒷날 남도의 안찰사(按察使)에 비견하는 상임 외직으로 고정된 것은 현종(顯宗) 후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병마사가 군사와 일반행정을 모두 관장하는 지방 장관으로서 예하의 행정기구들을 지휘, 감독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양계에서는 분도제(分道制)가 실시되어 양계를 다시 5도로 나누고 각, 도마다 감창사(監倉使)·분도장군(分道將軍)·분대(分臺)를 두었다. 북계의 경우 운중도(雲中道)와 흥화도(興化道)의 2개 도로로 나뉘어 있었다.
한편 서경과 안북대도호부는 물론 모든 주·진·현에는 지방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정용(精勇)·초군(抄軍)·좌군(左軍)·우군(右軍)·보창군(保昌軍) 등이 약 4만 명에 이르러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규모가 훨씬 컸다.
고려 후기에는 몽고의 침략으로 양계의 주·진들이 대거 섬으로 옮김에 따라 이 지역의 행정체계가 크게 붕괴되었다. 특히 1269년(원종 10)에는 서경에서 최탄(崔坦)·한신(韓愼) 등이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에 투항하자 몽고가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해 행정구역으로서의 북계는 일시 소멸하게 되었다.
그 뒤 고려의 거듭된 요구로 1294년(충렬왕 20) 이 지역이 고려에 환속되면서 각 주··진에 지방관들이 다시 파견되고 병마사의 후신으로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두었다.
이 서북면도지휘사는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忠宣王)이 복위하면서 평양도존무사(平壤道存撫使)로 바뀌고 평양부윤(平壤府尹)이 겸하게 되었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에는 다시 평양도순무사(平壤道巡撫使)로 개칭되었다.
1369년(공민왕 18)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와 이성만호부(泥城萬戶府 : 지금의 昌城)가 새로 설치되었으며, 공민왕(恭愍王) 후년에는 도순문사(都巡問使)가 군사와 민정을 관할하는 행정장관이 되었다.
이것이 1389년(공양왕 1)에 도절제사(都節制使)로 바뀌었다가 다음 해에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남도와 마찬가지로 서북면도관찰출척사(西北面都觀察黜陟使)가 파견되어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와 평양부윤을 겸하였다.
현황
그 뒤 점차 군사적 성격이 탈색되고 민사적인 일반 주·현으로 전환되면서 방어사·진장 등이 남도와 같은 목사·부사(府使)·지주사(知州事)·지군사(知郡事)·현령 등으로 교체되었다. 행정구역으로서의 북계(서북면)는 조선 초기까지 그대로 존속되다가 1413년(태종 13)에 평안도로 개칭되면서 소멸하였다. → 동계(東界), 양계(兩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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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종실록(太宗實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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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기 양계(兩界) 병마사의 성립과 기능」(이정기, 『한국중세사연구』24, 2008)
・ 「고려(高麗) 성종 14년 군현제(郡縣制) 개편(改編)에 대한 연구」(윤경진, 『한국문화(韓國文化)』2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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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지방제도의 정비와 도제」(최정환, 『경북사학』19,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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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高麗) 양계(兩界)의 지배조직(支配組職)」(변태섭, 『高麗政治制度史硏究』, 일조각,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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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高麗) 양계(兩界)의 주진군(州鎭軍)」(이기백, 『高麗兵制史硏究』, 일조각, 1968)
・ 「고려(高麗) 북계(北界) 지리고(地理考)」(윤무병, 『역사학보(歷史學報)』4·5, 1953)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