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 치안대장으로 양민 11명 학살 주도...無期선고 후 전향 안하다 옥사
6*25당시 노무현대통령 장인 권오석씨에 의해 학살된 양민 유족대표 변재환 박사 증언
노무현 대통령의 장인 권오석씨는 1948년 막걸리를 공업용 알콜에 섞어 마시다 실명됐으나 같은 해 남로당에 가입했고, 다른 면에서 좌익사상을 이유로 쫒겨난 뒤 변재환 박사 숙부인 변백섭씨가 면장으로 일하던 창원군 진전면의 면서기로 일하게 됐다.
6*25가 나자 권오석씨는 진전면의 공산군 치안대장으로 좌익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영부인 권양숙 여사는 물론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당 측은 6*25당시 권씨의 행적에 대해 “공산군의 부역을 강요받았다, 수복 후 구속됐으나, 곧 석방됐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눈이 안보여서 단순한 부역을 하는데 그쳤다는 주장에 대해 변 박사는 “얼마나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기에 눈이 멀쩡한 사람들을 제끼고 노동당 선전부장이 되고,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치안대장이 됐겠느냐”고 되물었다.
실제 일제시대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면서기로 근무했을 정도로 명석했던 권오석씨는 인민군 점령 후 치안대를 조직한 진전면 토착좌익의 우두머리였다고 변 박사는 증언하고 있다.
변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권씨는 눈이 안보였기 때문에 손바닥을 만져본 뒤 손이 거칠면 ‘너는 노동자이니 C급’, 손이 부드러우면 ‘너는 지주이니 A급’으로 판정해 반동분자를 색출했고, 권씨의 숙부를 비롯한 양민 11명을 학살했다.
권양숙 여사는 또 권오석씨가 5*16이후 사회불안요소를 격리한다는 차원에서 다시 투옥됐다고 지난 대선 당시 밝혔지만, 실제 귄씨가 잔형(殘刑)집행을 위해 재수감된 시기는 5*16이 나기 전 1961년 3월 27일 민주당 집권시절이었다.
변박사는 “권오석씨는 체포된 후 무기징역형을 받았지만, 56년 양앙실명 및 폐결핵으로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뒤 61년 3월 재수감, 끝내 전향을 거부한 뒤 71년 폐결핵으로 옥사했다”며 “권씨의 죄가 가벼워 풀려났다느니, 5*16이후 박 대통령이 재수감됐다느니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라고 말했다.
과거를 과거 속에 덮어두려던 변 박사를 비롯한 유족들을 자극하는 일은 정작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2002년 5월 초 장인묘소를 참배하면서 “좌우로 갈라 싸운 사람 모두가 시대와 역사의 피해자였다” “권오석씨는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말했다.
간단한 위로나 사과의 말이라도 기대했던 유족들은 분노했고, 노후보에게 사실인정과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다 유족들은 같은 해 12월 대선 10일 전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기자회견을 시도했으나 노사모회원들에 의해 저지돼 언론보도조차 제대로 되지 못했다. 오히려 유족들은 선거법위반으로 영등포경찰서에 연행됐고, 변박사는 기소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변 박사가 근무하던 직장조차 노대통령측의 보복을 우려해 변박사를 사직케 했고 변 박사는 현재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변박사는 “지금 여권은 친일행적을 규명하자고 떠들어대지만 더 철저히 규명해야 할 과거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친북좌익활동”이라며 “친북좌익활동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자기 동포 수백만을 학살한 좌익들의 만행에 대한 역사를 규명하고 위협당하고 있는 현재 국민들의 생존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