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속의 달빛 여우 (외 1편)
윤정구
베어 문 사과 속에 달빛 한 입 묻어 있다
고향에서 보내온 풋사과 맛의 골짜기 어디쯤
길이 끊기고 멸악산 갑자기 높아져서
캉캉 여우 울음소리가 하늘로 퍼져 올라갈 때
사과나무도 분명 그 날카로운 여우 울음소리를 들었으리라
한낮에는 댑싸리 빗자루보다 더 길고 풍성한 꼬리를 끌고
부드럽게 보리밭 끄트머리로 걸어 나오던 그 여우의
송곳처럼 날카로웠던 울음소리
잡목 우거진 여수골의 밤 달빛이 얼마나 고혹적이었는지
밤길을 잃어버려본 사람들은 안다
눈 속에서 낙엽 속에서 녹음방초 속에서 여우는 그렇게 숨어서 울었지만
사람들이 그 여수골 입구를 일구고 사과나무를 심어나가자
여우는 마침내 마지막 울음을 남기고는
나무 사이 푸른 달빛을 타고 멸악산 등성이를 넘어갔다
달빛 묻은 사과를 한 점 베어 먹는다
손전등처럼 반짝이던 두 눈, 달빛 여우가 보인다
구스타프 말러의 부활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휘어 돌아가는 것임을
방금 산벚꽃잎이 지는 모양을 보고 알았다
바람 한 점 없는 하오의 시간을
꽃잎은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떨며 떨어졌다
백지에 한 일(一)자 하나 그으며
어떻게 하면 힘차게 쭈욱
곧은 직선으로 내려그을 것인가 만을 생각해온 나는
문득
순간순간 거리를 달리하는 수많은 별들의 인력으로
떨며 떨어지는 꽃잎들처럼
내게 남은 시간이 두근두근 떨리는 것을 느꼈다
1만 미터 높이의 직선으로 날았다 하여도
결국은 곡선으로 지구를 돌아오는 제트비행기처럼
내가 직선으로 알고 살아온 선들이 실은 모두 곡선인지도 모른다
외골수 사랑과
정직하려 했던 시
그리고 내게 남겨진 시간도
내가 그었던 직선처럼
그렇게 곡선으로 떨며 떨어져갈 것이다
직선의 끝 저 멀리
숨은 블랙홀의 무게로 휘어 있는
곡선의 우주 저편
시리우스별 너머 심연 속으로
—시집『사과 속의 달빛 여우』(2015)에서
------------
윤정구/ 경기도 평택 출생. 고려대학교 졸업. 충남대학교 대학원 수료.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눈 속의 푸른 풀밭』『햇빛의 길을 보았니』『쥐똥나무가 좋아졌다』『사과 속의 달빛 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