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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제자들 중에서도 그 여자를 가장 사랑했으며, 그녀의 입에 입을 자주 맞추곤 했다.
다른 제자들은 이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며
'어째서 저희 중에서 저 여자를 가장 사랑하시나이까?'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예수는 '내가 어째서 저 여자를 사랑하듯이 너희를 사랑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빌립복음서-(외경)
Lucas Cranach the Elder(1472-1553)
St. Mary Magdalene in a Landscape
1525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왜 복음사가들은 그렇게 그녀를 경계하며 신약성서의 가장자리로 밀어냈을까....
대체 무엇때문에 초기 카톨릭교회를 지배했던 남성들이 그녀를 그렇게 경계했을까요?
1969년 카톨릭교회는 수세기 동안 학자들이 지적한 사실을 조용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아직 이런 변화는 신도들에게는 퍼지지 않았죠.
교회는 아주 조용했습니다.
바로 회개한 창녀라는 막달라 마리아의 전통적 이미지는
성경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럼 교황은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창녀라는 주홍글씨를 붙이고
그후 1400여년 동안 공식적으로 그녀가 회개한 창녀라고 주장했던 것일까요?
기록의 원본들이 많이 소실되고 히브리어와 아랍어, 그리스어, 라틴어
성경이 뒤죽박죽이던 암흑시대에 실수로 잘못 해석된 것일까요?
아니면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깍아내림으로써 이교의 여신숭배를 금하기위해,
교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역할을 약화시키고 기독교 신앙의 인간적인 면을 매장하려는 것이었을까요?
Jules-Joseph Lefebvre
Mary Magdalene in the Grotto
1876
"성스러움과 세속의 경계를 넘나들다”
마리아 막달레나, 그녀는 많은 화가들의 그림의 주인공이 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입을 맞춘 여인이자,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순간을 지켜본 여인이며,
부활한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는데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이 그것이죠.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율법에서는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죠.
그녀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였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전부 달아나버리고 그녀가 그 자리를 지키지요.
그리고 부활절 아침, 예수의 무덤에 간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이 비어 있는것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예수가 부활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성경속 막달라 마리아는 회개한 창녀로써 기독교사의 중요한 순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여성입니다.
TIZIANO Vecellio
Penitent St Mary Magdalene
c. 1532
자코모 다 바라라제의 《황금전설》 등에 의하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매춘부 출신으로 한동안 쾌락에 탐닉하다가
예수를 만나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막달레나에게는 창녀를 의미하는 ‘죄의 여자(the Sinner)’라는 별명이 주어지고,
르네상스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의 회개를 주제로 하는 회화나 조각이 많이 제작되죠.
이는 《누가 복음서》에 나오는 창녀를 근거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1400년 가까이 마리아 막달레나는 매춘부로 낙인찍혔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591년 마리아 막달레나가 창녀였다고 강론했습니다.
이 이미지는 로마 가톨릭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지적되었으며,
1988년에서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를 ‘사도들의 사도’라고 격상시켰죠.
예수가 승천한 후, 막달레나는 마르다 등과 함께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유로 가서,
만년을 동굴 속에서 은수생활을 하며 보냈다고 하며, 매일 일곱 번씩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녀의 유해는 엑상프로방스 교외의 생 막시망 라 생트 보메(Saint-Maximin-la-Sainte-Baume)에 매장되었다
고 믿어지고 있습니다. 그 유해(두개골)는 나중에 베즈레이의 성 막달레나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고 하죠.
그러나 생 막시망 라 생트 보메측은 지금도 막달레나의 유해를 보관,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Rubens
Christ and Mary Magdalene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는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경에 나오는 이름없는 ,
혹은 성이 없이 이름만 알려진 여자들을 막달라 마리아로 뭉뚱그리면서 왜곡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발을 눈물로 씻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입을 맞춘 다음 향유를 부은 죄인도 있었고, 베다니의 마리아, 또 한 사람의 이름없는 여인...
이들은 59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에 의해 모두 '막달라 마리아'로 정한다고 공식화되었죠.
성경에서 채택하지 않고 있는 고대 복음서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에게 부여한 중개자 역할을 대신 하게되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 복음에서 베드로는 몹시 불쾌해하며
'예수께서 정말로 우리도 모르게 여자에게 말씀하셨다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도 레위는 그녀를 옹호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 베드로여.너는 늘 여자를 싫어했지. 주님이 저 여자를 가치있게 하셨다면
네가 누구이기에 그녀를 거부하는가?
주님은 실로 그녀를 잘 알고 계시고 그러기에 더욱 사랑하신다네'
La Tour
참회나는 막달레나(임신한 배가 보입니다)
초대 교황이 베드로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로 의미있는 장면이지요.
예수가 죽고 그녀의 위치는 촛불과도 같았습니다.
베드로가 교황으로 있었던 당시 교회는 막달라 마리아외에도 여러 여사제들을 이단으로 선포합니다.
권력다툼이었죠.
당시 예수의 아이를 임신했다고도 전해지는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를 피해 에베소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지방을 전전하다 프랑스로 건너가게 됩니다.
에베소와 이집트 그리고 그 주위 지역에서는 아직도 고대문서가 발견되어 이를 뒤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시온수도회의 회원이었던 디즈니의 인어공주에 등장하는 임신한 막달래나
Leonardo da Vinci
Magdalene Drawing
Leonardo da Vinci
최후의 만찬 detail
막달라 마리아를 향해 위협하듯 뻗은 베드로의 손은 예수
사후에 진행될 예수 운동에서 그가 막달라 마리아와 경쟁 관계에 놓일 것이며
또한 예수가 이 운동의 중요한 자리를 자신이 아닌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여한 것을 두고
베드로가 느끼는 질투심을 보여줍니다.
죄와구원, 성모와창녀를 나타내는 인물로써 막달라 마리아는 지금까지
문학과 예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약 천년 전, 서유럽에서 상영된 최초의 연극인 수난극의 무대에서도 그녀가 등장했죠.
현대로 넘어와서 막달라 마리아에 매료된 작가들은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50년도 더 전에 니코스 카잔차스키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The Last Temptation of Chris>에서
두사람을 연인사이로 설정했고, 미국의 마틴 스콜세지는 1980년대 이를 영화화했죠.
Alexander lvanov
예수의 부활과 막달레나
1834
역시 30여년 작품인 록 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또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연인이었다고 가정합니다.
성 역할과 지도자로서 여성, 결혼과 출산에 대해 새로운 막달라 마리아를 발견한것이죠.
하지만 이는 단지 작가들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세계적인 역사학자들은 그녀의 역사적 실체와 전통적인 복음서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역할의 의미에 대해 끝없이 논합니다.
하지만 이미 남자들의 차지가 된 교회는 이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표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가 아닌 사도였다는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1995년 여성 사제라는 문제를 논하는것조차 금해버리죠.
교황 바오로2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남성만을 그의 사도로 선택했다'라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승자의 지위를 되찾아 줄때,
현재와 같은 남성의 교회지배라는 전제가 필연적으로 흔들릴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El Greco
Mary Magdalene
1597
막달라 마리아가 부부이고 예수가 십자가 형을 당했을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아이를 배고 있었다는 생각은 프랑스에서는 이미 모두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성배를 들고 프랑스로 왔고 막달라 마리아가 낳은
아이의 후손들이 메로빙거 왕조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프랑스 왕가의 전설입니다.
초기 카톨릭은 여성의 이교의 상징으로 몰아버리고 교회의 권력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권력을 갖기위해 예수를 극도로 신격화 시키고 모든 구원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하죠.
그러기 위해선 예수의 인간적인 면을 대표하는 막달라 마리아와의 사랑은 역사에서 지워야만 했었던 것이죠.
마리아 막달레나가 창녀로 바뀐 것은 교회가 조작한 것이며,
마리아 막달레나의 지위를 복권해야 한다는 일부 여권주의 수정론자들의 주장입니다.
예수의 든든한 후원자였으며 최초로 예수의 부활을 지켜본 증인인
마리아 막달레나가 창녀의 오명을 쓰게 된 데에는 그가 남성 중심적인 기독교에게
중대한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죠.
이단으로 분류된 한 복음서에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을 바탕으로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와 경쟁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남성들이 중심인 교회에서 질투의 대상이었으며
남성으로 이루어진 성직자들이 여성인 그녀를 창녀로 전락시켰다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은 남성 성직자들을 선호한 교부들에 의해 감춰졌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핵심에 성 대결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마리아 막달레나와 그녀가 이끄는 사람들이 그 싸움에서 이겼다면
교회의 역사와 구조가 여성을 동등하게 받아들였을까요?
Leonardo Da Vinci
사도 요한과 막달레나
BENSON, Ambrosius
Mary Magdalene
c. 1530
CARAVAGGIO
Magdalene
1596-97
FETI, Domenico
The Repentant St Mary Magdalene
1617-21
FONTANA, Lavinia
Jesus Appears to Mary Magdalene
1581
GIOTTO di Bondone
Scenes from the Life of Mary Magdalene: Mary Magdalene and Cardinal Pontano
1320s
GIOTTO di Bondone
Scenes from the Life of Mary Magdalene: Noli me tangere
1320s
GOES, Hugo van der
Sts Margaret and Mary Magdalene with Maria Portinari
1476-79
GRECO, El
Mary Magdalen in Penitence
1580-85
MASSYS, Quentin
St Mary Magdalene
PIERO DI COSIMO
St Mary Magdalene
1490s
PIOLA, Domenico
Magdalene in the Desert
1674
RENI, Guido
St Mary Magdalene
1633
VOUET, Simon
St Mary Magdalene
16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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