⑸ 선교사들의 관여문제
① 삼일운동 이전까지 서구선교사들은 친일적이었고 기독교 민족운동가들과 대립되는 입장을 강했다.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우며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고 교회가 민족운동에 말려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했다.
② 그러나 삼일운동과정에서 나타난 일제의 만행과 기독교 탄압에 대해서 선교사들은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는 수원 제암리 사건의 사진을 찍어 〈꺼버릴 수 없는 불〉을 출판하였다. 이 책자는 일본의 만행을 서구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수원 제암리에서 일본군은
마을사람들(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을 교회로 몰아넣고
방화하여 학살하였다.
세브란스 병원의 세균학 교수였던 스코필드 박사는
마을에서 연기와 불이 타오르는 장면을 보고
자전거를타고(그는 소아마비였다) 현장을 방문하였다.
현장탐사를 막는 일본헌병에게 항의하고 있다.
제암리 학살 사건 추모비
일본기독교회는 일본의 만행을 사죄하며 추모비를 세웠다.
③ 신흥우는 1919년 5월 미국북감리교 100주년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보도하였다.
미국기독교연합회(FCCCA)는 〈The Korean Situation〉을 5천권 발간하였다.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는 일본수상에게 만행을 규탄하는 전문(6.26)을 보냈고 일본 수상은 이것에 응답했다.(7.10)
미국 정부(6월)는 일본의 대리공사 데부치에게 해명과 조치를 요구하게 되었다.
일제는 그들의 만행을 숨길 수 없게 되었고 국제적으로 외교적으로 고립당하는 위치게 서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신문에 실린 삼일운동
한인신문
영문 독립선언서
4) 삼일운동의 결과
① 삼일운동은 종교와 지역, 빈부격차, 국내와 국외를 뛰어넘어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어내었다.
②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임시정부의 중심인물들에는 기독교인들이 대다수 였다. 안창호, 이승만, 김규식, 서병호, 현순, 김병조 등등)
③ 일제의 무단통치는 삼일운동 이후 기만적이지만 문화통치로 변화되었고, 일제의 기독교정책, 교육정책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④ 외래 종교였던 기독교는 삼일운동의 희생을 통해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종교로 자리를 매김했다.
⑤ 그리고 교인 수가 증가했다. 32만(1918), 30만(1919), 32만 3천(1920), 35만 5천(1921), 37만 3천(1922)
일제의 교회박해와 탄압으로 1919년에 교인 수는 감소했다.
그러나 그 이후 교인의 숫자는 크게 증가했다.
1920년대 후반의 교인 감소는 농민들의 대규모의 이민이 주원인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상해 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결성식
중국에서 일본군의 처형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