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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 기사 중계 > 아홉째날[25일]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 첫 진혼제 의의와 역사적 배경 # 이모저모
# 독립운동사의 고아 '조선의용군' 위한 첫 진혼제 중국 현지에서 열려
일제 치하 중국 화북 지방에서 무장 항일 운동을 전개했던 '조선의용군'을 위한 진혼제가 25일 오전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 한단[旱單, 한단] 태항산에서 사상 처음으로 열렸다.
이날 진혼제에는 지난 99년부터 장준하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있는 '아! 장준하 구국장정 6천리' 행사에 참가한 대학생 등 청년등불 장정단 54명이 참여했다.
태항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조선의용군의 항일 독립 운동은 남한은 공산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북한은 6·25 이후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는 이유로 남북 모두로부터 외면당해왔었다. 학술적 목적 외에 조선의용군 묘소를 대규모로 공식 참배하고 유적지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진혼제는 1942년 12월 태항산 일대에서 일본군을 맞아 당시 중국 팔로군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태항산 기슭의 석문촌에 자리잡은 윤세주와 진광화 묘역에서 열렸다. 윤세주는 의열단 활동으로 십여년간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건너가 무장 항일 운동에 투신했다. 진광화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항일 운동을 벌였었다.
장정단은 국내에서 준비해간 음식물로 진혼제를 위한 제사상을 마련했으며, 중국 한단시 관계자들과 묘지 인근 마을 주민 등도 참여했다.
이에 앞서 청년 등불 장정단은 한단시내에 위치한 항일열사능원과 조선의용군이 주둔했던 한단시 섭현 남장촌을 방문했다. 항일열사능원에는 243명의 묘비가 있으며, 윤세준과 진광화 묘비도 마련되어 있다. 남장촌은 조선의용군이 주둔해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등 주민복지사업은 물론 1945년 8월까지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 게릴라전을 펼쳤던 근거지였다.
# 첫 진혼제 의의와 역사적 배경 한국 대학생들의 중국 한단시의 조선의용군 묘역에 대한 공식 참배는 탈 이데올로기 시대를 맞아 남북 모두로부터 외면됐던 독립운동사를 복원한다는 측면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조선의용군은 일제 말기 중국 내 무장 항일 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남북한 정부로부터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그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남한의 경우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함께 활동했다는 이유로, 북한은 김일성 중심의 항일 운동 외에 다른 운동은 정통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민간 차원이기는 하지만 남한의 대학생들이 조선의용군 묘역을 공식 참배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조망한 것은 그동안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지 못했던 독립 운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의용군은 그 역사적 연원이 1938년 김원봉의 민족혁명당과 사회주의혁명가 그룹, 무정부주의자, 연안파 등 중국 내 항일조직들이 만든 '조선민족해방전선'의 무장조직인 조선의용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전역에 흩어져 활동하다 1941년 3월 낙양에 결집해 무장게릴라 훈련을 받은 뒤 북상해 한단을 중심으로 한 태항산으로 거점을 옮긴다. 이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것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북경과 천진 석가장 신양 등에 거주하는 20여만명의 조선인들을 조직해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우고 북상 운동을 펼친다.
조선의용대는 1941년 12월 태항산 일대에서 일본군을 맞아 호가장 전투, 형대 전투를 치른다. 1942년 5월 마전현 전투에서는 일본군 40만명이 당시 태항산 일대에 거점을 둔 중국 팔로군을 포위했을 때 선두에 서서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윤세주가 전사하는 등 300여명에 이르던 조직원 상당수가 전사하고, 공산주의 계열 인사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중국 공산당의 공식 지도를 받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된다. 이후 조선의용군은 주력부대는 연안으로 이동해 소위 '연안파'를 형성하며, 일부는 태항산 일대에 남아 계속 유격전을 전개했다.
장정단이 답사한 한단시 섭현 남장촌에는 당시 조선의용군의 사령부 건물과 정치의식교육을 위해 세웠던 군정학교 건물이 보존되어 있다. 남장촌 일대에는 당시 조선의용군이 심은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남아있으며, 이곳 마을 주민들은 장정단에게 이 나무에서 딴 감과 대추를 말린 것을 이날 방문 선물로 전달했다.
또 장정단이 방문을 하지는 못했지만 남장촌에서 1시간여 떨어진 좌건현에는 "왜놈의 상관을 쏴죽이고 조선의용군으로 오십시요"라고 적힌 '항일표'가 아직도 남아있다. 항일표는 조선의용군이 일본군 부대에 학도병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무공작을 펴기 위해 만든 것으로,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주었던 조선의용군을 기리기 위해 페인트칠을 계속하며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 관련 연구물들이 나오고 있으며, 90년대 초반 일부 학자들이 태항산 일대를 답사하기도 했다. 또 지난해에는 윤세주기념사업회가 유가족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국가보훈처에서도 20억을 지원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장준하기념사업회의 60주기 진혼제와 답사는 남북 모두로부터 외면당해오던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의 항일독립운동을 복원하는 본격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이모저모 ●…한단시는 장정단의 조선의용군 유적지 답사에 큰 관심과 전폭적인 지원을 아기지 않았다. 장정단이 25일 오전 7시 한단역에 도착했을 때 시 관계자가 한단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장정단이 아침 식사를 한 식당에는 한단시 동용쇼우(董永壽) 부시장과 한단시 공산당위원회 칭춘민 부서기장 등이 나와 함께 식사를 하며 격려했다. 한단시 동용쇼우 부시장은 "항일 운동시 중국인들과 함께 투쟁한 조선의용군의 유적지를 방문한 장정단원들을 800만 한단시민을 대표해 환영한다"며 "일본의 군국주의가 강화되고 있는데 한국과 중국이 서로 손을 잡고 이를 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정단이 남장촌과 윤세주 묘역에 이동하는 동안에는 중국 공안 차량 2대가 에스코트를 하는 배려도 했다. 또한 지역 텔레비전과 신문이 장정단과 동행하며 답사 전과정을 밀착 취재하기도 했다.
●…한단시내 열사능원은 1946년 건조를 시작해 1950년 완성됐으며, 윤세주 묘역은 일반 묘역에 조성되어 있으나 진광화 묘역은 비교적 큰 규모로 따로 조성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박한용 연구원은 "윤세주은 군사적으로는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조선인들만의 독립된 활동을 주장한 반면 진광화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장정단이 능원에 도착하자 능원 관계자들은 장정단을 윤세주 묘역으로 먼저 안내하고, 직접 준비한 화환까지 바치도록 배려하는 등 진광화에 비해 윤세주의 역할과 업적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 능원 조성이 중국 장개석 정부시절 시작되어 공산당 정권 때까지 이어지면서 진광화 묘역의 비석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세운 묘비도 남아있었다.윤세주 묘역에서 진행된 참배 의식은 중국식으로 간소하게 진행됐다. 장정단은 열사능원 관리자의 안내에 따라 묘비로 이동해 헌화를 한 뒤 허리를 깊숙이 숙여 세차례 절을 했다.
●…이준영 사무국장은 혁명열사능원에서 "우리가 라오허커우[老河口, 노하구]에서 방문했던 이종인 부대에도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부대의 부패상을 견디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화북으로 이동했다"며 "이들은 이종인 부대와 함께 항일 투쟁을 하는 것보다는 화북지대에서 유격전을 하는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 지역으로 이동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무국장은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싸우자고 간 사람들인데 공산주의자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다"며 "해방 뒤 공산주의 국가가 된 북한에서도 이곳을 한 번도 참배하러 오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장정단이 한단시 섭현 남장촌을 방문했을 때 이곳 주민들은 고적대까지 동원해 마을 입구부터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남장촌 촌장은 "한국인들은 우리 촌락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었다"며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이 방문한 것은 아주 감동적이고 기쁘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또 "우리 주민들은 당시의 한중 우의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자주 마을을 찾아주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은 장정단이 떠날 때 "조선의용군들이 심은 나무에서 거둔 것"이라며, 곶감과 대추를 장정단에게 선물해 일부 장정단원들이 감격에 겨워하기도 했다. 장정단은 이를 한국에서 준비해간 음식물과 함께 태항산에서 열린 진혼제 상차림에 사용해 선조들의 은덕을 기렸다.
●…남장촌의 조선의용군 사령부와 군정학교 건물은 마을의 다른 집과는 달리 '조선식 기와'를 사용하는 등 남다른 모양이었다. 조선의용군 사령부는 현재 사는 사람 없이 쇠락한 모습이었지만 군정학교 건물은 마을 유치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또 주민들은 군정학교 건물 벽에 '조선혁명군정학교구지'라는 표지문까지 만들어 기념하고 있었다.
●…태항산 기슭의 윤세주와 진광화의 묘지는 버스에서 내려 약 20여분을 걸어 올라간 산기슭의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또 지난 1992년 이곳을 학술 답사했던 조동걸 교수가 윤세주의 동지였던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인 문정일 선생에게 부탁했다던 '애국영령 영원불멸하리'라는 비가 세워져 있었다. 윤세주의 묘비는 그의 아호이자, 암호명이기도 했던 '석정'이라는 이름이 씌여져 있었다. 또 양 쪽 묘비에는 모두 'ㅈㅗㅅㅓㄴㅁㅣㄴㅈㅗㄱㅕㅇㄴㅕㅇ'이라는 한글을 풀어쓴 '조선민족영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진혼제에 앞서 경규칠 대원이 조선의용대의 기관지였던 '조선의용대 통신'에 실렸던 시를 낭독했다. 이두산의 시 '당신은 의용의 전사, 전선의 의용대에게 보냄'이라는 제목의 시를 읽던 경 대원은 "전사들이여 압록강은 당신을 기다린다. 청룡칼에 묻은 피자국 닦고 동지들이여"라는 첫 구절을 읽은 뒤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메어 잠시 중단하기도 했다. 이 시는 "아! 젊은 나의 형제여! 칼 들고 압록강 돌파하여 어머니 묘지 쓸어주고 떠도는 아버님 위안하라 너는 의용의 전사 복수의 칼을 들어라"는 구절로 끝을 맺고 있어, 조선의용대가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진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진혼제는 태항산 일대에서 일제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바친 영혼들의 넋을 푸는 해원제 형식으로 진행됐다. 제주는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맡았으며, 김영민 대원이 사회를 맡았다. 불노하 강변에서 무명의 애국열사들을 위해 지낸 진혼제와 같은 형식으로 진행됐으며, 진혼제 말미에 장정단은 '님을 위한 행진곡'과 '독립군가'를 제창해 선배 영령들의 넋을 위로했다. 노래 제창 중 모든 대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으며, 일부 대원들은 흐느껴 울기도 했다.
●…김호준 단장은 진혼제 뒤 "선배 영령들이 우리 후손들의 모습을 보고 평안하게 눈을 감으실 것"이라며 "여러분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에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오늘 우리의 진혼제가 찢겨진 역사를 복원하는 큰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는 선조들이 찾아준 조국이 있어 돌아갈 곳이 있다"며 "돌아가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개인의 일들을 충실히 하자"고 당부했다.
●…윤경로 교수는 "60년 만에 처음으로 이 자리에서 진혼제를 지낸 사실에 무척 감격스럽다"며 만세 삼창을 선창했다. 윤교수가 '조국 독립 만세', '민족 통일 만세', '청년 등불 만세'를 선창하고 장정단이 만세 삼창을 하자 주변에서 이를 구경하던 중국인들도 박수를 치며 격려했다.
●…박한용 연구원은 "우리들이 오늘 광복군이었던 장준하를 따르고자 했던 이들이 만든 님을 위한 행진곡을 조선의용군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선배들께 불러드렸다"며 "우리의 노래를 기쁘게 들으셨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선조들이 목숨을 버리며 꿈꾸던 나라는 분단이 되고 특정한 사람들만 부유하게 사는 곳이 아니었다"며 "우리가 돌아가서 할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돌아보자"고 제안했다.
●…이날 통역을 위해 장정단과 동행했던 한단시 관계자는 진혼제를 참관한 "숙연하고 진지한 진혼제 의식에 눈물이 흘렀다"며 "함께 지켜보던 모든 중국인들도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장정단은 진혼제 뒤 한단시로 다시 이동해 저녁 식사를 한 뒤 버스 편으로 다음날이 26일 새벽 1시쯤 북경에 도착했다. 25일 저녁 식사 때는 한단시 싱춘민 여의국장(한국의 관광국장에 해당)이 자리를 함께 했다. 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일제에게 학살당했다는 싱 국장은 "윤세주 60주기를 기념하는 학술대회를 열자고 허베이성 성정부에 보고서를 올렸는데 성사가 된다며 한국의 학자들도 초청을 하고 싶다"며 "가능하다면 한단시의 학생들도 한국을 방문하는 등 양국의 교류가 증진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일제 식민지 말기 시대인 1940년대 독립운동은 국내는 물론 1930년대 후반 활발했던 만주 항일무장 운동 세력도 1941년을 기해 소련 영내로 물러나면서 이렇다할 활동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최전선이 1920년대에 식민지 조선이었다면,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이 전선은 만주로 이동하였고, 1937년의 중일전쟁을 계기로 전선은 다시 북중국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조선독립동맹이 활동한 화북지역은 당시로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최전선이었다. 독립동맹은 1940년대 이 최전선에서 일제와 치열하게 무장 투쟁을 전개한 유일한 민족해방운동세력이었다. 그러나 해방은 국내 진공을 준비하던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전에 너무나 갑자기 찾아왔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함께 그들은 해방을 기쁨보다 아쉬움으로 맞이하게 된다.
조선독립동맹은 1940년대 한국민족해방운동사에서 큰 획을 그었다. 우파 중심의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일성, 최현 중심의 만주의 동북항일연군, 그리고 중국 화북의 조선독립동맹 정도가 당시 큰 독립운동세력이었다. 조선독립동맹은 또한 만주의 항일 빨치산 활동이 좌절된 후 중국에 남은 거의 유일한 공산주의 정치조직으로 휘하에 무장조직인 조선의용군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해방 후 북한에서 조선 신민당으로 재편된 독립동맹은 북조선 노동당과 조선인민군의 유력한 모태가 되었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형성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우선 초대 조선의용대장을 지내고 조선의용대 성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약산 김원봉이 한봉근, 황상규, 석정 윤세주 등과 지린(吉林)에서 의열단을 결성한다. 1920년대 전반기 수백 차례의 테러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의열단은 1925년부터 반일투쟁의 방침을 바꾸어 민족해방투쟁의 이론적인 학습에 힘쓰며 군사기술을 갖춘 간부배양에 주력하게 된다.
1932년 11월 의열단은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한국광복동지회와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한다. 이 조직은 곧 한국민족혁명당으로, 다시 1935년(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명한다. 이들은 기본강령으로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조선민족의 자유해방을 쟁취하며, 전 민족을 토대로 하되 주요하게는 농민, 노동자, 소자산계급에게 편중한다고 규정했다. 간부육성을 위해 중국 난징(南京)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워 약산 김원봉을 교장에 추대하여, 3기 졸업생까지 300여 명의 조선민족청년군사간부가 배양되었다. 산하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 2개 지대가 창설됐다. 제1지대는 지대장 박효삼, 정치지도원 왕조를 중심으로 76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중국국민당 4?9전구에서 활동하였다. 제2지대는 지대장 이익성, 정치지도원 임평을 중심으로 7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중국국민당 1?2?5전구에서 활동하였다. 뒤에 구성된 제3지대는 61명의 대원이 참여했으며, 중국국민당 3?9전구에서 활동하다가 김원봉의 지도하에 충칭으로 이동한다.
한편 화북 지방에서는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북상한 최창익, 이유민 등이 무정을 중심으로 1941년 1월 10일 산서성 진동남의 태항산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한다. 1941년 7월과 8월 산하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창설하고 지대장 박효삼을 임명한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간부 훈련반을 창설해 교장 무정, 부교장 진광화, 교사 왕지연, 최창익, 윤세주, 박무, 박효삼 등의 진용을 갖추어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는다. 1942년 8월 15일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바뀌면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한다.
조선독립동맹을 구성한 혁명가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중국공산당의 해방구가 존재했던 화북 특히 연안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중국혁명과 항일전에 참가한 경력이 있고, 박일우나 진광화처럼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 출신이나 이유민, 장진광처럼 항일군정대학 출신이다. 이들의 지도자격인 인물은 무정이다. 무정은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홍군의 대장정에 참가해 중국공산당이 가장 신임하는 조선인으로 팔로군 포병단 창설을 주도했다. 1941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장, 1945년 조선의용군 총사령을 역임한다. 둘째는 중국 국민당 지구에서 민족주의자와 행동을 함께 하던 공산주의자 및 이들을 따르던 급진적인 청년들이다. 최창익은 제3차 조선공산당의 간부로 활동하다 1928년 체포되어 형을 산 후,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한 후 조선의용대 2구대를 조선청년전시복무단(후에 조선청년전위동맹으로 개칭)으로 개편해 이들과 함께 화북으로 진출, 1942년 조선독립동맹 부주석에 취임한다. 한빈은 1941년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을 조직하고 그 휘하의 조선의용대 일부와 함께 연안으로 가 1942년 독립동맹 부수석에 취임한다. 그 밖에 독립동맹 중앙집행위원인 김학무나 독립동맹 선전부장인 김창만 등이 이 그룹을 구성한다. 셋째는 민족주의자, 민족혁명당원들이다. 이들은 중국국민당 내부에 설치된 조선혁명간부학교나 중국 중앙군관학교 성자분교 출신자들로서 김원봉과 황포군관학교 동기생인 조선의용대 3지대장 박효삼, 조선의용대 3지대 정치지도원 양민산, 이춘암 등이 있다. 앞의 세 그룹 이외에 저명한 민족주의자 김두봉의 존재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주시경에게서 수학한 유명한 한글학자인 그는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가해 1942년 8월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에 취임한다. 김두봉은 독립동맹 지도자 가운데 가장 오랜 혁명 경력과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통합'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조선의용군의 대표적인 항일 전투는 다음과 같다. 호가장 전투는 1941년 12월 12일 아직 조선의용대의 이름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화북성 석가장에 가까운 원씨현 호가장 부락에서 무장선전대 30명과 일본군 500여명의 전투이다. 김세광 대장 이하 29명이 팔로군의 정치공작에 협력하여 호가장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근거지로 철수하던 중에 붙은 교전으로 ‘최후의 분대장’의 주인공 김학철 선생이 다리 부상을 입고 나가사끼 형무소로 송치된 바로 그 전투이다. 4명이 사망했다. 반소탕전은 1942년 5월 일본군이 20개 사단을 동원하여 태항산맥의 마전에서 한중 양국이 투쟁한 전투이다. 5월 29일 팔로군 사령부는 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양측의 산을 조선의용군이 공격하여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선의용군(당시 무정은 연안에 있어서 마전전투의 총지휘는 부사령 박효삼이 담당)은 석정 윤세주와 진광화(본명 김창화)가 전사하는 희생을 치르고 작전을 성공하여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은 일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팔로군 전방 참모장 좌권 장군도 희생되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그를 기려 마전은 좌권현으로 개명한다. 당시 이 반소탕전은 조선의용군에게 가장 큰 시련이어서 그들 사이에서는 힘든 일이 있으면 '1942년을 상기하라!', '1942년을 잊었으냐?'는 말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크고 작은 전투 이후 1944년이 되면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연안으로 후퇴한다. 1945년 광복의 기운이 보일 무렵인 8월 12일 주덕 팔로군 총사령은 '명령6호'를 발하여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행하는 의용군에 대하여 팔로군 및 전 동북국부군과 함께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 해방의 임무를 달성하도록 명하게 된다.
해방 후 1945년 11월 말에서 12월 중순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신의주에서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게 된다. 당시 독립동맹의 주석 김두봉, 부주석 최창익·한빈, 집행위원 무정·허정숙·이유민·박효삼·박일우·김창만·양민산·주춘길·방우용·하앙천,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 부사령 박효삼·박일우 등의 구성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노선을 주장하던 조선독립동맹은 1946년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한다. 조선독립동맹은 구성원은 공산주의자가 중심이나 강령은 공산주의적 색채를 거의 띠지 않는다. 강령내용은 김구과 김원봉이 발표한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간' 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익 민족주의자도 포괄할 수 있는 민족해방운동의 초당파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독립동맹은 자신의 존재를 "조선의 독립을 전취하기 위한 한 지방단체"로 규정, 민족해방운동에서 유일한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독립동맹을 승인하지 않았던 임정과는 대조적이라 하겠다.
앞서 언급한 호가장 전투에서 부상하여 일본에 압송된 조선의용대원 김학철 선생은 모교인 서울 보성고에서 수여하는 '자랑스런 보성인' 시상식에서 다음의 인사말을 남겼다.
"상을 받기가 정말 쑥스럽습니다. 일본군에 맞서 싸우긴 싸웠지만 열 번에 아홉 번쯤은 지는 싸움을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 어쩌다 한 번쯤 이긴다는 것도 적군을 한둘 또는 서넛 살상을 하면 아주 괜찮은 걸로 들 여겼습니다. 적아 400만 이상의 군대가 마구 어우러져 엎치락뒤치락 싸워대는 판에 우리 조선의용군은 총 몇 백 자루가 고작. 그럴 가지고 어떻게 큰 판 싸움을 벌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새발의 피지요. 그러게 혁혁한 전과하시는 데는 낯이 간지럽습니다.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은 그 전 과정을 통해, 대첩 운운하는 따위의 거창한 용어로 표현할만한 전역(轉役)을, 우리 단독으로는 애당초에 치러보지를 못했습니다. 중국군에 편승을 하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조선의용군이 윷진아비마냥 자꾸 지면서도 일본군이 무조건 항복을 하는 날까지 계속 달려든 것만은 평가를 받을 만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