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여 도우소서
좋은 차를 평가하는 기준중의 하나는 좋은 브레이크라고 할 수 있다. 차는 앞으로 나가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는 멈추어서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해야만 한다., 아무리 좋은 차라고 할지라도 브레이크가 없으면 큰일 난다. 멈추어야
할 때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충격 없이 멈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차가 정말 좋은 차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급 브레이크나 필요이상의 브레이크를 사용치 않는다. 앞뒤좌우의 형편을 잘 관찰하며 변화하는 속도의 흐름을 잘 타기 때문이다.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문화는 “속도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더 빨리” “더 크게” 인생길을 달리기 원한다. “더 빨리” 더 크게” 가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도 필요하실 때에는 원하는 것을 속히 이루기 위해서 속도를 내게도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것은 “인간적인 생각과 육신적인 야망으로” 무리한 속도를 내며 우리의 영혼을 돌아 보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 것은 “위험한 인생”이다.
우리들의 인생길에서 지속적으로 승리하길 원한다면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속도를 줄이고 잠시 멈추어 서는 것이다. 그리고 방향을 새롭게 점검하는 것이다. 영혼이 병든 성공, 영감이 없는 설교, 영감이 없는 연주는 참으로 위험한 것이다.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인 아이작스턴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중국에는 전국에서 선발한
어린아이들을 모아서 만든 국립현악 단이 있었다. 10억의 인구 중에 선발된 아이들이기 때문에 보통 연주를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공연의 특유의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훈련을 시켰기 때문에 열살 안팎의 어린아이들이
차이코프스키의 어려운 곡들도 굉장히 잘 연주했다. 연주가 끝난 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책임자가 아이작스턴
한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아이작스톤은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첫째, 어린 나이에 기교 있는
음악을 아이들이 연주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둘째, 그러면서도
이토록 영혼이 없는 음악은 처음이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 인가?. 스파르타식 훈련을 통하여 빠른 시간 내에 연주하는 기교를
습득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혼이 담긴 연주, 영감이
넘치는 연주는 그렇게 단 시일 내에 되는 것이 아니다. 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 성공하기
위해서 속도는 분명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 빠르고 큰 성공 속에 양심이 없고, 영혼이 없고, 하나님이 없다면 그 성공은 마치 금세기 최고인 초호화
여객선이었던 “타이타닉호” 같은 위험한 성공이다.
‘타이타닉”은 최고의 크기와 최고의 속도와 당대 최고급을 상징했던 여객선 이었지만 너무
분별없는 빠른 속도 때문에 브레이크를 사용할 시간을 놓쳐서 그만 방향을 잃고 어이없이 작은 암초에 부딪쳐 침몰한 엄청난 참사의 비극으로 역사 속에
사라졌다. 그렇다. 우리 인생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과감하게 속도를 줄여야 한다.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빨리 돌이키는 것이 지혜다.
사도행전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도 즉시 자신들의 행동을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초대교회의 큰 일꾼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받았을 것이다. 부부일심동체라고 하나님앞에 약속하고
사람들 앞에 자신의 가식적인 헌신보이고 잘난체하다 막상 땅이 팔리고 돈이 생기니 본전생각이 났다. 성령님께 속이려다 부부는 졸지에 줄 초상났다. 하나님앞에서 계산하지마라 가장 미련한 짓이다.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약속도 함부로 기도하지 마라. 하나님은 모든
것이 풍부한 전능 자이다. 자신들의 삶을 위하여 각별히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약속했으면 목숨 바쳐 지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라.
그러나 많은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사람듣기 좋은 지키지 못할
기도와 약속을 가벼이 안다. 잘못 나갔던 길을 돌이켰던 제자 “베드로”와 생각을 돌이키지 않고 지체했던 가롯유다를 보라!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이다. 그러나 그 두 제자의 운명은 주님께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엄청난 징계와 축복으로
삶으로 바뀌게 되었다.
베드로는 다시 주님께 돌아와 [진정한 회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함으로서 이 땅의 삶 속에서도 “천국열쇠”를 하사 받는 영광을 누렸지만 돌이킬 줄 몰랐던 가롯유다는
인간적인 뉘우침과 후회는 있었으나 끝내 주님께 돌아오지[회개] 않아
스스로 처절한 죽음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세세 무궁토록 “배반자”라는
이름으로 저주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것이 회개의 차이다. 죄보다
무서운 것이 “회개”이다.
그렇다. 회개의 과정은 고통스럽다. 마치 “환란”을 만난 것 같은 아픔을 통과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환란”이란
말이 신비스럽다. 환란의 의미가 은혜롭다. “환란’ 이란 말의 히브리 어원은 “탈곡기에서 곡식을 탈곡하다” 는 말에서 나왔는데 가을철에 잘 익은 벼를 탈곡기에 넣어서 곡식의 껍질을 벗길 때 곡식은 아플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깨끗하고 순수한 쌀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탈곡과정을 통해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이 구분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영혼을 “영혼의 탈곡” 과정을 통하여 [회개의 과정] 우리가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사람과 떠나야 할 사람을 구분해 주신다.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 놀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을 남겨주시고 나머지는 거두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신다. 우리는
집착함으로 가 아니라 집착할 것을 내려 놓음으로 더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두 손을 펼 때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철저한 회개”를 위해 잠시 멈추어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슨 일을 해도 잘 되지 않을
때는 잠시 멈추어 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말씀을 사모하고 어찌하든지 예배를 회복하라.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기
위해 삶을 점검하라.
버려야 할 것을 버리시오. 비워야 할 것을 비우시오. 떠나야
할 것을 떠나시오. 잊어야 할 것을 잊으시오
사 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지나온 그 많은 날들 헛되이 보내고 이제 주님 만남으로 새 인생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재능과 은사 그리고 장점을
점검하라.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점검하라. 우리가
쉬지 않고 일할 때보다 우리가 잠자는 안식시간에 하나님은 더욱 많은 일을 할 수가 있다. 우리가 멈추어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 우리가 움직일 때 오히려 하나님은 멈추실
때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균형을 유지 해야 한다. 너무 자주 방향을 전환하기 위하여 멈추어 서지는
말라. 아무리 브레이크가 좋아도 자주 사용하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자주 방향을 전환하게 되면
방향전환이 아니라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잠시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라.
하나님은 궤도를 빗나간 자를 책망 하시기보다는 오히려 빗나간 궤도를 수정하지 않는 자를 책망한다. 이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찢어지는 것으로 더 악화되지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찢어질 때는 [철저한
회개]를 할 때 최선의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만약 회개를 미룬다면 당신은 결국 그 귀한 영혼을 사단에게 빼앗길
것이다. 우리모두는 주님 앞에 배반자다. 그러나 회개의 선택에
따라 엄청난 영광과 엄청난 징계가 기다린다. 베드로 인생이 될 것인가? 가롯유다 인생이 될 것인가? 선택은? You!
주님!
지나온 그 많은 날들 헛되이 보내고
이제 주님 만남으로 새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나의 이 연약함을.. 나는 너무나 잘 압니다.
주님께서 저를 도와주셔야만 새 인생이 가능합니다.
오 주여! 도우소서 간절히 비옵나니
이 악한 세상에서 죄악과 벗하지 않으며
겸손하게 주의 뜻을 좇아가기 원하오니
나를 도우사 강건케 하여 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써 이기게 하소서
오 주여 도우소서!
오 주여 도우소서!
오 주여 도우소서!
JOHN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