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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탄 의거와 종로경찰서 폭파, 그리고 조선혁명선언
김약산은 1921년 겨울과 1922년 봄을 정중동(靜中動)의 태도로 맞고 보냈다. 의열단의 기습공격은 주춤하였지만 그의 행보는 매우 바빴다. 그는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제휴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놀라운 첩보를 손에 넣었다. 일본의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에 갔다가 제 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싱가포르와 홍콩을 거쳐 상해에 들른다는 것이었다. 일본군 대장을 죽일 것인가. 그는 기관 파괴가 아니라 그야말로 암살인지라 망설였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일본군 대장을 암살한다고 해서 독립이 성취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성공하면 독립투쟁의 국면을 바꿀 수 있다. 종이호랑이 같은 중국에도 경종을 울리고, 3․1 만세 운동과 청산리 전투 이후 주춤해 있는 조선 민중과 독립운동 진영을 흔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약산은 이종암 ․ 오성륜 ․ 김익상 동지를 불러놓고 추상같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죽이시오,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이 이토오를 죽일 때 그랬던 것처럼 3중의 공격을 준비해야 하오. 상해는 김익상 동지가, 남경은 오성륜 동지가, 천진과 북경은 이종암 동지가 맡으시오.”
단원들은 그의 단호한 음성에 어깨를 꼿꼿이 폈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었다. 다음날 다나카가 상해에만 들르고 곧장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정보가 들어왔던 것이다.
약산은 세 사람을 다시 모이게 했다. 상해에서 끝내야 한다. 안중근 의사가 그렇게 한 것처럼 한 사람이 권총을 품고 기다렸다가 다나카가 배에서 내리는 순간 저격하면 될 일이었다. 그는 최고의 명사수인 오성륜을 보내고 싶었으나 이종암과 김익상이 양보하지 않았다. 이종암은 국내 잠입을 해서 동지들만 잃고 돌아온 것을 만회하려 하고 있었고, 김익상은 조선총독부를 뚫고 들어가 거사를 하고 나온 자신이야말로 최적임자라고 우기고 있었다.
김약산이 엄격한 음성으로 선언했다.
“역시 3중으로 합니다. 오성륜 동지는 다나카가 배에서 내릴 때, 김익상 동지는 그자가 일본영사관에서 보낸 차를 향해 걸어갈 때, 이종암 동지는 그자가 자동차에 오를 때를 노립시다.”
1922년 3월 28일 오후 3시 30분, 약산은 부두가 잘 보이는 둔덕 길 위에 곳에 서 있었다. 그는 서상락 ․ 강세우 동지와 함께 자전거를 하나씩 끌고 나가 있었다. 거사에 나선 세 동지가 위급해지면 자전거를 넘겨주자는 계산이었다.
“의백 동지, 배가 들어옵니다.”
서상락이 멀리서 내항으로 머리를 돌리고 다가오고 있는 기선을 가리켰다.
약산은 심호흡을 하며 곧 배가 접안될 부두를 바라보았다. 부두는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국제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중국인, 일본인, 조선인, 인도인,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 등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상해 황포탄의 국제부두에 나와 있었다. 자동차들과 마차들, 인력거들도 몰려와 있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여느 날과 달리 일본군 거물이 오는지라 홍콩 주재 일본 영사와 관리들이 영접하러 나오고, 각국 신문 기자들도 많았다. 그들의 뒤에는 일본 거류민들이 일장기를 흔들며 도열해 있었다.
다나카 대장을 태운 기선이 황포탄의 홍구(虹口) 부두에 접안했다. 약산은 둔덕 위에 서서, 일본군 해군 의장병 수십 명과 일본 조계의 순사들로 보이는 경관 수십 명, 그리고 미군과 영국군들이 합동경비를 위해 부두 주변에 배치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성륜 ․ 김익상 ․ 이종암 세 동지가 자리잡은 곳을 눈여겨보았다. 인파가 많은 것이 도움이 될 것인가 장해가 될 것인가. 오성륜이 최고의 명사수인데다 김익상과 오성륜이 고성능 폭탄을 하나씩 갖고 있으므로 성공 가능성은 많아 보였다. 일단 적을 쓰러뜨린 뒤에는 인파가 많은 것이 탈출에 도움을 줄 것 같았다.
일본군 의장병들의 지휘자인 듯한 자가 외치는 “차렷!” 구령 소리가 들려왔다. 김약산이 목을 뽑고 보니 선복(船腹)으로 이어진 램프에서 제복의 금장식이 번쩍거리는 장성 하나가 걸어 내려왔다. 그자의 발이 지상에 닿은 순간, 고급장교와 관리들이 도열해 서서 악수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오성륜이 다가갔다. 순간을 포착해 권총을 꺼내 조준하는 것이 보였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김약산은 눈을 의심했다. 그 순간에 금발의 서양 여자가 갑자기 조준선에 뛰어드는 것을. 아마도 모자가 해풍에 날려가자 잡으려고 한 것 같았다. 쓰러진 것은 다나카 대장이 아니라 서양 여자였다. 1차는 실패로구나 하고 그가 눈을 부릅뜨고 보니 다나카는 땅바닥에 납작 배를 갈고 엎드려 있었다.
오성륜은 성공한 것으로 믿는 듯했다.
“차오시엔 두리완쑤에이! 이리에투완 완쑤에이!(조선독립만세! 의열단 만세!)”
큰 소리로 외치며 자신을 탈출시키기 위해 기다리는 자동차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아수라장이 된 군중 속으로 김익상이 권총을 뽑아들고 달려 들어가, 막 몸을 일으켜 줄달음질치는 다나카의 등을 향해 두 발을 쏘았다. 군모에 맞은 듯 군모가 홱 벗겨져 날아갔다. 김익상은 품속에서 폭탄을 꺼내 옆에 있는 전주에 부딪친 다음 힘차게 던졌다. 폭탄은 다나카의 뒤쪽에서 터졌다. 다나카를 에워싸듯 겹겹으로 호위하며 달리던 일본군 병사들이 몸이 붕 떠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다나카는 다리에 피를 흘리며 병사들의 부축을 받고 자동차에 올랐다. 자동차가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하자 제3선을 맡은 이종암이 역시 폭탄을 땅바닥에 부딪쳐 신관을 작동시킨 뒤 힘차게 던졌다.
“다나카야! 지옥으로 가거라!”
폭탄은 차 옆구리에 맞았으나 시한신관의 시간차가 1초쯤 빗나가 달리는 차의 뒤에서 터졌고 자동차는 뒷유리가 박살나고 꽁무니에 불이 붙은 채 달려갔다.
혹시나 하여 있는 힘을 다해 자전거 페달을 밟아 거사지점으로 달리던 김약산은 멀리 뒤꽁무니를 보이고 사라져가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아아, 천운이 다나카를 돕는구나. 어떻게 총탄과 폭탄을 저렇게 피해간단 말인가. 이제 남은 건 세 동지를 구출해 빼돌리는 일이었다. 그는 열심히 자전거를 달렸다. 그는 이종암과 거리가 가까웠다. 서상락과 강세우에게 자신은 이종암을 따라간다고 손짓해 알리고 그 쪽을 향해 자전거를 달렸다.
이종암은 아수라장이 된 부두를 빠져나가 뒤쫓는 군중을 이끈 채 거리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그 뒤로 헌병과 순사, 밀정 들은 물론이고 일반 군중까지 쫓아 달리고 있었다.
약산은 고꾸라질 듯 자전거를 몰아 뒤를 따랐다. 그러나 군중들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군중은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뛰어나온 사람들도 덩달아 달리고 있었다. 저러다가 골목에서 뛰어나온 사람들에게 잡히겠군. 그가 긴장하여 시선을 떼지 못하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종암이 달려가면서 반외투를 활활 벗더니 막 골목에서 튀어나온 사람에게 건네줬다. 아직 3월이지만 바닷바람이 찰 것이라면서 입고 나온 고급의 모직 반외투였다. 반외투 속에서 드러난 이종암의 옷은 달리는 사람들과 같은 청색 마꿸이었다. 건네받은 사람은 물색없이 얼른 반외투를 입었다.
그는 지그재그로 달리며 이따금 짐을 가득 실은 우마차와 자동차를 에워 돌아 달렸는데 갑자기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사라져 버린 게 아니라 사람들과 똑같아서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종암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임기응변의 기지로 위기를 벗어난 것이었다.
김약산은 헌병과 순사와 밀정 들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볼 때처럼 무연하게 돌아서는 것을 보며 안심하고 자전거를 다른 방향으로 몰았다. 다른 두 동지도 그렇게 피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는 프랑스 조계에 있는 제6 아지트로 갔다. 이 사건 이후 숨어들기 위해 다섯 곳의 숙소를 버리고 다시 구한 곳이었다.
밤이 되자 서상락과 강세우가 와서 보고했다.
“오성륜 동지와 김익상 동지는 잡혔소이다. 이종암 동지는 제7숙소로 무사히 돌아와 있소이다.”
두 동지가 지켜보고 들은 바를 종합한 바에 의하면 결과는 이러했다.
김익상과 오성륜은 허공에 권총을 쏘아가며 아수라장 속을 함께 달렸다. 수십 명의 경찰과 헌병과 민간인이 마구 쫓아왔다.
두 사람은 소리쳤다.
“쫑구어 평요 칭 뿌야오 쭈 땅. 워먼 스차오시엔더 뚜리 짠스!(중국 인민들은 우리를 막지 마시오. 우리는 조선의 독립투사요!)”
중국 순경 하나가 달려들었으나 김익상의 발길에 얼굴을 맞고 고꾸라졌고, 인도(印度) 출신 경찰관 한 사람은 길을 가로막다가 오성륜이 쏜 총탄을 다리에 맞고 쓰러졌다. 영국 신문기자 한 사람이 김익상에게 덤벼들어 권총을 빼앗으려다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다.
두 사람은 구강로(九江路)를 지나 사천로(四川路)로 내달렸다. 그 때 그곳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황포(黃布)룰 씌운 인력거들이 있었다. 누가 소리쳤는지 인력거꾼들이 한꺼번에 달려와 앞을 막았다.
권총 탄약이 떨어지고 다리에 힘도 떨어졌다. 그리하여 김익상과 오성륜은 자동차를 타고 뒤쫓아 온 헌병들에게 포박당했다. 그리고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며 공동조계 공부국으로 끌려갔다.
서상락과 강세우의 보고를 받고 김약산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인력거꾼들이 왜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단 말인가. 왜놈들이 자기들의 적인 줄도 모르고.”
그는 밀려오는 억울함을 삭이며 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제7 아지트로 가서 이종암을 만났다. 이종암은 뱃심 좋게 신문을 구해다 읽고 있었다.
“의백 동지, 미안하외다. 임무 완수를 못해서.”
김약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놈의 다나카가 천운을 만난 탓이오.”
신문은 황포탄 부두와 상해 시내를 쑥밭으로 만들었던 테러리스트들이 김약산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 비밀결사 의열단 멤버들이며, 다나카 대신 총을 맞은 서양 여인은 미국에서 신혼여행을 온 스나이더 부인이라고 밝히고 있었다.
약산이나 의열단원들은 알지 못했지만 황포탄 의거는 상해 주재 특파원들에 의해 전 세계로 타전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의열단의 존재와, 조선인들의 독립 투쟁의지가 선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 사건의 후폭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의열단원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온대로 북경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북경에서 한 달 가량 지내고 다시 상해로 갔을 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오성륜이 일본 영사관 경찰서 유치장을 부수고 탈옥한 것이었다.
의백 동지, 나는 일본인 죄수 다무라(田村)와 함께 다무라의 아내가 유치장으로 들여보낸 칼로 수갑을 풀고 유치장 자물쇠를 열어 탈출했소이다. 탈출 자금과 의복, 기차표가 필요합니다. 자 세한 것은 훗날 보고하겠습니다.
편지를 받고 김약산은 모든 단원에게 잠복할 것을 명령하고 그의 탈출을 지원했다.
일본 영사관 경찰은 영국과 중국 경찰의 지원을 받아 두 탈옥수의 체포에 힘을 기울였다. 다무라는 사흘만에 체포했으나 오성륜은 찾지 못했다. 거액의 현상금을 붙였으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탈옥 열흘이 지나서 그는 의열단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군 장교의 복장을 하고 천진을 거쳐 봉천으로 갔다.
반년 쯤 뒤에 김약산은 그를 길림에서 만났다.
오성륜은 자책감에 빠져 눈물을 흘렸다.
“나는 다나카 놈에게 명중한 것으로 알았어요. 그 때 내가 한 걸음만 더 달려 나가 한 발만 더 쐈어도 그자는 죽고, 2선과 3선의 동지들은 나설 필요조차 없었어요.”
김약산은 그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자책하지 말아요. 다 지난 일이니.”
오성륜은 죽은 미국 여인의 남편이 유치장으로 면회 온 일을 이야기했다. 그의 이름은 아놀드 스나이더였다. 상해로 신혼여행을 온 그는 아내가 비명횡사하자 살인자를 저주하며 며칠을 보냈다. 아내의 사체를 소독하고 방부처리를 해야 귀국할 수 있기 때문에 상해에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범인이 왜 일본 장군을 쏘았는가 궁금해서 신문을 보았다.「샹하이 모닝 포스트」라는 영어신문이었다. 그는 거기서 총을 쏜 사람이 조선의 독립투사라는 것을 알았다.
스나이더는 오성륜을 면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나는 불행합니다. 그러나 결코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총을 발사하는 순간에 아내는 모자를 집으러 장군의 앞으로 갔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조국독립을 위해 총을 쐈으니까요.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앞으로 내게 기회가 오면 당신 민족의 해방운동을 돕고 싶습니다.”
오성륜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내 잘못을 그렇게 용서하다니, 당신은 너그러운 분이군요. 나는 평생 당신 부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그 때의 일을 다 이야기하고 나서 오성륜은 중얼거렸다.
“그 때 내 눈에 뭣이 씌었었나 봐요. 나는 다나카에게 명중한 걸로 알았어요.”
오성륜은 공산주의 사상에 젖어 가고 있었다. 그가 모스크바 유학을 원한다며 허락을 요청해 김약산은 쾌히 승낙했다.
그 무렵 김약산은 단원들이 입수한「동아일보」에서 김익상의 소식을 읽었다. 혼자 감옥에 남은 김익상은 고문에 못 이겨 예전의 조선총독부 폭파사건을 고백했고 일본 나가사키 감옥으로 이감되어 있었다.
황포탄 작전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 실패로 끝났지만 그 사건 자체와 오성륜의 탈옥은 일본인들을 두렵게 만들고, 중국인들에게 조선 민족이 강인한 민족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참으로 대담한 사람들이지 않은가. 수천 명 군중 속으로 달려가며 일본군 대장에게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다니.”
“나라를 찾겠다고 한 목숨을 그렇게 던지다니, 사나이 중의 사나이지. 게다가 한 사람은 현장에서 탈출했고 한 사람은 탈옥했다지 않은가.”
중국인들은 그렇게 말했다.
일본의 압력에 밀려 종이호랑이처럼 꼼짝 못하고 쩔쩔매는 중국 정부에 대해 불안을 느껴오던 그들은 그 사건으로 일종의 통쾌한 대리충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메아리는 고국에서도 들려오고 있었다. 소문을 전한 사람이 말했다.
“총독부가 애써 보도통제를 했지만 소문이 입에서 입을 타고 저자거리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지요. 조선 땅에서 임시정부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의열단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아이들도 골목길에서 ‘장하다 의열단!’하고 외치다가 깜짝 놀란 부모에게 입을 틀어 막힌 채 집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식민지를 경영하는 열강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한 성공적인 측면이 있었다. 피식민지인들의 독립정신을 부추기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미국 측 반응이 그러했다. 황포탄 의거 직후 상해에 머무르고 있던 미국 공사 샬만은 기자들에게 말했다.
“조선인들이 독립 투쟁의 방법으로 공산주의자들처럼 잔혹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을 미국은 물론 세계 어떤 나라도 찬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의열단들의 저격으로 미국인이 절명한 사실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자 임시정부는 황포탄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임시정부와 그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조선의 독립은 과격주의와 공포적 수단을 취하여 달성할 일이 아니라’고 못박았던 것이다.
그것은 분열과 무능으로 약화되고 있던 임시정부의 입장을 더 궁색하게 만들었다. 한동안 주춤했던 북경파 인사들의 국민대표회의 소집 명분을 크게 해 주었다. 그리고 전체 독립운동 진영에서 의열단과 김약산의 위상을 뚜렷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 가운데 김약산은 한형권(韓亨權)에게서 4만원의 활동자금을 받았다. 한형권은 일찍이 러시아 연해주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든 권업회의 멤버로 활동한 사람이었다. 그 뒤 이동휘의 명령으로 러시아로 가서 레닌에게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지원금 60만원을 받았다.
그 돈은 40만원이 상해까지 무사히 도착했는데 그 돈은 임시정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가 이리저리 사용했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 이동휘는 총리에서 물러났다. 한형권은 러시아에 남겨두었던 20만원을 들여와 국민대표회의 자금으로 사용하면서 의열단에 4만원을 준 것이었다.
당시 상해의 독립운동 진영은 여러 개의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를 고수하려는 계열을 ‘고수파’라 했고, 여운형과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려고 하는 계열을 ‘개조파’라고 했으며, 그리고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를 보다 안전한 러시아 연해주에서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계열을 창조파라 했다. 한형권은 창조파였다.
한형권은 김약산에게 돈을 주며 말했다.
“나는 의열단이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동지들이 상해에서 안전하게 체류하도록 도와주리라고 믿습니다.”
한형권의 레닌 자금을 관리하던 김립(金立)이 상해에 와서 반대파들에게 암살당한 터라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김약산이 답했다.
“돈을 주었다고 해서 나와 의열단을 창조파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은 갖지 마십시오. 국민대표회의도 진정한 통합이 아니라 세력 싸움인 것 같아 싫습니다. 한동지와 한동지 동료들의 신분 안전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지요. 조국독립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향해 분투하는 분들이니까요.”
김약산은 그렇게 해서 임시정부를 둘러싼 독립운동 지도자들 간의 갈등에서 벗어나고 활동자금을 넉넉하게 확보했다. 그러나 상해의 조선인들에게 그는 무정부주의자라는 인상을 다시 강하게 보여 주었다.
어느 날 장지락이 그에게 그런 말들을 전하면서 덧붙였다.
“의백은 사실 남들에게 아나키스트처럼 보이게 행동해온 거 아니에요? 의열단도 의백과 명목상의 부단장이 있을 뿐이지 누구는 정보부장이다, 누구는 총무부장이다, 누구는 사찰부장이다 따위 조직을 안 갖추고 있지요. 그러니까 아나키스트 냄새가 나지요.”
김약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냥 웃다가 입을 열었다.
“장지락, 자네가 의열단원일 줄 모르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말하는군.”
“나는 철저하게 숨겨진 비밀단원이니까 사람들이 알 리가 없지요. 그 사람들은 말해요. 의열단은 마치 강력한 유대감으로 묶인 무슨 종교집단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김약산은 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장지락은 나이가 일곱 살이나 아래지만 신흥무관학교 동기였다. 게다가 성격이 자유분방해 기탄없이 말을 해 주는 사람이었다.
김약산은 결국 국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단원들을 몇 사람 더 가입시키고 그들을 훈련시켜 내실을 기하는데 주력했다. 이 때 받아들인 단원들 중 그가 공을 들인 사람은 김시현 ․ 김지섭(金祉燮) ․ 최용덕(崔用德) ․ 이태준(李泰俊) 등이었다.
김시현은 독립투사들에게 사상적, 지적 바탕을 만들어주고 있는 최고의 인텔리겐치아였다. 또한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당원이었으며, 최근 당원 자격으로 모스크바의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김약산은 세 해 전 길림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비밀단원으로 가입하기를 희망했을 때 김약산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다시 뵙고 가르침 받을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단원이 되신다니요.”
늘 겸손하고 점잖아 보이던 김시현은 표정이 엄숙해졌다.
“의백, 나는 평단원이 되고 싶소이다. 의백의 명령을 받아 권총과 폭탄을 들고 겁 없이 수천 군중 속을 달려 왜놈 대장을 저격했던 황포탄 의거의 용사들처럼.”
“정녕 선생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고 싶단 말씀입니까?”
김시현은 눈물이 글썽글썽해져서 대답했다.
“그렇소. 수십 번 그런 꿈을 꿨소. 임시정부도, 국민대표회의도, 국제법 이론도 다 부질없는 일이오. 나는 적을 향해 총을 쏘고 싶소. 어느 날 김익상 동지에게 내린 것처럼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라, 하고 명령을 내려주오. 그러면 표연하게 나가 죽겠소이다.”
김약산은 어쩔 수 없이 김시현을 단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음속은 감격으로 벅차올랐다.
김지섭도 약산보다 열두 살 연상이었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재판소 서기 겸 통역으로도 일했다. 그러나 강제 합병 뒤 재판이란 것이 애국지사를 감옥으로 보내고, 특히 3․1 만세 운동 때에는 수많은 지사들을 재판하게 되는지라 분연히 중국으로 망명해온 사람이었다.
김약산은 그를 두 말 없이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의열단원들과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최용덕은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나온 현역장교였으며 비행기 조종 교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김약산이 장차 중국군과의 관계를 가질 때를 대비하고 비행학교에 단원들을 보낼 계산으로 받아들인 비밀단원이었다.
이태준은 경성에서 세브란스 의전(醫專)을 나온 의사였다. 그는 외몽고에서 왕족 주치의로 일했는데 중국 내의 조선인 독립투사들과 선이 닿아 있었다. 그 때문에, 레닌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낸 40만원의 거금을 외몽고를 거치게 하여 자신이 맡아 수송함으로써 무사히 들어오게 한 공을 세웠다.
김약산은 이태준을 북경에 있는 중국식 요정에서 만났다. 의열단 활동이 하도 통쾌해서 저녁 식사를 한 번 같이하고 싶다고 이태준이 초청한 것이었다.
이태준이 말했다.
“황포탄 거사를 보도한 신문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저를 의열단원으로 받아주십시오.”
최근에 뜻밖의 인사들을 가입시킨 바 있으므로 약산은 놀라지 않았다. 단원들이 언제 갑자기 총상이나 칼에 의한 부상을 입을 줄 모르므로 의사 단원이 한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고 평소에 가졌던 희망이 이뤄지는 것이 기뻤다.
약산은 그 자리에서 이태준의 입단 서약을 받았다.
밤이 깊어져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즈음 이태준이 말했다.
“의백, 황포탄 의거에서 쓴 폭탄은 자체 제작한 겁니까?”
“아닙니다.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영국인 전문가에게서 산 겁니다. 비싼 돈을 주고 샀지요.”
이태준은 만년필을 꺼내 자기 손바닥에 ‘제림 나이트’라고 썼다.
약산이 물었다.
“제림 나이트가 뭡니까?”
“주먹 만한 것 하나로 집 한 채를 날려버리는 고성능 폭약이지요. 그걸 만들 줄 아는 기술자가 외몽고에 있습니다.”
“그 사람을 데려다 주십시오.”
김약산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생각이었소이다.”
이태준이 말했다.
이태준은 마자르(Magyar)라는 이름을 가진 헝가리인 폭탄 제조 기술자를 데려 오기로 약속하고 외몽고로 돌아갔다.
1922년 초여름, 김약산은 폭탄 기술자가 오기를 기대하면서 제2차 암살 파괴 작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유자명(柳子明)과 남정각(南廷珏)을 국내에 잠입시켜 교통 형편을 정찰하고 폭탄 운송방법을 알아보게 했다. 그리고 무산자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이끌고 있던 김한(金翰)과 접촉하게 했다. 김한은 김사국(金思國)과 함께, 국내에게 막 일어나기 시작한 진보적 청년운동을 지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김약산은 1차 파괴 공작 작전에서 밀양과 경상도 쪽 인맥이 무너진 터라 이번에는 일본 경찰이 짐작 못하는 새로운 인맥을 잡아 거사를 꾸미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밀사는 김한을 만나 김약산의 요청을 전했고, 김한은 기꺼이 승낙했다. 얼마 후 남정각이 김한의 밀서를 갖고 왔다. 김약산은 활동자금 2천원을 그를 통해 김한에게 보냈다.
김약산은 이태준이 폭탄 기술자를 데려 오기를 목을 뽑고 기다렸다. 사실 그는 의열단과 자신의 위상이 높아지고 활동자금도 넉넉해졌지만 고성능 폭탄을 갖지 못한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황포탄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지 반년이 지났지만 그 때 일본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도 폭탄 성능만 컸으면 죽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도대체 지금까지 의열단이 감행한 의거 중에 성능 좋은 폭탄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일본 땅 나가사키에 끌려가 갇혀 있는 동지 김익상을 생각해도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김익상이 황포탄에서 던진 폭탄이 제대로 터졌는데도 다나카 대장을 죽이지 못한 일, 그가 목숨을 걸고 국내로 잠입해가서 조선총독부 건물을 휘저은 거사도 폭탄위력이 더 컸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일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국내 정찰을 끝내고 돌아와 있던 이종암이 그에게 보고했다.
“이태준 동지가 죽었어요.”
“아니, 왜요?”
김약산은 눈을 크게 떴다.
“몽고와 중국의 국경에서 한 외국인을 동반하여 오다가 러시아 백위군에게 총살당했답니다.”
김약산은 실망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로 입단한 이태준이 비명에 간 것이 자신의 부탁 때문일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고 고성능 폭탄 기술자를 구하지 못하게 된 것이 매우 아쉬웠다.
김약산이 의사 이태준의 사망 원인을 파악하고 그 마자르라는 이름을 가진 헝가리 청년을 찾게 할 작정으로 단원 하나를 몽고에 보내려 하고 있는데 이상한 첩보가 들어왔다.
“며칠 전부터 서양 청년이 북경 성내의 술집을 돌아다니며 조선 사람이 있냐고 묻고, 내가 조선인이다, 라고 말하면 김약산을 아느냐고 묻는답니다.”
약산은 보고를 한 동지에게 말했다.
“당장 데려 오시오.”
그 날 밤 의열단원들이 그 청년을 데려 왔다. 짐작한 대로 그 청년은 헝가리 출신 폭탄제조 기술자 마자르였다. 마자르는 이태준의 죽음에 대해 증언해 주었다. 러시아 백위군과 조우했는데 사령관인 세미요노프 장군의 보좌관이 이태준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을 아는 일본인 정보장교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속절없이 처형당한 것이었고 마자르는 러시아어를 잘하는 바람에 적당히 둘러대서 살아남은 것이었다.
김약산은 마자르를 데리고 상해로 돌아왔다. 프랑스 조계에 있는 양옥집을 셋집으로 빌려 폭탄 제조 아지트로 만들었다. 그리고 의열단원 이동화(李東華)에게 마자르를 돕게 했다. 마자르가 중국어나 조선어는 한 마디도 모르고 러시아 어만 알기 때문이었다. 이동화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오래 산 터라 러시아 어에 능통했다. 김약산은 그 외에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여성 독립투사 현계옥(玄桂玉)을 동거하는 여인처럼 위장시켜 그 집에 있게 하였다.
이 집으로 연락원 하나가 드나들며 김약산의 명령을 전했다. 조로태태(曺老太太)라고 불리는 중국인 할머니였다. 병원을 운영하는 중국인의 아내인 그 할머니는 김약산의 옛 동지인 김철성의 양어머니였다.
경륜 높은 단원들이 들어오고, 활동자금도 넉넉하고, 좋은 폭탄도 손에 넣고, 2차 암살 파괴 작전도 희망이 있어 보여 김약산은 뿌듯한 기분으로 늦가을을 보내고 있었다. 11월이면 북경이나 만주는 겨울이 시작되지만 상해는 위도상 훨씬 남쪽에 있어 단풍이 한창이었다.
그 무렵, 그는 뜻밖의 친구와 해후를 했다. 이명건이 상해에 온 것이었다.
조선인들이 많이 출입하는 프랑스 조계의 한 술집에서 스물대여섯 살 된 사람이 술에 취해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상해는 의열단 세상이라던데 어떻게 생긴 사람들인가 한번 보고 싶군. 나도 조선 청년이니까 하는 말이오.”
그러자 옆자리의 술꾼이 말했다.
“거 참, 형씨는 물색도 모르네. 그러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지. 여기가 프랑스가 관장하는 치외법권 지역이라 하지마는 도처에 귀가 있소.”
“누가 나를 죽인단 말입니까?”
“일본 밀정이 알면 의열단에 가입하려는 걸로 알고 처단하려 할 거고, 의열단이 알면 밀정인 줄 알고 처단하러 덤빌 거요.”
물색 모르는 여행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나는 의열단원을 한번 보고 싶다 이 말이에요. 그 사람들이 산같이 생겼는지 물같이 생겼는지 별같이 생겼는지 보고 싶다 이겁니다.”
“이사람 취했군. 온전히 조선 땅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술집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객쩍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술집에는 일본 밀정도, 프랑스의 밀정도, 그리고 의열단의 밀정도 있었다.
다음날 오전 그 사람의 이야기는 김약산에게 보고되었다. 수집한 정보를 중간에서 정리한 이종암이 산, 물, 별이라는 말을 주목한 것이었다. 그는 의백이 두 사람의 친구와 의형제를 맺으며 ‘산과 같다’는 뜻으로 ‘약산’이라는 가명을 만들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말을 듣자마자 약산은 무릎을 쳤다.
“이명건이 왔군. 만나게 해주시오.”
그 날 밤, 또다시 그 술집으로 걸어가던 물색없는 여행객은 두 청년에게 팔을 잡혀 컴컴한 골목으로 끌려 들어갔다. 예리한 칼이 옆구리에서 번쩍거렸다.
“우리는 의열단이다. 당신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은 이여성. 어제 술집에서는 취해서 떠들었소. 다신 안 그럴 테니 놔주시오.”
그는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그런 과정을 거친 끝에 그는 김약산과 마주앉았다.
이명건은 약산을 보자 목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약산 형, 형을 만나려고 목숨 걸고 찾아왔어요.”
약산은 이명건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잘 왔어, 여성아. 어디서 오는 길이냐?”
“그동안 도쿄 릿쿄(立敎)대학을 마쳤어요. 경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형을 만나려고 무작정 온 거 에요.”
이명건은 김약산 ․ 김두전과 함께 평생친구 결의를 하고 남경 금릉대학에 같이 유학했다. 3․1 만세운동 뒤 약산은 무력항쟁을 주장하고 이명건과 김두전은 국내 민중 결집을 통한 항쟁을 주장해 뜻이 갈려 헤어지고 네 해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그는 약산에게 김두전의 소식도 전했다.
“약수 형님도 나처럼 비밀결사를 이끌다가 나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본에 유학했어요. 우리는 일본에서 최근 북성회(北星會)라는 아나키스트 그룹을 조직했어요.”
“그럼 약수 형님은 일본에 있구나.”
“네. 편지를 가져오려고 했는데 왜놈들 수색이 하도 심해서 그냥 왔어요. 나는 왜놈들 식으로 말하면 징역을 산 전과자니까.”
“여성이 자네가 전과자라고?”
“그 때 형님하고 헤어져 바로 귀국해서 혜성단(彗星團)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다가 반년쯤 서대문 형무소에서 콩밥을 먹었지요. 나만 먹었나요? 약수 형님도 콩밥을 먹었어요. 아무튼 약수 형님이 약산 형님에게 하고 싶어 하는 말은 내 머릿속에 다 있어요.”
의열단 동지들이 중국음식점에 가서 술과 음식을 사서 나무상자에 담아 두 사람이 있는 비밀숙소로 가져왔다.
“나는 방학 때만 귀국해 조선 땅에 머물렀지마는 다 압니다. 의열단은 대성공입니다. 겁 없이 목숨을 던지는 투사들에 대해 모든 조선인들은 통쾌한 대리 충족을 느끼지요. 식민지 백성이라는 열패감을 씻어주고 정신적 패배감을 잊게 해주지요. 조선 동포들은 임시정부는 있는지 없는지 몰라도 의열단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구요.”
약산은 그렇게 말하는 이명건에게 술잔을 권했다.
“이보게 아우, 그런 칭송이야 많이 들었네.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지?”
이명건은 술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지금까지 의열단 활동은 행동만 있고 정신은 없는 듯했어요. 피 끓는 젊은이들이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듯한 느낌을 줬다는 거지요. 그래서 최남선(崔南善) 선생과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지었다는 기미독립선언서처럼 장려하고 엄숙한 선언이 필요하지요. 이게 약수 형님과 내가 형님한테 꼭 하고 싶었던 첫 번째 말입니다.”
약산은 명건의 손을 잡았다.
“고맙네. 사실은 나도 그걸 요즘 절실히 느끼고 있었네. 나나 우리 단원들 필력으로는 안 되고, 민족의 양심을 대표하는 분, 항일운동의 사표가 되는 분의 글을 곧 받도록 노력하겠네. 다음 할 말은 뭔가?”
이명건은 찬찬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또 하나 말하지요. 언제까지 테러리스트 두목을 할 거냐, 의열단을 이끌면서 획득한 강력한 지도력과 조선 민족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전체 항일투사들의 중심으로 언제 들어갈 거냐 하는 거지요. 약수 형님과 나는 약산 형님이 언제고 의열단 운영 실무를 제2인자에게 넘겨주고 임시정부나 만주 독립군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약산은 이명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 그의 주변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지만 지휘권을 넘기라는 고언(苦言)을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알았네. 그런데 내 가슴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평생의 책무가 있네. 폭탄을 안고 가서 죽으라는 내 명령을 받고 떠난 동지들이 남긴 유언 말이네. 어떻게든지 의열단을 지속시키고 후배 대원들을 뽑아 의거를 계속하라는 것, 그리고 언제고 기회가 오면 의열단을 군대조직으로 바꾸라는 것, 그리고 군대를 끌고 조국 땅에 진격해 승리하면 큰 소리로 자기 이름을 불러 달라는 것이었네. 내 일신의 영달을 위해 달릴 수는 없네.”
그가 말을 끝내자 이명건이 술을 부어 주었다.
“알았어요. 그 문제는 차근차근 생각해 보세요.”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명건은 사회주의 색채가 짙은 아나키스트 그룹의 리더로 일하고 싶어 하면서도 조선의 고미술사를 미학적 안목으로 연구하고 정리하는 일에 욕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 넌 비밀결사보다는 학자가 어울리지. 계속 연구를 해서 일가를 이뤄 봐.”
약산은 그렇게 격려했다.
이명건은 상해 호강(滬江)대학 도서관에 들이박혀 고미술학 자료를 뒤적이다가 경성으로 떠났다.
김약산은 폭탄제조를 동지들에게 맡겨두고 이종암과 함께 북경으로 갔다. 북경과 천진, 그리고 압록강 국경도시 안동에 있는 비밀 조직망을 가동하여 폭탄을 반입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했다.
쇼우 사장에게 인사하려고 이륭양행에 들른 그는 우연히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안동 일본 영사관 부영사로 김우영(金雨英)이라는 조선인 외교관이 부임했는데 그의 아내가 여류 화가이자 소설가인 나혜석이라는 것이었다.
“아름답고 활발한 신여성이라 시선을 한 몸에 받았지요. 어쩌다 의열단 이야기가 나왔어요. 내가 좌우를 살피고 나서, 김약산 단장을 만난 적이 있다고 그랬더니 나한테 살짝 말해 주더군요. 자기도 당신을 만난 적이 있다고.”
쇼우의 말을 들으면서 김약산은 중앙학교의 스승 나경석의 누이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학창시절 스승님의 누이에요. 스승님 댁에 갔다가 만났지요.”
쇼우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만나게 해 줄까요?
“만나고 싶지요.”하며 김약산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샅샅이 속옷까지 뒤지고 짐이란 짐은 모두 풀어헤쳐 조사하는 압록강 국경의 통관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1퍼센트의 기대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이었다.
비밀 연락을 주고받고 안전을 확보하느라 곡절이 있었지만 그는 나혜석을 중국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녀는 원숙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이 되어 있었다.
“세상을 뒤흔든 의열단 단장이 그 때 만난 원봉 씨인 걸 알고 기절초풍할 뻔했어요. 참으로 장하세요.”
나혜석이 깊은 눈을 들어 말했다.
“고마운 말씀이군요. 침략자 일본에 충성하는 외교관을 남편으로 둔 분, 식민지 현실에 만족하며 미술과 문학에서 명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여성이 하시는 말씀이니 말입니다.”
김약산은 두 눈을 똑바로 들어 끝까지 응시하며 말했다. 그는 오로지 목적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속마음을 떠보아야 하고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음식이 나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묵묵히 젓가락을 움직여 음식을 들었다.
“일본에 붙어사는 조선인들은 민족적 양심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그는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나는 3·1 만세 운동 때 구속당해 다섯 달이나 옥살이를 했어요. 내 남편도 변호사로서 독립투사들을 변호해 ‘만세 변호사’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김약산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음식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 그는 그녀 쪽으로 가서 그녀가 일어나기 좋게 식탁 의자를 뒤로 빼주었다. 그 때 그녀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내 힘이 필요하면 연락해요.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지요?”
김약산의 두뇌는 재빨리 회전했다.
“내가 수원 큰대문집에 갔을 때 독서 토론한 게 멜빌의「백경」과 서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였어요.”
“그랬던가요?”
“그걸 암호로 사용해요.”
나혜석은 무슨 뜻인가 눈을 깜짝거리다가 알아들었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김약산은 안동을 떠나 곧장 북경으로 가서 단재 신채호 선생을 방문했다. 이명건이 권고하고 간 의열단의 정신 선언 때문이었다. 그는 선생이 상해의 임시정부에 몸담고 있을 때 뵌 적이 있었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선생의 안부를 묻고는 한 바 있었다. 선생은 이승만에 반대하여 임시정부와 인연을 끊고 북경에 머물며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었다.
신채호 선생은 민족정신의 지주였다. 성균관 박사 출신으로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을 받아「황성신문」의 논설을 썼으며「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지내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수많은 논문과 저술을 냈다. 그 뒤 신민회를 만드는 데 중심이 되었고 임시정부 의정원 위원이 되었다. 김약산으로서는 소년시절에 표충사에 머물며 선생의「을지문덕전」,「이순신전」등을 읽으며 사숙을 했던 터였다.
그가 찾아가자 선생은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선생님, 늘 찾아 뵌다 뵌다 하면서도 제가 불민해서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비밀결사의 우두머리가 행동이 자유로울 리가 없지. 의백과 의열단이야말로 우리 조선 민족의 자존심을 끝없이 떨쳐 일으키는 유일한 희망이네.”
그는 선생의 서재로 들어가서 큰절을 올렸다.
“선생님, 저희가 급히 창단을 하면서 정신적 바탕이랄까, 선언이랄까, 그런 걸 제대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저희들의 정신을 천명하는 선언을 할 필요가 느껴집니다.”
단재는 껄껄 웃었다.
“선언이나 선전만 앞세우는 사람들보다는 낫지. 독립 운동하는 사람들이 대개 말만 앞세운단 말일세.”
“네. 그래서 선생님께 저희들의 정신적 선언을 기초해 주십사 간청 드립니다.”
단재는 약산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으로 생각하고 하겠네. 내가 지금 써 나가고 있는 책이 곧 탈고가 되니 내가 상해로 가겠네.”
약산은 북경을 떠나 상해로 돌아왔다. 그 때 의열단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김상옥이 면담을 요청해왔다. 김상옥은 국내에서 의열 투쟁을 하다가 두해 전 망명해 와서 의열단에 입단한 뒤 그의 이해를 구하고 지금까지 임시정부 쪽에서 일해 온 터였다.
김상옥은 그의 진정한 애국심과 의열단을 이끌어온 노고에 대하여 깊은 칭송을 하고 나서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의백 동지, 나를 조국 땅으로 보내 주시오. 3년 동안 참아 왔는데 이젠 못 참겠소이다.”
김약산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김상옥을 바라보았다.
“공격할 목표를 이미 정한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사이토(齊藤) 총독 놈하고 종로경찰서요.”
“김선생께서 암살 파괴 공작에 나서는 걸 임시정부의 높은 분들도 알고 있습니까?”
김약산이 물었다. 황포탄 사건 직후 미국의 비난 발언이 있자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와 의열단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조선의 독립은 과격주의와 공포적 수단을 취하여 달성할 일이 아니라’고 천명한 때문이었다.
“알고 있소. 사실은 그분들이 의백에게 도움을 요청하겠다는 걸 내가 말씀드리겠다고 했소. 나도 어엿한 의열단원이니까요.”
김약산은 자신이 복안을 세우고 있고 새 폭탄을 만들고 있으니까 두어 달 기다리라고 하려다가 참았다. 그의 복안이 극히 일부 단원만 아는 기밀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두 해 전 국내 잠입 대원들이 체포된 것이 상해에서부터 기밀이 새나갔기 때문이라고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부하단원들을 아무도 불신하지 않았다. 기밀이 누설된 것은 일본의 첩보망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하의 호걸인 김익상이 황포탄 의거에서 체포당해 조선총독부 폭파 사건의 당사자가 자신이라고 진술한 것은 일본 경찰의 고문취조를 누구도 당할 수 없다는 결론을 그에게 갖게 해 주었던 것이다.
김약산은 문득 새 폭탄을 시험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김한의 인맥이 어떻게 움직여 김상옥을 돕는가를 파악하고 싶었다. 그는 김한과 접선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나서 말했다.
“2~3일 내로 출발하시지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시구요. 폭탄은 오늘 내일 중으로 구하겠습니다.”
김상옥의 얼굴에 감격한 빛이 스쳐 갔다.
김약산은 마자르가 만든 폭탄 세 개를 들고 나가 한 개를 시험해 본 뒤 남은 두 개를 김상옥에게 주었다.
김상옥은 동지 한 사람과 함께 농부로 변장해 그믐날 밤 캄캄한 어둠을 틈타 압록강을 건넜다.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신의주역에서 화물열차를 타고 경기도 일산까지 가는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걸어서 곧장 경성으로 들어갔다.
김한이 그를 만나 말했다.
“김상옥 동지, 먼 길 잘 오셨소이다. 매우 좋은 정보가 있소이다. 한 달 뒤 동경에서 열리는 중추원 회의에 사이토 총독이 참석할 것이오. 사이토는 보나마나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타서 부산진역에 내리겠지요. 두 장소 중 한 곳을 노리면 되겠지요.”
김상옥은 즉각 자기 생각을 말했다.
“남대문역이면 아주 잘 됐소. 나는 재작년 거기서 거사하려다가 못한 터라 한이 맺혀 있소.”
그는 두 해 전 여름, 미국 의회 의원단을 환영하는 총독부 고관들을 살해하려다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망명한 사람이었다.
거사 시점을 기다리며 동지의 집에 잠복해 있던 그는 이상한 사내가 배회하는 것을 보았다. 이미 한 번 실패의 맛을 보았던 그는 아무리 작은 낌새라도 무심히 넘기지 않았다. 들창 밖에도 누군가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뒷문으로 빠져나가 살펴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가 담벽에 몸을 붙이고 들창에 귀를 대고 있었다. 그는 다음날 숙소를 옮겼다.
그는 며칠 뒤 남대문역을 정찰하고 돌아오다가 다시 자신을 미행하는 밀정이 있음을 알았다. 자신의 신분이 파악된 듯했다. 3․1 만세 직후 혁신당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들고 경찰에 체포되어 몇 달 구금된 일이 있는데 그 때 사진을 찍힌 기억이 났다.
그는 다시 숙소를 옮긴 뒤 동지들에게 말했다.
“이러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붙잡히겠소. 두 번째 목표부터 실행하겠소이다.”
그러고는 곧장 종로경찰서로 갔다. 그는 자신의 조카 김달수가 이 경찰서에 순사로 근무한다고 속여 정문 경비소를 통과하려 했으나 김달수가 외근을 나간 탓으로 통과하지 못했다.
그는 견고한 담장으로 가로막힌 경찰서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한 곳을 주목했다. 담과 건물이 바싹 붙어 있어 유리창이 손에 닿을 듯이 보이는 지점이었다.
“천지신명이시여, 나라를 위해 적에게 폭탄을 던집니다. 저를 지켜주소서!”
그는 그렇게 기원하고 나서 힘차게 폭탄을 던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폭탄은 유리창을 뚫고 들어가 어마어마한 폭음을 내며 터졌다. 건물 벽에 커다란 구명이 나고 건물 밖 담장도 무너져 내렸다.
아이쿠, 하며 그는 배를 깔고 엎드리며 두 팔로 머리를 감쌌는데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그는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천연스럽게 웃옷을 벗어던지고 거리를 걸어 안전지대로 벗어났다.
그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생각했다. 일제 경찰과 밀정들이 눈에 불을 켜고 시내를 샅샅이 뒤지는데 그는 요리조리 피해 남대문역에서 가까운 삼파동(三波洞. 현재의 후암동)에 숨었다.
닷새가 지났을 때, 기다리던 첩보가 왔다. 내일 오전에 사이토 총독이 남대문역을 떠나 도쿄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죽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밤을 지냈다. 역에 경비가 삼엄하고 경찰이 자신의 얼굴을 아니 변장을 잘해도 침투하기가 어렵고 성공한다 해도 탈출하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새벽녘 그는 개들이 일제히 짖는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가슴에 품은 권총을 꺼내들며 들창에 귀를 기울였다. 간밤에 눈이 내렸는지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는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는 어둠속을 더듬어 방안에 들여놓았던 구두를 허겁지겁 신고, 폭탄을 넣은 가방을 메고 쏜살같이 방문 밖으로 나가 뒷문을 열어 제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양손에 하나씩 쌍권총을 든 채였다. 담벼락을 타고 달려온 자들이 권총을 뽑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손이 더 빨랐다.
“이놈들아, 총알 맛을 보아라.”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이 나고 그 자들은 눈 위에 피를 뿜으며 고꾸라졌다. 첫 총탄을 맞은 자는 그를 줄곧 쫓아온 종로경찰서 최고의 민완형사 다무라(田村) 경부였다. 그자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그자의 부하 둘이 중상을 입었다.
그는 나는 듯이 달려 남산에 달라붙었다. 경찰이 남산 전체를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히며 올라갔으나 빠져 나간 뒤였다. 그는 장충단을 거쳐 왕십리의 안장사(安長寺)라는 사찰에 도착했다. 거기서 가사(袈裟)와 식량을 얻어 다시 시내로 들어가 효제동의 이혜수(李惠受) 동지의 집에 숨었다. 동상에 걸린 발을 치료하며 이혜수에게 남산에 숨긴 폭탄을 가져오게 했다. 막연한 짐작으로 그의 본가가 있는 창신동을 뒤지던 경찰은 여기서 꼬리를 잡고 미행해 이혜수의 집을 겹겹이 포위했다. 동원된 경찰 병력은 4백 명이나 되었다.
동대문경찰서 구리다(栗田) 경부는 10여 명의 부하와 함께 그 집에 들어가 이혜수의 식구들에게 소리쳤다.
“범인이 있는 방이 어디냐. 그 방문을 열어라.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집 식구들을 몰살시키든지 폭탄으로 집을 날려버리겠다.”
이혜수의 동생 이순로(李順老)가 애걸했다.
“제발 폭파만은 하지 말아 주세요.”
이때 막내인 열한 살 먹은 이요안이 김상옥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김상옥이 뛰어나오며 구리다를 사살하고 담벼락을 걷어차 옆집으로 가면서 사격을 해서 다시 6명을 사살했다. 그는 어느 집 변소 간에 들어가 일본 경찰의 집중 사격에 맞서 응전했다. 그러다 탄약이 떨어지자 그는 “대한 독립 만세! 의열단 만세!”를 부르며 마지막 한 발로 목숨을 끊었다.
북경에서 약산과 약속을 하고 며칠 지나서 단재 선생이 상해로 왔다. 김약산은 조용한 곳에 거처를 마련해 드렸다. 그리고 최근에 의열단의 고문(顧問)으로 초빙한 유자명을 선생 곁에 있게 했다. 유자명은 본명이 유흥식(柳興湜)으로, 이회영 ․ 신채호 ․ 김창숙 등과 함께 북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조선인 지도자들 중 하나였다. 아나키스트의 성향이 강했으나 학문이 깊고 이론에 출중했다.
상해 체류 보름이 지나자 단재 신채호 선생은 마침내 총 6,400자로 5개 부분으로 된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하였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川澤)·철도·광산·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모든 생산기능을 칼로 베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百一稅)·지방세·주초세(酒草稅)·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어지간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 하에서 멸망할 뿐이요, 대다수 인민과 곧 일반 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일 년 내내 소득으로 자기 한 몸과 처자의 호구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바치어 그 살을 찌워주는 영원한 소와 말이 될 뿐이요, 마침내는 그 소와 말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 이민의 수입이 해마다 높고 빠르게 증가하여 ‘딸깍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가 굶주린 귀신으로부터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될 뿐이며,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정치를 지독하게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 발짝의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가 없어, 고통과 울분과 원한이 있으면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요,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양성소-학교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속여 소잔명존의 형제’라 하여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이 다스린 땅’이라 한 일본 놈들의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정치를 찬미하는 반(半)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하는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 하에 감옥에 갇혀, 주리를 틀고 목과 발에 쇠사슬을 씌우고, 단근질·채찍질·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수족을 달아매는, 콧구멍에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刑律) 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 감옥에서 나온대야 평생 불구의 폐인이 될 뿐이라. 그렇지 않을지라도 발명 창작의 본능은 생활의 곤란에서 단절하며, 진취 활발의 기상은 처한 형편의 압박에서 사그라들어 ‘찍도 짹도’ 못하게 각 방면의 속박·채찍질·구박·압제를 받아, 삼천리가 하나의 큰 감옥이 되어, 우리 민족은 아주 인류의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 본능까지 잃어 노예부터 기계가 되어 강도수중의 사용품이 되고 말 뿐이며,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지푸라기로 보아, 을사 이후 13도의 의병 나던 각 지방에서 일본 군대가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즉 최근 삼일운동 이후 수원·선천 등이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서간도·노령 연해주 각처까지 도처에 주민을 도륙한다, 촌락을 불지른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욕보인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몸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로 내어 죽인다, 아동을 잔혹하게 다룬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도다.
이상의 사실에 따라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異族)통치가 우리 조선민족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죽여 없앰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이렇게 1부는 일본은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을 박탈해간 강도라고 규정하고 일본을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은 정당한 수단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2부에서는 삼일운동 이후 국내에서 대두된 자치론과 내정독립론과 참정권론 및 문화운동을 일제와 타협하려는 ‘적’이라고 규정하였으며, 3부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론과 독립전쟁 준비론 등의 독립운동 방략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4부는 일제를 몰아내려는 혁명은 민중의 직접혁명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5부에서는 ‘조선혁명’과 관련하여, 다섯 가지 파괴와 다섯 가지 건설의 목표를 제시하였다. 다섯 가지 파괴의 대상은 이족통치(異族統治)와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평균 및 노예적 문화사상이며, 다섯 가지 건설의 목표는 고유적 조선과 자유적 민중과 민중적 조선, 그리고 민중적 사회 및 민중적 문화라고 선언하였다.
김약산은 마지막으로 정리된 원고를 읽고 단재 선생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훌륭한 문장입니다. 그리고 우리 의열단의 정신적 목표와 이념이 아주 잘 녹아들어 있고, 조선 민족 전체에게 독립에 대한 확신과 목표를 정해주는 듯합니다.”
단재 선생은 흐뭇한 표정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선생이 북경으로 떠나가실 것이라 김약산은 단재 선생을 요릿집에 모셔 후하게 대접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부단장인 이종암이 찾아왔다. 김약산은 육감적으로 국내에 침투시킨 김상옥 동지에 대한 소식이 왔음을 알아차렸다.
이종암은 단재 선생이 권한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아 식탁에 놓고 눈물을 쏟았다.
“의백 동지, 김상옥 동지가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장렬하게 순국했소이다.”
김약산은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것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었다.
“임시정부에서 일했던 김상옥 동지 말이오?”
김약산은 고개를 선생에게 돌리고 머리를 숙였다.
“네. 그분은 저희 비밀단원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상해에 오시기 전에 출발했으나 말씀 올리지 못했습니다.”
단재 선생은 두 팔을 뻗어 김약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잘한 일이오. 의열단이야말로 기밀이 생명이니까.”
단재 선생이 충분히 이해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므로 어서 말하라는 뜻으로 이종암을 바라보았다.
이종암은 주머니에서 두 장의 종이를 꺼내들었다.
“보고서와 신문기사를 종합해보건대 김동지는 왜놈 경찰 천 명 이상을 상대로 싸운 듯합니다. 김동지는 남대문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죽이려 했으나 경찰이 냄새를 맡고 조여오자 두 번째 목표인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잠복에 들어갔소이다. 그러던 중 사이토 총독이 남대문역을 떠나 도쿄로 간다는 첩보를 손에 넣고 그 자를 처단하기 위해 전날 저녁 역에서 가까운 삼파동에 은신했소이다. 그러나 한밤중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 포위된 것을 알고 벼락 치듯 달려 나가 종로경찰서 다무라 경부 놈과 순사 놈들 셋을 사살하고 남산을 거쳐 효자동에 숨었습니다. 하지만 왜놈들이 거기까지 냄새를 맡고 와 포위하자 또다시 달려 나가 구리다 경부 놈과 순사 여섯을 사살하고 탄약이 떨어지자 마지막 한 발로 자결했소이다.”
이종암이 내놓은 것은 경성에서 발행된 「조선일보」기사와 한 장의 보고서였다. 그것들은 압록강에 인접한 만주 안동에서 공작을 하는 비밀요원이 보내온 것이었다. 김상옥 의사의 의거가 끝나자 경성의 비밀요원이 그 전모를 파악하고, 사건이 보도된 신문을 들고, 포목장수로 위장해 국경을 건너 안동에 있는 비밀요원을 만나 보고서를 써 준 것이었다. 안동의 비밀요원은 그것을 품에 숨기고 이틀이 걸려 상해까지 와서 전했고, 김약산은 결국 의거 닷새 만에 보고서를 받은 것이었다.
김약산은 옷깃을 여미며 일어섰다.
“선생님, 저희와 함께 김상옥 동지의 혼령에 절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엄숙한 표정을 하고 일어서 조국이 있는 동쪽을 향했다.
“김상옥 동지, 동지의 희생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부디 극락에서 편히 잠드시오. 그리고 우리들의 투쟁을 지켜주소서.”
선생의 물기 밴 음성을 들으며 김약산은 또다시 속으로 울었다. 또 한 사람의 동지를 죽음의 길로 보낸 자책 때문이었다.
다음날 단재선생이 북경으로 떠나자 김약산은 ‘조선 총독부소속 관공리에게’라는 글을 동지들과 함께 작성하였다.
조선총독부 소속 관리 제군, 강도 일본의 총독부 정치 하에 기생하는 관공리 제군, 제군은 제군의 선조로부터 자 손에 이르기까지 움직일 수 없는 한국 민족의 일분자가 아 닌가. 만약 한국 민족의 일분자라고 하면 설령 구복(口腹) 과 처자를 위해 강도 일본에 노예적 관공리 생애를 한다고 할지라도 강도 일본의 총독정치가 이민족의 구적(仇敵)임 을 알지라. 따라서 아(我)들의 혁명운동은 곧 강도 일본의 총독정치를 파괴하고 한국 민족을 구제하려고 하는 운동임 을 알지라. 이를 안다면 우리의 혁명운동을 방해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 그런데 방해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우리는 이러한 도배의 생명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4256년 1월 의열단.
김약산은 ‘조선혁명 선언’과 이 글을 인쇄소에 맡겨 비밀리에 인쇄하게 했다. 폭탄과 함께 이것들도 국내로 보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