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충효재(永川忠孝齋)와 산남의진(山南義陣)’
조선 후기 의병대장인 정환직(1843 ∼ 1907)과 그의 큰아들인 정용기(1862 ∼ 1907)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묘 근처에 세운 재실입니다.
정환직은 고종 25년(1888) 의금부 의금도사를 지냈으며 광무 3년(1899) 시찰사, 도찰사 겸 도포사를 역임하고 그 뒤 중추원 의관을 지냈습니다.
그의 아들 용기는 혜민원 총무를 거쳐 민영환 등과 함께 독립회와 만민회에 참여하고 보안회 국채보상운동에 회장으로서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광무 9년(1905) 불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정환직은 고종에게 ‘짐망 화천지수[朕望華泉之水]’란 밀지를 받고 일으킨 의병진입니다.
초대 대장 정용기는 천성이 활달하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정의감이 투철했으며, 국채 보상 운동을 위한 ‘단연회통문(斷煙會通文)’ 및 ‘의연금권고가(義捐金勸告歌)’와 정계의 부패를 비난하는 6개 조항을 들어 투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민중 계몽에 힘쓰던 중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의 명으로 통유문과 권고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배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이름하고 초대 대장에 추대되었습니다. 산남이란 문경의 조령 즉 새재의 남쪽이란 뜻으로 영남의 다른 표현으로 아시면 됩니다.
정용기는 전투다운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경주의 우각리를 경유할 때 경주진위대의 간계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가 아버지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1907년 4월 재차 거의하여 영천 · 영일 · 청송 등지에서 일본군을 여러 차례 전투를 하였습니다.
1907년 8월 산남의진 본진 100여 명과 함께 포항시 북구 죽장면의 매현으로 들어가 9월 초 강릉으로 북상을 준비하던 중 1907년 9월 1일 입암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의 역습을 받아 격렬히 싸우다가 이한구(李韓久) · 손영각(孫永珏) · 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광복 후 나라에서는 애국지사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그 해 9월 아들 정용기가 입암 전투에서 전사하자 스스로 산남의진 제2대 대장에 취임한 정환직은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진영을 정비하고 북동대산으로 본진을 이동하여 본격적인 대일 항전을 시작하고, 이어 청하 · 흥해 · 신녕 · 의흥 · 영덕 등지에서 분파소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한편 일본 순사와 한국인 순검을 사살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불행히도 1907년 11월 7일 청하면 각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일본 헌병은 그를 대구로 호송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회유하려 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음에 다시 영천으로 호송하여, 1907년 11월 16일[양력 12월 20일] 지금의 영천시 창구동 소재 조양각 밑 둔치에서 총살형을 집행하였습니다.
조국 광복 후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그 해 영천시 창구동 영천문화원 내에 지역민들에 의해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1985년 후손들이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충효재에 추모비를 건립하였습니다.
정환직이 순국하기 전날 최후로 남긴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身亡心不變(신망심불변) 몸은 없어지나 마음마저 변할쏘냐.
義重死猶輕(의중사유경) 의는 무거우나 죽음은 가볍도다.
後事憑誰託(후사빙수탁) 나머지 뒤의 일을 누구에게 맡기리오.
無言坐五更(무언좌오경) 말없이 앉아 있노라니 오경이 되었구나.
정환직과 정용기 애국지사의 묘소는 이곳 충효리에 있습니다.
정환직의 순국 후 최세윤(崔世允)이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대장에 취임한 후 산남의진은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1908년 7월까지 유격 활동을 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항일항쟁을 이어간 산남의진은 영남 지방을 대표하는 대규모의 의병부대로 인근 지역의 신돌석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고, 1907년 말부터 1908년 초까지 전개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을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등 영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무력항일의병단체였습니다.
잠시 고종황제께서 정환직에게 내린 ‘짐망화천지수’의 유래를 설명드리겠습니다.
‘화천지수(華泉之水)’의 유래
제나라와 진나라의 전쟁터에서 제나라가 패하여 화부주산(華不注山) 기슭으로 달아나며 봉축보(逢丑父)는 제경공(齊頃公)에게 아뢰게 됩니다.
“사태가 매우 급박합니다. 주공께서는 속히 입고 계시는 금포수갑을 벗어 신에게 주십시오, 그리고 신의 옷으로 바꿔 입고서 말고삐를 잡으십시오. 이젠 진나라 군사를 속여야겠습니다. 만일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금포수갑을 입은 신이 주공을 대신하여 죽겠습니다.”
그 때 한궐의 병거가 달려와 금포수갑을 입은 사람이 제경공인줄 알고 자기 나라로 데려가려고 할 때, 가짜 제경공인 봉축보가 진짜 제경공에게 표주박을 내주며,
“봉축보야 내가 목이 말라서 대답을 못하겠구나. 나를 위해 물을 떠오너라.”
이에 진짜 제경공이 금어병거에서 내려 물을 떠왔습니다.
“봉축보야 물이 탁해서 어디 마시겠니. 저기 돌아가면 우물[華泉]이 있다. 좀 늦어도 좋으니 맑은 물을 떠오너라.”
그제야 변장한 제경공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다시 물을 뜨러 가는 것처럼 나가 산속 덤불을 헤치고 달아났습니다. 한궐(韓闕)은 가짜 제경공을 진짜인줄 알고 극극(郤克)에게 보냈으며, 극극은 금방 가짜인줄 알아차리자 한궐은 분기충천하여
“너는 누구냐? 저놈을 결박을 지어 참하여라.”
봉축보가 끌려가면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진나라 임금은 내 말을 듣거라. 이제부터 천하에 자기 임금을 대신하여 죽을 자가 없겠구나. 나는 우리 임금을 대신해서 죽음을 당하는 표본이다.”
이 말을 듣고 극극은 곧 봉축보의 결박을 풀게 하였습니다.
“그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을 죽인다면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이리하여 봉축보는 죽음을 면하고 함거에 수감됐으며, 훗날 다시 봉축보는 벼슬을 하게 됩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지금 대구의 팔공산에서 견훤(甄萱)에게 패퇴할 때 신숭겸(申崇謙)과 옷을 바꿔 입고 목숨을 구한 일화도 다 화천지수 고사를 따라서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