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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c 영국 베드포드 촌에 한 은장색이 있었는데, 그는 무식한 부랑자 번연 요한이었습니다.
하루는 어디 갈 때에 무슨 소리가 있어 은근히 귀에 들리니 “네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것이 좋으냐? 죄를 그냥 짓고 지옥에 빠지는 것이 좋으냐?” 하는 소리를 듣고 회개한 후에는 순박한 그, 영민한 그 심성은 인생의 신성과 존귀함을 깨닫는 때에 힘을 다하여 심중의 마력을 멸하고자 한즉 회개의 눈물은 그치지 않고,애걸의 호소는 듣는 자로 하여금 저를 불쌍히 여길 만큼 되었답니다.
위로 하늘을 쳐다본즉 태양은 그 광선을 저 같은 죄인에게 발휘하는 것이 참으로 가석하고, 굽어 땅을 바라본즉 산천초목 금수의별은 주의식을 제공함이 참말로 황송하게 생각되었으며, 양심 없는 금수를 부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순례자의 고통이어서..., 그러나 미구에 십자가 밑에 나아가 등에 있는 무거운 짐이 떨어짐을 감각할 때에 요한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흐르고 그 가슴에는 하늘의 평강이 충만하였소.
저는 후일에 이 경험을 말하기를, “아! 그리스도! 그리스도! 나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 제하고는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의 매장, 그의 부활, 귀중한 사실을 이것저것 하나하나 나의 마음속에 다 실험시켰다고, 나의 몸에 받은 은혜는 마치 부귀한 사람이 금괴를 은행에 저축하고 그 주머니에는 용돈만 조금 가지고 가는 것 같은 것이라고, 나의 전 재산은 예수께 저축했다고 했습니다. 주께서는 내가 하나님과 합체되는 깊은 뜻을 나에게 알게 하사 나는 그에게 속하여 나는 그의 육에 육이 더했나니 만일 그가 나와 일체가 되면 그의 의, 그의 공, 그의 승리는 다 나의 것이라고 할렐루야를 불렀습니다. 나는 나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에 있는 자요, 나의 육체로서는 땅에 있는 자이다. 나는 그를 의지하야 의로워지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리를 항상 찬미하노라”고 외쳤습니다.
이 구원의 경험이 철두철미한 번연 요한은 불타는 가슴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정부의 박해를 받아 12년간의 옥중생활에서 얻은 단순한 복음의 진수가 바로 이 천로역정이랍니다.
본서의 내용은 장망성에 살던 기독도가 천성을 향해 가는 길에 갈래 길이 많으므로 때를 따라 쓰러지고, 때를 따라 곁길로, 어려운 산, 험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 여러 가지 희노애락을 돌파하고, 마지막에는 사해를 건너 천성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인생의 일로요, 신앙의 노선이랍니다.
본서에는 인명과 지명이 많이 나오는데, 사람 이름과 땅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신구약의 진리요, 우리 신앙생활의 적절한 비유로 되었습니다.
본 강화 중에는 종종 노래가 나오는데, 곡조는 대개 합동찬송가 456장 곡조로 부르면 좋을 것입니다.
장망성을 떠난객이 천성향해 가는길에
갈랫길이 많으므로 그릇걷기 쉬웁도다
그러하나 우리구주 천성가는 길이되고
성신우리 인도하니 안심하고 따라가세
오늘은 이만침하고 그치겠습니다.
천로역정의 첫대지는 장망성에서 좁은 문까지,
둘째 대지는 좁은 문에서 미궁까지,
셋째 대지는 미궁에서 허화시까지,
넷째 대지는 허화시에서 낙산까지,
다섯째 대지는 낙산에서 천성까지...
번연 요한은 옥중에서 비몽사몽간에 한 이상을 보았는데, 황막한 광야에 한 사람이 남루한 옷을 입고 등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손에는 책 한 권을 들고, 집은 등지고 돌아서서 그 책을 읽다가 울다가 떨며 슬퍼하며 근심하는 사람 하나를 보았습니다. 이는 장망성 사는 기독도의 상태요, 장망성 떠나 천성 가는 제 일계단은 심령이 각성된 사람, 각성된 심령...
사람이 비록 존귀한데 거하나 깨달음이 없으면 멸망할 짐승과 같도다고 하였소, 아바지의 품을 떠난 탕자는 받은 재산 탕진하고 마지막 돼지 치는 목자였습니다. 자기 신세를 깨닫고, 자기 장래 멸망을 깨닫고, 자기 아바지집 모든 풍성함을 깨달아 돌아올 때에 아바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이외다.
탕자 같은 인생아 깨달아라 깨달아라
첫째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자기의 진상을 깨달았습니다.
첫째로, 기독도가 남루한 옷, 등에 무거운 짐을 진 것은 자기의 진상을 깨달음이예요, 남루한 옷은 무엇인가? 이사야 64장 6절을 보세요, “우리가 다 깨끗하지 못한 자와 같으며 우리의 모든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고 하였으며, 시편 38편 4절을 보세요, “내 죄가 내 머리에 넘치니 무거운 짐과 같아야 내게 너무 무겁다”고, 시편 40편 12절에를 보세요, “내 죄가 나에게 미쳤으매 내가 능히 머리를 들 수가 없으니 내 죄가 내 머리털보다 많기로 내가 낙심하였나이다”. 욥기 40장 40절을 보세요,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되 보소서 나는 천한 자라 무엇을 주께 대답하리까 오직 손으로 내 입을 손으로 가릴 뿐이로소이다” 하며 저는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였지요.
천성 가는 기독자의 자격은 먼저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이외다. 이전에는 자기가 잘나고 깨끗하고 의롭고 얌전한 줄 알았지만, 이제는 추하고 불의하고 흉악한 자인 줄 알게 되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다윗이는 내 죄가 내 머리털보다 많다고 하였고, 바울 선생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사야는 내가 화가 있으리라고 자복하였고, 어거스틴은 어려서 어머니 젖빨다 젖꼭지 깨문 죄까지 회개했다고 합니다. 이 천로역정을 지은 뻔연 요한도 참회록에 “아이고, 나는 더러운 자이다 내 죄가 내 속에서 솟는 것이 마치 샘물이 샘에서 나오는 것과 같구나 이 세상에 내 마음과 짝할 것은 아마 나 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악마 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옳소! 아무리 교회 출입을 하고 잘 믿는다고 하는 신자, 교역자까지라도 한번은 자기의 진상을 철두철미하게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문둥이 같고 추악한 자임을 인식하지 못한 자는 천성갈 자격이 진실로 없는 것이예요.
예수는 죄인의 친구라고 했소, 죄인의 친구, 죄를 아는 대로 예수를 알고, 예수를 아는 대로 죄를 압니다. 죄를 모르는 사람은 예수 몰라요, 예수를 모르면 죄를 철저히 깨닫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죄가 너무 많아서 예수 못 믿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많이 믿겠느냐”고, 내가 어떤 때 대구서 어떤 청년 보고 목욕을 가자고 그러니까 “난 목욕 못 가요”, “왜” 그러니까, “때가 너무 많아서요”, “아, 이 사람아 목욕이야 때 있는 사람이 가지 때 없는 사람이 무슨 소용이야?”, “발에 때가 너무 많아요”, 아마 발이 까마귀 발처럼 된 모양이요, 내 그래서 때가 너무 많아 목욕 못 가겠다는 사람, 죄가 너무 많아 예수 못 믿겠다는 사람 마찬가지라고 했소.
둘째는 뭘 깨달았는가? 인생관을 깨달았습니다.
둘째로, 황막한 광야에 집을 등지고 있는 것은 인생관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외다. 이 세상의 부귀공명은 뜬구름과 같고, 가고 오는 이 세상은 뜻 붙일 곳 전혀 없다고, 쓸쓸한 광야에 적막한 상황을 깨달은 것이요. 솔로몬의 부귀영화도, 바벨론의 장한 경치도, 오늘날 간 곳이 없고요. 고금세계의 천만 사정은 꿈과 같이 지나고, 만고역대의 흥망성쇠가 물레바퀴 돌아가듯 하는구나. 춘삼월에 피는 저 꽃은 열흘의 짧은 목숨을 한탄하고 있지 않은가요. 가고 오는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고, 장망성 같은 이 세상은 무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산다면 늘 살까, 사람 살기 백년 가기 잠깐이요. 뒷동산에 한 무덤 이룰 때에 일생 수고는 흔적이 없구나. 고해 중에 지나는 나그네, 일엽편주 어디로 갈 것인가요. 모든 육체는 풀과 같이 썩어져 버리고 세상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쇠잔하리라. 멸망의 기차는 고동을 틀면서 달려 오는데, 죄악의 술을 마시고 허영의 꿈을 꾸는 인간들은 장망성을 아마 자기집 아랫묵으로 아는 모양이지요.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문전옥답도 우리 한번 죽음에 디디면 일장의 춘몽이 아닌가. 토지 많아 무엇해, 나 죽은 후에 삼척광중 일장지 넉넉해, 의복 많아 무엇해 너 떠나갈 때 수의 한 벌 관 한개 족지 않은가, 세상에 인생관의 허무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는 생명의 존귀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하는 기독도, 자기 생명의 존귀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얼 주고 제 생명과 바꾸겠느냐. 생명은 참으로 귀합니다.
살아 있는 개는 죽은 사자보다 나은 것이지요. 6.25때 보니까 무던히도 살을라고 애씁디다. 집도 내버리고, 부모처자도 내버리고, 요리장롱도 내버리고, 훌륭한 가장집물 다 내버리고 거저 자기만 살겠다고 달아나는데, 무던히들 살을라고 그래요. 고것이 영생 있는 증거요, 욕망이 있으면 대상 있소, 식욕 있으면 밥 있고, 색욕 있으면 이성 있고, 지욕 있으면 학문 있지요. 사람에게는 고렇게 살고저 하는 간절한 욕망이 있으매 영생의 대상이 있는 것이랍니다.
이 생명을, 잠깐 있는 이 육적 생명을 위하여 애를 쓰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참으로 애쓰는 사람은 많지 않소.
나는 어떤 날 아침에 새벽기도 가다가 담배가게 앞에서 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둘러서서 야단법썩인지 “저 뭘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담배 배급 타러 왔다”고, “그 얼마나 남느냐”고 그러니까, “한 갑에 십원 남는다”고, 십원 남는 담배 배급 타려고 새벽에 나와서 그 야단인데, 하나님의 말씀, 귀한 생명의 배급을 타러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 너무도 적은 것을 생각할 때에 맘에 안타깝기 그지 없었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사람에게 제일 급선무는 구원이요, 구원, 물에 빠진 사람에게 급선무가 무어요? 구원이예요. 물에 빠져 죽어가는데, 떡을 주어도 소용 없고, 옷을 주어도 소용 없고, 돈을 주어도 소용 없소. 물에서 구원 받아야지...
인생들은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꿈결 같은 세상에, 죄악의 세상 헤메다가 속절없이 멸망하는 인간들...
꿈결같은 이세상에 산다면 늘살까
인생의향락 좋대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세상 고난풍파 일장춘몽이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데로 달려가느냐
[2]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먼저번에 천로역정 강화, 첫째로, 하늘나라 가는 사람은 깨달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자기 진상을 깨닫고, 둘째는 자기 인생관을 깨닫고, 셋째는 생명의 존귀한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넷째로, 손에 들리워진 책 한 권이 있었는데, 기독도는 이책을 보고 자기의 진상과 황막한 인생관, 그리고 생명의 존귀함을 깨달은 것이예요.
그 책은 무슨 책인가? 잡지 소설책인가? 역사 과학책인가? 두 말할 것 없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과연 사람의 진상을 알려 주는 거울이요. 시대와 사회상을 잘 알려 주는 망원경이요. 우리 생명을 밝혀 주는 현미경입니다. “이는 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요, 이것으로 주의 종이 경계를 받으며, 이것을 지킴으로 큰 상을 얻으리로다”
기독도의 손에는 성경 한 권이 들리워진 것이 참으로 행복이었습니다. 우리 책장에 만권 책이 있어도 성서가 없는 책장은 죽은 책장이예요. 온 세상이 다 불타고 이 천지는 변하여도,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묵시하신 바니 이 성경은 너로 하여금 교훈과 책망과 정직케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을 행하기에 더욱 온전케 하느니라.
이 성경은 지금 일천 이백 방언으로 번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의 글은 시대를 따라 변하지만 이 말씀은 변하지 아니해요. 세상의 글은 환경을 따라 변합니다. 아이 보는 글 따로 있고, 어른 보는 글 따로 있고, 늙은이 보는 글 따로 있고, 젊은이 보는 글 따로 있고, 동양 사람 보는 글 따로 있고, 서양 사람 보는 글 따로 있고, 부자 보는 글 따로 있고, 가난뱅이 보는 글 따로 있지마는 이 성경은 누가 보든지, 참으로 양식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처럼, 누구에게도 필요합니다.
성신의 충만은 말씀의 충만이라고 했어요. 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애독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스럽소.
그 다음에 다섯번째는 참회의 눈물,
다섯째로는, 기독도는 근심하고 애통하고 안타까워하는 그 심정,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천성 가는 사람에게는 눈물이 있는 것이요.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바꿔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울라고 해서 덮어 놓고 울지 마세요. 언젠가 충청도 의산 가서 부흥회를 하는데, 어떤 늙은이가 심히 울기에 물어 보니 죽은 영감 생각이 나서 운다고 합디다. 신세 타령, 팔자 타령해서 우는 눈물은 몇 동이를 쏟아도 소용 없소. 죄를 슬퍼하라구요. 죄를 자랑하는 것은 마귀새끼, 죄악에 빠지는 것은 인간들이요, 죄를 슬퍼하는 것은 성도라고, 어떤 성도는 명담을 하였습니다.
참회의 눈물은 진주보다 귀해요. 다윗이는 통회의 눈물이 요를 썩이고 침상을 띄운다고 하고,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을 주의 책에 기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주랴고 부르짖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눈물이 마르고, 신자들의 눈에는 눈물이 말랐소. 내 자신을 위하여 울고, 이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눈물은 참으로 행복스럽소.
여섯째는 구원은 개인문제,
여섯째로 한 사람이 서 있다는 것이요. 황막한 광야에, 적막한 광야에, 쓸쓸한 광야에, 외로운 광야에 한 사람이 서 있소.구원은 개인문제...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여야 한다는 것이예요. 어떤 노인에게 전도하니 “여보, 내게는 전도 그만 두시요 난 예수 안 믿어도 일 없소”, “어째 그런가”하니, “우리 마누라 잘 믿고, 아들 딸 잘 믿고, 며느리 손자 다 예배당에 잘 댕기오, 천당 갈 때 나 하나 못 들고 가겠소” 한다. 한심한 일이지요. 마누라 밥 먹어서 영감 배 부를까요.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할 것이요. 사람을 바라지 말고 인생을 기다리지 말라구요. “여호와 가라사대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체를 믿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고, “저는 황야의 노가주나무와 같이 좋은 일이 이르는 것을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자기 진상을 깨닫고, 인생관을 깨닫고, 생명의 존귀한 것을 깨닫고, 구원의 급선무를 깨닫고, 성경의 존귀한 것을 깨닫고, 개인적 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당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아는데 인생들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니 스스로 망하는 자식들이로구나 하였소.
기독도의 이 형편을 본 가족들은 매우 놀라고 두려워하나 믿지 않고 오히려 정신병 들었다고 했소. 조롱도 하고, 책망도 하고, 상관치를 않았지요.
정말 우리가 신앙생활의 참된 은혜를 받아보면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예수를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했으니 그 제자된 자들이리요. 현대 신자는 너무나 똑똑해서 걱정이요. 예수 미치광이인가 보구료.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다 미쳐 산답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은 돈에 미치고, 허영에 미치고, 술에 미치고, 미신에 미치고, 글에 미치고, 사업에 미치고, 오락에 미치고, 명예에 미치고, 정치에 미치고, 먹는데 다 미쳐 산답니다. 미칠 바에는 예수에 똑바로 미쳐야 할거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그때에 고통하고 근심하는 기독도에게 전도가 찾아 왔습니다. 선한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들으리요. 당신의 택한 사람을 위해서는, 구원할 백성을 위해서 전도를 보내 주신답니다.
보세요. 다메섹 도상의 사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 주셨고,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는 베드로를 보내 주셨고,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하든 나다나엘에게는 빌립을 보내 주시고, 구스 내시에게는 빌립이 광야로 찾아 갔었고, 빌립보 강변의 자주장사 여인들에게는 바울이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당신을 위해서는 누가 찾아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야 이 큰 구원을 알고 받았습니까? 그리고 이 장망성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 고통하는 기독도가 이 구석 저 구석에 그 수를 알 수 없으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하여 가겠느냐고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는가요. 많은 사람을 가르쳐서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치리라. 다니엘12장3절에 그런 말씀이 있지요. 동방박사를 끌어다가 예수께 절 시킨게 무에요. 별,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가서 예수에게 황금을 드리고, 유향을 드리고, 몰약을 드려서 절하고 예수를 자기의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황금은 왜 드렸어요? 동방박사들은 황금만능주의자들이요. 황금을 사랑하던 저희들은 참으로 보배로운 주님을 만났으매 황금 사랑하든 마음을 주께 드린다는 것이요.
유향은 왜 드렸을까요? 유향은 이방 사람들 우상 섬길 적에 향불 피워 놓고, 입은 덕도 만만하거니와 새로 새덕을 달라고 코이 나부라지게 절을 하던 것이요. 이제는 참신 되시는 주님을 찾았으매 미신 섬기고 우상 섬기던 이 진정을 주의 앞에 드리는 토색이 아닐까요?
몰약은 왜 드렸는가? 몰약은 죽은 시체에다 발라서 미이라를 만들어 가지고 유리곽 속에 네 가지고는 죽은 영감 생각나면 그 말리워 둔 영감 보고 위로를 받고, 마누라 생각나면 그 말리워 둔 마누라 보고 위로를 받고, 아들 딸 생각나게 되면 그 말리워 둔 아들 딸 보고서 위로를 받든 저들이나, 이제는 생명의 근원이요, 진리의 근원이요, 평강의 근원이요, 만복의 근원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저들에게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려서 예수를 자기 구주로 믿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도는 기독도에게 “왜 여기서 그대는 그대로 울며 근심하느냐”고 하니, 기독도 가라대 “나는 내 손에 든 책을 보고 죽을 죄를 깨닫고 죽음의 심판이 올걸 생각하니 무거운 짐에 눌려서 죽을 뿐 아니라 지옥에 빠지게 되었나이다.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잠시 괴롬을 견디기 어렵거든 하물며 지옥에 빠지는 그 심판을 차마 어찌 받으리까” 전도는 그 말을 듣고 깊이 공정하면서 “살 길 찾을려면 왜 여기서 방황을 합니까? 속속히 이 장망성을 떠나서 장래 노하심을 피하시오”라고 주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기독도는 “장망성을 떠나면 어데로 피하여야 되겠나이까” 하니 전도는 손을 들어 가르쳐 “저기 저 높은 문으로 들어가라” 합니다. “저 곳에 있는 좁은 문이 뵈이지 않느냐”하며, 또 “저편에 훤한 빛은 보이는가?”, “보인다” 하니“그 빛을 바라보며 그리로 향하여 달려가면 거기에 좁은 문이 있을 것이니 그 문을 두다리면 당신의 행할 바를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좁은 문, 그렇습네다. 우리가 처음에는 예수의 깊은 진리를 보고 분명히 따른 것은 아니예요. 거울 속으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고 여러가지 동기로 교회에 나왔지만 믿고 나아가면 점점 깨닫게 되는 것이요. “너희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하였고, “이제는 따라오지 못하나 이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좁은 문, 우리 천성 가는 길은 좁고 험한 것이예요. 기차 철로가 길기는 길어도 좁아요. 기차는 철로가 좁아도 철로로 가야지, 철로가 좁다고 넓은 데로 가면 어찌 될 것이요. 곧 탈선이 되고 전복이 될 것이요.
모든 인생은 왜 이 길로 오지 않는가? 종교생활은 자유가 없다고, 좁다고, 신앙생활은 건조무미하고, 부자유하다고 오지 않는 것이예요.
주의 법도와 그 계명, 또 절제생활, 도덕생활은 다 부자유한 것 같으나 이 길은 참말로 사는 길이요, 자유방종은 사망이요, 멸망이랍니다. 기독교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그러한 것이지요. 가령, 밥을 세 공기 먹어야 그 식량에 알맞은 사람이 반찬 맛있다고 한 공기나 두 공기 더 먹으면 넓은 길로 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탈선이 되어서 배병이 생기고 설사가 난다고 병원에 가서 의사의 신세를 지느라고 야단이 아니예요. 모든 질병은 대개 절제 없는 생활에서 생기는 것이예요. 또한 일남 일녀는 좁은 길인데, 왜 많은 여자에게 내게는 한 사람뿐인고 하고 많은 여자를 취해 보라구요. 또 많은 남자에게 왜 내게는 한 사람뿐인고 하고 많은 남자를 친해 보라구요. 이 사회가 어찌 될 것인고, 저 아라비아에 가보며는 코 떨어진 여자가 많다고 해요. 그 사회는 다처주의라 여자끼리 강샘을 해서는 서로 코를 잘라 버려서 그리 된 것이라고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커서 그곳으로 가는 사람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험하야 찾는 이가 적으니라”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내가 곧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는 자유를 얻고 생명의 꼴을 얻으리라”하였고,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이룰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눈을들어 산을보라 만산초목 우겄구나
곳곳마다 가시덤불 굴러있는 해골떼라
재목없어 집못짓고 살곳없어 방황하나
맹수밥이 되는영혼 주의종아 어찌할꼬
오늘은 이만침 하고 그치겠습니다.
[3]
여러분 그동안 또 안녕하셨습니까?
하룻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길른지 알 수 없는 험악한 세상에서 하루하루 우리를 이렇게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진실로 감사합니다.
전번에 장망성 살던 기독도가 광야에서 헤메다가 전도의 전도를 듣고서 “좁은 문으로 가라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커서 그곳으로 가는 사람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험하야 찾는 자가 적으니라”고 하는 전도를 듣고 기독도는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기독도는 이제 귀한 복음을 듣고 큰 보화를 얻은 것처럼 껑충껑충 뛰면서 달아나기를 시작합니다. 거기서 그 집이 멀지 아니하니 그 처자들이 그 광경을 보고 울며 불며 돌아오라고 따라가며 부르짖었으나 저는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하면서 달아납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달아납니다.
천성에 가는 사람은 귀를 틀어 막아야 되는 것이예요. 귓구멍이 넓은 사람은 천성 가기 어렵대요. 이 사람 이러니 이럴듯, 저 사람 저러면 저럴듯, 바람에 불리는 갈대처럼, 무정견, 무골충 같은 사람은 아무것도 성공 못한답니다. 하늘나라에서 요구하는 사람은 의지가 돌같이 강하야 대소사에 마음 두지 않고 어떤 문제든지 일정한 의견을 가진 인물을 요구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떤 부자가 당나구 끌고 가다가 물에 빠친 얘기 들었을 거예요. 부자가 빈당나구 끌고 가는데, 한 동네 지나가려니 사람들이 보구 “저런 미련한 사람, 빈당나귀를 끌고 가느니보다 한 사람타고 가지 않나” 그 말이 그럴듯 해서 아들을 태우고 아버지가 경마를 들고 가지요. 또 한 동네를 지나 가노라니 사람들이 “저런 못난 영감, 아들을 태우고 아버지가 경마를 들어, 예이 망할 영감, 이담에 효도받겠다. 자식 참 잘 가르친다”하면서 비난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그것 참 그렇겠다, 이번에는 내가 탈 것이니 네가 끌어라”하고 바꾸어 타고 갔답니다. 또 한 동네 들어가니 사람들이 “저런 무심하고 무정한 영감 보라 어른 애비가 타고 어린아이를 경마를 들렸다? 예이 영감 편안하오?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소”합니다. 그 말을 들으매 참말 안 되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둘이 다 타자”하고 약한 나귀 등에다가 두 사람이 올라 앉았답니다. 어린 나귀는 삐뚝삐뚝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요. 또 한 동네 지나 가노라니 “저런 악한 영감, 말 못하는 짐승이라구, 둘이 타는 법이 어디 있느냐 그 나귀 허리 안 부러지느냐”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부자는 “큰일 났다. 이래도 말썽, 저래도 말썽, 이번에는 당나귀 네 다리를 결박해서 둘러 메고 건너가자”하고 돌다리를 건너다가 나귀가 요동하는 바람에 그만 물에 빠쳐서 죽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말많은 세상이요.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우리는 이 세상의 잡음을 귀막아 물리치고 신령한 주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고 힘차게 달아나야 합니다.
“달아나라, 너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들에도 머물지 말고 생명을 위하여 산으로 도망하여 불사름을 면하라” 소돔과 고모라 멸망할 때에 롯에게 천사가 와서 경고한 말씀이예요. 달아나라, 언제나 긴장한 태도이요. 가면 가고, 말면 말고, 되면 되고, 말면 마는, 이런 상태는 아무것도 성공 못하는 거예요. 먼저 위험을 피하고 사망을 피하야 달아날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 마라톤에는 허다한 간증자들이 구름같이 둘러 있고, 의의 면류관을 들고 속히 오라고 부르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따라서 모든 거리끼는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참음으로 믿음으로 주장하사 완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힘차게 씩씩하게 달아가서 개선의 영광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가며는 완행차가 어떻게나 많은지... 이놈의 완행차는 가면 가고, 말면 말고, ‘삑’ 하고 다음 정거장 우두커니 섰다가 또 심심하면 삑 하고... 신자들이 완행차가 되어서 예배시간에도 그저 늦게 늦게, 예배 다 본 후에, 거의 다 본 후에 오는 신자도 있어요.
어떤 장로의 아들, 장로가 병들어 예배당에 못가면서 아들 보고 “너 아무쪼록 예배 잘 보고 오너라”, “예”, 갔다 온 다음에, “너 예배당에 갔댔니?”, “예 갔댔어요”, “오늘 목사님 성경 어디 보시든?”, “성경 다 본 다음에 들어갔어요”, “목사님이 설교 문제는 뭘로 하고 설교 내용은 뭘로 하던?”, “설교할 때는 졸았어요”, “광고는 무슨 광고를 하시던?”, “광고 하기 전에 나왔디요”, 장로가 기가 맥혀서 “원 세상에 어떻게 저런게 내 새끼가 되어 내가 속을 태운다”고 그만 병이 더 생겼답니다. 그 아이만 그런게 아니예요. 오늘날 신자 가운데 완행차 신자가 참 많아요. 통일호와 같이, 태극호와 같이, 성신의 불이 충만해서 힘차게 달아나는 급행차들이 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독도는 벌써 벌판 가운데로 귀를 막고 달아나는데, 동네에서 두 사람이 따라 온답니다. 하나는 고집이요, 다른 사람은 변하기 잘하는 이천이, 고집이, 굳을 固자, 잡을 執자, 굳게 잡는..., 이천이, 쉬울 易자, 옮길 遷자, 변하기 잘하는..., 고집이 하고 이천이가 따라 옵니다. 고집이는 기독도를 붙들고 강제적, 위협적으로, 이천은 사정적으로 돌아갑니다. 기독도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음이라”고, 고집의 위협도, 이천의 사정도 다 떨쳐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고집이 가라대 “이 사람아 거기 가면 무에 그리 좋아서 이 좋은 장망성을 버리고, 그 귀여운 처자를 다 버리고, 친절한 친구를 다 버리고 딴고집을 부리면서 간단 말이냐”고 하였습니다.
기독도는 가라대 “이 책을 좀 보아라, 거짓말 없으신 신실한 주님의 말씀에 천성 가면 근심도 없고, 눈물도 없고, 질병과 사망의 고통이 없는 참평안한 곳이요, 천군천사 성도들과 같이 영세무궁 복락을 항상 누리는 곳이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이니라”.
고집이가 이천이더러 “이천이 돌아가세, 세상에 저렇게 고집 센 놈은 처음 보갔네, 친구들이 그만큼 사정하면 금수가 아닌 바에야 모를 이가 있나 미친 주제 넘은 놈”이라고 했습니다.
이천이 가라대 “그런 욕설은 그만 두게 이 사람 기독도 말이 참말이라면 나도 따라갈 맘 있네”
고집이 가라대 “얘 이놈아 너도 또 미치느냐? 그런 미친 놈 따라가다가는 장차 무슨 봉변 당할 줄을 누가 아느냐. 그러면 너희들끼리 잘 가서 복받아라 나는 그런 얼빠진 놈과 작발하지 않을터야”하고 고집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천이는 결심하고 기독도를 따라 옵니다. 기독도와 이천이는 벌판으로 벌판으로 같이 걸으며 얘기합니다. “고집이도 이런 귀한 도리와 장래 재앙을 알았더면 그렇게 경하게 돌아가지는 않았으련만...” 하면서 탄식하였소.
금강석이 아무리 보배라 할지라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지요. 어린아이에게 금덩어리를 주고 사탕을 주면 금덩어리를 내어버리고 사탕을 먹을 거예요.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귀한 진리를 몰라서 무시하고 반대하고, 몇날이나 살겠다고 썩어질 세상, 썩어질 허영에만 끌리워 죄악에 빠져 멸망의 길을 걷는 자, 그 수 얼마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 옛날 독일의 광물학자가 아프리카에를 갔더랍니다. 새까만 흑인종 계집애가 돌 네개를 가지고 공기를 놔요. 그게 뭔가 하니 금강석이예요, 얘가 얼마나 돈이 많아서 금강석 가지고 공기를 놓는가 너희 집 어딘가고, 그 광물학자를 데리고 가니 움막집에서 새까만 흑인종 부인네가 필끼죽을 쑤고 있더랍니다. “얘 당신네 아이요?”, “예”, “미안하지만 얘 가지고 노는 돌 나한테 팔으세요”, “예? 야 그 양반 별 양반 다 보겠다. 돌을 팔긴 뭘 팔아 그 양반 그냥 드려라” 이 계집애가 절을 깝싹 하고서는 돌 네 개를 갖다 드렸답니다. 이 광물학자는 지갑을 꺼내서 돈을 벌컥벌컥 삼십원을 꺼내 줘요. 그 흑인종 부인과 계집아이는 입이 대장이나 벌어졌더랍니다. “아야! 그 양반 무던히도 돈 많은가 보다 돌 네개에 삼십원을 주어?”하고 놀랬지만 광물학자는 그거 가지고 와서 여러 백만원 샀답니다. 그리고 자기 나라 정부에다 그 말을 해서 거기서 채광을 한 것이 독일 정부의 재산 절반 이상이나 캐냈다는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금강석이 아무리 보배라고 하지만은 모르는 흑인종에게는 돌 네개 같고, 돈 삼십원 받고 금강석 네개를 주고 말았지만, 광물학자는, 아는 광물학자에게는 자기만 아니라 자기의 전 국가에까지 큰 보화가 된 것처럼 예수의 귀한 진리, 이 귀한 복음은 우리 인생의 근본문제, 현재 문제, 미래 문제, 적은 문제, 큰 문제, 가정 문제, 세계 문제, 국가 문제가 전부 이 안에서 해결되건만은 사람들이 다몰라서 흑암의 길에서 방황하는 것을 볼 때에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이천이는 기독도다러 “우리 두 사람만 있어 조용한데 좀 자세히 이야기 해다오, 그 가지고 있는 책이 무슨 책인가? 그 다 참말인가요?”
기독도 가라대 “그렇고 말고요, 천지는 변해도 이 말씀은 영원히 불변하실 진실한 말씀이요, 우리가 가는 곳은 영원한 나라가 있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우리보다 먼저 간 성도들과 천군 천사들이 서로서로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은총을 누리고, 금면류관을 쓴 장로들이며, 금거문고를 타는 성도들이며, 주를 위하야 충성되야 그 계명을 순종하다가 죽은 순교자들이 다 평안한 영생 복락을 누린다”고 그러한 나라를 방금 눈 앞에 보는 듯이 열심으로 말했답니다.
이천이는 그 말을 듣고 “아 어서 갑시다. 그렇게 좋은 곳이 있는 줄을 이 세상 사람들은 다 모르지요. 빨리 갑시다”.
기독도는 “여보, 그대는 짐이 없어 잘 가지마는 나는 내 짐에, 내 등에 있는 이 짐, 무거운 짐 때문에 빨리 갈 수가 없구려” 하니,
이천이 말하기를 “그대는 무슨 짐을 밤낮 그렇게 지고 다니오”하였다.
이천이는 같이 따라 가기는 가지마는 도무지 자기 죄에 대한 깊은 느낌이 없이 천박한 신자요, 돌작밭의 씨와 같이 싹이 곧 나오기는 하지마는 해가 나서 쪼이며는 곧 말라지는 것이요.
이렇게 재미롭게 얘기하며 가던 두 사람은 별안간 뜻밖의 수랑통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우울리(憂鬱里) 절망소(絶望沼)라는 곳이예요. 저희는 거기서 한참 딩굴어서 진흙 투성이가 되었소. 대단히 위험한 곳이어서 저들은 “내가 깊은 수렁에 빠져서 능히 있을 곳이 없나이다 내가 깊은 물에 들어가니 파도가 나에게 넘쳤도다”한 말씀과 같이 되었습니다.
기독도는 등에 짐이 무거워 더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이천이 기독도다러 말하기를 “여기가 어덴가? 이제는 어찌 하려는가?”
기독도 “글쎄 나도 모르겠다”
이전이 벌컥 성을 내며 가라대 “이 사람아, 이것이 종일 나에게 말하던 복이냐? 이 첫걸음에 이 모양이 되니 나중에는 무슨 일, 무슨 봉변을 당할른지 알겠는가, 내가 정신 빠진 자이지, 왜 이런 미친 놈을 따라 오다가 이런 봉변을 당했는고” 기독도를 원망하고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그 수렁은 뒤로 서서 내려오면 나오기 쉬운 곳이지요.
이천이는 겨우 빠져 나와서 기독도를 저주하며 “에 이놈아 어서 네나 혼자 천성 가서 내 받을 복까지 다 받아 먹어라. 나는 다시 너 따라가는 자, 너 같은 자에게 속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빨리 집으로 돌아 갔답니다.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 일이 참 지혜로운 일이라고 하고 칭찬하는 이도 있고, “이 사람아, 그러기에 내가 가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그런 미친 놈을 따라가는 것이 대단히 잘못이다”라고 책망하는 이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따라가려면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모험을 시작하였다가 조그마한 어려움이 있다고 중도에 피하는 비겁쟁이라, 너는 아무것도 성공 못할 놈이 아닌가, 뼈 없는 무골충과 같은 신용 못할 놈이다“라고 하야 온 동네의 조롱거리만 되었답니다.
오늘은 이만침 하고 그치겠습니다.
[4]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번 장망성 살던 기독도가 좁은 문을 찾아서 귀에다 손가락을 틀어막고,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 하고 힘차게 달아날 때에 고집(固執)이와 이천(易遷)이가 따라가다가 고집이는 중간에 돌아가고, 이천이는 따라가다가 그만 수랑통에 빠져서 이천이는 기독도를 원망하면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주님을 따라가다가 타락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환영 못받는 것이예요.
맛 잃은 소금은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힘이 되리라고 했지요.
이천이는 어드런 신자인고 하니 경기적 신자,
이천이는 왜 그렇게 속히 돌아갔는가? 경기적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불경기가 될 때 물러가는 거예요. 기독도를 따라갈 때는 좋은 것만 생각했지, 가는 길에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을 예상치 못한 것이에요.
강원도 춘천에 어떤 노파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자 석달 동안 예배당에 잘 다니다가 주일날 예배당 간 사이에 도적놈 와서 꼬추 서말 도적질해가 교회 아니 나오므로 그 교회 목사가 심방을 가니, 그 할머니, “나 이제 예수 안 믿을 테예요”, “왜 그러냐”하니, “하나님 있으면 왜 꼬추 도적놈 못 지켜 주겠소”한다. 자라 모가지 신자들, 자라 모가지가 평안 무사할 때는 쑥 나오다가는 뭐이 건드리면 쑥 들어가는 것처럼 오늘도 그런 신자가 많아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려면 여러가지 환란을 겪어야 하리라”, “만일 뒤로 돌아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하신 우리 주님의 간곡히 부탁하신 귀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왜 이들은 이 절망소(絶望沼)에 빠졌는가?
절망소(絶望沼)에 빠진 원인.
첫째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한 까닭이예요. 성도의 생활은 말을 조심하여야 해요. 밑천 안먹는 말이라고 공연한 말 너무 하다가는 실패의 원인이 되는 거요. 다윗이는 “내 입에 파숫꾼을 세워 주시옵소서” 하였소. 이사야도 “내가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처하야 입술이 더럽다고 회개했습니다.
둘째로, 우울리(憂鬱里)에는 징검다리가 있는데, 그 징검다리를 보지 못했어요. 징검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예요. 우리가 어려운 일 당할 때에 침착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상고하야 말씀에 서서 나아가야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환란을 받으나 안심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네가 물에 들어가도 같이 하고 불에 들어가도 같이 하리라” 이런 말씀을 기억해야 해요. “내가 주의 말씀을 감춘 것은 범죄치 않게 하려 함이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나이다” 예수님께서도 마귀 시험을 당할 적에 말씀으로 승리하셨거든요. 말씀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주 너의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다 신명기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승리한 것이예요.
기독도는 아무리 어려워도 돌아서지 않고 죽어도 천성이나 바라보고 죽겠다고 생각한 것이요. 혼자 아무리 애를 써도 할 수 없어요. 울어도 할 수 없고, 힘써도 할 수 없어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빠져 들어갑니다.
이때 마침 은조라, 은혜 은(恩)자, 도울 조(助)자, 은조란 분이 와서 건져 주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다”라고 하였소. 시험당할 때에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날 구해 주실 이는 주 예수시니 오직 예수뿐이 아닌가
베드로도 갈릴리 바디 풍랑을 보고 무서워 빠져 들어갈 때에 주님이 오셔서 적게 믿는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면서 붙들어 건져 주셨습니다.
우울리(憂鬱里)에서 나온 기독도는 내 짐이 점점 무거울 때에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시니 내 대신 짐을 져주시네 찬송을 부르면서 걸어간 것이랍니다.
세지(世智)의 유혹, 육정부(肉情府)에 사는 세지(世智)란 자가 기독도를 만나 “그대가 수고로이 어디를 가느냐”하니, 기독도는 대답하기를 “나는 장망성(將亡城) 살던 사람인데, 진실로 곤고한 사람이라, 좁은 문으로 와서 이 무거운 짐을 벗고 영생을 얻으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세지는 “허허... 이 사람 큰일 났구만 세상에 이 길처럼 험하고 괴롭고 어려운 길은 없는데, 그대가 오다가 한판 굴려났네 그려, 이제 앞으로는 얼마나 더 어려운지 모르는데, 곤하고 어둡고 위태하고 기갈과 추운 곳, 죽음의 곳이라고, 우리 동네 육정부 사람들도 한 때 간다고 하더니 다 돌아 왔다네. 김 목사도 돌아오데, 이 장로도 돌아오고, 홍 권사도 돌아오고, 양 권찰도 돌아오고, 그대로 가다가는 죽나부대. 주 기철 목사도 옥중에서 죽었다네, 손 양원 목사도 삼부자 한꺼번에 죽었다네, 이 판일 장로 열 세 식구 한꺼번에 죽었다네, 그리카고는 숱한 고통을 당하는 모양이데, 오늘 날 참 잘 만났네, 이제라도 속히 돌아가게, 내가 경험도 많고 지식도 많은 사람이니 내 말만 들으면 행복일세” 한다.
기독도는 “아니요, 아무리 어려워도 이 짐만 벗는다면 아무데라도 가겠소이다”
세지는 “그 짐 있는 줄은 어찌 알았나?”
기독도 “이 성경책 보고 알았지요”
세지 “예이, 무식한 사람은... 그렇게 맘이 약해 어찌해, 그거 다 사람 쇡이는거야, 그대 처자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무정히 살겠다고 하는 것은 인정도리상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일이니, 정히 그 짐 벗기 원하면 내가 좋은 길 하나 가르쳐 줄테니 저기 보이는 시내 산 아래 도덕촌 찾아 율법 선생한테 가서 수양을 하고 도를 닦아 보게, 거기는 물건도 싸고 집도 많아 처자를 데리고 재미난 생활을 하는 곳이야”.
기독도는 그 말을 듣고 “아 그렇게 좋은 길이 있어요” 하곤 가던 길을 버리고, 복음의 길을 떠나서 시내산 율법 선생을 찾아 갑니다. 갈수록 짐은 점점 더 무겁고 공포와 의심에 싸여 죽게 되니 죽게 되니 진퇴양난이요. 산에서는 화광이 일어나고 불꽃이 그 몸에 미치려 할 때에 그제야 세지에게 속은 줄을 알고 후회하고 더 가지 못하고 전신에 땀만 흘리고 있었답니다.
그 때에 마침 전도가 다시 찾아와서 엄숙한 말로 경계하고 바른 길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이지요.
전도가 가라대 “왜 내가 좁은 길을 가르쳤는데 이렇게 속히 곁길로 들었는가? 율법이나 도덕이나 인간의 수양으로 그 짐을 벗고 천성의 생명길로 능히 가는 줄 아는가?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너희 눈앞에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이더냐 너희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신을 받았느냐 율법의 일을 행함으로 성신을 받았느냐 너희가 이렇게도 어리석으냐”했습니다.
기독도 가라대 “그렇게 위험한 줄 몰랐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희망이 전연 없읍니까?”
전도는 다시 여러가지 주의 말씀을 뵈주며 “이제라도 회개하라”고 명령햇습니다. 세지의 말 들은 것 통탄히 여겨라 정도를 떠나서 미혹의 길을 간 것...
둘째는 십자가를 떠나 평안한 육신의 평안함을 구하는 것, 셋째는 죽음의 지배를 계속하는 곳에 발을 디디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배반하고 사람의 뜻을 순종함이요.
기독도는 벌벌 떨면서 “나는 화를 받을 자요 멸망을 받을 자”이라고 슬피 울며 회개하였습니다. 세지 만난 것도 불행이요, 그 말을 경솔히 믿은 것도 나의 어리석음이요, 사욕으로 미혹하는 길을 좇은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였소.
전도는 다시 주의 긍휼과 사죄의 말씀을 주어 위로하고 바른 길에 세워 주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성취해라 이단을 삼가라 우리 가는 길에 복음에 서지 못한 어린 심령들은 율법주의, 도덕주의, 신비주의, 인본주의, 자유주의자들에게 괴롬을 많이 당합니다. 사이비한 소위 종교 이단지도로 끌고 나갑니다. 좀 신령하게 잘 믿어 보려고 하는 자가 근본 문제는 알지 못하고 지엽문제를 주창하다가 미혹에 드는 일이 많아요.
바른 성신 받는 일은 먼저 빛 아래서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성결을 받으며 또 참사랑이 내 맘에 성취하야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함이 급선무이련만, 무슨 이적이나 묵시나 금식이나 방언이나 신유나 예언을 주창하다가는 탈선이 됩니다.
물론 성신의 역사에도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이상을 본다고 하니 이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이 성신으로 오는지, 마귀에게로 오는지 분간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아는 거예요. 신비주의로 주의 말씀에 서지 못하고 극단적 감정과 자기 노력을 믿고 특별한 무얼 보고 들으려고 사람의 정욕으로 구하다가는 성신은 받지 못하고 마귀의 영에 속아 자기도 속고 사람을 속이는 일이 많답니다.
율법주의자들 가운데에는 토요일이 안식일이라 주장하야 하나님의 계명을 엄수하는 것 같으나 밤낮 날타령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녜요.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면, 당나귀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당나귀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당나귀는 사람이 타고 다니자고 있는 것이지, 사람이 당나귀를 머리에 뒤집어 니고 다니라는 말이 아니라는 말이예요. 이제는 날타령 그만치 하고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산 예수를 그대로 받아 당신 심중에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시기를 진실로 바라는 바이예요. 일언이폐지하고 순복음적이요, 정통 건전한 신앙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통신앙, 하나님은 빛이시다. 빛은 이지 방면이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예요, 사랑은 도덕 방면이예요, 하나님은 생명이예요, 생명은 신비 방면인고로 이지(理智)와 도덕(道德)과 신비(神秘), 삼자가 구비한 신앙이 건전한 참종교요, 참그리스도인입니다. 이지(理智)와 도덕(道德)이 결함된 신비(神秘)는 미신(迷信)에 빠지고, 신비의 체험이 없는 이지(理智)는 너무 냉냉하고 쌀쌀합니다. 이지와 신비가 없는 도덕가들은 너무도 건조 무미(乾燥無味)하고 싱거워요. 언제나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냉정하라구요. 신비의 가슴이 뜨겁다가 머리까지 뜨거워지면 큰일이요 라고 기독도를 위로하고, 다시는 곁길로 들지 말라고 신신부탁하고, 좁은 길로 가는 길을 다시 한번 분명히 가르쳐 주고 흔연히 작별하였습니다. 재차 사명의 사람이예요. 당신의 택한 사람을 위해서는 자주자주 전도를 보내 주신 주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더라는 말씀 그대로요.
엘리야가 사명에 낙심하고 호렙산의 동굴에 있을 때에 재차 사명을 주셨고, 요나가 불순종하고 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여호와 다시 나타나서 재차 사명을 주시고,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떨어져서 삼년 전에 내어 버렸던 그물을 다시 가지고 삼년 전에 떠났던 갈릴리 바다에 나간 베드로를 다시 찾아 새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아직 감복하지 않는 자야 어찌 사람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예요 죄악에 타락된 우리까지 사랑하니 참사랑이 아닌가.
기독도는 전도를 작별하고 이제는 누구에게나 말도 하지 아니하고, 누가 물어도 대답도 아니하고, 이전의 잘못만 걱정하면서 급한 걸음으로 좁은 문만 바라보고 걸어가다가 좁은 문에 다달으니 그 위에 간판을 썼는데, “문을 두다리라 또한 열어 주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이만침 하고 그치겠습니다.
[5]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제 2장, 좁은 문에서 미궁까지,
기독도가 문을 재삼 두드리니 인자(仁慈)란 사람이 마중나옵니다.
인자는 “그대는 누구며, 어데서 왔으며, 무얼 구하는가?”고 했습니다.
기독도 말하기를 “나는 가련한 죄인으로 장망성을 떠나 천성 갈려는 사람인데 이 문을 지나야 그리로 가게 된다고 하므로 왔사오니 잘 지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했지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두다리면 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매우 좋은 일이라고 하여 문을 열고 속히 들어오라고 손을 잡아서 끌어 들입니다.
기독도는 “왜 이처럼 급히 재촉하십니까?”
인자 “여보시요, 저기 보지 못하시요? 이 근방에 강도 둘이 있는데, 강도 굴이 있는데, 마귀 왕 사탄이가 여러 부하들을 거나리고 이 문에 들어오는 사람을 화살로 쏘아 죽이는 때문이라고 합니다.
참말로 이 문에 들어 갈려면 용단성 있게 들어가야지 우물쭈물 하다가는 차차 마귀의 화살에 찔리우는 것이랍니다. 하늘나라에는 용단성, 결단성이 필요한 것을 보여줍니다.
옳아요. 어떤 날, 마귀들이 회의를 하는데, 회장 마귀가 말하기를 “여러분 이 인생들을 어찌 하여야만 하겠소?” 하니, 한 마귀가 일어서서 말하기를 “내 좋은 방법이 있소,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에게 무신론을 가르쳐 주면 잘 될 것이요”하였다. 다른 마귀가 “아니요, 그 말에는 반대요, 아무리 하나님이 없다고 가르쳐 주어도 사람들이 평안할 때에는 무신론을 주창하지마는 어려움을 당하며는 임사호천(臨死呼天)으로 하나님을 찾으니 소용이 없어요” 다른 마귀가 “회장, 내 좋은 방법 들어 보세요 하나님은 계시다 그래도 지존 지엄하시고 거룩하시고 신령하신 분이니 너 같은 더러운 죄인이 가까이 할 수 없다고 가르치면 잘 될 것이요” 다른 마귀가 “아니요, 그 방법도 틀렸소, 그러기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가 십자가에 죽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 무섭다 해도 그의 십자가를 부여잡고 그의 공로를 힘 입어 바싹바싹 들어가니 그도 소용이 없소” 다른 마귀가 “회장, 내게 제일 좋은 방법을 들어 보시요, 하나님도 계시다. 또한 십자가의 사랑도 있다. 그래도 아직 남은 때가 많으니 지금부터 믿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차차 믿어라 차차 회개하라 내일로 미루고 내달로 미루다가 지옥에 툭 차 쓸어 넣으면 된다”고 하였소. “아 그것 참 좋은 방법이라”고 만장일치 가결하였다는 말이 있지요. 진실로 차차 마귀가 고약합니다. 오른눈이 범죄하면 그 눈을 빼어 버리고 오른손이 범죄하면 그 손을 끊어버리라고 한 것은 용단성 있게 결단성 있게 회개하란 말이요. 기회는 올 때에 붙잡아야지 갈 때는 붙잡지 못한 답니다.
영국 박물관에를 가보면 이상한 게 있다구 그래요. 대가리는 말 대가리, 꽁지는 새 꽁지인데, 거기다가 “기회는 올 때에 붙잡아야지 갈 때는 못 붙잡는다” 그렇게 써 놨답니다. 그건 무슨 소린가 하면 말대가리가 앞에 있어서 터렁구가 있어서 앞에서 잡아서 얼마든지 흔들 수 있지만 뒤에는 새꽁지가 돼서 쥐면 쪽 빠지고, 쥐면 쪽 빠져서 잡을 재간이 없답니다. 기회는 앞에 올 때 잡아야지 뒤로 갈 땐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회는 앞문으로 와서 뒷문으로 나간다고 그래요.
둘째는 효시(曉視)의 칠 교훈,
기독도는 인자와 여러가지 문답을 하고 인자의 안내를 받아 효시(曉視)의 집에 들어가서 일곱 가지 진리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효시는 한 손에 등불을 켜 들고 기독도의 손목을 잡고 진리의 궁전에 들어가서 일곱가지 구경을 시켰습니다.
효시는 진리의 영으로 충만한 참된 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요. 참된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이요.
일곱 가지 교훈,
첫째 방에 들어가니 엄숙한 전도자의 화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상 일은 등에 두고 손에는 가장 좋은 책 한 권을 들고, 그 눈은 하늘을 향하여 있고, 입술에는 진리의 율법이 써 있고, 머리에는 황금의 면류관을 쓰고, 많은 사람을 쉬지 않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이는 참전도자의 상태를 보여줌이예요. 세상이 그를 향하여 못 박고 그는 세상을 향하여 못 박혔소. 그의 소망은 하날에만 있어 우에 있는 것만 생각합니다. 손에 들린 책은 물론 성서가 그 손에서 떠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도를 전하기를 쉬지 않는 것이요. 부지런히 열심으로 많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만나야만 그대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했소. 오늘의 전도자는 세상을 등지는 대신에 세상과 짝하는 음행하는 여인과 같은 너희들아 세상과 벗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을 알지 못하나뇨, 하는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이요,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땅두더쥐처럼 땅만 내려다 보고 손에 성경 대신에는 소설 잡지가 떠나지 않고, 입을 열어 진리를 말하는 대신에 무익하고 허탄한 말이나 없는지 반성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어요.
율법의 사명과 복음의 은총,
둘째 방에 들어 갔더니 대청에 먼지가 가득히 찼는데, 한 사나이가 빗자루로 쓸면 쓸수록 먼지는 더욱 일어나요. 숨이 맥힐 지경이요. 그때 한 소녀가 물을 가지고 와서 물을 뿌린즉 먼지가 다 깔아 앉고 정결하여집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니 이는 율법의 사명과 복음의 은총을 보여 주신 것이요, 대청에 먼지가 가득찬 것은 항상 풍진 세파에 잼긴 우리의 마음이 죄로 더럽힌 심령을 가르치며, 모세의 율법으로는 쓸면 쓸사록 죄가 다시 일어나나니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사명은 있으나 깨끗케 할 힘은 없습니다. 소녀가 물을 가지고 뿌리는 것은 은혜를 가르치는 것으로서 예수의 피와 말씀으로만 우리를 정결케 하심을 알려 주는 것이요.
율법과 은혜의 대조,
율법은 은혜로 말미암아 오고, 은혜는 예수로 말미암아 왔나니라.
율법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 하고,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은 영생이라 하였소.
율법은 범죄한 영혼은 반드시 죽으리라 하고, 은혜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였소.
율법은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고, 은혜는 사랑은 여게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야 그 독생자를 주사 화목제가 되게 하셨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네가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은혜는 네가 빚진 것을 탕감하리라 합니다.
율법의 선언은 정죄와 죽음이요, 은혜의 반포는 칭의와 생명입니다.
율법은 새 심령과 새 정신을 가져라 하고, 은혜는 내가 너희에게 새 심정을 주리라 하였소.
율법은 하나님을 위하야 사람이 무얼 할까 함이요,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위하야 무엇을 하였는가 함이외다.
율법은 하나님의 무서움을 보여 명령을 순종하게 하고, 은혜는 하나님의 긍휼로 사람을 권면합니다.
율법은 사람에게 거룩을 요구하고, 은혜는 사람에게 성결을 줍니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요, 은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세째 방에 들어 갔더니 두 아이 급욕(急慾)이와 인내(忍耐)를 보았소. 어떤 아이가 재물 든 보따리를 주니 급욕은 혼자 다 지나가고 매우 기뻐하나 미구에 다 없어지고, 인내는 마지막까지 불평불만 없이 지내다가 더 좋은 상을 받았소.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천성 가는 성도는 급욕이가 되지 말고 인내가 되라는 말씀이예요.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이라. 일시 눈앞의 정욕으로 영원한 장래 기업을 잃지 말라는 것이요.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 기업을 팔아 먹은 것처럼 되지 말라구요. 잠깐 향락의 무정한 부자는 영원의 지옥 형벌을 받고, 모든 고난을 견디면서 의를 지킨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영원한 천국 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네째는 마귀의 냉수와 성신의 기름,
또 한 곳에 다다르니 담 안에는 불이 나오는데, 왠 한 사람이 물통에다 물을 끼얹어 불을 끕니다. 그러나 불은 거의 꺼지다가는 또 다시 일어나고 꺼지다가는 다시 일어 납니다. 왠일인가 하고 돌아가 보니 담 밖에서 기름을 붓는 사람이 있어요. 이 불은 신앙의 불, 은혜의 불입니다. 악마는 이를 미워하여 각양의 시험 냉수를 끼얹습니다.그러나 배후에서 부어 주시는 성신의 기름은 오날까지 우리의 믿음을 보전시켜 주시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요. 마귀의 냉수와 보혜사의 역사를 알려 주시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오직 감사할 뿐이요.
다섯째는 선한 싸움,
또 한 즐거운 곳에 이르러 굉장한 궁전을 보았습니다. 거기 들어가는 사람은 문 앞에서 성명을 기록하고 들어가야 하는데, 일변 무장한 폭도들이 방해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놈들이 무서워서 뒤로 물러가는데, 어떤 다른 무장한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결사적으로 그 놈들과 싸워 이기고 궁전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궁전 안에 노래 소리가 있어, “오라 오라 들어오라 영원한 영광은 네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려면 선한 싸움을 힘써 싸워 영생을 취하라 가르치는 것이요” 너희가 죄를 대적하되 피 흘리기까지 힘쓰지는 아니하였나니라. 마귀로 더불어 싸우고, 죄로 더불어 싸우고, 자기로 더불어 싸우고, 세상으로 더불어 싸우는 것이요.
여섯째는 배교자(背敎者)의 말로(末路),
다른 방에 들어가니 캄캄한 감방 철통안에 있어 고랑을 차고 신음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에게 물으니 나도 전에는 주님의 제자로서 덕행이 있다는 말을 듣고 천성 가든 사람인데, 점점 게으르고 사욕을 좇아 귀한 도리를 거역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저바리고 큰 죄악에 걸려 아주 타락하여 소망 없는 자가 되었다고 자백하였소. 배교자의 말로를 보여 주신 것이요.
평양 모란봉에는 20년간 목사 노릇 하다가 타락해서 지금 사주장책 보는 점쟁이가 되어 마귀 전도자 노릇 하는 사람이 있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서 너희 가운데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 떨어질까 염려하라.
일곱째는 대심판(大審判)의 꿈,
마지막으로 한 침실에 들어가서 한 사람이 자다가 깨어 벌벌 떨고 땀을 흘리며 공포 중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이제 꿈을 꾸었는데, 하늘이 캄캄하고, 천둥번개를 무섭게 하고, 검은 구름이 일고, 나팔 소래가 나고, 화염이 충천하고, 하늘에서 소래가 있어 불러 이르되 “죽은 사람들은 다 일어나 심판을 받으라”고 하니, 많은 사람을 갈라 악인은 지옥에 잡아 넣고, 선한 사람은 천국으로 보내는 광경을 보고 무서워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장차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에 서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쟁이는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던지리라. 면양과 산양을 갈라 놓는 날이 있을 것이요, 선과 악이 혼동되고 의와 불의가 지금 당장에 보증이 없다고 안심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요. 태양에 구름이 가리웠다고 태양이 없어지나요.
오늘은 이만침 하고 그치겠습니다.
[6]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도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번에 장망성 살던 기독도가 좁은 문까지 가서 두다릴 때 좁은 문에 들어가서 효시네 집에 가서 일곱가지 교훈을 배웠지요. 참전도자, 율법의 사명과 복음의 은총, 급욕과 인내, 마귀의 냉수와 성신의 기름, 선한 싸움, 배교자의 말로, 대심판의 광경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곤 그 효시네 집에 가서 모든 것을 구경하지마는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돌아다니면서, 그 진리는 재미가 있지마는, 이 무거운 짐은 언제나 떨어지겠느냐고 말씀할 때에 이제 저편으로 돌아가면 구원이라는 담 모퉁이 돌아가서 십자가를 만나야 당신의 짐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십자가를 언제나 만날까 하고 구원의 담 모퉁이를 돌아가니 거기에 흔연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환상이 나타납니다. 그때 기독도는 동경하던 구원의 십자가 담 모퉁이 갈보리 언덕에 서 있고, 그 안에는 무덤이 있는 것을 보고는 다가가서 십자가를 붙안을 때에 기독도의 무거운 짐은 십자가 밑에 이르자 뚝 떨어져서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뵈이지 아니합니다.
기독도는 너무도 씨원하고 깨끗하고 기쁘고 즐거워서 “우리 주님께서 괴롬을 받으심으로 나에게 쾌락을 주시고, 우리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나에게 생명을 주셨도다” 하고 불렀습니다. 감사의 눈물이 절로 흐릅니다.
이때에 천사 세 분이 나타나서, 첫째 분은, “소자야, 안심해라 네 죄를 사햇다”하시고, 둘째 분은 나타나서, 남루한 옷을 벳기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갈아 입혀 주시고, 세째 천사는 나타나서 이마에다 인을 쳐주면서 구원의 증표를 주셨는데, 그 구원의 증표에는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하는 이사야 43장 1절에 있는 그 말씀이었을 거예요.
천사 세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성부의 대표로 죄를 사해 주시고, 성자의 대표로 우리의 의가 되어 주시고, 성신의 대표로 우리에게 인을 쳐주셔서 구원의 확증을 준 것이요. 너는 내 것이다. 잘 났어도 내 것이요. 못 났어도 내 것, 내 것은 애착심이 있어요. 내 것은 잘 간수하는 것이요, 내 것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요, 우리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은 나의 것이니 위대한 교환이 되는 것이요, 이 귀중한 체험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고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느니라,
우리 죄를 소멸하시는 권능, 하나님과 화목시키시는 권능,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주시는 권능, 우리 생활에 성결을 주시는 권능, 마귀를 박멸시키시는 권능입니다. 할렐루야!
이 십자가에는 세 방면의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는 나를 사랑하야 나를 위하야 몸 바리신 대속의 십자가,
둘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체험의 십자가,
셋째는, 내가 지고 사는 십자가,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것은 나무깽이 해서 지고 다니거나, 십자가 패를 차고 다니는 그것이 아니예요, 십자가의 정신에서 사는 것이요, 용감한 십자가, 인내의 십자가, 공의의 십자가, 사랑의 십자가, 겸손한 십자가, 평화의 십자가, 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하루하루 살게 되는 것이예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누구든지 자기를 이기고 주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말살시키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찬송을 부르면서 기독도는 기쁘고 감사에 넘쳐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길가에 가다가 언덕 아래에 내려가 보니 잠쟁이 세 사람이 누워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 잠쟁이 이름은 뭐인고 하니, 우멍이, 어리석을 우(愚)자, 힘입을 몽(蒙)자, 멍텅구리란 말이요, 해타, 해타(懈惰)는 게으름뱅이, 자신, 스스로 자(自)자, 믿을 신 (信)자, 자신이란 세 사람이 지금 잠을 자고 있습니다.
기독도는 깨워 줄려고, “우몽아, 왠 잠을 이렇게 자냐, 위험하구나” 하니,
우몽이, “위험하기는 무얼 위험해” 하면서 그냥 자고 있습니다.
기독도, “해타야 일어나거라” 하니,
해타, “아이고, 조금만 더 자고” 합니다.
기독도, “자시야, 일어나거라”하니,
자신, “얘 이놈아, 너는 네 걱정이나 하지 남의 걱정은 왜 하니” 하고 그냥 잠을 자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이런 잠꾸러기가 많이 있는 것이예요.
우몽이, 너무 몰라서 잠을 잡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 주어도 감각이 둔해서 깨닫지를 못합니다. 밤낮 잠을 자는 신자가 있어요.
둘째는, 해타, 게으름뱅이가 잠을 잘 잡니다. 안일에 취해서 잠을 잡니다. 잠언26:13절에 보면 “문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나니라”, “게으른 자는 손을 그릇에 넣고 입으로 들어 올리기를 괴로워 하나니라” 아무리 은혜를 주어도 못 받는다는 말이지요.
셋째는, 자신, 되지 못하고 된 줄 알고,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하고, 없고도 있는 체 하고, 밉고도 고운 체 하고 잔뜩 체증이 나서 잠을 잡니다. 밤낮 들어도 그 소리지, 목사들 밤낮 하는 소리, 내 다 알아, 내 다 알아, 하면서 자고 있는 것이예요. 성경에 실패한 잠쟁이들이 참 많지요. 성경에 잠 자다가 실패한 사람 들어 보세요.
노아는 잠 자다가 벌거벗고 아들들한테 망신했지요.
롯이는 잠 자다가 자기 딸들한테 범죄하고,
다윗이는 잠 자다가 우리야의 아내에게 범죄하고,
삼손이는 들릴라 무릎 베고 잠 자다가 눈 뽑히고 연자 맷돌 돌리게 되고,
요나는 배 밑창에서 잠 자다가 고기 뱃속에 들어가고,
시스라는 야엘의 장막에서 잠 자다가 귓구녕에 말뚝 박혀 죽고,
이스보셋은 잠 자다가 배 찔리워 죽고,
솔로몬때 미련한 여자는 잠 자다가 아이 깔리워 죽이고, 웃방 여자는 제 아이 도적 맞고 솔로몬에게 재판 왔답니다.
유두고는 삼층 다락에서 떨어져서 목아지 부러질 뻔 하였고,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 자다가 말고의 귀 깎고,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까지 하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못 맞았답니다.
깨어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해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구나
이때는 자다가 깰 때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마땅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라
이 잠쟁이들은 길가에 누워 저도 안 가고 남도 못 가게 천국 문 가로 막고 방해하는 자가 교회 안에 많이 있음을 보여 주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 없는 신자,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신자들, 기독도가 이 잠쟁이들을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내버리고 갔답니다.
천로역정 하권에 보면은 이들은 강도들을 만나서 다 큰 봉변을 당하고 끝내는 나무에 목 매달아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잃으면 후회막급이예요. 볼찌어다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서 벌거벗고 다니지 말고 자기 옷을 지켜 부끄러움을 뵈지 않는 자가 복이 있나니라
기독도는 그대로 길을 가는데, 갑자기 담을 넘어서 껑충껑충 뛰어 들어오는, 담 넘어 들어오는 사람이 있어요. 웬 사람인가 하고 물으니 “우리는 허영촌(虛榮村)에 사는 위선(僞善)이와 시의(是義)라고 합니다. 허영촌에 사는 위선(僞善)이, 거짓 착한 체하는, 시의(是義), 자기 의를 믿는 시의, 시온산으로 가려고 합니다.
기독도가, “여보, 천성 갈려면 법대로 문으로 와야지 왜 담 넘어 들어오오. 담 넘어 들어오면 성경에 절도요 강도라고 하지 않았소”
“흥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우리 동네에서는 좁은 문이 어디라고요, 당신들은 돌아갈 꾀하면 우리는 질러갈 꾀 합니다” 위선이와 시의는 일약 천국에 들어갈 껑충쟁이랍니다. 껑충쟁이, 신자들 중에는 잠꾸래기도 걱정이지만 껑충쟁이도 걱정이예요, 늙은 노인네들은 대개 항상 잠자고 깔고 뭉개지만, 젊은이들은 대개 교회안에 들어온지 몇일도 안되 가지곤 벌써 제가 다 한다고 껑충거리는 껑충쟁이들이 많아서 걱정이예요. 교회 말썽꾸러기는 위선이와 시의가 이 껑충쟁이들 까탄에 걱정이요. 교회에서는 이 사람의 정도도 보지 아니하고, 신앙정도도 보지 않고, 은혜의 경험도 보지 않고, 좀 열심이 있어뵈고, 돈푼이나 있고, 좀 지식이나 있고 똑똑해 뵈이면 그대로 설익은 걸 갖다가 교회 성직을 맡겨 놓으면, 직분을 주면, 종래 실패하는건 십상 팔구는 이 위선이와 시의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위선이와 시의를 삼가라.
두 사람은 기독도다러 “당신은 문으로 들어온 것이나 우리가 담 넘어 들어온 것이나 다른거 무어 있소?”
“아, 자세히 보구려”
“아, 그 옷이 다르구려”
기독도, “여보, 옷만 다른 줄 아쇼, 이런 증표 당신 있소? 증표, 증표, 너는 내것이라는 증표 있소?”
두 사람은 그 증표는 없지만 그대로 간다고 합니다. 고집을 부리며 따라가는 것, 천성 가는 것 같지만 나는 성도 많은 저 천국을 가는 길이세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면서 따라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위선이와 시의를 분별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요, 그러나 그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알 것이지요, 조만간에 판결날 것이예요.
그 양인은 같이 찬송하면서 나아가는데, 그 험준하고 위험한 산 꼭대기에 다다르니 이름은 간난산, 어려울 간(艱)자, 어려울 난(難)자, 간난산(艱難山), 몸을 애끼어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쉬운 길 갔던 껑충쟁이들이 어찌 이런 산을 넘어갈 수 있나요. 좀 쉬운 길 찾아 산 허리를 돌아보니 한 길은 위험한 길이요, 또 한 길은 패망의 길이라, 두 사람은 다 곁길로 가다가 실족하여 굴러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오늘은 이만침 하고 그치겠습니다.
[7]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하룻동안에 무슨 일이 생길른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또 다시 말씀드릴 기회 얻은 것 감사합니다.
지난번에 장망성 살던 기독도는 좁은 문 지나가 그 무거운 짐 십자가에서 떨어지고 구원의 확증표를 얻어가지고 나아가는데, 간난산을, 그 무릎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기독도는 그 간난산에 올라가는데, 너무도 힘들어서 휴식정이라는 정자에서, 쉴 휴(休)자, 쉴 식(息)자, 쉬는 정자 휴식정(休息亭)에서, 거기에서 십자가 밑에서 천사가 입혀준 의복을 만져보고, 특히 거기서 얻은 증표를 꺼내 쥐고 쉬면서, 좋아하면서 스르르 잠이 들어 증서를 그만 떨어치고 말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깨와 가라대 “갈 길 바쁜데 왠 잠을 저렇게 자는고, 개미에게 가서 공부를 좀 해야겠구만”합니다.
기독도는 화닥닥 일어나 깨보니 밤새도록 잠을 잤습니다. 그만 새정신이 들어 급히 달려 뛰어 올라가는데, 산마루에 거의 올라가니 왠 두 사람이 숨이 하늘에 닿아서 급히 맞으러 달려 내려 옵니다.
그 달려 내려오는 사람의 이름은 뭐인고 하니, 심경(心驚)이, 마음 심(心)자, 놀랠 경(驚)자, 경풍쟁이, 회의(懷疑), 의심쟁이, 품을 회(懷)자, 의심 의(疑)자, 회의(懷疑),
그들이 말하되 “우리는 천성가던 사람인데, 가는 길에 사자 두 놈이 있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구, 사람이 살고 봐야지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래서 우리는 돌아갑니다. 당신들도 같이 돌아가자”고 하니,
기독도는 “나는 돌아가지 않겠소, 돌아가도 죽고, 나아가도 죽을 바에는 차라리 나아가다가 죽겠다“고 했소.
심경이와 회의는 “너 혼자 잘 살아라, 잘 가거라 우리는 돌아간다” 하면서 막 달아내려가 “걸음아 날 살려라 코 떨어지면 뱀 주워가자” 하면서 막 달아납니다.
기독도는 마음을 진정하려 해도 무서움과 의심은 점점 더 속을 설레이고, 그때는 천사가 주신 증표를 꺼내보고 위로를 받을려고 아무리 찾아보나 아무리 뒤져보나 간 곳이 없어요. “야 이것 큰일 났구나 이거 웬일인가, 어데서 떨어졌는가 생각해 보아라, 어데서 떨어졌는가 생각해 보아라” “아! 내가 휴식정에서 그때 꺼내보면서 졸다가 떨어졌구나, 이거 어떻게 하나”, 그만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아 번민하고 애통하나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다시 찾아야지. 무릎을 꿇고 자기의 그 우매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갑니다. 여러 시간 올라왔던 길을 도로 내려가니 공연한 헛걸음이지요. 내려가면서도 간절히 그 증표를 도로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내려갑니다. 혼자 탄식하기를, “잠깐 쉬라고 하는 정자에서 내 육신 평안과 향락을 위하야 방심한 것은 참으로 불쌍한 인간이로구나” 마침 쉬던 정자에 와보니, 아멘, 할렐루야, 잃었던 증표는 떨어진 그곳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밝은 대낮에도 가기 어려운 그 간난산 길, 밤중에 어떻게 넘어갈까, 주저 앉아서 통회하고 아무리 해도 아니갈 길 못 되니 용기를 내어 올라갑니다. 배는 고프고, 다리는 아프고, 목은 마르고, 피곤할대로 피곤하여 죽을 지경이예요.
참으로 실패하기는 쉬워도 회복하기는 힘들어요. 격언에 ‘일 분 동안에 실패한 것이 백년에 회복하기가 힘들다’고 했지요. 한푼 동안에 실패한 것이 백년 동안에 회복하기가 힘들어요. 주께서도 자지 말고 깨어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말라고 부탁하였소. 주님은 그렇게 피땀 흘리면서 기도하시는데, 베드로는 그 날 밤에 왜 그렇게도 무심하게도 잠만 자느냐, 은사 선생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저주까지 하고, 은혜 회복을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가요. 전설에 베드로는 닭이 울 때마다 그 실패를 생각하야 울었다고 합니다.
내가 아는 교역자와 신자들 중에도 한 때는 그렇게 주 위하여, 교회 위하여 나아가던 형제 자매들이 잠시 쉰다고 하다가 아주 타락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예요. 다시 회복하려고 하여도 삼손이 머리털 깎이우듯이 힘을 잃고 허덕이는 신자를 많이 봅니다. 자전거 탄 사람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발틀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정거하는 때는 나가 넘어지는 것이지요.
여름에는 덥다고 산으로 바다로 피서를 간다고 야단을 하는 동역자 여러분들 조심하시라, 어떤 목사는 강에 나가서 낚시질 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답니다. 미신 사회에서 비방거리가 되고, 또 주일날 뱃놀이 나갔다가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욕을 돌리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로 동행, 동거 동락, 예수로 만족하사이다.
내가 만주에 순회 전도할 때에 부흥회 앞자리에서 어떤 자매가 아이를 업고 와서 자기 진상을 고백하면서 애통해 합니다. 고국에 있을 때 어느 교회에 장로의 따님으로 보육학교를 졸업하고, 그 교회 유치원 보모로 있으면서 교회 찬양대를 지도하다가 미혼 처녀로서, 같은 찬양대 아내 있는 집사하고 사랑이 지나쳐서 까빡 실수를 해서 불의의 관계의 소문이 나자 두 남녀는 만주로 와서 아이를 둘 씩이나 낳고 살림을 하지만 남자는 아주 타락하여 방탕하고 술주정뱅이가 돼서 밤낮 그 여자를 때려 주면서 나는 너 때문에 망했노라고 고통을 주니, 집에 돌아갈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아직 그 양심은 살아 있어서 그 속에서 발버둥이를 치는 것이요. 가문을 망치고, 교회를 망치고, 자기의 신세를 망친 일을 백년 아니라 천년 만년에라도 무를 수가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땅에 이런 실패에 우는 남녀가 어찌 한 두 사람에 그치겠습니까? 일시적 찰라에 꿈꾼 향락이 영원히 무르지 못할 가련한 신세, 불행의 종국을 생각하여 방심하지 말라구요. 천국 가는 행인들아, 만사 만단에 종국을 생각해라, 만사 만단에 종국을 생각해라.
그러나 아주 자포자기 낙담하지는 마세요.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오. 의인은 일곱번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난다고 하였소. 배전의 용기 백배로 은혜를 회복하시요.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기독도는 그 밤중에 그 간난산을 천신만고로 올라갑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마침 산꼭대기에 아름다운 집, 미궁(美宮)이라는 굉장한 궁전이 있어요. 천성중에 길 가는 나그네를 위하야 예비한 집이요. 그 집을 바라보고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는데, 조금전에 심경(心驚)이와 회의(懷疑)가 보고 무서워 도망치던 사자 두 놈이 미궁 문 앞, 가는 길 좌우편에 엎디어 있지 않아요. 이것을 본 기독도는 본능적으로 공포와 의심에 눌리워서 뒷걸음질쳐 도망을 하려는 찰라에, 경성(警醒)이라는 사람, 깨울 경(警)자, 깨울 성(醒)자, 경성(警醒)이라는 사람이 “기독도야, 그 사자 무서워하지 말아라 발목아지 잡아맨 사자이다”라고 합니다. “아 그래요? 그건 왜 거기다 매어 두었소”, “이 사자를 매어 둔 것은 행인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이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래 위의 집인지, 반석 위의 집인지, 알곡인지, 쭉정인지, 선한 목자인지, 삮군 목자인지 시험하기 위함이다. 그대는 어찌 그리 담력이 약한가?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정로로, 가운데로만 오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기독도는 새 용기를 내어서 “그래요, 그러면 내 어디 지나가 보지”하고 사자 두 틈으로 지나가는데, 왠걸, 좌우편에서 사자 둘이 으르랑 하면서 달려듭니다. 으아! 그러나 몸을 해치지는 못해요. 왜? 발목아지 잡아 맺거든, 만일 좌로 치우치면 좌편 사자에게 상할 것이요. 우로 치우치면 우편 사자에게 상할 것이지요.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그렇습니다. 악마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으나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는 거예요. 성도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말아야 만사에 형통하리라고 하였소. 극단적 성질을 가지고 발목아지 잡아맨 사자를 보고 경거망동 하다가는 반다시 악마의 발톱에 찢기워, 좀더 심하면 아주 마귀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왜정시대나 해방후에 세상 술에 취하야 너무 앞장 서서 나아가면서 교회의 속화를 불러 들이는 발람의 길을 밟고, 또 한편 신령파라고 자칭하면서 뒤로 물러가서 좌편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니골라당, 즉 이단의 걸음을 걷는 자 많음은 얼마나 원통한 일인지 알 수가 없지요.
교회의 강단을 땅땅 뚜다리면서 국가가 있은 후에 종교가 있다고, 국가가 없는 종교 무슨 소용 있느냐고 웅변을 토하는 목사를 보고, 야! 참 애국자로구나 하고 알고 보니 과거에 왜정시대에 황국신민 만드느라고 돌아 다니면서 시국 강연을 많이 해서 그렇게 애국 강연도 잘 하는 모양이예요. 이런 현상을 보고 소위 진리옹호파라고 자칭하는, 신령파라고 하면서 현대 교회는 다 마귀당이다. 다 마귀 자식이다고 악수도 하지 않고, 한 자리에 앉지도 아니하고, 현재 교회당은 다 불살라 버리고, 새예배당은 못 짓고, 개인의 집, 술집, 혹 우상숭배하던 미신자 집, 요리집에 뫼면서도 자기들만 신성하다고 하니, 신사참배하지 않은 계명은 잘 지켰는지 모르지마는 제일 되는 사랑의 계명을 버렸으니 그 무서운 죄를 어찌 할꼬, 사람 사랑하다가 죄를 사랑하지 말고, 죄를 미워한다고 하다가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오십보로서 백보지요. 숨은 부끄러움이 적지 않습니다. 다같이 함께 회개하고 속화와 이단을 퇴치하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힘써 싸워 다시는 그런 길을 걷지 마사이다.
기독도는 미궁에 들어가니 근신이, 경건이, 현지, 인애란 성도들이 나와서 영접을 해주어요. 근신(謹愼)이, 경건(敬虔)이, 현지(賢智), 인애(仁愛), 배고픈 기독도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기독도에게 마실 걸 주고, 병든 기독도에게 약 발라 주고, 평안방이라는 방에서 잠을 재워 몇날 동안 안식하야 피곤한 몸이 새힘을 얻었어요.
서재로 데리고 가서 구약의 성도들의 역사와 전기를 다 구경시키고, 무기 곳간으로 데리고 가서는 옛날 주의 종들이 사용하던 모든 기구를 구경시키고, 다시 기독도에게도 무장을 시켜 주면서 이제까지는 무장이 없어도 왔지만 앞으로는 더 어려운 시험이 있을 터이니 무장을 단단히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무장은 하나님의 전신갑주, 구원의 투구, 의의 호심경, 진실한 띠,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성신의 검을 들려 주었습니다.
기독도의 무장은 앞에만 시켰지, 뒤에는 시키지 아니합니다. 왜? 돌아 서지 말라는 거예요.
[8]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전번에는 기독도는 간난산에서 졸다가 증표를 잃어버리고 그것 찾느라고 천신만고로 애써서 다시 찾아가지고 간난산 꼭대기의 미궁에 들어갈 때에 좌우편의 사자 보고서 그게 무서웠지마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로로 들어갈 때에 무사히 통과해서 들어갔습니다.
들어갈 때에 그 미궁의 성도들, 근신이, 경건이, 현지, 인애가 마중나와서 영접해 주었습니다. 미궁의 성도들은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예요.
첫째는, 경성(警醒)이, 미궁의, 미궁문 지키는, 오는 사람을 경고시키고, 면려시키고, 영접하여 줍니다. 대개 주의 성전의 하루가 다른 곳의 천날보다 아름다우니 내가 하나님의 전 문을 지키는 것이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승하도다. 하였습니다. 성도들을 항상 깨우고 면려시키는 파숫꾼의 사명은 참으로 중한 거예요. 거짓 파숫꾼은 다 소경이요, 무지하야 벙어리 개와 같이 짖지 못하고 다 꿈꾸는 자요 잠자기를 즐겨 하는 자라고 이사야 56장 10절에는 말씀하였지요.
진실한 파숫꾼은 자기가 경성하고 다른 사람을 경성시키는 엘리야와 같이, 나단과 같이, 세례 요한과 같이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은 참된 경성이랍니다.
오! 주여! 오늘날 우리 교회에 경성이와 같은 파숫꾼을 많이 보내어 주시옵소서.
둘째는, 근신(謹愼)이, 자신에 대한 생활의 근신이요. 말에 근신해야 해요. 말에... 혀는 곧 불이라고 했소, 말에 허물이 없으면 완전한 사람이라고 했소, 화살은 한번 쏘면 다시 집어올 수가 있지마는 말은 사람 귀에 들어가면 다시 빼내지 못하는 거요. 둘째는, 행위에 근신하라고요. 일거수 일투족, 한번 앉고 일어서는 것, 한번 웃는 것 근신해야 합니다.어떤 여자는 공연히 실없이 웃기 잘하다가 봉변할 뻔 했다고 합니다. 남의 남자 보고 공연히 웃기 잘하다가 그 남자가 밤중에 담넘어 들어오니 소리를 지르나, “너 나 보고 항상 웃지 않았니? 이제 새삼스럽게 왜 배척하느냐”고 했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어디를 가든지, 또 무슨 일을 하든지 할 수 있어요.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덕되기 위해서 조심할 거예요. 그러게 우리 주님께서는 저들을 위하야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복 있는 자는 악한 자의 의논대로 행치도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생활입니다.
셋째는 경건이요. 경건이는 하나님께 대한 태도이요. 세상의 도덕군자는 근신함도 있고, 의롭게 살기도 하나 하나님께 대한 경건은 없어요. 참경건은 하나님의 성임재 앞에서 항상 기도와 진리 묵상과 거룩한 봉사와 신앙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경건한 모양은 있으나 경건한 능은 버린 자가 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