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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최윤구 장군의 1919-40년대 항일무장투쟁
재만독립군단인 조선혁명군의 중대장이었던 고 최윤구 선생은 1919년부터 20년간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한 전형적인 독립군이다. 그는 1938년 화전현 전투에서 전사했다. (민족문제 연구소.글)
1931년 일명 만주사변이 9월18일 일어난다. 이후 조선혁명군은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싸울것을 맺는다. 1932년 4~8월 조선혁명군이 행한 주요 연합전투 및 단독전투
출처 : 新賓滿族自治縣民委朝鮮族志編纂組 編, 『新賓朝鮮族志』, 遼寧民族出版社, 1994, 27쪽. 독립운동사6권 국가보훈처발행 1977년108면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 공보처발행 1949년 165면 1936년 말에서 이듬해 초에 걸쳐 신원이 파악된 조선혁명군정부 주요 간부들의 출신지역과 나이, 경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표 2> 조선혁명군정부 주요간부 출신지역과 나이, 경력
<표 2>의 조선혁명군정부 조직과 비교해 볼 때 정치부와 조직부 등 부서의 명칭이 약간 다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일본 사법부의 검사가 파악한 위의 조선혁명군정부 요인 11명의 경력을 볼 때 두드러지는 점은 고이허와 김두칠(金斗七), 문무경(文武卿),김활석(金活石)등을 제외하면 총령 김동산을 위시해서 군관학교를 졸었했거나, 비교적 일찍부터 무장투쟁에 종사해 온 군출신 인사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는 이 군사정부에서 조선혁명군의 비중이 절대적임을 뜻한다.
또 중대장 2명을 제외한 간부 9명의 평균 연령은 42세로 이 시기 중국공산당계 항일유격대 간부들의 연령보다 비교적 많다.
특히 이들 가운데 조직부장 박대호(朴大浩)와 2사 사령 최윤구(崔允龜), 3사 사령 대리 김석강(金石岡)등의 3명이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한 점이 주목된다. 이는 이들이 애초부터 항일투쟁을 위한 정치적 동기에서 중국 동북으로 이주했음을 뜻한다.
최윤구(최현구)와 박대호(박상춘)의 경우는 1919년 3·1운동 때 경북 청도군 운문면사무소 면서기로 있던 최현구는 大韓獨立萬歲 기를 제작 할때 韓자를 썼으며 박대호는 歲자를 적었다.즉(韓世振 떨칠진)이 되는 것으로 해석 된다. 그리하여 만세운동에 앞장서 일제 관헌의 추적을 받게 되자 함께 망명한 것으로 전한다.
그리하여 두분은 참의부에서 1928년 제3중대장 韓世振(본명최현구) 5중대장朴大浩(본명박상춘)으로 있을때 韓世振 名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통의부 있을때는 1922년8월23일 통의부 설립후 의용군 김명봉 5중대 제1소대장 金昌大명으로...이무렵 박대호도 김명봉 부하였다고한다. (국사관론총8권 1989년 243쪽 참조)참의부 제5중대는 金蒼岡(金長川)(최현구).박대호(박상춘)는 지방출장이 있을때는 교대로 제5중대장을 지켰다.그리고 참의부의 주도 대표권을 유지하며 꾸려 나갔다. ********************************************************************************************************************************************************** ◈ (김창천은 누구인가?최현구이다 최현구의어머니존암은 김응자 인데 어머니 성을 따서 김이며 창천은 운문면에 흐르는 물 동창천의 (孔 巖 "蒼" 碧)蒼天(창천) 이라고 이름을 지어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독립운동 활동 명으로 사용한 것이다.최동경(지촌리).최창강(崔昌岡) 김창강등이 들수 있다. 자료:김창강(金昌岡)은........ 『참의부(제1중대장)와 정의부 김경근』일파.... ◈동아일보 기사 1926년 12.월10일과| 운문면 지명유래참조 | 한민족독립운동사 4 국사편찬위원회와 | 길림성 당안관 자료 독립기념관|에서 볼수있다.)
◈동아일보뉴스 기사 1934.6.1일자 관공서 습격한...|대정12년3월(1923년) 훈련을 마치고 이병화는 제1중대 제3소대장 金蒼天의 지휘로...???
◈동아일보뉴스 기사1926.4.24일자 참의부원 피착 |참의부 참모장 윤성좌 부하 제5중대장 金昌天
◈동아일보" 1926.12.10일자 "참의부제1중대장" "金昌岡" 은(조선혁명군 제2사령 "崔昌岡"(崔允九))와 동일인이 틀림 없으며 또한 "참의부제1중대장" "金蒼(昌)天"과도 연결(일명 퍼즐맞추기 발굴 성공)참의부제1중대장 김창천은 경상도 사람으로 나온다. ◈길림성 당안관 자료 참조 독립기념관 ◈신한민보 1934.11.15일자 조화선.최윤구 는 위만군 2000여명을 물리쳐 승리 하였다. ◈동아일보" 1932.4.22 일자 중대장 崔允奎 (崔雲龜)필자 영능가성 전투중 시기)
◈동아일보" 1933.12.10일자 제7중대장 崔冗奎 (용규는 상지촌리 윗동네(상동경)용귀의 마을이 있다.고향의 지명으로 주로 독립운동명으로 이용함.《일본자료.지하비밀단체에 대하여 1936년 주표 제7중대장 崔允奎 》 이들의 출신지역을 보면 총령 김동산이 충남, 박대호.최운구.김두칠 3명이 경북, 조선혁명군 총사령 문무경이 경기
도 등으로 중부 이남 출신 인사가 10명 중 5명이나 된다. 한편으로는 서세명(본명서명수)도 경남 밀양 출신이다. 경
상도 출신 들이 비밀 첩보원 조선혁명군 간부로 활동했다. ◈(총사령 김활석의 문무경존암도 김활석의 어머니 존암이 문씨 이다. 어머니성을 따서 문이요 무경이라 지어 문무경으로 일제에 눈을 피하기 위하여 독립운동 활동 명으로 사용했다고 재만한인공산주의운동연구 이명영 1974 이명영교수의 논문을 볼수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만큼 경상도 출신들이 불타는 애국심이 특별히 많았다는 증표로 말해주는 단서이다.그 이유중 하나만 꽂는다면 화랑정신의 유전이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애국혼신이 남달리 많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주와 가까운 평안도 지역 보다는 천리가 넘는 먼 만주땅에 와서 가치없이 목숨을 버릴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적극 적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럿듯 3월18일 운문면에서 만세운동을 하고 중국 만주로 건너가 지체없이 1919년7월에 한교공회를 조직 하였다는 사실이다. 대표 적으로 윤세용.윤세복.손병헌.최현구.김철제.박상춘등이 인물이다. (독 고욱은 후 변절)
또한 운문면3.1운동에 앞장선 김진효.최성희등이 중국 상해임시정부. 유림단. 북경에 조직된 다물단에 참가하여 통의부와 긴밀한 열락을 취하며 군자금 모집에 헌신한 활동이 있었다. 아울러 통의부(統義府)에 소대장으로 활동했던 청도출신인 최윤구(崔鉉九)와 박대호(朴相春).김두칠(金哲濟)등이 독립운동에 함께 전개하고 있었다는 사실들이 있으며 더불어 이에 다물단과 통의부와 긴밀한 연관이 있었음을 파악되고 있다. 이에 자료를 보면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 주목되는 사항중의 하나가 인천만국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 회의 라 할수있다 한성임시정부는 3월초 이교헌(李敎憲) 윤이병(尹履炳) 윤용주(尹容周) 최현구(崔鉉九) 이용규(李容珪) 김규(金奎) 등이 이규갑에게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 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 했다. 따라 임시정부수립에 있어 귀중한 디딤돌을 마련했다고 보여진다. 이후 1919년 4월23일 전국 13도 대표가 서울에 비밀로 집회하여 취지서를 선포.배포 하고 한성정부를 성립했다. 이때에 일본관헌이 지사들을 체포 하였고 일부는 국외로 망명한 혁명 지사들이 상해에서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그 뒤에 한성정부는 국내에서도 활동이 제약 될수밖에 없게 되자 홍진(洪震) 대표로 하여금 상해 임시정부에 병합케 하였다. 京城에서 國民大會를 召集하여 左記事項을 결정하다. 一. 出席한 13道 代表 氏名 李晩植 李容珪 康勳 崔鉉九 李東秀 柳植 金明善 奇寔 金鐸 朴漢永 林鍾郁 柳瑾 朱翼 金顯俊 朴章浩 宋之憲 姜芝馨 洪性郁鄭潭敎 李容俊 李東旭 張樫 張梭 朴鐸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4권 1969 국사편찬위원회)ㅂ.한성정부 한성정부는 비교적 늦게 그 성립이 발표된 정부이다. 3·1독립선언 이후 임시정부의 수립은 필연적이었다. 임시정부의 수립계획은 3월 초에 이교헌(李敎憲)·윤이병(尹履炳)·윤용주(尹龍周)·최현구(崔鉉九)·이용규(李容珪)·김규(金奎) 등이 이규갑(李奎甲)에게 임시정부의 수립 문제를 제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註 027 (출처:한국사데이타베이스) <임시정부의 자료를 보면서 어쩌면 운문면 3.1운동(3.18일)은 이미 계획된 3.1운동의 거사로 읽혀진다.><연구...>
출처| 만 주| 길림성| 당안관자료 최동경 (崔東京)1927년 참의부 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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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혁명군의 최후 ★
양세봉이 암살된 이후, 1934년 10월에 향수하자 방초구(芳草溝)에서 조선혁명군의 네번째 전체 간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고이허, 총재는 김동삼,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김활석, 총사령부 비서장에 김영근, 중앙보안대장에 한진지, 정치위원에 김활석·문무경, 외교위원장은 김동이, 조직위원장은 김동삼, 노동위원장은 박대호, 선전위원장에 김두칠, 혁명위원장에 최석용, 교육위원장에 고이허, 군민위원장에 김진방, 재정위원장에 이상관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하 16명의 위원을 두고, 국민부를 해체하기로 결정했으며 조선혁명당 중앙은 조선 혁명의 의무금 징수와 정보 수집 기관으로 바뀌었다. 또 조선혁명군의 편제는 참모장에 金斗七, 제1방면군 사령관에 韓劍秋, 제2방면군 사령관에 崔允龜, 제3방면군 사령관에 趙化善으로 개편되었다.
1935년 9월 20일에 조선혁명군 제1방면군 사령관 한검추는 중국의 항일의용군 왕봉각 부대와 집안현 제8구에서 회의를 열고 ‘중한항일동맹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중한항일동맹회 성립 선언’을 발표한 그들은 집안·통화현에서 여러 차례 회의를 열고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동북의 빼앗긴 땅을 회복하며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명시하면서 “군사적 수단을 통해 일본의 군사 행동과 정치적 음모를 분쇄하는 동시에 행정 수단으로 중·한 양국의 새로운 정치권력을 수립한다”고 제시했다.
중한항일동맹회는 고이허를 정치위원장, 왕봉각을 군사위원장으로 추대했고 한검추를 의용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했다.
당시 일제의 관헌자료에는 “중한항일동맹회의 성립은 결코 조선혁명군의 독립적 지위와 강화를 가져다 줄 수 없다. 오히려 홍군이 지향하는 통일전선의 승리인 것이다. 이것은 곧 조선혁명군이 홍군에 동화되는 것을 뜻한다”고 평가하면서 “소화(昭和) 9년 10월부터 통화중심현위원회(通化中心縣委員會)가 설립된 이후 이 지역의 홍군 세력은 어느 정도 발전했다.
소화 10년 2월, 조선이 동흥 지역을 습격한 후부터 조선혁명군과 홍군은 점차 가까워졌고, 서로 작전협정을 맺었다. 이후 양자는 서로 미지근한 관계를 유지하며 각별한 발전이 없었다.
그러나 홍군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동맹회 주체 왕봉각이 금년(소화 11년) 봄 이후 홍군과 가까워지면서 홍군·동맹회·조선혁명군 사이에 획기적인 통일전선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표현된 홍군이란 양정우가 지휘하는 동북인민혁명군을 말한다. 당시 조선혁명군 각 부대가 동북인민혁명군과 자주 접촉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조선혁명군은 양세봉 장군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지속적인 무장 투쟁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들은 평안북도 위원군, 집안현 대반화와 선마구, 환인현 업주구, 통화현 이도구, 관전현 하로하, 유하현 오봉루, 흥경현 거매체구, 영릉성 남백가보, 위자욕 강동 등지에서 수십 차례 전투를 벌여 일본군과 만주국군에 많은 인명피해를 입혔다.
조선혁명군은 동북인민혁명군과 왕봉각이 이끈 중국 의용군과 협력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중국과 조선의 항일군민들은 이러한 연합작전을 통해 피와 죽음으로 우의를 맺고 다졌다.
1935년 이후 일본 군경과 만주국 군대는 항일군민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진압작전을 실시했다. 그들은 조선혁명군이 줄곧 활동해오던 향수하자 지역에서 대대적인 수색과 체포 작전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70여명의 조선인 농민들이 학살되었다.
1935년 11월 30일에는 일본군 독립수비대 보병 제6대대가 흥경현 5구 다호륜(多呼倫)에서 조선혁명군 제3방면군 주둔지를 포위하여 1백여명의 조선혁명군 병사를 사살하고 대대장 김덕해 등 7명을 체포했다. 일본군은 미친 듯이 기뻐 날뛰며 ‘조선혁명군 전멸지’라고 쓴 비석을 세웠다.
1936년 5월, 통화 영사관 흥경분관의 경찰분소장 고바야시 미츠오 경시정은 10명의 부서원과 현지 경찰, 자위단을 데리고 왕청문에 거주하는 중국인과 조선인 30여명을 붙잡아 흥경현으로 압송하여 이들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다. 이들 가운데 20명은 그해 7월, 일본군 이와나가 대대의 구로사키 중위와 현의 경찰관 지휘로 북산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나머지 10명은 일본군 병사들이 총검술을 연습하는 과녁에 되어 잔인하게 살해됐다.
1937년 1월, 홍묘자에서 일본 경찰대의 밀정으로 활동하는 최진해는 만주국 경무과 특무대 장교 김대도에게 동금구에 사는 양수봉 등이 조선혁명군과 동북인민혁명군이 소집한 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다고 밀고했다. 이에 일본 군경은 동금구를 포위하고 그 자리에서 여섯 사람을 죽이고, 5백여명의 조선인과 중국인을 체포해 흥경현으로 끌고 갔다. 고문을 하며 조사한 끝에 2백여명은 석방되었지만 2백여명은 처형되었다.
일본군의 잔혹한 학살과 토벌로 인해 조선혁명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혁명군 재정부장 이상관이 환인현 두붕전자에서 체포되었고, 고이허는 관전현 보달원 서건구자에서 체포되었다. 혁명군 사령부 부관처장 김명암도 환인현 3가 와붕촌에서 체포되었고, 혁명군 외교관인 홍심원도 관전현 태평초 중탕구에서 체포되었다.
만주국 동변도 특무대와 환인현 헌병대가 이들 네 명의 간부를 따로따로 심문하여 자백을 강요했지만 티끌만한 진술도 얻지 못했다. 일본군은 이 네 사람을 한밤중에 비행기로 압송한 후 살해했다.
1937년 1월 29일에는 제3방면군 제1중대장 장명도가 환인현 험창구 화권에서 일본 경찰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양하산은 관전현 하로하 일대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응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조선혁명당의 특파원 김선수는 만주국군에게 발각되어 체포된 후 환인현 거리 동쪽에서 총살형을 당했으며,"제3방면군 제2중대장 안홍은 주가보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조선혁명군 환인현 유격대장 류광흘과 소대장 김성호는 전투 중에 희생되었다. "제1방면군 사령관 한검추는 70여명의 부하와 함께 일본군에 투항했으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김활석은 일본의 영사관 경찰대에 체포된 후 자수 함으로써 배신했다.
조선혁명군은 점점 열악한 상황으로 내몰렸지만 "부사령관 박대호와 제2방면군 사령관 최운구"를 중심으로 반일 의식을 더욱 고취시키고, 내부 단결을 더욱 굳건히 해 나가면서 압록강 주변과 백두산 일대를 종횡무진하여 적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1938년3월18일 최운구.박대호 등은 "즙안 로령철로 터널 공지전투"에 참가 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위군경 7명을 격살하고 5명을 포로 했으며 근로자 1.731명을 구원 해냈으며" 건축물 12동 자동차 3대를 불질렀다.적은 이번 전투에서 20만원(일본돈) 이상 손실을 보았다.
적들은 이번 전투를 동변도 숙청사상 최대의 현장 로령사건이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성과로 인하여 조선혁명군과 양정우부대와 더욱 가까워졌고, 서로 작전협정을 맺은 계기가 되었다.
★ 동북항일연군에 참가 ★
趙化善.崔允龜와 朴大浩가 동북항일연군에 편입
조화선은 1938년2월에 먼저180여명의 병들을 데리고 "환인현 우모령"에서 양정우부대의 소년영부대와 합세하였다.그후 양정우는 조화선을 "동북항일연군 제1군 군부" 부관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최윤구.박대호는
1938년3월말일에 동북항일연군 편입에 있어 두가지 조건을 붙혔다. 1. 먼저간 조선혁명군대원들도 "한인독립사"에 편입하여 유지키로 하며 2.지위및 편성은 총사령 김활석이 지정해 준대로 할것을 주문한것이다.
이에"제2사 사장" 최윤구와 조선혁명군 "부사령겸 조직부장인 박대호"가 60여명의 잔여 부하를 데리고 환인현 양정우 부대와 합세하고 동북항일연군 제1군단에 편입해 별도의 한인독립사(韓人獨立師)에 편입하였다.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군단에 편입해 양정우의 지휘 아래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때 편제는 "한인 독립사의 사령은 최윤구(崔允龜) 정치지도원은 박대호 선전간사는 김세헌이며 참모장은 김윤걸 비서장은 김남이다. 총3대(隊)로 나누어 6섯개반(班)으로 편제 하였다. 모두 인원은 당시150여명으로 추정한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군단에 편입해 양정우의 지휘 아래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38년12월25일 최윤구는 양정우를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 경위로 소년철혈대를 영솔하여 화전현 홍스라즈 강남 소유하자에서 위정안군을 습격하여 적100여명을 격살했으며 다음날 적이 이를 만회하고자 비행기까지 동원 하였다. 최윤구는 이때 낮게뜨는 비행기를 산 봉오리에 올라가 오는 비행기를 기관총으로 쏴 1대를 떨어뜨렸다. 이때 아군의 손실은 있었으나 최윤구(崔允龜)는 전사했다는 중국인 이해군.장서해씨의 증언도 있고 화전시 강남 소유수하자에 최윤구 기념비가 있다. 증언에 의하면 원래는 산봉우리에서 전사했는데 편의상 아래에다 기념비를 안장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냇가에 있어 비가오면 묻혀버리고 기우러져 옴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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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 자료를 인용한 연구물 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물이 있다.
최윤구는 대대장(大隊長)겸 총참모장" 되어 1940년2월15일 변절한 정빈.최주봉이 "일본군.경 600명"과 몽강전투에서 "정빈(程斌).최주봉(崔冑峰)"은 토벌대를 앞세워 "최윤구.양정우"를 추적하였다. 포위작전에 이르러 최대대장(崔允龜)이 출현한 것을 포착 하였다. 이에 맹렬하게 공방전을 펼치다가 적군 아군 할것없이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이전투에서 통화 이통에 "일본장교 경위(警尉)"등이 허다하게 희생 되었다.
이때에 더군다나 추운날씨에 눈(雪)은 무릅가지 싸여 겉기도 어려웠고 적들은 일명 토끼몰이 식 으로 포위 하였다. 어디로 빠져 나갈수도 없었다 최운구(崔雲龜)(允龜)부대는 포위되여 어쩔 도리가 없어 대원들에게 끝까지 싸울것을 동의하고 해방을 외치며 사격개시의 신호탄을 울리며 용감하게 적과 싸우다가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戰死) 하였다. 대원들도 대부분 모두 전사했다.
1938년12월~1940년2월이든간에 일본군과 격투 하다가 전사.순국 한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일주일후 "양정우(楊靖宇)군장(軍將)"도 얼마안가 적의 추적을 피하지 못하고 1940년2월23일 오후4시30분경 적이 항복 할것을 권장 하였으나 거절하고 다가오는 위경을 다리를 쏘자 주시하고 있던 위경이 총을쏴 그도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戰死) 하였다. 끝
정부에서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하였다.
2005년 독립장을 서훈 미전수다.
·武裝獨立運動秘史(채근식 .1949)165면
.김동산(김진방)비서 박윤걸의 약사 독립기념관 소장 (1929년 조선혁명군(국민부조직) 결성에 활동한 내용이 있다.)
.독립운동사자료집10독립군전투사자료집 판결 소화 6년 형공 제20호(이제우.김세호.1930.12판결문) 989면 원본.번역본
.독립운동사자료집10독립군전투사자료집 판시 소화 6년 형상 제37호(이제우.김세호.1931.3판시문)994면 원본.번역본
.한국독립운동사사전1총론편상권(독립기념관연구소. 1996)420면
.日本야마구치현 소장 林家문서 1936.朝鮮革命軍幹部. 金聲大 陳述
.總領 金東山비서 朴允杰 略史
.韓國獨立運動史5권608면
.韓國獨立運動史6권108면
.國外容疑朝鮮人名簿(朝鮮總督府 警務局, 1934) 154·159면
·滿洲 및 中國에서의 地下秘密團體에 대하여(1936), 在滿不逞團 現勢一覽表
·朝鮮革命軍의 狀況에 關한 件(新派秘 第342號, 1937. 6)
·滿洲에 있어 中國 共産黨과 共産匪(社會問題資料硏究會, 1973)
.思想情勢視察報告集(社會問題資料硏究會, 1977) 제8권 32면
.國史館論叢 11집 44집
.동아일보기사 1932년4월22일자 박대호.최윤구등 중대장
.신한민보 1934년 11월15일자 조화선.최윤구의 만주 조선혁명군과 중국의용군의 합작낙보
.길림성 화전시최웅국(최윤구)기념비 (1990년자료원서 이해군.장서해)씨가 복사해줌/1999년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1956) 483면
· 죽은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강용권1996)장산 하권99면
.2007요동항전연구(전파.2008)료령민족출판사.44~46.48.56.288.434.450.452~454면
.조선혁명군과 량세봉장군 항일투쟁사론 (길경갑.전정혁.2013)201.249.279.282.291.296298.301.341.360.375.386.
387.389.392(2013.주필 전정혁으로 나온 동일한 출판물도 있음)
. 항일투쟁반세기 (김양.1995)요령민족출판사 287.292면
.청원조선족지(청원만족자치현조선족지편찬위원회편1999.10)206면
.동구적개 (同仇敵愾)(조문기.1998)신빈만족연구소/208.209.224.233.241.242.254.259.282.312.315.317.318.
.신빈현조선족지 (1994년신빈만족자치구민위조선족지편찬조 편/료령민족출판사/27.29면
.민족항전연구 요동지구(전파.2002)료령민족출판사./7.15.64.86<<88면>>1938年12月末 崔允龜.戰死.殉國
·韓國獨立史(金承學, 1965) 하권 287면
·勸力의 歷史(李命英, 1983)89.91.94.97./ /101·103·104면
.동북항일의용군(박선령1998)중국출판공사.231.232면
.압록강류역의 조선민족과 반일투쟁 (김양.2001)료령민족출판사/12.306.477~480.483.495.556.563.564면
.경북독립운동사4/국외지역항일투쟁(경상북도 2013)293.294면
·한국항일독립운동사연구 (신용하.2006)298.302.304.312.313면
·梁世奉:朝鮮革命軍 總司令의 硏究(丁原鈺, 1989), 國史館論叢 제8권 263∼264·266면
·鴨綠江邊的抗日名將梁世鳳(曹文奇, 1990) 172·193면 참조
·朝鮮革命軍 硏究(張世胤,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권, 1990) 329면
·朝鮮革命軍 歷史에 대하여(黃龍國, 1990) 國史館論叢 제15권 237·239·242∼243면
·朝鮮革命軍과 遼寧民衆抗日衛軍의 聯合作戰(朴昌昱, 1992) 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681·683·688·690∼692·696·697면
·朝鮮革命軍의 性格硏究(慶倫昊, 1995) 釜大史學 제19권 611면
·朝鮮革命軍政府 硏究(張世胤, 1997)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1집235 //257면
.만주지역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신주백.1999)414.416면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 답사기(박환, 2011) 37면 참조
·한국독립운동사사전(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제6권 669·671면
."봉화"제3집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민족출판사.1989)311.312.313면
."불씨"제2집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민족출판사.1995)365면
.청도의독립운동사 (권대웅 외 2010)청도군 345.347.463면
★ 조화선의 최후의 행적★
1940년2월23일 양정우가 희생된후 조화선은 남은16명의 전사를 이끌고 적과 계속 싸웠다.
1940년12월 즙안 부근의 압록강에서 조화선등 10여명이 적과싸웠다.
일군은 압록강에 포를 쏘아 얼음을 깨뜨렸다.조화선부대는 모두 얼음구뎅에 빠져들어갔으나 물
위로 올라와 전투를 저녁 무렵까지 견하였다. 적군이 철퇴한후 조화선의 두다리 솜옷 신발 등
이 같이 얼어붙어 움직일수 없게되었다.
1941년1월 조화선의 대원은 겨우 3명밖에 남지않았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2명은 실종되고 경위원밖에 안남았다. 경위원은 두발에 동상을 입은 조화선
을 업고 통화현 쾌대무에서 조선인의 방한칸을 얻어 조화선을 시중들며 겨울을 보냈다.
1942년 조화선은 그의 경위원에게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동북의 항일상황을 보고 하라고 지시
하였다.경위원이 떠난후 조화선은 趙景福이라는 가명으로 은페했다.(일명 최추악)
(일설에는 1942년 가을에 즙안에서 일본군에 체포 되었는데 기차로 이동중에 뛰어 내렸으나 얼
마가지 못하고 다시 체포 되었다가 봉천(심양)에 있는 조선총독부로 이송중에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재차 뛰어내려 도주하다 피살 되었다는 증언도 있다.1999년 왕청문에서 祖父님이 고향
이 경북청도인에게 청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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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여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
2018년11월27일 유족 故조화선 열사의 증손녀 조침영(자오천잉 趙琛穎33)씨가 전수하였다.
늦졌지만 국가보훈처가 참으로 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