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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말, 국제학술회의 참석차 윁남을 방문하는 길에 광주시를 경유하면서 다시 찾아 본 광주봉기렬사릉원은 일찍 1997년 여름에 처음 찾았을 때에 비해 거의 몰라볼 정도로 많은 변화가 생겼다.
현재 전국중점렬사기념건물보호기지 및 전국애국주의교육기지로 지정되여있는 광주봉기렬사릉원에는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기념하기 위한 광주봉기기념비, 광주공사렬사묘, 광주봉기지도자조각상기념광장 등 건물 외에도 광동성혁명력사박물관 및 해방초기 광주시장을 력임하였던 엽검영원수 기념비를 비롯한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내가 찾아갔던 11월 23일은 마침 날씨도 화창한 일요일인지라 공원 곳곳에서 운동과 휴가를 즐기고있는 광주시민들의 한가로운 모습이 보였다.
물론 중국근현대사를 전공하는 력사학 교수로서 중국혁명사에서 유명한 광주봉기의 현장을 찾아보는것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겠지만 이렇게 외국방문길에 일부러 시간을 내여 십년만에 다시 찾게 된것은 역시 중조혈의정을 참례해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무려 200명이 넘는 조선인 영령들을 기리기 위함이였다. 광주시는 1923년 3월에 중화민국의 창설자 손중산이 광주에서 북양군벌(北洋軍閥)을 반대하는 호법정부를 설립하고 곧 이어 쏘련의 도움으로 중국공산당과 제1차국공합작을 실시하면서 단연 중국혁명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되였고 따라서 일본제국주의 식민침략에 저항하는 식민지 조선의 애국청년들이 속속 찾아들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벌써 십몇년을 넘어가고있던 당시 조선의 애국청년들에게 있어서 조선인들의 항일구국투쟁을 적극 지원해주는 혁명정권이 들어서있고 또한 쏘련의 지원과 중국공산당의 활동이 공개화되여있는 광주는 그야말로 동아세아전역에서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혁명자의 락원이 아닐수 없었다. 국내외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의 제1차국공합작 및 북벌전쟁이 한창 고조되던 1926년무렵 광주에는 수백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모여들었는데 그중 쏘련을 거쳐온 지도자 또는 전문가 수준의 베테랑 혁명자 외에 대다수가 젊은 청년학생들이였다. 례컨대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수많은 군사전문가를 양성하여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황포군관학교에는 40명이 넘는 조선인 학생들이 제3기부터 제6기에서 재학하고있었을뿐만 아니라 후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요지도자로 된 최용건(당시 이름은 최석천)을 비롯한 조선인 혁명자들이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교관 및 생도대장 등 요직을 담당하고있었다. 지어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의 부관에도 조선인이 있었다. 또한 중국민주혁명의 아버지 손중산선생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국립광동대학이 국립중산대학교로 개칭되면서 1927년 5월까지 52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재학하고있었다.
이처럼 이역만리의 중국 광주를 찾아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 중국혁명에 한몸을 바친 조선인 혁명자들에게 있어서 중국혁명에 참가하는 일은 바로 후날 조선혁명 즉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장기적 투쟁의 일환으로 간주되였는데 그 점이 바로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이중적력사사명이였다. 말하자면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의 국제적 이민과정을 통해 중국의 새로운 소수민족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조선인들은 력사적으로 중국내 다른 형제민족과 더불어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 적극 참가해야 할뿐만 아니라 나아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투쟁도 함께 전개해야 하는 이중의 력사적사명을 갖게 되였는데 당시 광주를 찾아온 조선인 혁명자들이 바로 그러한 이중적력사적사명감을 안고 중국혁명에 몸을 바친 국제주의 투사들이였다.
따라서 1927년 4월부터 제1차 국공합작국면의 파탄과 함께 장개석 국민당정권의 피비린 탄압에 반항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측에서 1927년 8월의 남창봉기와 9월의 추수봉기에 이어 같은 해 12월 광주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당시 광주에 있던 조선인 혁명자들은 조금도 주저없이 중국공산당을 따라 무장봉기에 적극 가담하였던것이다.
당시 중국공산당 광동성위원회에 의해 특별 임명된 중국공산당 초기의 유명한 지도자인 봉기 총지휘자 장태뢰(張太雷) 및 북벌전쟁의 명장이자 후날 신사군(新四軍)의 초대사령관으로 활약하였던 군사총지휘자 엽정의 직접 지휘에 따라 원 국민혁명군 제4군 교도련대, 경위련대 및 황포군관학교 특무대대를 주력으로 한 봉기군이 1927년 12월 11일 새벽 3시 30분에 광주시 곳곳에서 일제히 무장봉기를 일으켰는데 수백명의 조선인 혁명자들이 이번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모스크바군사학교 출신의 유명한 포병교관 양달부는 군사총지휘자 엽정의 군사참모로 임명되여 봉기의 군사지휘에 직접 참여하였고 김산 역시 엽정의 군사참모로 중국어가 능통하지 못한 양달부의 중국어 통역까지 담당해주었다.
봉기군의 주력부대인 교도련대에 특별히 조선인 혁명자들이 많이 집중되였는데 그중 제2대대 제5중대는 책임자 김규광을 비롯하여 거의 전원이 조선사람이였고 특히 박영, 박근만, 박근수, 박건웅 등 유명한 포병 사격수들이 집중되여있었다. 봉기군의 또 하나 주력부대인 황포군관학교 특무대대에도 조선인 혁명자들이 150명 넘게 있었는데 그중 최용건(최석천)이 중대장을 맡은 제2중대는 전부가 조선인들로 구성되였다. 그리고 조선인 혁명자 오성륜, 박영, 박건웅, 김성숙(김충창) 등 역시 봉기군의 소분대 책임자를 맡았으며 특히 교육수준이 보편적으로 높아 쏘련류학 또는 중국내 군사학교 교육경력이 있는 조선인 혁명자들은 당시 기술적수준이 가장 높은 포병 및 기관총 등 특수병과의 지휘관 또는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주도면밀한 준비작업을 거쳐 이른 새벽에 갑작스럽게 무장폭동을 일으킨 까닭으로 봉기군은 처음부터 파죽지세로 광주시내 여러 요소를 속속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군사총지휘 엽정을 도와 적군의 주력부대가 주둔하고있던 사하진을 신속 점령하고 두개 련대의 적군을 완전 섬멸한 조선인 군사고문 양달부는 김산의 중국어통역을 통해 적군포로 200여명을 교육한 뒤 곧바로 봉기군에 가담시켰다. 양달부는 오래전부터 중국군벌부대에서 높이 존경받고있는 유명한 포병지휘관으로서 중국군벌부대 장병들의 특성을 잘 알고있었는데 중국어도 잘 모르는 그의 통역을 통한 정치선동에 따라 적군포로 200여명이 즉석에서 총부리를 돌려 봉기군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은 그만큼 양달부의 뛰여난 정치적, 군사적 지휘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양달부는 곧바로 원 적군포로 200여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하여 적 제3군 군단사령부를 공격하였는데 포병 명사수인 그는 직접 포를 쏘아 적군 사령관의 저택건물 등 목표물을 정확하게 명중하면서 전투를 승리에로 이끌었다.
한편 김산은 륙군병원 등 여러 병원의 의료일군들을 적극 동원하여 곧바로 부상병 구호작업에 나섰다. 당시 김산과 함께 부상병 구호작업을 벌였던 중국인 혁명자는 후날 《조선사람인 그가 중국인민의 해방위업을 위해 저렇게 결사적으로 싸우고있는데 어떻게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않겠는가》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면서 회고하였다. 그리고 봉기군 제1대대 대대장 엽용(葉勇)의 군사고문을 맡은 모스크바 홍군대학 출신의 조선인 리용은 적의 공안국건물을 점령하는 전투에서 조선인 용사들을 포함한 봉기군을 지휘하여 반시간도 안되는 사이에 적 공안국을 점령하고 1000명이 넘는 적군을 포로하였다. 경위련대 포병대장 민승재, 황포군관학교 특무대대 제2중대 최용건 등 역시 곳곳에서 봉기군을 거느리고 용감하게 적군을 무찔렀으며 중산대학교에 재학중인 조선인학생 장지장 등은 중국식 옷을 갈아입고 봉기를 위한 선동 및 구호작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12일 아침이 밝아오면서 봉기군은 광주시의 주요거점을 모두 점령하였고 따라서 새로운 혁명정권인 광주쏘베트정부를 공식 설립하였는데 김규광(김성숙), 김산을 비롯한 10여명의 조선인 혁명자들이 쏘베트정부 설립대회에 참가하였고 또한 김규광은 반혁명숙청위원회의 간부로, 김산은 로농무장부의 간부로 새로운 혁명정권에 직접 참여하였다.
후날 김산은 광주봉기 당시 조선인 혁명자들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모든 활동부문에서 조선사람들은 모두 책임적인 부서의 중임을 맡았다. 한것은 그들이 경험이 풍부하였고 그들중에는 모스크바에서 훌륭한 정치훈련과 군사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기때문이였다. 많은 중국사람들은 그들이 조선사람이라는것을 모르고있었으나 그들은 꼼뮨기간에 당의 정치위원회의 성원으로서 활약한것이였다.》 그러나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제국주의 세력의 무장지원을 받은 국민당반동세력이 12일 아침부터 봉기군에 대한 전면 반격작전을 전개해오자 절대적인 렬세에 처한 봉기군은 일부 중요한 거점에서 저항전을 조직하는 한편 고립된 광주시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치렬한 전투과정에서 총지휘부의 철수명령을 제때에 전달받지 못한 일부 봉기군은 우세한 적군의 거듭된 공격끝에 거의 전원이 희생되였다. 그중 사하를 지키고있던 황포군관학교 특무대대의 조선인 용사 150여명은 자기들보다 6~7배가 더 되는 우세한 적군과 반나절 넘게 싸우다가 모두 희생되였고 령남대학 부근을 지키던 조선인 혁명자 50여명은 적군에게 포로된 뒤 투항을 거부하여 끝내 적군이 퍼붓는 기관총 탄알속에 모두 쓰러졌다.
후날 김산은 광주봉기가 실패한 뒤 조선인 혁명자들의 비참한 형편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조선사람들은 그 박명한 꼼뮨의 최후의 나날에도 극난한 처지에서도 어엿한 태도로 훌륭히 행동하였던것이다. 그들은 17일 이후부터는 수중에 돈 한푼 없는 신세로 되여버렸다. 그들에게는 돈을 꾸어줄만한 동무도 없었고 도망하여 피신할만한 곳도 없었다.》 이렇게 1927년 12월 11일부터 13일까지 전개된 광주무장봉기에서 적어도 200명이 넘는 조선인 혁명자들이 희생되였고 최용건, 김산을 비롯한 나머지 조선인 혁명자들은 봉기군 잔여부대와 함께 광동 및 광서 등 외곽지역으로 철수하여 계속 중국혁명에 참여하였다.
일제식민지시대를 거쳐온 이들 조선인 혁명자들은 대개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하였고 중국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중국어는 물론 광동어, 상해말 같은 지방언어에도 서툴지 않았으며 일부 쏘련 류학 또는 방문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로씨야어에도 능통하였다. 그들은 또 뛰여난 군사적 전투능력과 지휘능력을 갖춘 군사인재였으며 중국과 조선의 혁명사업은 물론 세계와 전 인류의 해방사업을 자신의 타고난 사명으로 간주하고있는 훌륭한 국제공산주의자들이였다.
그들은 20―30대의 꽃다운 젊은 나이에 자신의 정확한 이름과 고향출신지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채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해 나젊은 목숨을 고스란히 바쳤다. 그러나 그들의 용감한 희생이 자신을 낳아주었던 고국땅에서는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 이바지하여 이룩해놓은 새 중국에서도 오래동안 잊혀져있었던것은 가슴아픈 사실이 아닐수 없다. 다행히도 1963년초에 광주무장봉기에 직접 참가하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위원장 최용건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중국정부 주은래총리와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조선인 혁명자들을 위한 기념건물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는데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세워진 중조혈의정이다.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들의 피로써 맺어진 친선의 정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세워진 중조혈의정은 현재 광주봉기렬사릉원의 동북쪽에 세워져있는데 기념비 정면에는 광주봉기 당시 주요 지도자 출신으로 광주시장을 맡고있던 엽검영원수가 1964년 10월 1일에 친필로 쓴 《중조 두 나라 인민의 전투적우의는 만고에 길이 푸르리라!》는 제사가 새겨져있고 기념비의 뒤면에는 역시 엽검영이 친필로 쓴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있다.
《1927년 12월 11일에 광주의 무산계급과 혁명병사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아래 무장봉기를 단행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혁명병사들중에는 조선청년 150여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중국 전우들과 함께 붉은기를 높이 들고 어깨겯고 싸우면서 마지막 사하전투에서 끝까지 진지를 지켜 대부분이 용감하게 희생됨으로써 위대한 무산계급 국제주의정신과 두려움 모르는 혁명영웅기개를 보여주었다.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동지들은 영생불멸하리라!
중조 두 나라 인민의 전투적친선의 정은 만고에 길이 푸르리라!》
광주무장봉기가 지난지 36년만에 최용건과 엽검영 등 광주봉기에 직접 참가하였던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지도자들에 의해 기념비가 세워진것은 비록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여하튼 당시 희생된 조선인 혁명자들의 영령에 대한 훌륭한 위안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인 혁명자들이 150여명이라고 한것은 분명 250명 넘게 참가하였던 력사적사실과 다른것이였다. 물론 기념비 수립 당시에는 연구의 부족 등 여러 가지 객관적사정으로 그렇게 되였다고 할수 있겠지만 세기를 넘어 80년이 더 지난 오늘날에는 반드시 력사적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밝혀져야 할것인즉 명색이 력사학자인 나도 그러한 민족력사 바로세우기 작업에 힘껏 노력할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였다.
우리 민족의 력사는 우리 민족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켜지고 우리 민족의 선렬들 역시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 스스로 높이 추대하고 선양해드려야 한다.력사를 잊어버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였거늘 오늘날 우리가 력사의 아득한 추억속으로 점차 잊혀져가고있는 겨레의 영령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고 기리는것은 결국 우리 민족의 새로운 밝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한 소중한 교훈과 가르침을 얻고저 하는것인즉 바로 만해 한룡운선생이 《당신을 보았습니다》에서 읊었던것처럼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맞습니다!》
(권혁수:동북사범대학 력사문화학원 박사과정지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