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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차 이야기(‘화개 덖음 녹차 만들기’를 중심으로)
들어가는 말
2022년 5월 하동에서는 ‘하동세계차엑스포’가 열린다. 이 행사의 주역은 하동차를 비롯한 우리차가 되어야하고, 하동차와 우리차를 키우고 만들고 사고팔며 즐겨 마시는 우리 차산업과 차문화의 종사자들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하동세계차엑스포’에서 오늘날 횡행하고 있는 업적 남기기와 보여주기식의 행정편의주의적 각종 지역축제나 우리가 벌인 장에 중국산 보이차와 인도산 홍차가 판을 치는 각지의 차행사가 재현된다면, 이 행사는 우리차 중흥과 발전의 밑거름이 되기는커녕 그렇지 않아도 부실허약한 우리차의 숨통을 끊는 비수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이 행사의 주역이 되려면 먼저 하동차와 우리차의 역량와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자리매김하여야 한다.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지만 경거망동해서도 안된다. 지금 하동차계에서는 자신의 단점은 감추고 장점은 내세우거나, 남의 것을 제 것으로 삼거나, 작은 일을 크게 부풀리는 소설쓰기가 조장되어 유행이다. 거짓은 잠깐 몇몇의 눈을 속이는 독 묻힌 부메랑이다.
‘오딧세이아’ ‘삼국지연의’ ‘햄릿’ ‘아큐정전’ ‘닥터 지바고’ ‘토지’ 등이 사랑받는 것은 당대인의 실생활을 바탕으로 인간 본연의 정서와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진솔하게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친이 197,80년대에 차업을 시작하였을 때는 어깨너머로 보았고, 하동차와 우리차가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차업에 투신하였다. 이제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지식과 나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 하동차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려고 한다.
아무도 하지 않으니 나서기는 하였으나, 배움이 천박하고 재주는 비루하며 성정마저 급박한 차농군이라서, 혹시나 거칠게 따져서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틀린 것을 우기거나, 솔직함이 지나쳐 우리차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더라도 너그러이 감싸주시고 배움을 내려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제가 그리 옹졸하거나 편벽된 자는 아닙니다.
1. 화개차, 하동차, 우리차.
오늘날 우리차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지도는 제주도차와 보성차와 하동차의 순서이지만, 차 애호인들의 선호도는 그 역순이다. 다른 지역 차들은 대규모 평지 밀식재배와 자동화된 대형기계로 제조한 찐차를 위주로 만들고, 하동차는 산비탈의 소규모 산식 차밭에서 손으로 따서 만든 덖음차가 대표하기 때문이다.
하동차라 부르지만, 사실은 화개차이다. 화개면 바로 옆의 악양면에서는 차가 좀 나지만 다른 읍면들은 약소하다. 하동군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섬진강과 화개천이 흐르고 지리산 연봉이 감싸고 있는 화개동천(花開洞天)은 우리차의 보고(寶庫)이자 성지(聖地)이다. 소설 쓰냐구요?
고려 최고의 문장가 이상국의 시, 세종조 진주목사 하문효공의 시, 조선왕조실록의 지리지 등에는 화개차가 명확히 적시되어 있고, 초의 다신전의 원전은 화개 칠불사에서 베껴간 것이고 그의 동다송에는 화개차와 화개의 차밭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범해의 차시에는 화개가 맨 윗자리에 있고, 추사가 가장 좋아한 차는 쌍계사 차였다. 그리고 198,90년대 우리차 부활기에 절이나 차교실에서 주로 마시던 차는 화개차였다.
시후스펑롱징, 교오또오우즈교꾸로, 다즐링퍼스트플러쉬, 우이무수따홍파오 등은 서호용정차, 경도우치차, 다즐링홍차, 무이암차 등을 대표한다. 이는 그 차들이 학술자료와 차나무의 식생과 재배법, 채엽 방식, 제조설비, 제조법, 제조기술자 등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차를 대표하는 화개차는 어떤가? 정말로 지리산 야생 구증구포 가마솥 덖음 녹차가 맞는가?
우아한 고급차와 무난한 대중차는 우리차 비상의 양 날개이다.
2. 우리차 만들기에 쓰이는 용어에 대하여.
금세기 들어 대학의 차관련학과가 부쩍 늘어나더니 근래엔 시들해졌고, 2010년엔 우리가 다니던 부덕국민학교 터에 하동녹차연구소가 들어섰는데 다들 뭘 하는지를 모르겠다.
초보적 단계의 우리 차산업에 긴요한 차 관련 학문과 연구는 차나무 기르기, 찻잎 따기, 차 만들기 등에 대한 기초적인 것들이다. 고등학교나 전문학교에서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차 교육을 통하여 유능한 후계 차농들을 길러내어야 하고, 현업 차농들에게는 실습 위주의 훈련을 통하여 차농사와 차 만들기에 대한 유용한 지식과 기술의 습득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차 관련 서적들을 훑어보면, 음풍농월하는 차 문학, 차려입고 멋부리는 차 예식, 남루한 우리의 옛것에의 고집, 얼빠진 남의 차 찬양 들이 넘쳐나고, 차 관련 교육들도 외국의 차 이론을 임의로 발췌, 축소, 과장, 조작하는 경향이 짙다. 이는 우리차에 대한 우리의 공부가 천박하기 때문이다.
제다 용어의 경우에도 일본색과 중국풍이 범람하여 그 개념을 제대로 알고 쓰기가 어렵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말과 글이 있으니 이제부터라도 ‘우리차 만들기에 쓰는 말’들을 잘 만들어 제대로 써야겠다.
다음은 여섯 가지 차 만들기에 쓰이는 말하기 좋고 알아듣기 쉬운 우리말이다.
* 녹차: 덖어 익히기 – 널어 식히기 – 비비기 – 털어 널기 – 덖어 말리기.
* 백차: 널어 시들리기 – 모아 널기 – 펼쳐 널기 – 말리기.
* 청차: 널어 시들리기 – 흔들기, 뒤집기, 부비기 – 널기 – 덖어 익히기 – 비비기 – 털어 널기 – 말리기.
* 홍차: 시들리기 – 비비기 – 털기 – 모아 띄우기 – 말리기.
* 황차: 널어 시들리기 – 덖어 익히기 – 비비기 – 털기 - 쌓아 띄우기 – 말리기.
* 흑차: 시들리기 – 덖어 익히기 – 비비기 – 털기 – 쌓아 띄우기 – 말리기.
‘익히기’를 흔히 ‘살청(殺靑)’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중국의 제다용어이다. ‘푸르름 죽이기’로 옮길 수 있는데, 산화효소를 실활시킨다는 의미로는 적당하다. 그러나, 공정으로 보면 ‘덖어 익히기(炒菁)’과 ‘쪄 익히기(蒸菁)’가 있고, 일본에서는 ‘증엽(蒸葉)’이라 부르니, 우리말의 ‘익히기’야말로 이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라 생각한다.
‘위조(萎凋)’ ‘정치(靜置)’ ‘탄방(攤放)’ 들은 ‘널어두기’인데, 기능과 상태와 동작의 의미가 섞여 있고 지역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며, 그 정도와 세부공정은 차이가 많다. 그런데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혼용하고 오용하며 남용해서야 되겠는가?
위에는 없는 담기 전의 ‘마무리 덖기’를 ‘시아게’ 또는 ‘가향작업’이라 부르면서, 길거나 센 불에 덖어 차 본래의 향미는 없애고 당질과 단백질의 구수한 내음과 심지어는 탄내를 입히는 데...
각 공정별 세부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며, 사계 권위자들과 동업자 여러분들의 질정을 바란다.
3. 우리 전통차는 가마솥 덖음차인가?
전통을 말할 때, 이어졌다는 전(傳)보다는 그 실질적 내용인 통(統)이 더 중요하다. 전통을 내세우려면, 확인 가능한 시간과 공간과 사람을 아우르는 실재하는 사실이 있어야 한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좁지 않은 지역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고 사고팔며 마시던 우리차가 있었던가? 그것을 증거할 기록이나 유물이나 증인은 있는가?
선친이 1970년대에 일본의 차 전문가들을 불러와 화개 지역 우리차 재배의 적합성을 알아보고 꺾꽂이로 묘목을 키워 시험조다한 일들은 어리고 철없던 때라 어슴프레 생각나지만, 1979년에 차씨를 심어 키운 묘목을 1982년에 옮겨심고 차를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는 선친의 의논 상대도 되어 드리고 정리기록을 도왔으니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때 화개와 지리산 일원에 남아있던 우리 전통녹차(?)의 흔적은 밥 짓는 솥에서 주걱으로 덖거나 시루에 찌거나 끓는 물에 데쳐서 만드는 것이었다. 그 전통(?)의 방법으로 찻잎을 익혀 보았으나 탐탁치가 않아서, 천신만고 끝에 선친이 정립한 녹차제조법은 솥에서 덖어 익혀서 멍석에서 비비고 덖기와 비비기를 한두번 되풀이한 다음 채반에 얇게 널어 밀실에서 말리는 것이었고, 이는 다신전 조다편을 당시의 우리 실정에 맞추어 창발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또한, 다신전의 조다편을 궁리한 끝에 내복에 파라핀을 채운 ‘반구형 이중솥’을 개발하여 ‘찻잎 덖어 익히기’에 적용하였다. 그 솥은 본가의 고방과 골안의 모 제다원에 남아있다.
솥에는 반구형인 과(鍋, 노구솥 과)와 그 위에 원통이 있는 부(釜, 큰 솥 부)가 있는데, 다신전 조다편의 솥은 과이고 부는 삶거나 찌기에 적합한 솥이다. 일본인들은 과를 ‘나베’로 부를 ‘가마’라 부르는데, 우리는 ‘냄비’와 ‘가마솥’이라 부른다.
어쨌든 1980년대부터 화개차 만들기에서 가마솥은 줄어들고 노구솥이 늘어나게 되었고, 이제는 가마솥으로 찻잎을 익히는 이는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부초차(釜炒茶)’ 즉 ‘가마솥 덖음차’는 버려야 할 이름이다.
4. 장한 일, 좋은 일, 잘한 일.
아래의 문서는 선친이 1989년에 국회의원 김광일 등인을 내세워 국회에 제출한 ‘녹차의 생산과 판매에 관한 청원’에 대한 답신이며,
이로써 소규모 가내수공업 농가형 녹차 생산과 판매의 길이 열린 셈이다.
선친이 일찍이 민족민주운동에 몸을 던져 끝까지 지조를 지킨 일은 장한 일이나, 가족으로서 좋은 일만은 아니고...
혹벌로 무너진 우리 밤농사에 신품종 밤나무를 보급한 일과 우리 차산업에 주춧돌을 놓은 일은 잘하신 일이라 생각한다.
5. 찻잎 따기
새봄이 와서 벚꽃이 피고 진 곡우 무렵부터 보리가 익은 소만까지 한 달 남짓이 화개의 봄차철이다. 같은 동네라도 차밭의 조건과 그해의 기후 등에 따라 찻잎의 성장 상태가 다르다. 이르면 설익고 늦으면 쇠어서 완성차의 품질이 나빠지니 때를 잘 맞추어 따야 한다.
새순과 새잎의 바로 아래를 손끝으로 톡톡 끊어서 따야만 하는데, 많이 따려는 욕심에 움켜쥐고 뜯으면 찻닢의 형색향미기를 그르친다.
따서 모은 찻잎을 뭉쳐놓으면 뜨고 펼쳐놓으면 마르는데, 두세 시간별로 나누어 따로 보살펴야 한다.
다신전 채다편에는 ‘이슬을 머금은 찻잎이 가장 좋고, 낮에 딴 것은 다음이다. 흐리거나 비 오는 날에는 따지 말라’고 적혀있는데, 수분은 찻잎을 신선하게 보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발효나 산패를 촉진시키기도 하니, 잘 알아 할 탓이다.
어린 찻닢이 예쁘고 가지런하며 젖내음이 나고 부드러운 단맛이 그윽하기는 하지만, 산뜻하면서 짙고 두터우면서도 깔끔한 잘 여문 찻잎의 제대로 익은 향미에 어찌 비하랴!
순이 줄어들고 잎 사이의 줄기가 길어지며 잎이 둥글게 펴지면서 빛이 나면 찻잎이 쇤 것이다. 보기에는 굳세고 튼튼하지만 만들어진 찻닢은 형색이 거칠고 어두우며 향미 또한 거칠고 싱겁다.
6. 덖어 익히기
따온 찻잎은 펼쳐서 널어두고, 묵은 잎, 쇤 잎, 젖 잎, 상한 잎, 잎줄기, 가지 들과 그 밖의 이물질들을 골라낸다.
솥이 적당히 달구어지면 찻잎을 넣고 뒤집으며 익힌다.
솥의 온도는 180도씨를 기준으로 삼는데, 여러 조건들에 따라 적절히 증감한다. 온도가 낮으면, 고르게 익지 않고 속까지 익지 않으니 바라지 않은 산화가 일어나서 완성차의 형색향미기를 그르친다. 또 풋내가 남고 단내가 살아나지 않는다. 온도가 높으면, 겉은 타고 속은 익지 않아서 탄내와 뜬맛이 섞이게 된다. 태우지 않으려고 찻잎을 많이 넣고 김을 내면서 익히면, 쪄지면서 익게 되어, 그 형색이 난잡하고 향미는 생삽하다.
찻잎 익히기는 차 만들기의 가장 중요한 공정이고 그 성패가 다음 공정으로 이어져서 완성차의 우열이 크게 달라진다.
솥의 열도와 찻잎의 양과 뒤집는 속도와 김 날리기와 덖는 시간 들은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야 하고, 찻잎의 성질과 만들고자 하는 다류에 따라서도 달라져야 한다.
7. 비비기
익혀서 꺼낸 찻잎은 덩이 지어 비빈다. 녹차를 만드려면 반드시 식혀서 비비는데, 그래야만 찻잎이 뜨지 않는다.
덩이를 지어서 비비기와 풀기를 되풀이하여, 찻잎들끼리 서로 부딪히면서 고르게 안팎으로 멍들게 한다. 쪄지듯 익거나 설익거나 탔거나 말랐거나 고르게 익지 않는 찻잎은 부서지거나 잘라지거나 고르게 비벼지지 않으니, 제대로 덖어 익히기가 먼저이다.
세게 비비면 찻잎이 부서지고 내액이 나와서 말리기를 할 때 눌어붙고 뜨게 되어, 완성차를 우려내면 찻물에 가루가 많고 어두운 빛깔을 띠게 된다.
살살 비비면 우린 찻잎의 생김새는 좋으나, 잘 우러나지가 않고 엽맥이나 잎줄기가 뜨게 되어, 찻물이 맹탕이거나 풋내와 떫은맛이 나고 잡향잡미가 섞이게 된다.
제대로 익힌 찻잎을 잘 비벼야만 말리기가 순조롭게 이어져서, 맑고 그윽하며 짙고 깔끔한 차를 얻을 수 있다.
8. 말리기(1)
익혀서 비빈 찻잎을 말리면 찻닢이 완성된다.
찻잎의 수분 함량을 5% 아래로 줄여서 완성차의 저장성을 확보하려면 널어 말리기를 하면 된다. 그러나,
말리기를 통하여 수분 함량을 줄이고, 성분을 가열 숙성시켜서 향미를 북돋우며, 그 생김새까지 다듬으려면 반드시 덖어 말리기를 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햇볕 널어 말리기는 겉은 바짝 마르지만 속은 잘 마르지 않으며, 자외선의 작용으로 이상한 향미가 생긴다.
그늘 널어 말리기는 얇게 널고 바람이 잘 통하여야 하는데, 이상발효가 일어날 수가 있고, 향미기가 생냉(生冷)하다.
열풍(건조기 포함)이나 열판(온돌 포함)이 편리하기는 하지만, 덖어 말리기처럼 세밀한 조작을 할 수가 없다.
위의 널어 말리기를 한 차들은 생김새가 거칠고 향미기에 이상(異常)이 있는데, 그 흠결을 감추려고 마무리 덖기(시아게 또는 가향작업이라 부르는)를 길게 한다.
누룽지의 구수한 냄새는 정다(精茶)의 진향(眞香)이 아니다.
9. 말리기(2)
익혀서 비빈 찻잎은 바로 덖어 말리기를 한다.
덖어 익히기를 한 찻잎이라 할지라도, 효소들이 완전히 실활되지 않았고, 특히 엽맥과 잎줄기는 잘 익지 않는다.
덖음녹차는 단위 찻잎의 가열량이 많을수록, 내음이 맑고 맛은 달며 뒷맛이 깔끔하고 풋내와 떫은맛과 답답함이 적다.
덖어 말리기의 솥 온도는 수분 함량이 줄어듦에 따라 점점 낮추어 준다. 온도가 높으면 겉이 타거나 속이 덜 마르고, 낮으면 눌어붙거나 뜨게 된다.
솥의 온도를 낮추어 가면서 여러 가지 손놀림을 써서 고저와 완급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으니, 서너 차례에 걸쳐서 솥에 넣고 빼기를 되풀이하여 말리기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솔에 넣고 빼기를 아홉 번을 했다고 우기면서 ‘구증구포(九蒸九炰)’와 ‘아홉 번 덖고 아홉 번 비비기’를 강변하는 이들이 있는데, 고금의 어느 검증된 다서에도 ‘구증구포’는 없고 ‘구초구유(九炒九揉)’는 억지이다. 솥을 들락날락하면, 부서지거나 뜨게 되어 완성차의 품질이 떨어진다.
요즘에는 대만제 초청기(炒菁機. 전동식 가스가열 원통형 찻잎 덖음 솥)가 많이 보급되었으니, 이를 활용하면 된다. 찻잎의 상태를 살펴서, 온도계를 보면서 불의 강약을 맞추고 회전속도의 완급과 바람불기의 횟수를 적절히 조작하면 인력도 줄이고 품질도 높일 수 있다.
10. 맛보기(1)
차를 맛보는 일은 차를 사고팔거나 사서 마시는 이들에게 중요한 일이다. 차를 만드는 이들도 자기가 만든 차의 맛을 제대로 보아야만, 제값을 매기고, 만들기의 잘잘못을 밝혀내어 더 좋은 차를 만들 수 있다.
‘차 가리기’는 마른 차와 찻물과 우린 잎의 형색향미기의 선악을 가리는 일인데, 셋 중에는 찻물이 중요하고 다섯 중에는 향미가 우선이다. 차 맛보기의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고...
차는 기호성 마실거리이므로 사람의 눈코입을 써서 그 품질의 우열을 가려내는데, 그 보편성과 신뢰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그 형식과 절차는 다듬어쓰면 되지만, 아직은 품다인들의 실력이 미숙하고 우리차의 품질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
항저우에서는 롱찡이, 쑤저우에서는 비뤄춘이, 교오또오에서는 교꾸로가 나는데, 화개에서는 화개차가 나지 않는다.
일본제 기계로 만든 대량자동화증제차는 제쳐두더라도, 집집마다 각양각색인 ‘지리산 화개동천 야생 수제 구증구포 부초 녹차’ 가운데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초의스님이 칠불사에서 다신전을 베끼고 동다송에서 주로 화개차를 노래한 것은 사실이나, 차는 해남 대흥사에서 만들었다.
추사선생의 쌍계사 차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그는 만허스님이 만든 쌍계사 차를 젊었을 때 북경에 가서 완원의 태화쌍비관에서 마셨던 승설차에 비견하고 용정차와 양의차보다 낫다고도 하였다.
초의제다법은 실낱처럼 가늘게 이어졌고, 만허제다법은 연기처럼 사라졌으니, 화개차의 제법을 바로 세우는 것이 우리의 긴급한 책무가 아닐까?
11. 맛보기(2)
16세기 말에 쓰여진 장원 ‘다록’을 19세기 초에 초의가 베낀 것은, 한중일 사이에는 제반 학문이 한문으로 공유되었고, 덖음녹차의 제조법이 일찍이 확립되었다는 당시의 실상을 반영한다.
21세기 초에 그 ‘고문(古文)’을 다시 풀이해 보임은 호가호위가 아니라, 법고창신의 기풍을 살리자는 것이다.
다음은 초의 ‘다신전’에서 ‘차맛보기’에 대한 내용을 가려서 뽑은 것이다.
辨茶(변다; 차 가리기)
茶之妙, 在乎始造之精. 藏之得法, 泡之得宜. 優劣定乎始鍋, 淸濁係乎末火. 火烈香淸, 鍋寒神倦. 火猛生焦, 柴疏失翠. 久延則過熟, 早起却還生. 熟則犯黃, 生則着黑. 順那則甘, 亦那則澁. 帶*白点者無妨, 絶焦点者最勝.
차지묘, 재호시조지정. 장지득법, 포지득의. 우열정호시과, 청탁계호말화. 화열향청, 과한신권. 화맹생초, 시소실취. 구연즉과숙, 조기각환생. 숙즉범황, 생즉착흑. 순나즉감, 역나즉삽. 대백점자무방, 절초점자최승.
* 白點(백점): 차잎을 솥에 덖을 때 높은 열도에 그을려서 생긴 흔적.
차의 오묘함은 먼저 정성스럽게 만드는 데에 있다. 그리고 잘 저장하고 제대로 우려내어야 한다.
차의 우열(優劣)은 덖어 익히기에서 결정되고, 청탁(淸濁)은 덖어 말리기에서 온다. 적절한 열도로 뜨겁게 덖으면 향이 맑고, 솥이 미지근하면 색향미가 떨어진다. 너무 뜨거우면 설익거나 타게 되고, 불기운이 약하면 신선함을 잃게 된다.
오래 덖으면 너무 익고, 일찍 그치면 설익게 된다. 너무 익히면 누렇게 되고, 설익히면 어둡게 된다.
제대로 비벼서 만들면 맛이 달고, 그렇지 않으면 떫게 된다.
눌어서 흰 점이 있는 것은 무방하나, 눌은 점이 없는 것이 가장 좋다.
12. 맛보기(3)
飮茶(음다; 차 마시기)
飮茶以客少爲貴, 客衆則喧, 喧則雅趣乏矣. 獨啜曰神, 二客曰勝, 三四曰取, 五六曰泛, 七八曰施.
음다이객소위귀, 객중즉훤, 훤즉아취핍의. 독철왈신, 이객왈승, 삼사왈취, 오륙왈범, 칠팔왈시.
차를 마시는 자리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사람이 많으면 시끄러울 뿐, 멋이 적다.
홀로 음미하여야 차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둘이서 마시는 것도 괜찮고, 서넛은 마실만 하나, 대여섯은 너무 많고, 일고여덟은 차를 그저 퍼주는 것이다.
香(향)
茶有眞香, 有蘭香, 有淸香, 有純香. 表裏如一曰純香, 不生不熟曰淸香, 火候均停曰蘭香, 雨前神俱曰眞香. 更有*含香, *淚香, *浮香, *問香, 此皆不正之氣.
다유진향, 유란향, 유청향, 유순향. 표리여일왈순향, 불생불숙왈청향, 화후균정왈란향, 우전신구왈진향. 갱유함향, 누향, 부향, 문향, 차개부정지기.
* 含香(함향): 뜬 냄새.
* 漏香(누향): 밋밋한 향.
* 浮香(부향): 가벼운 향.
* 問香(문향): 잡냄새.
차에는 진향(眞香) 난향(蘭香) 청향(淸香) 순향(純香)이 있다. 순향은 안팎이 같은 순수한 향이고, 청향은 고르게 익은 맑은 향이며, 난향은 불기운이 제대로 갈무리된 은은한 향이고, 진향은 일찍 따서 잘 만든 차의 참된 향이다. 그런데 뜬 내, 묵은내, 풋내, 잡내 등은 모두 바른 향이 아니다.
色(색)
茶以靑翠爲勝, 濤以藍白爲佳. 黃黑紅昏, 俱不入品. 雪濤爲上, 翠濤爲中, 黃濤爲下. 新泉活火, 煮茗玄工, 玉茗氷濤, 當杯絶技.
다이청취위승, 도이람백위가. 황흑홍혼, 구불입품. 설도위상, 취도위중, 황도위하. 신천활화, 자명현공, 옥명빙도, 당배절기.
찻닢의 색은 연한 녹색이 좋고, 찻물 색은 밝고 연한 녹색이 좋다. 누런색 검은색 붉은색 갈색 등은 좋지 않다. 밝은 물빛이 좋고, 푸른색은 보통이며, 누런색은 좋지 않다. 샘물을 긷고 불을 지펴서 차를 우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좋은 차를 맑게 우려내어 마시는 것은 절묘한 솜씨이다.
味(미)
味以甘潤爲上, 苦澁爲下.
미이감윤위상, 고삽위하.
차 맛은 달고 매끄러운 것이 좋고, 쓰고 떫은 것은 좋지 않다.
茶道(다도)
造時精, 藏時燥, 泡時潔. 精燥潔茶道盡矣.
조시정, 장시조, 포시결. 정조결다도진의.
정밀(精密)하게 만들고,
건조(乾燥)한 곳에 두며,
청결(淸潔)하게 우려낸다.
정조결(精燥潔)로써
다도(茶道)가 모두 이루어졌으니,
무얼 더 보태랴? (장원의 다록 http://cafe.daum.net/moonrivertea/hBMr/10?svc=cafeapi 중에서)
叢林或有趙州風而盡不知茶道,故抄示可畏.
절간에 조주의 다풍이 있다고는 하나,
다도를 알기에는 미진하여,
후생을 위하여 베껴 보인다.(다신전발문(茶神傳跋文) 중에서)
13. 제다기계를 활용하여 우리차의 경쟁력을 확보하자.
그동안 발굴하고 정리된 삼국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의 우리차에 관한 사료와 시문들은 ‘우리나라는 물이 좋아서 차를 안 마셨다’는 말을 무색하게 한다.
궁중에서 차를 사용하고, 차를 공납 받고, 사대부들이 차를 즐겼다는 기록들은 차고 넘치는 데, 정작 차나무를 기르고 찻잎을 따서 만드는 일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초의스님의 ‘다신전’과 ‘동다송’ 말고는, 희박하다.
‘다신전’과 ‘동다송’의 채다와 조다와 음다에 관한 이론은 육우 ‘다경’과 장원 ‘다록’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다경과 다록은 당나라와 명나라 때의 다서이니, 이후에 이루어진 차의 발전과 변화를 담고 있지 못하다.
나는 1990년대까지는 선친이 확립한 다신전 조다편을 기초로 삼은 우리 덖음녹차를 완성하려 하였고, 2000년 이후에는 중국의 자료와 기계를 활용하여 품질 안정과 생산성 제고에 진력하였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이들이 있다. 주걱으로 덖든, 발바닥으로 비비든, 봉지로 띄우든 차만 맛있으면 그만이라는 데...
화개터미널에서 직행버스를 타면 서울남부터미널까지 세 시간 반이 걸린다. 지금은 걸어서 가거나 달구지 타고 가는 시대가 아니다.
나가는 말
이제까지 ‘화개 덖음 녹차 만들기’를 중심으로, 어떻게 찻잎을 따서 만들어 맛보나를 이야기하였다.
화개차를 잘 만들려면 화개차를 사랑해야 한다. 먼저 스스로를 사랑하고 화개 산천을 사랑하고 그기서 난 화개 찻잎을 사랑하자.
내가 있는 곳의 주인이 되라! 그곳에 바로 진리가 있으니...(隨處作主立處卽眞수처작주입처즉진)
옛것에 얽매이거나 남의 것을 따라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옛것과 남의 것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야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있다. 그러려면, 아집과 편견 없이 다른 것을 수용하고 내 것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명확한 인식과 구체적 실천이 좋은 열매를 낳는다.(妙用時水流花開묘용시수류화개)
오늘날 우리에게 긴요한 것은 자주성(自主性)과 과학성(科學性) 아닐까? <201110春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