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선 글
[Ms. Anscombe 의 사회학 이야기] 첫번째 : 개관
[Ms. Anscombe 의 사회학 이야기] 두번째 : 탄생 - 쌍둥이 혁명
[Ms. Anscombe 의 사회학 이야기] 두번째 : 탄생 - 과학으로 거듭나다
[Ms. Anscombe 의 사회학 이야기] 세번째 : 칼 맑스, 왜 사회학자인가?
지난 번 글의 테마는, 맑스는 개인을 어디까지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자 했고, 이를 행함에 있어서 형이상학적인 잡설이 아니라,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다는 것 되겠습니다.
일단 맑스의 방법론이 실증주의냐는 의문이 나올 수 있는데, 지난 번 글에서는 '그렇다'는 식으로 넘어갔습니다만, 확실히 맑스와 실증주의 사이에는 큰 벽이 있죠. 실증주의적 해석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기는 합니다만. 다만, 이는 과학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기 때문에 일단 괄호쳤고, 큰 의미에서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에서 맑스가 과학을 선택했다는 것 정도로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가장 강조했던 건, 사회적 관계가 갖는 효과였는데, 이것에 주목한다는 것이 우리가 '사회학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맑스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습니다만, 애초에 주제는 '사회학이란 무엇인가'였고, 그 점에서 사회 관계에 주목한 맑스가 사회학적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보여준 것입니다.
원래는 초기 저작에 대해 논의한다고 했습니다만, 다시 찾아보고 쓰려니 머리가 아픈 관계로, 널리 알려진 '생산력과 생산관계' 개념을 상식 익히듯 살펴보고, 맑스주의와 도덕에 관해 잡설을 늘어놓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1. 생산양식 : 생산력과 생산관계
맑스라고 하면 보통 떠오르는 게 공산주의이고, 도식적으로 배운 것이 일명 5단계설 입니다. 이건 맑스 자신이 아닌 후대의 학자가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여하간 많이 언급되고 있는 부분이니 걍 넘어갈 수는 없군요.
역사를 어떤 기준에 의해 구분하느냐는 그가 무엇을 중시하는가를 보여줍니다. 맑스가 다섯 단계로 역사를 구분하는 근거는 각각이 발현하고 있는 생산양식의 차이입니다. 즉,
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이들 각각은 상이한 생산양식입니다. 생산양식이란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개념은 맑스의 역사 유물론, 사회변동에 관한 이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죠. 사회적 변화를 규정하는 기준이 되니까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맑스는 노동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다른 생물들은 자연 법칙에 순응하는 데 반해,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필요에 맞게 이용하고, 바꿉니다. 다른 생물들이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그것에 일방적 내지 그것과 상호작용합니다. 다른 생물들이 수동적인데 반해, 인간은 능동적입니다. 맑스는 노동을 자연의 변형이라고 보았습니다.(이 부분은 이후 인간 중심주의라는 비판, 반환경주의라는 비판을 받게 되지요) 다른 생물들과 인간을 구분지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노동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유지를 노동을 통해 이룩하게 되지요.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고, (무리해서 비약하자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면, 맑스에게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입니다.
노동은 두 가지 요소를 필요로 합니다. 노동의 대상, 즉 자연과 노동의 도구로 구성되지요. 내가 사냥이라는 노동을 한다면, 노동의 대상으로서의 사슴이 있고, 노동의 도구로서의 활이 있는 셈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사냥 행위, 즉 노동력이라는 요소가 들어가야 하죠.
그런데 이는 그대로 정체되어있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합니다. 사냥 도구는 점점 정교해지고, 변화하게 되죠. 처음에는 손으로, 다음에는 돌로, 도끼로, 활로, 총으로 사냥을 하게 되죠. 이처럼 생산도구가 더 많은 생산물을 얻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생산력이 증대되었다고 말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노동은 결코 자연이라는 대상과 나와의 관계만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특히 사회학에 있어서 맑스의 공헌은 노동이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간파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홀로 일하지 않고 여러 사람과 함께 일합니다. 함께 모여서 행동하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면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개념을 끄집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산력은 앞서 언급한 노동도구의 생산능력을 의미합니다. 이 노동도구는 보통 생산수단이라고 불립니다. 생산관계는 이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의미합니다.
다시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생산수단 없이는 생산할 수 없습니다. 물론 노동력이 가해져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죠.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맑스가 노동 생산물의 가치는 전적으로 노동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생산수단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대상(자연)이 생산물로 변형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일 뿐이죠.(이를 가치의 이전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노동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이 발휘되려면 언제나 생산수단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생산수단은 모두가 공유하지 않습니다. 과거 원시 공산사회는 그러했지만, 이후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특정 집단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를 생산수단의 사유라고 부릅니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사유가 어디에서 기원했는가를 역사적으로 탐구하고 있죠. 맑스하면 떠오르는 불평등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핵심을 둔다고 이해해도 좋을 듯 합니다. 제가 보기엔, 문제는 일단 그것이 사유된다는 데에 있고, 그것이 계속해서 승계됨으로써, 계급을 재생산하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노예제에서 생산수단은 노예였고, 노예를 소유한 것은 노예주들입니다. 봉건제에서 생산수단은 토지였고, 토지를 소유한 것은 지주들이었죠.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은 자본이고, 자본을 소유한 것은 자본가들입니다. 반면에,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예, 농민, 노동자들이 반대편에 존재합니다.
맑스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집단을 유산계급으로, 소유하지 못한 집단을 무산계급이라고 부릅니다. 이 양 계급간의 관계를 생산관계라고 합니다. 내가 어떤 계급에 속하는가는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소유했으면 유산계급이고, 소유하지 못했으면 무산계급입니다. 다른 말로, 지배계급 - 피지배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맑스는 기본적으로 물질적인 토대를 소유한 사람이 정치와 문화를 지배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물적 토대를 소유한 유산계급이 지배계급이 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초중기의 '공산당 선언'과 같은 저작에 강하게 드러납니다. 자본주의를 예로 든다면, 유산계급-지배계급에 해당하는 것이 부르주아지, 무산계급-피지배계급에 해당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되겠죠. 물론 양 계급 이외의 다른 계급, 프티 부르주아지, 농민, 지주 등과 같은 계급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록 그 계급들은 프롤레타리아트화 될 것으로 보았을 뿐이죠. 이를 계급의 양극화 명제라고 표현합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으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생산수단이겠죠. 생산수단은 계속해서 발전해서 생산력 증대를 이루는데, 그것의 사용은 생산관계에 매여있으니까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맺는 일정한 관계를 맑스는 생산양식이라고 부릅니다. 노예에 기반한 노예제, 토지에 기반한 봉건제, 자본에 기반한 자본주의는 각각 하나의 생산양식입니다.
그렇다면 생산양식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생산력은 계속해서 증대합니다. 노동도구는 지속적으로 발달을 거듭하게 되죠. 여기에 끊임없는 인간의 욕구라는 요소가 작용한다고 생각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거듭 발달하는 생산력과 달리, 생산관계는 정체되어 있습니다.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는 하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죠.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면, 기존의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달에 장애가 됩니다. 맑스는 이것이 하나의 생산양식이 갖는 필연적인 모순이라고 보았죠. 그렇다면 어느 순간에?
헤겔(G. W. F. Hegel)의 명제 가운데 양의 질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네모 판자와 모서리에 얇은 나무 판자가 붙어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의자라 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1cm, 1cm 씩 길어지면 어느 순간 우리는 그것을 의자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명확한 기준이나 한계가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원숭이와 인간이 어느 정도 수준에서 질적으로 달라지는가를 판가름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어디까지를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이라고 구분하는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갈등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노예제 생산양식은 더 이상의 생산력 발전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생산력 증대를 위해서는 더 이상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노동이 필요했죠. 봉건제 생산양식도 그러합니다. 기계의 발달과 분업의 등장으로 생산력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토지에 매여있어 이리저리 움직일 수 없었던 농민들의 상황(봉건제 생산관계로 인해)은 분명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맑스는 이 갈등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계급이라고 봅니다. 봉건제의 지주 계급이 그러하고, 자본주의의 자본가 계급이 그러하죠. 이전 생산양식의 지배계급은 다음 생산양식에서는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자본가는 봉건제 생산양식의 지배계급인 지주들과의 피나는 싸움을 통해서 지배계급의 지위를 획득하였죠.
요약하자면, 생산력은 끊임없이 증대하며, 생산관계와 상호작용 함으로써, 하나의 생산양식을 이룹니다. 하지만 생산관계의 정체하고자 하는 성격과 생산력의 끊임없이 상승하려는 성격이 어느 시점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은 생산력의 발달을 위해 생산관계가 변화하게 되고, 생산양식도 달라지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결국 생산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맑스를 경제 결정론자로 몰고 가는 근거가 되고 있지만, 생산관계의 변혁 과정은 결코 자동적이지 않고, 치열한 계급투쟁의 과정을 통해 획득되는 산물이라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조야한 결정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맑스는 생산양식이 그 사회의 비경제적인 부분을 결정짓는다고 보았습니다.(약한 의미로 해석한다면 조응한다고 할 수 있겠죠) 경제적인 부분이 바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관계로서의 생산양식이고, 통상적으로 하부구조라고 불립니다. 그것이 결정 내지 그것과 조응하는 부분이 종교, 도덕, 정치, 문화와 같은 정신적, 관념적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 보통 상부구조라고 불립니다. 이데올로기도 이에 해당하죠. 이들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총체를 사회구성체라고 부릅니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입니다만, 자주 사용되는 맑스의 개념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2. 계급의식과 체제이행의 문제
계급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맑스는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변동은 생산양식의 변화이고, 생산양식의 변화는 기존 생산관계를 유지하려는 집단과 이를 바꾸려는 집단 사이의 갈등 속에서 일어나죠. 따라서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특징짓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자본주의까지의 설명은 현재 일어난 상황에 대한 사후적인 설명이지만, 맑스는 나아가 자본주의 또한 계급투쟁에 따라 다른 생산양식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보았죠. 그것이 사회주의-공산주의인데,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금지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차원을 달리합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원은 프롤레타리아트 일당 독재, 국가의 존재 여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만, 대충 그 정도로 알고 넘어갑시다.
문제는 계급투쟁은 '저절로'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역사적인 필연성이 존재한다면, 부르주아지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모든 건 결정되어 있죠. 이건 조야하기 짝이 없는 결정론인데, 맑스 사후 이런 주장을 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너무 단순화시킨 감이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도 그 당시 맑스가 풀지 못했던 의문에 같이 맞닥뜨리게 됩니다. 왜 노동자 계급은 노동자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가? 왜 피지배 계급은 '쪽수'에서 월등한데도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하는가? 여기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도입해 볼 수 있습니다. 지배계급들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피지배계급들이 자신들이 처한 위치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데올로기를 생산, 확대시키는 것이 학교, 교회, 요즘 식으로 말하면 미디어들이 되겠죠. 알튀세(Louis Althusser) 같은 사람은 이를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요즘 보이는 명박이 대통령'님'(!!!!)의 언론 장악 시도도 이러한 식으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지배 계급이 피지배계급을 무지의 상태로 놓아두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 사실을 말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너무 음모론적이죠. 그저 지배계급들이 우월한 힘을 이용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이념들을 사회의 지배적 가치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데올로기 문제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이해하는데 꽤나 설득력있는 틀입니다.
맑스는 노동자 계급이 언제까지나 무지 상태에 있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더욱 효과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똑똑해져야' 했고, 교육이 생산력 향상의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맑스는 이를 두고 부르주아지들이 자신의 무덤을 파는 형국이라고 말하고 있죠.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봉사하기 위해 똑똑해질 수록 자신들이 처한 위치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질테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자신의 위치를 몰랐다가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바로 계급투쟁으로 이어질까요? 노동자 계급이라고 '외적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들 계급 집단을 형성할까요? 아니, 그 사람들이 자신들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상황을 변화시켜야 더 나아진다는 생각에 동의하기는 할까요?
계급을 단순히 외적인 조건으로 정의할 것인지, 실제로 그들이 계급에 속해있다는 의식까지 포함할 것인지는 논쟁거리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무엇이 계급적 이익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설령, 그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은 달라질 수 있죠.
예컨대, 노동자들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보다 한나라당이 자신의 이익을 더 잘 대변해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생각인지는 이론가들이 이렇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한다고 해서 '이데올로기로부터 깨어나라'고 계몽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무엇이 '이익'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것은 정당의 경향과 정당으로부터 노동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 사이의 상관관계를 논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데, 이건 '이데올로기'로 설명할 문제는 아닌 것이죠.
따져보니,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노동자 계급에게 이익이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실제로 노동자들이 이들 정당을 지지할까요? 경제적 차원이 아닌 다른 요소들이 정당 지지의 근거가 된다는 점은 제쳐두더라도, 이러한 정당을 찍는 것이 이들에게 당장 이익을 가져다 줄지는 의문입니다. 일명 '사표'가 될 가능성도 있고, 설령 집권을 한다 치더라도, (특히 중간계급의 경우에는) 일명 '이행의 시기'를 거쳐야 합니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장기적으로는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에게 높은 복지(사회복지가 아니라 전체적인 경제적 이익을 말함)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투표는 어디까지나 단기적인 행위입니다. 사람들이 과연 복지의 감소를 감수하면서 표를 던질까요?
해답을 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계급의 문제가 보기보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고, 맑스의 논의는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게된다는 점을 기억해 두었으면 합니다.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해 맑스가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어차피 현대 정치체제에서 맑스 식의 혁명을 기대하기 어려운만큼, 이러한 고민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3. 맑스와 도덕
마지막으로 맑스주의와 도덕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맑스가 자신의 논의를 과학적이라고 부르고 싶어했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입니다만, 여기에는 늘 도덕적인 지향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가 실증주의자들처럼 가치가 전적으로 배제된 과학을 추구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만, 자신의 논의를 진리의 차원에 넣으려고 했던 것 또한 진실이죠. 예컨대, 그는 어떠한 이론이든 당파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보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동등한 위치를 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당파적일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쉽사리 상대주의적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는 경제적인 지배계급이 이데올로기(허위의식)를 생산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응하는 피지배계급의 이념을 이데올로기라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점에서 '너'의 주장은 비판에서 면제될 수 있느냐는 반론이 나올 시점이 되죠. 후에 칼 만하임(Karl Mannheim)이 이러한 지적을 통해 지식 사회학이라는 분야를 열게 됩니다.
여하간, 맑스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전망을 갖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설령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회로의 이행을 좀 더 빨리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잘못일 수는 없죠.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좀 더 나은 사회라는 것을 맑스는 과학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 더 좋은 것인가에 관한 합의가 필요합니다. 맑스 식의 논의에 대해 심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죠, 그것이 '맑스'로 나타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우리의 예만 들더라도, 노동자들의 비참한 작업 환경이나, 일에 비해 보수는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인간적인 대접은 기대할 수도 없는 현실은 맑스의 자본주의 비판에 동감하게 만들죠. 부의 양극화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그렇다면 그것은 왜 문제일까요? 여기에는 자유나 평등 같은 지극히 부르주아적인 가치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맑스가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를 스케치만 하다 말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기는 합니다만, 그의 비판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가 직접적으로는 주장하지 않은 여러 도덕적 가치 덕분이었다는 점은 주목할만 합니다. 아니, 맑스 자신도 그런 부르주아적 가치를 무시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실현하려고 했다는 점이 옳은 해석일 것 같습니다.
후기
뭐, 중구난방 식으로 떠들어서 착실한 정리가 되지는 못했습니다만, 이 정도면 된 거 같고. 세부적인 논의들은 어차피 '교과서적인' 방식을 지양한 바라 생략했습니다.. 라기 보다는 능력 부족과 시간 부족으로 봐 주시면 되겠군요. 어차피 훑어보자는 게 목적이니.
일단은 맑스가 인간을 규정함에 있어 사회관계가 무진장 중요하다는 점을 통찰했다는 점을 기억해두고,
한 가지 빼먹었군요, 대체 '맑스 적'이라는 건 무엇인가? 대강 이렇게 생각해두록 합시다. '어떤 주장을 평가함에 있어, 그 주장이 어떠한 이해관계, 사회적 맥락에서 파생된 것인가에 주목하는 관점, 특히 경제적인 이해관계 - 즉, 계급 - 에 주목하는 관점'이라고 말이지요.
좌파의 좌, 빨갱이의 빨자만 들어도 몸서리치는 사람이라도, 일반 서민이라면 그의 논법 중에서 맑스적인 주장을 상당히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실제 주장과는 무관하게, 맑스, 그와 연관된 이미지들이 무조건적인 배척이 대상이 되는 한국의 현실이 안타깝네요. 물론, 학문의 영역에서는 과소비되는 경향이 있는 것 또한 분명한데, 이러한 편식이야말로 건강을 크게 해치고 있다고 봅니다.
다음에는 막스 베버(Max Weber)를 살펴볼까 하는데, 관심도를 높이자는 의미에서, 널리 알려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주제로 할까 합니다. 학기 중이라면 더 괜찮았을텐데 아쉽기는 하지만.
출처 : www.pgr21.com
글쓴이 : Ms. Anscomb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