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자유주의」의 메시지/ 메이첸
그 책의 내용과 목적에 대한 메이첸 자신의 평가는 출판사의 요청으로 광고 전단을 위해 준비된 진술에 간명하게 표현되었다.
“현대의 ‘자유주의’ 종교와 유서 깊은 기독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본서에서 시도된다. 저자가 확신하는 바는 한편으로 자유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유서 깊은 교회의 종교는 같은 종교의 두 이종이 아니라, 전혀 다른 뿌리에서 생겨난 별개의 두 종교라는 것이다. 이런 확신은 하나님과 사람, 성경, 그리스도, 구원,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섬김에 대한 유서 깊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근대 자유주의의 가르침을 간결하게 진술함으로써 뒷받침된다. 만약 그 유서 깊은 통념에서의 기독교를 정말로 포기할 수 있다면, 적어도 권할 만한 것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들이 그 자리에 무엇을 두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책은 기본적으로 근본주의자 책으로 간주됐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것은 한 가지 이상의 점에서 여느 근본주의자 저작물보다 뛰어났다. 그 책은 평이하게 씌었지만 학자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주제를 다루었다. 게다가 그 책에는 문제가 되어 있는 한층 깊은 쟁점들에 대한 통찰이 있는데, 이런 통찰은 여느 근본주의자 사유와 저술의 범위를 상당히 넘어서는 것이다. 예컨대, 이것은 구원에 관한 기독교 교리의 일관성 있는 초자연론에 나타난다. 그것은 그 문제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문제이지 단순히 성경의 다소 고립된 어떤 교리들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독특하게 나타난다. 메이첸은 ‘하나님의 두려운 초월성’의 본질적인 특성을 강조했다.
“시종일관 성경은 피조물을 창조주로부터 분리시키는 무서운 간극을 설명하려고 한다. 실로,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내재하신다. 참새 한 마리도 그분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이 이 세상에 내재하시는 것은 그분이 이 세상과 동일시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은 이 세상을 당신 뜻대로 창조하신 분이시며 붙들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놓여 있다.”
메이첸은 기독교 안에서의 역사의 위치와 교리 그 자체의 위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근대 사상은 복음의 중심을 이루며 그것에 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큰 장애물로 생각했다. 메이첸이 기독교 역사관의 중심성과 복음을 이해하는 데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끈기 있고 효과적인 방식은 주목돼야 한다.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그는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기독교의 모든 사상은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종교에는 기독교가 없을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사상들의 복합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사건의 서술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이 없다면 기독교의 견해에서는, 이 세상은 흑암이며, 인간에는 죄책 아래서 상실된다.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영원한 진리는 죄악 때문에 절망만을 가져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 제물로 바치셨을 때 행하신 복된 일로 삶의 면모가 일신됐다.”
또한 메이첸은, 어쩌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사람이 기독교 메시지의 믿음에 부여하는 의미, 요컨대 진리 그 자체를 향한 그의 태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근본주의를 넘어섰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어떤 사람이 동정녀 탄생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비롯하여 신조의 모든 조항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만약 결국 사람이 믿느냐의 여부는 정말로 중요하지 않으며 불신앙은 신앙만큼 용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단지 어떤 고립된 교리들만 부정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단호하게 기독교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메이첸은 서장(序章) 뒤에서 ‘교리’에 관한 장 전부로 자신의 작업을 소개했다. 여기서 그는 기독교와 그리스도 자신의 메시지는 바로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교리적임을 보여준다. 사람이 비교리적인 종교를 가지려 하거나 단지 일반적인 진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그는 바울 뿐만 아니라 원시 기독교회 및 예수님 그분도 포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회의론이나 무관심은 그의 판단으로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깊은 이단이다.
「기독교와 자유주의」 마지막 장은 ‘교회’에 바쳐진다. 그것에는 모두 포괄주의를 설득력 있게 고발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주의는 제대로 신앙을 고백한 적이 전혀 없는 많은 사람들을 교인이 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목회와 영향력 있는 여타의 자리들을 담당하도록 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한 교회 내에는 평화가 있을 리가 없었다. “교회의 두 당사자의 분리는 현재의 긴요한 일이다.” 더구나 교리의 차이들은 사소한 것이라는 가정 아래 교리 문제를 무시하는 교회에 연합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지적하기를, 교회의 교리들을 지키려는 교회의 목회자들과 그 밖의 임원들의 진지한 헌신에 비추어 볼 때 “교리적 차이들을 무시하고서 그리스도인의 섬김이라는 프로그램으로 교회를 연합시키는” 것은 부정직한 일일 것이라고 했다. 정직의 길은 유니테리언 교도들이 걷는 길이다. 그들은 솔직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권위 있는 성경 없는, 교리적 요구들이 없는, 신조 없는 교회를 원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기쁨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복음이 전파되겠는가? 당연한 대답은 교회의 기관들을 통해 전파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교회의 기관들은 성경과 유서 깊은 신조들에 있는 것으로서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점에서 복음과 정반대인 어떤 유형의 종교적 가르침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알고 있다.”
그의 교단 안팎 모두의 보수적인 종교 언론이 그 책을 진심으로 환영했지만, 그것은 자유주의자들에게서는 호된 비판을 받았다. 오히려 ‘퍼시픽 유니테리언’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신자이거나 불신자이거나, 복음주의자이거나 또는 자유주의자이거나, 어느 한쪽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 동시에 양쪽 모두가 될 수가 없다. 우리는 메이첸박사가 복음적인 교회 내의 자유당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복음적인 교회에서는 자유당은 서 있을 건강한 다리가 없다.”
메이첸은 브리티시 위클리의 물음에 답하였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정녕 교리와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생활 방식이나 교리로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생활 방식이 아니라, 교리에 바탕을 둔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은 특히 일어난 어떤 일을 선포하는 데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원시 교회가 그 일어난 일을 선포한 것은 그 안에서 최초의 위대한 행위가 일어난 이후였습니다. 예수께서 예언의 방법으로 그것을 선포하셨지만, 원시 교회와 예수님은 사건을 선포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았습니다.”
스톤하우스, 「메이첸의 생애와 사상」, PP 451-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