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추봉(秋峰) 박승철(朴勝喆)
연천 지역 사회 원로 분들의 증언을 계기로 연천향토사연구소에서 추봉 박승철(1897~ ?)선생에 대한 인물 조사를 시작할 때 만해도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고작 일제 강점기 연천의 요시찰 대상 인물 세 명 중 한 명이라는 것뿐이었다.
이후 1 년도 안 되는 짧은 조사기간에 추봉 선생에 대한 지역 내 원로 열 분 이상의 증언을 녹취하고 상당한 양의 관련 자료를 발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에 아직 연구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미완인 상태나마 지역 주민 여러분과 추봉 박승철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을 공유하고자 한다.
추봉선생은 1938년 일제가 국내 민족주의 진영에 대한 말살정책으로 흥업구락부 회원을 대량검거 할 때 구속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렀는데 이 사건은 안창호 계열의 수양동우회 회원 탄압에 이은 국내 이승만 계열 조직에 대한 탄압사건이었다.
추봉선생은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1915년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에 참여하면서 당시 내로라하는 민족운동자들과 교유를 시작한 것이다. 경성고보 교원양성소 내에서 설립된 이 비밀결사는 조선혼을 고취하고 사회진출 후에도 서로 연락하여 일본인에게 피탈당하고 있는 각종 사업을 조선인 자신이 부흥시켜 나가자는 취지로 회원을 확대하고 있었다.
추봉선생은 교원양성소 학생은 아니지만 일반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1917년 6월 주요간부가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될 때에는 일본유학 중이어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모임은 신민회와 더불어 3.1운동 이전에 일제의 수사망에 걸려 검거된 대표적인 비밀결사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의 간부계원으로는 계장에 중앙학교 교사 최규익(崔奎翼)을 비롯하여 회계 최남선(崔南善) 그리고 협의회원으로 유근(柳 瑾) 남형유(南亨裕) 김두봉(金枓奉) 박중화(朴重華) 등의 쟁쟁한 인물이 참여하고 있었고 일반계원은 훗날 민족주의사학자로서 이름을 떨친 안재홍(安在鴻)과 시인 이은상 등을 포함하여 70명 남짓이었다.
추봉선생이 조선산직장려계에 참여한 것은 1911년 월남 이상재의 권유로 YMCA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산직장려계가 성경연구회에서 이우용의 발의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먼저 추봉 박승철과 월남 이상재의 인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상재는 박승철의 아버지인 박정양의 식객으로 10여년을 지냈는데 1881년 박정양이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방문할 때에 수행원으로 동행했고,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갈 때에도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한 인연이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이상재가 박정양 사후 박승철의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상재는 기독교도로서 YMCA(황성기독청년회)에서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으로 있었는데 이때 박승철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추봉 선생을 잘 이해하기 위해 그의 가계를 살펴보자.
추봉 박승철의 아버지 박정양(朴定陽)은 1841년에 태어나 1905년 11월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박정양은 동갑내기인 양주 趙씨를 아내로 맞아들여 위로 딸 둘과 아래로 아들(朴勝吉)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박승길은 1891년 11월 21세의 젊은 나이에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박승길의 아내 한산 李씨는 이때 겨우 17세의 젊은 나이였는데 평생을 수절하다 1950년 8월 76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한편, 박정양의 처 양주 趙씨는 외아들 박승길이 죽자 5대독자인 박정양의 대가 끊길까 염려가 컸던 탓인지 한 달 반 만에 52세를 일기로 아들을 따라 세상을 떠나니 고관대작인 박정양은 외아들과 아내를 동시에 잃은 고단한 처지가 되었다.
박정양은 이때 인동 張씨를 둘째 아내로 맞아들여 위로 딸 하나와 아래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이 박승철이다.
박정양은 이승만 이상재 등이 나서서 독립협회 운동을 펼치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대한제국에 개혁을 요구할 당시에 내부대신이자 총리대신서리와 궁내부 대신서리를 겸하고 있던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다. 1897년 57세의 나이에 아들을 얻으니 고종 황제도 기뻐하며 특별히 관심을 쏟고 축하해주었다고 한다.
박정양은 61세 되던 해에 둘째아들 박승희(1901-1964)를 얻었는데 그는 토월회를 조직하여 우리나라 신극운동의 효시를 이룬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승철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복형인 박승길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장자가 되었으나 불과 아홉의 나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니 그를 돌봐줄 이는 이복누이 둘과 동복누이 하나 그리고 일찍이 청상과부가 된 형수(이복형 승길의 처) 뿐이었다고 한다.
박정양은 자신의 지위만큼이나 엄청난 토지를 남겼는데, 박정양이 5대 독자였던 관계로 가까운 친척이 없어 재산관리는 외가집에서 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추봉선생은 아버지를 일찍 잃은 것을 제외하고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귀족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박승철은 동갑내기 양주 趙씨를 맞아들여 21살 되던 해인 1917년에 첫딸 정희를 얻고 1919년에는 아들 흥서(1919~1973)를 두었으나 청상과부가 된 형수(박승길의 처)에게 양자로 보내었다.
박승철의 아내 양주 조씨는 이후 딸 박덕경(1921년생 이화대졸),아들 박명서(1926년생 서울공대졸),아들 박만서(1927년생 서울문리대 재학중 납북),아들 박동서(1929년생 서울대 행정대학원장 역임)까지 모두 여섯 자녀를 두었으나 1935년 2월 불과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박승철은 김영애(일본여대졸)를 둘째 아내로 맞아들이니 나이차이가 열네 살 이었다. 김영애는 박승철과의 사이에서 내리 딸을 셋을 낳고 늦게 아들 하나를 더 두었다.
박승철의 둘째 아내 김영애는 남편 박승철이 6.25때 납북됨에 따라 자신의 소생들을 데리고 미국에 건너가 살다가 별세하였다고한다.
다시 추봉 박승철의 독립운동 관련 이야기로 돌아오면,
1915년 10월 일본으로 유학하여 이듬해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후 동경유학생 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약했다.
1920년 와세다 대학 사학과 학생으로 2.8독립선언 1주년 기념행사를 주동하여 김종열,변희용,최승만,박일병,유영준과 같이 2월 7일에 2.8운동 1주년 기념강연을 열었다.
2월 22일 에는 김준연 최승만 서상국과 함께 회합을 갖고 3.1운동 1주년 집회를 준비하였다. 동경에서 벌어진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 기념시위에서 다수의 학생이 체포되어 구류 처분을 당하는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1920년 당시 조선유학생 학우회 간부 중 김달호 김준연 고지영 변희용 김용우 강종섭 등과 함께 요시찰 갑호로 분류되어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받는 처지에 놓였다.
1920년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는 길에 동아일보사의 후원을 받아 부산부터 서울까지 전국 순회 계몽강연을 김준연, 김도연, 변희용 등과 함께 벌였다.
서울 단성사에서 강연 중 일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는데 추봉 선생 일행의 계몽강연은 최초의 대규모적인 유학생 귀국 강연으로 기록되고 있다.
박승철은 1922년 1월 김준연(해방 후 법무장관 역임, 1967년 대통령선거 출마)과 함께 독일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하면서 평생 동지의 관계가 되었다.
독일 유학 중 당대 우리나라 최고의 잡지인 [개벽]에 정기적으로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기행문을 보내기도 했다.
박승철은 1925년에 독일유학에서 돌아와 중앙, 보성 등의 학교에서 서양사를 강의하면서 「조선사정연구회」와 「민립대학기성운동」에 참여하였다.
즉, 1925년 9월 박승철은 백남훈(白南薰) 백남운(白南雲) 백관수(白寬洙) 최원순(崔元淳) 김준연(金俊淵) 안재홍(安在鴻) 최두선(催斗善) 조병옥(趙炳玉) 홍명희(洪命熹) 유억겸(兪億兼)등과 함께
“극단의 공산주의를 주장하고....... 조선에 통용 실시코자 하는 등 과격한 주장을 하는 이가 있으나 조선에는 조선의 역사가 있고 독특한 민족성이 있으니 이러한 행위는 조선민족을 자멸에 도입케 될 것이므로 그 가부를 연구해서 그 장소(長所)를 취해서 민족정신의 보지(保持)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며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926년 3월에는 이종린(李鍾麟) 구자옥(具滋玉) 최원순(催元淳)한기악(韓其岳) 안재홍(安在鴻)등과 함께 민립대학기성운동 공동대표가 되어 침체되었던 민립대학 촉성운동을 다시 벌이기도 하였다.
추봉선생은 1932년에 서울 생활을 접고 경기도 연천군 통현리 새말로 이사하였는데 여행 중에 연천의 산수에 반해 이주했다고 한다.
연천 이주의 내막을 추봉선생의 아내 김영애 가 남긴 글을 통해 보면 “...별안간 총독부에서 지시가 나오기를 이제부터 일본말을 사용하지 않고는 강의를 절대 하지 못한다는 지시가 내렸대. ...내가 왜 조상들의 훌륭한 말을 받았는데 어째서 그까짓 일본말로 내가 가르치랴....”하며 당장 사표를 내고 이사할 시골을 물색하던 중 연천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추봉선생이 연천으로 이주한 뒤에 김준연 유억겸 구자옥 등의 친구들이 서울에서 자주 놀러왔다고 한다.
박승철의 절친한 친구 김준연은 3차 공산당 사건으로 7년간 복역하고 나와 동아일보 주필로 있던 중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해직을 강요당하였다. 해직된 김준연은 인촌 김성수의 연천군 은대리 해동농장 관리인으로 내려와 해방 전까지 가까이서 박승철과 교유하였다.
추봉선생의 일제 강점기 말 연천에서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권병희 옹(84세)의 증언에 의하면 주민들의 요구로 통현리 일대를 개간하여 대규모 농장을 만들고 현재의 고인돌공원 아래쪽에 기와공장을 열어 통현리 주민들의 생계유지에 대단한 기여를 했다 한다.
추봉선생은 해방과 함께 연천군 자치위원장이 되었는데 연천군민의 존경을 받는 정신적 지주였다. 지역의 많은 원로 분들께 일제강점기 말과 해방 전후 시기에 가장 훌륭한 인물이 누구냐고 설문했을 때 하나같이 추봉 박승철 선생을 첫째로 꼽는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옛 동지들이 해방과 함께 미군정하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추봉선생은 1947년 2월 까지 38선 이북지역인 연천에 머물러 있다가 3월에야 월남하였다.
월남 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문교장관 등 장관제의를 세 번이나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던 중 네 번째 부탁은 거절 할 수 없이 남선전기(한국전력의 전신)사장에 부임하였다 한다.
짧은 기간이지만 남선전기 사장시절 공평무사한 업무처리로 직원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1950년 8월 전쟁 중에 북한으로 피랍되어 말년의 사정을 알 수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추봉선생의 해방직후 행적을 살펴보면, 38선 이북지역인 경기도 연천군의 자치위원장이면서도 1945년 9월 8일 우익인사의 결집체인 한국민주당 발기인에 이름이 올라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내내 동지관계에 있던 흥업구락부 멤버들이 박승철의 명망도를 고려해서 서류상으로만 이름을 올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47년 3월 월남할 당시에는 장택상이 동두천까지 트럭을 보내주어 한탄강을 도하한 박승철 일가를 맞아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직을 제의한 것과 관련해서는 당시 김준연의 소개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박승철 본인이 이미 젊은 시절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미국을 들러 이승만을 만나고 돌아온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통령 자신이 내심 발탁하려고 했던 듯 하다. 물론 아버지 박정양의 후광도 작용한 것 같다.
하지만 추봉선생은 장관으로 대거 등용되어 출세길을 향해 달리던 옛 동지들과는 달리 혼란기의 내각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남선전기 사장을 맡고 있던 관계로 1950년 1월 상공부 장관의 자문에 응하는 전기분과위원에 위촉된 것이 유일하게 확인되는 정부 관련 활동이다.
6.25전쟁 중 납북되어 전쟁직후에는 평양근교 변전소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57년 중 광산으로 이주했다는 설이 있다.
추봉 박승철 선생은 청소년기부터 민족독립 사상을 갖고 독립운동과 민중계몽 활동에 참여했으며 다른 동지들과 달리 일제 강점기 말에 변절의 길도 걷지 않은 훌륭한 분이다.
비록 독립운동자로 서훈되지는 않았으나 연천의 원로 분들이 한결같이 해방전후의 훌륭한 인물로 지목해 왔기 때문에 추봉선생을 조명하는 기회를 가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