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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가톨릭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사진 출처 노터데임대학교 |
1. 라틴아메리카 |
1928년생으로 학자로서 여전히 활동 중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페루 출신 가톨릭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해방신학의 창립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구티에레스는 남아메리카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1928년 6월 8일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의 후손인 메스티소였는데, 원주민 중 케추아 부족 혈통이었다. 구티에레스는 열두 살부터 골수염을 앓아서, 자주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 따라서 12살부터 18살까진 휠체어를 사용하는 날이 많았고, 이후에도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평생 유지했다. 원래 구티에레스는 정신과 의사가 되기 위해 1947년에 페루 산마르코스국립대 의대에 들어갔으나, 학교에서 정치 동아리에 참석하면서 라틴아메리카 정치 현실에 눈을 떴다. 의학보다 철학과 신학에 더 관심이 많았기에, 곧 신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사제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리마 가톨릭신학교와 칠레 산티아고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벨기에 루뱅가톨릭대학(1951~1955)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이어서 프랑스 리옹대학(1955~1959)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59년에 사제로 안수받은 후, 1년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이브 콩가(Yves Congar), 마리-도미니크 세뉘(Marie-Dominique Chenu), 크리스티앙 뒤코크(Christian Ducoq) 등, 당대의 저명하고 개혁 지향적인 가톨릭 학자들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또한 이들로부터 도미니코회, 그리고 예수회 사상을 배웠고, 에드바르트 스힐러벡스(Edward Schillebeeckx), 카를 라너, 한스 큉, 요한 밥티스트 메츠 같은, 가톨릭 전통 신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상을 전개한 혁신적 대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유학하던 시절의 유럽 교회는 당대 세상에 문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시기였으므로, 이 분위기도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카를 바르트 같은 개신교 신학자나 프랑수아 페로(François Perroux) 같은 사회과학자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콩가, 세뉘, 스힐러벡스 등이 모두 도미니코수도회 소속이었던 데다가, 그의 해방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쳐 그가 전기를 쓰기도 한 16세기 선교 수도사 라스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84~1566)의 소속 수도회였던 점 덕에, 구티에레스 역시 1998년 도미니코회에 가입했다.
1960년에 귀국한 구티에레스는 리마 교황청 가톨릭대학(Pontifical Catholic University of Peru)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는 동시에, 리마 빈민 구역인 리막(Rimac)에서 사목 활동을 하면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 눈을 떴다. 이 시기에 체 게바라나 카미요 토레스 같은 혁명가들과도 교제했다. 이후 그는 현실을 반영한 학문의 틀을 짜기 시작했다. 이 현실, 상황, 경험이 바로 해방신학의 근거와 기초, 추진력이었다. 특히 1974년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라스카사스연구소(Instituto Bartolomé de las Casas)를 설립했다. 이후 북미와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방문교수로 활동했다. 현재는 미국 인디애나주 소재 성십자회 대학인 노터데임대학에서 존 오하라 추기경 석좌교수직을 맡고 있다. 1993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la Légion d’honneur)을 받는 등, 여러 국가와 기관에서 권위 있는 상을 많이 받았다.4)
2016년 9월 27일 도미니칸대학교에서 열린 심포지엄. 단상에서 발언하는 구티에레스. 사진 출처 플리커 |
구티에레스가 눈뜬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은 이 대륙의 비극적인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유럽인 도착 이전 라틴아메리카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가진 여러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특히 이 지역에는 정치조직, 종교 문화, 경제활동 등에서 상당한 고유성과 탁월성을 지닌 아즈텍, 잉카, 마야문명 같은 고도로 발전된 국가조직도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후 1492년에 콜럼버스가 도착하면서, 이 지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는 유럽 해양 제국에 정복되어 착취·추방·학살당하는 운명으로 전락했다. 정치와 종교 간 구별이 분명치 않은 기독교 세계(Christendom)가 지배하던 시기였기에, 두 제국이 보낸 함선 대부분에는 군인과 선원, 관리, 상인과 함께 가톨릭 선교사들이 타고 있었다. 따라서 군인이 군사적으로 정복한 곳에, 관리의 정치적 통치가 뒤따랐고, 이어서 상인들에 의한 경제적 착취와 함께, 사제들의 '강제' 개종 활동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한데 뒤섞여 있었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으며, 라틴아메리카 원주민 및 대륙의 생태 자체를 전복하는 총체적 변혁을 가져왔다.
라틴아메리카에 도착한 유럽인의 군대는 숫자는 미미했으나, 발전된 무기, 특히 근대식 대포, 중무장한 기사, 군용견 등을 동원하여 활과 창, 독침, 주술 등을 사용한 원주민을 쉽사리 정복했다. 그러나 원주민의 패배와 멸절에 특히 기여한 것은 생화학 무기였다. 즉, 실제 생화학 무기를 유럽인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몸에 지니고 온 세균과 바이러스가 오히려 치명적인 무기가 되었다. 이미 유럽에서 홍역을 앓고 나서 면역력을 지닌 유럽인과는 달리, 홍역은 이 병에 한 번도 노출되어 본 적이 없는 원주민의 몰살을 불러왔다. 이외에도 돼지인플루엔자, 천연두, 결핵, 디프테리아, 독감, 페스트 등이 사람과 가축에 엄청난 피해를 끼쳤다. 통계가 저마다 달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5) 유럽인이 라틴아메리카에 도착한 후 채 100년이 되기도 전에, 원주민 전 인구의 약 절반 이상이 질병·전투·학살 등으로 사망했다. 따라서 이 시기 라틴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이 당한 경험은 역사상 최대의 대학살(genocide)이라 칭할 만하다.
또한 금, 은, 설탕, 커피, 면화, 담배에 대한 욕망으로 수많은 광산이 개발되고, 거대 플랜테이션 농장들이 들어서면서, 원주민과 아프리카 흑인의 노예화도 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에 부를 쌓는 식민지 귀족 계층이 탄생했다. 19세기에 라틴아메리카 여러 식민지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대항하여 독립 투쟁을 전개하면서, 오늘날 지도에 그려진 라틴아메리카의 독립국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들 신생 독립국들의 진정한 독립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았다. 유럽에 대한 종속에서 해방된 이들은 20세기 이후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으면서, 점차 미국에 종속되기 시작했다.
특히 1950년대 이후 산업화 시대에 미국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지원에 의존하고, 이전 시대 식민지 귀족층의 후예라 할 만한 부패한 권력층이 국가가 소유한 부를 거의 독점하면서, 실제 민중의 극단적 가난, 양극화, 뇌물과 부패, 결탁 등으로 인한 부패, 군사독재 정부와 종교계, 폭력 조직과의 결탁, 인구의 도시 집중과 슬럼화, 일상적 살인과 폭력 등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었다. 구티에레스와 해방신학이 등장하기도 전에 하버드대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Arthur Schlesinger, 1888~1965)는 "지금 이곳 라틴아메리카 인구수는 미국보다 1/8이 더 많다. 그러나 미국 국민총생산의 1/8 수준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국민의 5%가 국가 총수입의 1/3을 차지하는 반면, 70%는 극빈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 배후에 있는 정부들은 이와 같은 체제를 계속 유지하지 위해 정치적·사회적 구조들을 조직화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6) 이것이 20세기 중반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이었다.
2013년 당시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홈페이지 갈무리 |
2. 라스카사스 |
라틴아메리카 비극적 현실의 또 다른 측면은 정치적·경제적 부패와 인종차별, 학살의 역사가 종교, 특히 가톨릭의 전파 및 지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리상의 대발견' 이후 두 나라, 특히 스페인의 신대륙 종교 정책은 중세 시대에 확립된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스페인 영토 내에서 무슬림 무어인(Moor)7)을 몰아내는 일종의 십자군 운동인 레콩키스타(재정복, Reconquista)를 1492년에 완수한 스페인 가톨릭 신자들은 그들이 스페인에서 사용했던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교화 방법을 신대륙 원주민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스페인 내에서 카나리아제도와 그라나다를 스페인 기독교인이 무슬림에게서 탈환했을 때 교황은 이들이 정복한 지역의 교회를 총괄할 수 있는 권한을 왕실에 하사했다. 이를 국왕의 교회 보호권(patronate real)이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신대륙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이로써 왕이 신대륙의 주교와 고위 성직자를 임명하고 재정을 독립적으로 관리하게 되어, 식민지 교회는 스페인 국가(민족)교회가 되었다. 따라서 스페인 국가의 이익과 교회의 이익이 하나로 통합되었고, 이 과정에서 스페인군과 민간인이 자행하는 현지인과 환경에 대한 착취·파괴·말살 등의 악행도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곤 했다.8)
1492년 이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시행한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착취형 선교에는 이면도 있었다. 성경에 기반하고, 선교사의 모델인 사도 바울이 구현한 참선교를 실천하기 위해, 피선교지 사람들과 같은 수준으로 가난하고 단순하게 살면서 동일시(identification)의 모범을 이루려 노력한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수도사들의 헌신도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이가 원주민의 눈으로 식민지 정책을 판단하면서, 유럽 정착민의 원주민 착취에 대항하여 원주민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영화 '미션'에 나오는 예수회 신부 가브리엘이 보여 준 것이 바로 이런 이들의 선교 전형이었다.
특히 18세기에 유럽에서 예수회가 스페인과 다른 나라 지도자들에게서, 후에는 결국 교황에게까지 핍박을 받고 한때 해산되는 고초를 당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원주민 권리를 격렬할 정도로 옹호했기 때문이었다. 즉, 중남미 가톨릭 선교 패러다임에는 이런 극적인 대칭 구조가 있었다. 상부에는 지배 계층, 교구 주교나 재속 성직자, 스페인 정착민의 이익을 위해 일한 일부 수도자가 있었고, 하부에는 이를 비판하고 스스로 멸시의 대상이 되어 원주민과 함께 길을 걸어간 진실한 선교사가 있었다. 이런 교회의 양면성은 오늘날까지 중남미 가톨릭교회의 특징으로 이어졌다.
영화 '미션'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원주민들 사이에서 오보에를 부는 가브리엘 신부. 영화 '미션' 스틸컷 |
스페인령 중남미 선교 역사에서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들 중 특히 언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선교사로,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Bartoleme de las Casas, c.1484~1566)라는 인물이 있었다. 라스카사스는 원래 1501년부터 오늘날의 도미니카공화국에 해당하는 산토도밍고에 정착하여 사목하는 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그는 원주민 착취에 대해 별 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이 없었다. 그런데 1511년에 도미니코회 수도사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Antonio de Montesinos, c.1475~1545)가 산토도밍고에서 행한 설교를 들고 번민하다가 1514년에 일종의 마음의 회심을 경험했다. 몬테시노스는 스페인 정착민들이 그들의 악행 때문에 무어인이나 터키인처럼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설교했다. 그러자 그를 지지한 동료 도미니코회 수도사들과 지방 관리 사이에 심각한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원래 라스카사스는 원주민 보호를 조건으로 왕에게서 위탁받은 토지와 사람 사용권 '엔코미엔다'(encomienda)를 활용하여 반노예나 마찬가지인 원주민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하에서 원주민 보호는 허울 좋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 권리는 원주민 보호가 아니라 원주민을 착취하여 자신의 이익을 노리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라스카사스는 1514년 오순절에 자기 소유의 엔코미엔다를 포기하고 기독교 신앙은 원주민 착취와 공존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후 몬테시노스의 활동에 합류한 그는 스페인으로 수차례 건너가 이 제도의 악행을 고발하고 조치를 탄원했다. 그러나 어렵게 스페인 본국에서 엔코미엔다를 교정하려 시도해도, 식민지 현지 백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후 라스카사스는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등지에서 비슷한 원주민 인권 활동을 벌이다 남부 멕시코 치아파스의 주교로 임명된 후에도 개혁 활동을 계속 이어 갔다. 그러나 결국 엔코미엔다를 소유한 정착민들과의 갈등을 이겨 내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남은 39년 생애 동안 글과 연설을 통해 제도 개선을 시도하다가 1566년에 92세로 사망했다. 불행히도 라스카사스의 책은 1552년에 페루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17세기 중반에는 그가 쓴 여러 책이 종교재판소가 규정한 금서 목록에 포함되는 비극을 겪었다.9)
이미 언급했듯, 구티에레스는 1960년에 귀국한 후 교수와 사목 생활을 병행하면서 1974년에 라스카사스연구소를 설립했다. 이어서 1992년에는 <라스카사스: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 En busca de los pobres de Jesucristo: El pensamiento de Bartolomé de las Casas>(Lima: CEP, 1992)라는 전기를 출간했다. 구티에레스가 라스카사스를 자신이 지향한 해방신학의 정신을 구현한 모델임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3. 해방신학 |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구체적 역사적 현실, 그리고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모델로서의 라스카사스와 함께, 해방신학 탄생에 기여한 주요 요소들은 가톨릭교회에서 열린 두 차례 회의였다. 하나는 전 세계 가톨릭 전체를 대변하는 모임으로, 교황 요한 23세의 주도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Vatican II), 다른 하나는 1968년에 콜롬비아 메데인(Medellin)에서 열린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II)였다. 두 회의와 이들이 발행한 문서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회구조의 변혁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를 부여하여 해방신학의 탄생에 산파 역할을 했다. 전자가 주로 일반론적인 측면에서 교회가 쇄신하고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선언적 명제를 기술하면서 문을 열었다면, 후자는 더 구체적인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그 쇄신 방향을 구체적으로 서술했기에 해방신학의 진정한 시원으로 간주된다.10)
광주 가톨릭대 김정용 교수는 CELAM II(간단히 '메데인'이라 쓰기도 한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메데인 회의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전면적인 해방, 온갖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인격적 성숙, 집단적 통합을 바라는 열망으로 가득 찬 새로운 역사적 시점에 들어 서 있다고 진단하면서(메데인 문헌: 서문 4항) 남미의 상황을 '제도화된 폭력이라고 부를 불의의 상황'(메데인 문헌: 평화, 16항)으로 규정한다. 특히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불평등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주님이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거부한다. 그런 곳에서는 주님 자신조차도 거부된다"(메데인 문헌: 평화, 14항)고 천명하였다. 아울러 메데인 회의는 인간을 온갖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빛 속에서(메데인 문헌: 정의, 3-5항 참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메데인 문헌: 교회의 가난, 9-11항 참조)를 강조하고 교회의 현실 참여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11)
해방신학의 주창자는 여럿이다. 그중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브라질의 레오나르두 보프, 휴고 아스만, 멕시코의 호세 미란다, 우루과이의 후안 루이스 세군도, 스페인 출신으로 엘살바도르에서 활동한 혼 소브리도 등이 유명하다. 해방신학이 가톨릭 배경에서 출현했기 때문에, 대부분 가톨릭이지만 예외도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 호세 미구에스 보니노는 개신교 중에서도 감리교 소속이었다. 미국 퍼시픽종교학대학원에서 오래 가르친 로버트 매카피 브라운은 라틴아메리카 배경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이 신학을 가장 든든하게 옹호한 주창자 중 하나였다. 이렇게 주창자들 배경이 다양하기 때문에, 주장하는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12) 그러나 대체로 공유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13)
도미니칸대학교에서 강연하고 있는 구티에레스. 사진 출처 플리커 |
1) 신학은 반드시 상황적이어야 한다. 전통적인 유럽신학은 교회의 학문이자, 교리 체계를 형성하기 위한 학문이자, '위로부터의'(from above) 학문이다. 소위 이런 보편적, 절대주의, 이론신학은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상황에 부적합하다. 이와는 달리, 상황신학은 언제나 특정하고 구체적인 사회 문화적 환경에 깊이 연관을 맺어야 하고, 거기서 출발해야 하므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시작된 해방신학은 그 대륙의 현실과 경험을 반드시 취급해야만 한다.
2)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구체적인 삶의 정황은 극단적인 빈곤과 양극화다. 다른 모든 대륙에도 빈곤은 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가난은 북미나 유럽과는 달리, 외적 요인으로 부과된 빈곤이다. 즉, 이 가난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거주민 대다수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희생해 가면서까지 소수에게 권력과 부를 몰아주는 사회구조가 만들어 낸 결과다. 특히 유럽과 북미 국가들과 일부 다국적 기업이 라틴아메리카 각국 정부와 결탁하여 만들어 낸 '종속' 경제가 이런 고통을 극대화한다. 또한 이런 사회구조는 정부와 일부 재벌 기업만의 책임이 아니다.
이 대륙 국가 모두에서 국교이거나 주요 세력인 가톨릭교회는 체제의 질서를 지지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럴 교회이므로, 교회는 사회정치 문제에서 중립적이라는 스스로의 주장과는 달리, 언제나 압제자를 편들었다. 따라서 국제 자본주의와 세계화에 함몰된 정부와 기업과 교회가 이 비참한 현실의 원인제공자이자 결탁자다.
3)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을 편애하시며, 우선 선택하신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보편적으로, 예외 없이, 우주적으로, 차별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이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학의 가르침이었다. 창세 이전에 창조주의 뜻에 따라 상황이나 조건과 관계없이 구원받기로 선택된 이들이 있다는 구원 예정론을 가르치는 전통이 있기는 했으나, 이들도 하나님의 사랑이 편파적이거나 조건적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하나님의 사랑에 조건이 있고, 하나님은 편파적으로 편애하는 분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편파적인 사랑은 가난한 자들을 향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이 도덕이나 행위에서 다른 이들보다 낫다는 것이 조건은 아니다. 구티에레스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자들이 선취권을 갖는 것이 마땅한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더 낫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좁은 의미의 정의에 대한 이해와 상충한다. 그러므로 바로 이런 선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14) 1968년의 메데인 회의를 재평가하기 위해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1979년에 모인 제3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III)는 이 명제를 더욱 확고하게 지지했다.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명백하고 예언자적인, 우선적이고 연대적인 선택을 나타낸 제2차 주교회의의 생각을 다시 수용한다. (중략)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포괄적 해방을 직시하면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할 전체 교회의 회개의 필요성을 확증한다. (중략)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동반하고 섬기기 위해 그들에게 가까이 갈 때, 우리는 우리처럼 가난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제가 됨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친 바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는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일에 유일한 요소는 아니지만 우선적 요소이다. (중략)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개입과 바닥 공동체의 생성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 속에 있는 복음화의 잠재력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들은 교회의 회개를 외침으로써 항상 교회를 질문의 대상으로 세우기 때문이다."15)
4) 신학은 프락시스(praxis, 실천)에 대한 성찰에 따르는 이차적 행위다. 다른 말로, 해방신학은 바른 이론, 즉 정통 교리(orthodox)를 추구하지 않고, 바른 실천, 즉 정통 실천(orthopraxis)를 추구한다. 이 정통 실천이 신학의 기준이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위한 바른 실천과 헌신에서 신학이 시작해야 한다. 이는 전통 신학의 순서, 즉 바른 이론에서 바른 실천이 나온다는 고전신학의 방법론을 완전히 뒤집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과도 같다.
5) 구원은 곧 해방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생명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다. 생명의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이들에게도 생명을 주시고자 한다. 그런데 사랑하시는 이들이 고난과 압제 중에 있으므로, 결국 사랑이신 생명의 하나님은 해방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런 해방신학의 주장이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구티에레스가 유럽에서 공부할 때 배운 요한 밥티스트 메츠 등 유럽 정치신학자들의 주장이 해방신학의 방법론에 차용되었다.
또한 해방신학은 기독교적 실천을 보조하는 이론적 토대로 마르크스주의도 주저 없이 차용한다. 특히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특수 현실을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는 토대로 마르크스주의 사회 분석을 활용했다. 자본주의에 반대한 이들은 사회주의 자체가 하나님나라는 아닐지라도, 이 체제가 현실 사회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경제체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를 활용하는 것과, 초대교회 당시 교부들이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플라톤 등의 그리스 철학자를 활용하고,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믿었다.
따라서 구원은 천국을 보장받는 행위가 아니라, 육적이고 사회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사회변혁, 이웃을 위한 삶으로의 회심을 포괄하는 총체적 해방이다. 그렇다면 이런 총체적인 해방과 정의를 위한 노력에 폭력도 수단이 될 수 있는가. 구티에레스와 보니노 등 대표 해방신학자들은 폭력을 이상화하지도, 우선 수단으로 제시하지도 않는다. 무장투쟁보다는 비폭력 저항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으로 폭력이 사용되어야 하는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면, 이를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해방신학이 탄생하기 전에, 원래 신부이자 콜롬비아국립대 교수였다가 교수직을 포기하고 무산계급을 위한 게릴라 혁명전에 참여하여 영웅이 된 콜롬비아인 카미요 토레스(Camilo Torres Restrepo, 1929~1966)16)가 이런 인식의 선구자였다.
구티에레스가 2013년 페루 리마 교황청 가톨릭대학에서 세계은행그룹 김용 총재와 대화하고 있다. 사진 출처 플리커 |
구티에레스를 비롯한 해방신학자들의 이런 주장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해방신학의 주장을 독특한 기여로 인정한 이들도 있었고, 가혹하게 비판한 이들도 있었다. 기여로 인식될 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17) 첫째, 신자와 그들이 처한 현실의 구체성에 대한 관심이 없는 신학은 불완전하다. 둘째,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을 상기하여, 교회가 이 문제에 다시 천착하게 했다. 셋째, 구원이 영적이거나 교회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육, 지정의를 포괄하는 전인적인 것이며, 교회와 사회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해방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넷째, 신학이 단순히 바른 이론으로만 존재해서는 안 되며, 삶의 구체적이고 어두운 현실을 바꾸는 바른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신학은 다음과 같은 비판18)도 받았다. 첫째, 우선 가톨릭교회에서 내린 공식 비판이 있었다. 1984년 9월에 바티칸 신앙교리성에서는 '자유의 전갈: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대한 훈령'19)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해방신학은 예언서와 복음서에 의존해서 빈자를 옹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성서 속의 가난한 자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를 혼동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재난이다"라고 비판했다. 이 문서는 당시 교리성 수장이던 보수주의자 요제프 라칭어(Joseph Razinger)가 작성한 것으로, 라칭어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재직하게 되는 인물이다. 이듬해에는 브라질 해방신학자 보프에게 1년간 함구령을 내리기도 했다. 구티에레스에 대한 조사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함구령을 내리거나 정죄를 하지는 않았다. 1986년 4월에 나온 두 번째 교시 '자유의 자각: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20)에서는 해방신학의 일부 요소에 대해 이전에 했던 비판을 반복하기는 했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곧 메시야적 하나님 백성으로 환원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을 통한 인간의 자기 구원으로 환원되고, 하나님나라는 계급투쟁의 성공을 이룬 공산사회가 되며, 신앙은 역사에 대한 신실함으로 대체된다. 2년 전 교시보다는 발언 강도가 유화적이고 온건하기는 했지만, 해방신학의 내재주의 성향을 비판한 것은 같았다.21)
둘째, 다른 보수주의 진영, 혹은 개신교의 비판도 신앙교리성의 판단과 맥이 크게 다르지 않다. 즉, 해방신학이 당연시하는 이원론적 이분법 구도가 과연 늘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라틴아메리카 사람은 모두 빈자와 부자로 선명하게 구별되는가? 라틴아메리카의 빈곤의 원인이 전적으로 북반구 정부와 기업의 착취에서만 온 것인가? 외부인이 모든 죄를 덮어쓰고, 내부자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경제정책 실패, 라틴아메리카인의 관습과 삶에 대한 태도 등에서 비롯된 것은 없는가?
셋째, 라칭어의 비판과 유사하게, 많은 비판자들은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 담론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판단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적 세계관과 인간관이 기독교 세계관의 인간에 대한 인식, 예컨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가치 대신에, 물질과 환경으로 결정되는 인간관을 주창한다는 비판이다. 마지막으로, 해방신학이 주장하는 바른 실천, 즉 프락시스의 타당성에 대한 물음이다. 예컨대, 해방신학에 동정적인 영국 선교학자 앤드루 커크 또한 바른 실천(orthopraxis)의 우선성이 타당한지 질문한다. 즉, 바른 실천이라는 용어가 성립하려면, 어떤 실천이 바른지에 대한 이론적 성찰이 전제되어야 할 텐데, 바른 실천 다음에야 바른 이론이 따라 나온다면 바른 실천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것이다. 결국 커크는 이론적 근거, 즉 기독교인의 지침으로서의 성경 계시에 대한 확고한 해석학적 지침이 전제되지 않는 바른 실천은 모호하다고 비판한다.22)
4. 민중신학 |
구티에레스와 그 동료들의 해방신학에 한국교회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역시, 우선 한국천주교의 공식 반응부터 살펴보자. 한국천주교주교회는 1984년 10월에 '해방신학 경계 성명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해방신학'이라는 이름에 편승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경계하여야 한다. 성서와 교의를 순전히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과 마르크스의 무산자들을 혼동하며, 폭력적인 계급투쟁으로써 진정한 개혁을 지체시키는 것은 교회의 정통 신앙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정신적인 파멸 위에 새로운 빈곤과 예속을 가져올 뿐이다"라며 해방신학을 비판했다.23) 그런데 이 내용은 사실상 같은 해에 발표된 교황청 교리성 문서와 차이가 거의 없다. 말하자면, 해방신학에 대한 당시 한국천주교 내부 입장은 교황청의 공식 입장에 순명하는 것이었다.24)
따라서 같은 이유로,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던 천주교인은 1970년대 말부터 활동하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민주화와 인권 투쟁에 앞장 선 사제들을 해방신학에 오염된 이들도 정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신학에 우호적인 라틴아메리카 출신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시보리(Jorge Mario Bergoglio Sívori) 추기경이 2013년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해방신학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이 되살아났다. 1984년 성명서와 같은 부정적인 평가가 더 이상 한국천주교회의 대세는 아님을 뜻한다.25)
2014년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종과 만나 악수하는 구티에레스. 바티칸뉴스 갈무리 |
개신교에서는 주로 진보를 대변하는 기독교장로회의 민중신학이 해방신학으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한국만의 독특한 정치문화, 신앙 환경에서 태동한 민중신학이 라틴아메리카 배경에서 탄생한 해방신학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민중신학을 한국판 해방신학이라 부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으며, 1960~1970년대 상황화신학의 세계적인 확장 및 유통 과정과 맞닿아 있다.
실제로, 한국 민중신학은 1975년 4월호 <기독교사상>에 서남동이 '민중의 신학에 관하여'를 기고하면서 독립된 신학 담론으로 등장했다. 서남동은 "대국적으로 보아 내 신학의 변화는 서구 신학의 흐름을 따른 셈입니다. (중략) 그러다가 우리 현실의 문제에 눈을 뜨게 되면서 해방신학에 종사하게 되었고, 그 과제를 한국적 상황에서 문제시하여 이제는 '민중신학'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라며, 스스로 해방신학이 한국적 상황을 문제시하는 민중신학의 기원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민중의 개념이 해방신학의 프롤레타리아보다 한층 더 포괄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단순히 무산 노동자 계층만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을 포함한 모든 서민 대중이 민중(ochlos)이라는 것이다.26)
그러나 유럽에서 더 이른 시기부터 등장한 정치신학의 영향하에, 1960~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와 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현실, 경험에서 등장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세계의 신학의 일부로서 상호 공명하는 신학적 대화와 실천적 연대의 파트너였다. 해방신학은 또한 흑인신학, 여성신학, 아시아신학, 생태신학 등 이후에 등장하는 다양한 급진 신학의 모판이자 수원이기도 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급진적 바른 실천(orthopraxis)을 요청하는 이런 종류의 다양한 전 세계 상황신학을 대변하는 선구적 대표자였다.
주 1) 마크 A. 놀, 『복음주의와 세계 기독교의 형성』, 박세혁 역, 이재근 해설 (서울: IVP, 2015),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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