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김씨의 뿌리
1. 영광김씨(靈光金氏)
시조는 김심언 시호 문안공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은설의 손자로써
고려성종 목종 현종조의 세 왕을 모신 명신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오성군 현 영광군에 봉해졌으므로 본관(本貫)을 영광김씨라 하였다.
시조 심언께서는 육정(六正), 육사(六邪)를 만들어 왕에게 건의하니
왕이 검토해 보고 그렇게 하도록 관리들의 복무지침으로 실천하도록 하였다.
즉, 육정(六正)이라 함은 임금님이 올바르게 국정을 수행하도록 여섯가지 군주를
모시는 지침을 말한다.
2. 시조
심언 1세, 윤보 2세, 행경 3세, 수영 4세, 국검 5세, 영부 6세, 보당/지당 7세
심언 시조로부터 개성에 살면서 7세 보당 선조까지 대체로 당상관(3급 이상)
평장사까지의 고관대작을 계속 배출됨으로 그 후손들의 세거지를 평장동이라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던 중 1170년 의종 24년 정중부가 난을 일으켜 의종왕을 거제도로 귀향
보내 축출하고 무신정권 다시 말하자면 군사정권을 세우고 문신들을 살육하자
당시 동북면 병마사로 계시던 심언의 7세 손 보당 할아버지가 거제도에
귀향 보낸 의종왕을 경주까지 모시고 와서 경주에 두고 의병을 일으켜
군사정권을 토벌할려고 하였으나,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당하고 평장동에 살고 있던 영광김씨 일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여 성을
숨기고 전국 각지로 훝어져 숨어 살다가 100여년 후에야 겨우 회복하게 되니
중간역사가 100여년간 실전되었다.
그래서 장흥파는 문경공 태용을 1세를 중시조로 경파는 별장, 정부를 1세를
중시조로, 영광파는 판서공 행 1세를 중시조로, 고창파는 문열공 사경 1세를
중시조로 모시며, 양사파는 문충공 광찬을 1세를 중시조로 강계파는 보광을
1세로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이렇게 중간 역사실전으로 김심언 시조를 1세로 못하고 중시조를 1세로 하는
이유가 100여년간 역사 단절의 탓인 것이다.
장흥파 중시조 태용과 시 선조는 파주에 묘소가 있어 매년 한식인 양 4월 6일에
시제를 모시고 있고, 경인은 강진군에 묘가 모셔 있으며, 경의와 찬 선조는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 평강에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시제를 지낸다.
용반리 선산을 평강이라 함은 경의 할아버지가 평강 현감을 지냈기 때문에
벼슬 이름을 따서 평강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3. 필(1426-1470)
자는 화보요. 호는 설암이며 아버지는 경의요 찬은 형님이사다.
1447년 세종대에 22세때 사마시에 응시하여 진사 1동, 생원 2동으로 합격
하였고, 또 그 해에 대과인 문과에도 급재하여 백패와 홍패를 받았다.
백패는 소과에 합격하면 받는 것이고, 홍패는 대과에 합격하면 받는 것이다.
공은 부산면 내안리 안곡에 묘소가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15일에 필-괴-
광원-귀년-율-여숙의 시재를 모시고 있다.
공께서는 27세때 세종실록 편찬을 위해 실록청이 설치되었는데 기사관으로
근무하실때 맨 우두머리인 영관사는 의정부 좌의정 정인지이고, 그 다음
지관사에 이조판서 정찬손이며 동지관사에 이조참판 최항 편수관에 집현전
부재학 박평년과 집현전 부재학 하위지와 사간원 좌사관에 성삼문이고,
기주관에는 집현전 직재학 신숙주와 집현전 직재학 이석형 및 집현전
지제 유성원 등 우리 역사에 유명한 분들이 공의 직속 상관으로 세종실록
편찬위원회 명단의 앞줄에 적혀 있다.
그 중에서 박평년 하위지 성상문 유성원은 나중에 세조 2년 1455년 6월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죽음을 당하는 사육신중의 내사람으로서
공의 낙남의 동기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니라 생각되며 공께서는 불과
27세의 젊은 연세에 오직 당신의 영민함으로 이처럼 큰 인물들을 모시고
벼술살이를 하신 실로 앞길이 양양한 큰 인물이였다.
이때에 영광김씨 장흥파 전부가 큰집 작은집 세 집뿐이었다.
공께서도 단종 패위에 불복하고 피신하게 되면 가족들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니 큰아버지 경인 아버지 경의 형님 찬을 모시고 최남단인 장흥군 부산면
내동에 거처를 정하고 경치좋은 장흥읍 송암리 설암 바위 밑에 정각을
짓고 그 당시 벼슬이름을 따서 사인정이라 하고 그 정각에서 간간히 김시습
선생의 방문을 받으며 시국한탄을 하면서 시를 읆으며 세월을 보내면서
부산 여인보를 축조했는데 데리고 내려온 두 사람의 종인 주지와 광대를
책임자로 하여 보를 막고 그 공을 치하해서 주지와 광대에게 물이 좋은
논을 주었는데 5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논을 주지논 주지시함(연못
또는 둔벙)이라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방축 동네앞에 있다.
그러던 중 세조 임금께서 여러 차례 복귀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권유에 못익혀 할 수 없이 벼슬길로 복귀하였다. 여러 요직을 거쳐
경상감사와 경기감사, 충청감사를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45세의
아쉬운 연세로 병사하였다.
좀 더 오래 계셨으면 정승까지도 바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공께서 세조 임금님의 부름을 끝까지 거절하고 지조를 지켰으면 사유신
또는 생육신에 들어갈 수도 모르는 일이였다.
* 출처: 영광김씨의 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