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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과 대화하는 고갯마루를 찾아서(星摩嶺)
성마령에 있는 신비한 묘소를 참배하기 위하여 2019년 11월 08일 금요일 09시경 적십자회관 앞에서 전선집 강릉회장님과 전남표 기자님을 만났습니다.
움푹 파인 구덩이에 위치한 묘소의 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오륜은 고려시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가 조선시대가 들어섬에 따라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새로운 왕조에 협조하지 않았으므로, 관향(貫鄕)인 정선에 가서 한양으로 출입하지 말라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本鄕安置)
그래서 연로하신 할아버지를 모시고 정선의 새로운 안거지(安居地)를 찾아 정선군 용탄면 행마동 성마령을 넘게 되었습니다. 그때 고려시대 예문각 대제학과 문화시중 평장사를 역임하였던 할아버지(全遇和)가 노환으로 병이 깊어져서 임시로 초막을 짓고 머물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극진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부인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시장을 보러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거의 아사(餓死) 직전의 노스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상중(喪中)이라 그냥 지나치려다가 사람의 생명을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여 자신의 젓을 짜서 종기에 담아 스님께 공양하였습니다.
기력을 차린 노스님은 고마운 마음에서 묏자리를 점지(占地) 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800m 정도를 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삼거리 위쪽 큰 소나무가 있는데 소나무 앞 15m지점에 묘를 쓰면 대대로 백성의 존경을 받는 공직자와 학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여 주었습니다. 다만 몇 가지 주의점할 점을 덧붙여 알려주었습니다.
우선 땅을 파다가 바위가 나올 것이니 그 바위를 치우지 말고 그 위에 관(棺)을 올려놓고 묘(墓)를 써야 하고, 시간적으로 조금 늦추어 안장하되 내가 성마령을 다 넘을 정도가 되거든 하관(下棺)을 하라고 신신당부(申申當付)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족들의 소통부족과 노스님의 예언을 믿지 않고 지관을 더 믿어서 바위를 일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큰 이변(異變)이 생겼습니다. 그 밑에서 살던 왕벌 3마리가 날아가고, 그중 한 마리는는 성마령 고갯길을 거의 다 넘었던 노스님한테 달려가 쏘아서 즉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묘소자리가 쿵하는 큰 소리가 나면서 땅이 내려앉게 되었습니다.』
전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려사(高麗史)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 전보문(全普門)은 판도판서, 판삼사사를 역임하고, 전오륜(全五倫)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습니다. 지금의 장관을 두 명이나 배출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全씨는 60명의 문과 급제자가 배출하었으며, 그 중 채미헌파에서는 전효우(사헌부 감찰), 전순인(군자감정), 전방경(용궁현감)이 문과 급제하였으나 장관급에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노스님이 이야기한 대로 실천하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정말로 예언대로 백성들의 존경받는 공직자와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을까?
사헌부 감찰, 군자감정, 용궁현감보다 더 현달하여 장관급에 승진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상상을 하면서 자동차 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2019년 11월 04일에 평산부사 전공간公 묘소를 찾기 위해서 오봉리를 찾았던 후일담(後日譚)으로 후손이 끊긴 사연이 있음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평산 부사公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의 에피소드(episode)입니다.
『지관(地官) 김승(金昇)이 지금의 장소를 점지(占地)하였는데, 지관 최윤(崔胤)은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실제로 장례식 진행 중에 목표지점 바로 20m전에 이르렀을 때 지관 최윤(崔胤)은 여기에 묘소를 써야하고 지관 김승(金昇)이 점지한 곳에 묘소를 쓰면 후손(後孫)이 끊긴다고 울면서 호소하였습니다.』
결과론이지만 지관 최윤(崔胤)의 주장을 수용하였으면, 지금처럼 후손(後孫)이 없어 외손봉사(外孫奉祀)를 받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도 해 보았습니다. ‘한 번의 선택이 10년이 좌우 한다.’라는 광고를 본 적이 있는데, 묘소의 장소 선택은 500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문중 묘소는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에 있는데, 왕산면 한자 표기에 대한 의견 교환을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왕성할 ‘旺’이라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분은 임금 ‘王’을 써서 “王山”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강릉시 왕산면사무소에 문의한 결과 일제의 잔재로 “旺山”으로 표기되었는데 원래 의미대로 “王山面”으로 개정하고 공고하였으므로 이제는 임금 ‘王’字를 써야 한다는 유권해석을 받았습니다.
젊은 시절 한 3년 동안 살았던 임계를 지나면서 회상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정선 임계 시절 어느 날, 시장 안 큰 신배나무가 있는 집에 살았는데 아내가 주인집에 잠깐 들어오라 해서 들어가 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동네 사람들 사주(四柱)를 보아 주고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사주를 보게 되었는데, 금년 9월에 강릉으로 이사가 예정되어 있고, 앞으로는 틀림없이 교육장이 될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이 실천 안 되면 송아지 한 마리를 저에게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 해 9월에 강릉으로 이사 가게 되었으나, 그 후 은퇴할 때까지 교육장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가끔은 아내와 임계 할아버지한테 송아지 받으러 가야 한다는 농담을 하곤 합니다.
그밖에도 몇 분의 저에 대한 예언을 더 이야기하면서 정선군 여량면에 접어들었습니다.
다리가 없어서 아우라지를 버스가 배를 타고 건넜던 기억을 되살아났고, 그 때 보다 획기적으로 변화한 여량 우회도로를 지나갔습니다.
여량을 지나면서 1978년 무렵 젊은 시절 2년을 보낸 구절리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동행한 분들이 향교 장의(掌議) 출신 유림(儒林)이므로 자연히 구절리 노추산 이성대(二聖臺)와 얽힌 노추산 산신령님과 밀당을 하였던 일화를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노추산(魯鄒山)은 공자님의 노(魯)나라와 맹자님의 추(鄒)나라에서 연유된 지명이므로 유림(儒林)과 관계가 깊습니다. 노추산과 이웃한 산이 4명의 달사(達士)를 배출할 장소라는 의미로 사달산(四達山)입니다.
4자리에서 이미 두 명(신라시대 설총, 조선시대 이율곡)은 충원되었고, 두 명의 빈자리가 있다는 전설을 듣고 지도에 의지하여 남자 3명이 정선 구절리 방향이 아닌 강릉 왕산 대기 방향으로 1차 원정을 가게 되었습니다. 산촌이라서 물어볼 사람이 별로 없어 지도상의 사달산(四達山)이라고 추측한 곳으로 등산하게 되었는데, 산의 2/3쯤을 올라갔는데 이곳이 사달산(四達山)이라는 확신도 없고 비가 와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노추산(魯鄒山)을 찾긴 제대로 찾았는데, 비로 인해 실패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영험한 산은 산이 허락하지 않으면 입산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노추산(魯鄒山) 산신령이 입산(入山)을 불허(不許)한 것으로 추측해 보았습니다
2차 원정대는 멤버를 바꾸어서 강릉 왕산 대기로 노추산(魯鄒山)을 올라갔었는데, 노추산(魯鄒山) 산신령이 거부하는데도 무리하게 올라갔는지 내려오는 길에 두 팀으로 갈라져서 산을 헤매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일행 두 명이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있어서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출발하였는데, 조금 내려가서 야호! 하니 호응이 있었는데 내려올수록 멀리서 들렸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중간지점에서 다시 올라가서 일행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간 정도에서 못 만나서 다시 베이스캠프로 내려오는데 나와 한 팀인 일행이 갑자기 길이 안 보인다고 하여 멈춰 섰었습니다. 나도 약간은 선뜻하였는데 잠시 정신을 차려 길을 찾았습니다. 나도 길이 안 보였으면 두 팀이 산을 어둡도록 헤맸을 것으로 추측하였습니다. 또 다시 일행을 찾아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하다가 저녁 무렵이 되었습니다.
배도 고프고, 산을 헤매는 사람 중에 내일 직장에 출근해야할 여성도 있어서 신고를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아 고민 속에 있었는데, 저쪽에서 우리가 찾던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너무 반갑고 오늘 하루가 스쳐지나가서 하마터면 울 뻔 했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산이 원뿔처럼 생겼는데 원뿔을 나사처럼 내려가서 딴 곳이 나와서 헤매다가 왕산대기와 정반대 방향 정선구절에서 산판차를 만나 타고 왔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니 노추산(魯鄒山) 산신령이 입산을 불허하였는데 무시하고 들어가서 이렇게 헤매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헤매게 되었는지 원인을 되짚어 보고자 3차 원정대를 다시 꾸며서 강릉을 출발하여 왕산대기 정상을 조금 지나니 갑자기 차가 멈추면서 차가 안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농담인가 하였는데 정말 배터리가 방전되어서 강릉에서 정비소 차량을 불러서 배터리를 충전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차를 정비하고 예정대로 노추산(魯鄒山)으로 가자고 하니 산을 헤맸던 멤버들은 고개를 흔들면서 못가겠다고 하여서 강릉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멤버들은 노추산(魯鄒山) 산신령의 존재를 긴가민가하면서도 약간의 경외감(敬畏感)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노추산(魯鄒山)에 두려움을 느꼈던 멤버를 제외하고 다시 4차 원정대를 꾸며서 이번에는 정선 구절리쪽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구절리쪽에는 안내판이 잘 되어 있어서 산을 헤맬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비가 와서 골짜기 통과하는 길이 보이지 않아서 조금 헤맸습니다. 그날따라 안개가 끼고 약간 경사가 있어서 일행들이 중간에서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설득하여 올라가고 있었는데, 안개사이로 이성대(二聖臺) 처마가 보여서 굉장히 환희하였습니다. 이성대(二聖臺)는 바위가 병풍처럼 에워싸고, 바위에서 물이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어서 신비하게 느껴졌습니다.
설총선생과 율곡선생님의 위패를 모신 이성대(二聖臺)에 도착하니 어떤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반갑게 마중 나왔습니다. 본인은 이성대(二聖臺)에서 기도하면서 머물고 있고, 오늘 아침에 노추산(魯鄒山) 산신령이 아주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걸쳐 올라오는 분이 있으니 극진히 대접하고 하룻밤 주무시게 하라는 현몽을 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입산 불허로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은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신기하기도 했지만, 하루 숙박할 생각은 없어서 그 사람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후일담(後日譚)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 때 그 호의(好意)를 받아들였으면 「지금 굉장한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사람도 주위에 있습니다.
여량에서 정선까지도 옛날에 살던 때와는 전혀 다르고 넓게 도로포장이 되어서 있어서 정선에 도착하여서 주과포를 구입하여서 ‘성마령식당’에 도착하였습니다.
전남표 기자님과 친분이 두터운 정선 전씨 채미헌파 전경석회장님과 ‘성마령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전정석 종인이 마중 나왔습니다.
정선시내에서 용탄면 성마령까지는 전경석 회장이 안내하였습니다. 차안에서 족보 수단 작업에 대한 의견도 교환하고, 옛날 인연 있던 ‘전위’선생님의 가족들의 근황도 들었습니다. 그의 가족 중에 “전주수”는 춘천시장 후보로 나선 적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꾸불꾸불한 1차선 도로에 진입하였습니다. 헬기착륙장등을 지나면서 비포장이고 삼거리 길도 나와서 이곳 토박이고 여러 번 묘소에 다녀와서 익숙한 전경석회장님도 1번 정도 길에 대한 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일반 승용차처럼 낮은 차로는 접근 가능하지 않고 중간에 차를 만나면 후진하여야 하는 오지(奧地) 도로였습니다.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가능하지 않고, 도보로 시간을 많이 투자하여 등산은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꾸불꾸불한 도로를 덜컹덜컹 흔들리면서 전설이 어린 신비한 성마령 묘소에 11시 30분께 도착하였습니다.
차를 세운 곳에서 한 15m 정도를 올라가니 거북바위가 있고 움푹 파인 구덩이에 묘소가 보였습니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와는 다른 감동이 다가왔습니다. 전설에는 펑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꺼졌다고 나와 있으나 석회암지대에 있는 작은 (돌리네) 분지였습니다.
작은 연못 같은 곳인데 비가 왔을 때 어떻게 물이 처리되는지 궁금하였습니다.
준비한 주과포를 차려놓고 간소한 제례를 봉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구덩이를 나와서 언덕에 있는 公의 자제인 “全賁”의 묘소도 촬영하였습니다.
사비를 들여서 두 묘소를 성역화 하는데 공헌한 사람은 ‘전석룡’公이었고 두 분의 시향(時享)은 음력 09월 15일에 정선군 남면 낙동리 중시조 묘소 시향이 끝나고 오후에 봉행한다고 들었습니다. 요즘은 신비한 묘소로 많이 알려져서 경향각지(京鄕各地)의 시인 묵객(詩人墨客)들의 방문이 많아졌다고 들었습니다.
별빛과 교류하는 嶺 마루에 위치한 신비한 묘소 방문을 마치고 종인이 운영하는 성마령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음식은 산초기름으로 구운 두부였습니다. 옛날 평창군 계촌리에서 직장 생활할 때 먹어본 후 오랜만에 먹어보았습니다.
전선집회장님의 권유로 정선군 지족산으로 이동하였더니 14시 30분이 되었습니다. 지족산 입구에서 한 10분정도 걸어가니 숭록대부 ‘全子建’ 묘소가 있었습니다. 묘소 주위에 후손들의 묘소 약 30기가 있었습니다. 묘소 촬영 후 오늘의 정선 일정을 마감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임계에도 잠간 들려서 요즘 품질이 좋다고 소문난 임계 사과도 구입하고 나서 강릉으로 내려와서 오리구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17시 25분경 일과를 마치었습니다.
◎ 성마령
[ 星摩嶺 , Seongmaryeong]
위치
강원도 평창군, 강원도 정선군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과 정선군 정선읍과 북면 경계에 있는 가리왕산에 위치한 고개이다. 『평창읍지』에 따르면 성마령은 정선군과 경계를 이루는데 하늘을 누르는 듯한 형세라서 얻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혹은 깎아지른 듯 치솟은 고개가 별을 잡을 듯이 높다는 뜻에서 나온 지명이라고도 한다. 이 고개를 넘으면 정선군인데, 옛날 서울에서 관리들이 정선으로 발령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넘던 고개이다. 『평창군신지지』에는 "평창의 맨 동쪽에 성마령이 있다."고 쓰고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따르면 미탄면 한치동(寒峙洞)에 위치한다. 한치는 눈이 봄 늦게까지 녹지 않고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해동지도』에는 정선과 통하는 대로로서 성마령이 표시되어 있다. 『여지도서』에서는 읍치에서 44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두만산(斗滿山)에서 뻗어 나온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지도』, 『지승』, 『1872년지방지도』, 『광여도』, 『조선팔도지도』, 『대동여지도』, 『동여도』, 『팔도지도』, 『팔도분도』 등의 지도에 성마령이 표시되어 있다. 성마령은 예전에 사람들이 평창과 정선을 넘나들던 유일한 행로로 관원들의 통행로가 되었고, 주막이 있어 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옥돌이 난다고도 한다. 성마령을 사이에 자주 넘나들던 정선의 조랑말 장사들은 "아 이말아 성마령에 해 떨어진다. 아흔한굽이 해떨어지기 전에 빨리 넘자."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평안2리는 성마령을 넘기 전에 목을 축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본래 없었던 주막이 새로 생겨 새술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고개와 통하는 정선군에도 성마령에 관련된 사료가 적지 않다. 『정선군지』에는 "벽파산에서 뻗어 나와 군 서쪽 35리에 있다."고 쓰고 있다. 지명은 밤하늘의 별을 매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수많은 정선아리랑의 모티브가 되었던 성마령에 관련된 가사로는 "정선읍내야 일백오십 호 몽땅 잠들어 놓고서 임호장내 맞메누리 다리고서 성마령 넘자."와 "아질아질 성마령 야속하다 관음베류. 지옥 같은 정선읍내 십 년 간들 어이 가리. 지옥 같은 이 정선을 누구 따라 나 여기 왔나."가 있다. 이 가사로만 보면 성마령고개는 넘기 힘들고 지루했고 정선군은 첩첩 산중이었다. 후자는 조선 후기 선정을 베풀던 오홍묵(吳弘默) 군수의 부인이 읊은 것이다. 성마령 정상에는 비석돌이 많고 봉수대도 있었다. 성마령에 난 도로는 노폭이 6m이고 주변에는 지금도 굵은 참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정상에는 정선아리랑 가사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성마령 [星摩嶺, Seongmaryeong]
◎ 전보문
[ 全普門 ]
대표관직(경력)/판도판서(判圖判書)
정의/?∼1366(공민왕 15). 고려 후기의 관인.
생애 및 활동사항
공민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수종(隨從)한 공로로 1352년(공민왕 1) 1등공신에 올랐고 판도판서(判圖判書)가 되었다.
그 뒤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제수되었고, 1354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하고 나서 곧 원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파견되었으며, 귀국 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356년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천직되었다가 관제를 구제도로 바꾸었기 때문에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로 고쳐 제수되었다. 1358년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1363년 경상도도순문사, 1365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이듬해 원나라에 하정사로 갔다가 이곳에서 한림시강학사 지제고 동수국사(翰林侍講學士知制誥同修國史)에 제수되고 귀국하였다. 시호는 안경(安敬)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전보문 [全普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고전번역총서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6권 > 강원도(江原道)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6권
강원도(江原道)
정선군(旌善郡)
【인물】 고려 문간(文幹) 본성(本姓)은 전(全)이다.
중국 조정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문씨(文氏)로 사성(賜姓)하였으며,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문관(文冠) 청렴하고 정직하며 관후(寬厚)하였다.
생업을 일삼지 않았으며, 관(官)에 있어서는 절조를 지켜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벼슬이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을 때에 도부서(都部署) 한충(韓冲)이 와서 알현하니 문관이 선 채로 절을 받고 한 마디도 말을 주고받지 아니하니 한충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진정 원수(元帥)다운 기상이 있다.” 하였다.
전우화(全遇和)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전오륜(全五倫)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본조 전빈(全賓) 태종조(太宗朝)에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봉화 (역) ┃ 1970
◎ 목은시고 제27권
시(詩)
외구(外舅) 화원군(花原君)의 내외손(內外孫)들이 모든 경조(慶弔)나 영전(迎餞)의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모이는 것을 사촌회(四寸會)라 이름하고, 해마다 두 사람이 그 일을 관장하게 하여 그들을 유사(有司)라 이름하며, 유사는 세말(歲末)에 모임을 소집하여 그 일을 내년의 다음 유사에게 넘겨주곤 하는데, 이는 가법(家法)인 것이다. 그리고 모임을 가질 때에는 반드시 부항(父行)이 되는 한두 사람을 맞이하여 그 좌석을 주관하게 한다. 경신년 동짓달 24일에 민중립(閔中立)과 내 자식 종학(種學)이 그 모임을 마련하였으므로, 내가 민 판사(閔判事), 권 판서(權判書)와 함께 그 자리에 참여하여 몹시 취해 돌아왔다가, 다음 날 한낮에야 비로소 일어나서 한 수를 읊는 바이다.
일곱 사람이 이제는 세 사람만 남았는데 / 七人今日只三人
당에 가득한 자제들은 풍채가 새롭구나 / 諸子滿堂風彩新
노인이 긴 소매로 춤추는 뜻을 누가 알랴 / 誰識老翁長袖舞
성주께서 어진 신하를 얻은 때문이라네 / 只緣聖主得賢臣
타고난 천성이 우애하여 가문은 창성하고 / 因心以友家門盛
효도를 옮겨 충성하니 세도는 순박해지리 / 移孝爲忠世道淳
겨울 다스움 압도해 추위가 잠시 극성해라 / 壓盡冬溫寒乍極
화기가 조화를 회전시킨 걸 비로소 알겠네 / 始知和氣轉洪鈞
[주D-001]일곱 …… 남았는데 : 화원군(花原君) 권중달(權仲達)의 아들인 판종정시사(判宗正寺事) 권사종(權嗣宗), 전법 판서(典法判書) 권계용(權季容)과 사위인 전분(全賁), 유혜방(柳蕙芳), 판사(判事) 민근(閔瑾), 이색(李穡), 김윤철(金允轍)까지 모두 일곱 남매(男妹) 중에 이때는 오직 아들 권계용과 사위 민근ㆍ이색만이 생존해 있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 전오륜
[ 全五倫 ]
요약
고려 말기의 문신이다. 공양왕 때 대제학을 지냈으며, 이색·정몽주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정선의 서운산으로 옮겼으며, 훗날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다.
본관은 정선(旌善)이고, 호는 채미헌(採薇軒)이다. 대제학 분(賁)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1391년(공양왕 3) 우상시(右常侍)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왕을 모시고 5죄(五罪)를 정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형조판서를 거처 대제학에 올랐다. 이색(李穡)·정몽주 등과 깊은 교유를 맺었다. 국정이 불안할 때 정몽주와 더불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정사를 바로잡고자 애썼다.
고려가 망하자 그를 비롯하여 뜻을 같이하는 72명의 신하들이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이성계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자 다시 그를 비롯한 7명이 정선으로 옮겨 서운산(瑞雲山)으로 들어갔다. 백이숙제(伯夷叔齊)를 흠모해 호를 채미헌(採薇軒)이라 하고, 나라 잃은 백성이 해를 어찌 보겠느냐며 외출할 때는 항상 패랭이를 쓰고 다녔다. 안의(安義)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전오륜 [全五倫] (두산백과)
◎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28일 정미 3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태조의 즉위 교서
1. 유사(有司)가 상언(上言)하기를,
‘우현보(禹玄寶)·이색(李穡)·설장수(偰長壽) 등 56인이 고려의 말기에 도당(徒黨)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해서 맨처음 화단(禍端)을 일으켰으니, 마땅히 법에 처하여 장래의 사람들을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 나는 오히려 이들을 가엾이 여겨 목숨을 보전하게 하니,
그 우현보·이색·설장수 등은 그 직첩(職貼)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해상(海上)으로 옮겨서 종신토록 같은 계급에 끼이지 못하게 할 것이며,
우홍수(禹洪壽)·강회백(姜淮伯)·이숭인(李崇仁)·조호(趙瑚)·김진양(金震陽)·이확(李擴)·이종학(李種學)·우홍득(禹洪得)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1백 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최을의(崔乙義)·박흥택(朴興澤)·김이(金履)·이내(李來)·김묘(金畝)·이종선(李種善)·우홍강(禹洪康)·서견(徐甄)·우홍명(禹洪命)·김첨(金瞻)·허응(許膺)·유향(柳珦)·이작(李作)·이신(李申)·안노생(安魯生)·권홍(權弘)·최함(崔咸)·이감(李敢)·최관(崔關)·이사영(李士潁)·유기(柳沂)·이첨(李詹)·우홍부(禹洪富)·강여(康餘)·김윤수(金允壽)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70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게 할 것이며,
김남득(金南得)·강시(姜蓍)·이을진(李乙珍)·유정현(柳廷顯)·정우(鄭寓)·정과(鄭過)·정도(鄭蹈)·강인보(姜仁甫)·안준(安俊)·이당(李堂)·이실(李室)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에 방치(放置)할 것이며,
성석린(成石璘)·이윤굉(李允紘)·유혜손(柳惠孫)·안원(安瑗)·강회중(姜淮中)·신윤필(申允弼)·성석용(成石瑢)·전오륜(全五倫)·정희(鄭熙) 등은 각기 본향(本鄕)에 안치(安置)할 것이며,
그 나머지 무릇 범죄한 사람은 일죄(一罪)로서 보통의 사유(赦宥)에 용서되지 않는 죄를 제외하고는, 이죄(二罪) 이하의 죄는 홍무(洪武) 25년(1392) 7월 28일 이른 새벽 이전으로부터 이미 발각된 것이든지 발각되지 않은 것이든지 모두 이를 사면(赦免)할 것이다.
[原文]
有司上言: "禹玄寶、李穡、偰長壽等五十六人, 在前朝之季, 結黨謀亂, 首生厲階, 宜置於法, 以戒後來。" 予尙憫之, 俾保首領。 其禹玄寶、李穡、偰長壽等, 收其職貼, 廢爲庶人, 徙諸海上, 終身不齒; 禹洪壽、姜淮伯、李崇仁、趙瑚、金震陽、李擴、李種學、禹洪得等, 收其職貼, 決杖一百, 流于遐方; 崔乙義、朴興澤、金履、李來、金畝、李種善、禹洪康、徐甄、禹洪命、金瞻、許膺、柳珦、李作、李申、安魯生、權弘、崔咸、李敢、崔關、李士潁、柳沂、李詹、禹洪富、康餘、金允壽等, 收其職(貼)〔牒〕 , 決杖七十, 流于遐方; 金南得、姜蓍、李乙珍、柳廷顯、鄭㝢、鄭過、鄭蹈、姜仁甫、安俊、李堂、李室等, 收其職牒, 放置遐方; 成石璘、李允紘、柳惠孫、安瑗、姜淮中、申允弼、成石瑢、全五倫、鄭熙等, 各於本鄕安置。 其餘凡有犯罪者, 除一罪常宥不原外二罪已下, 自洪武二十五年七月二十八日昧爽已前, 已發覺未發覺, 咸宥除之。
◎ 돌리네
[ doline ]
요약
석회암 지대에서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물에 녹으면서 깔때기 모양으로 패인 웅덩이를 형성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와지 안에서 경작할 수 있는 크기를 돌리네라 부른다. 테라로사라 불리는 토양이 발달하며, 돌리네가 연결된 경우 우발레라 한다.
석회암 지대의 갈라진 틈으로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빗물이 스며들면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녹아서 깔때기 모양 또는 작은 양념절구 모양의 오목하게 패인 웅덩이를 형성한다. 크기는 지름 1m 내외에서 100m에 이르는 등 다양하나, 최근의 국제적인 정의(定義)에 따르면 그 와지 저면(底面)에서 경작할 수 있는 토양이 발달할 정도의 크기를 돌리네라고 하기로 하였다. 돌리네의 저면에는 테라로사(terra rossa)라고 불리는 토양이 발달된 곳이 많으며,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돌리네가 더욱 용식(溶蝕)되어 인접된 돌리네와 연결되어 좁고 긴 와지를 이루는 경우를 우발레(uvale)라고 한다. 아드리아해(海) 동안의 카르스트 지방, 일본의 야마구치현[山口縣] 아키요시다이[秋吉臺]가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한국의 충북 단양(丹陽) 일대에도 매포(梅浦)를 중심으로 하여 다수의 돌리네가 형성되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돌리네 [doline] (두산백과)
◎ 노추산
[ 魯雛山 ]
정의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에 있는 산봉우리.
명칭유래
노추산(魯雛山)은 신라 때 설총과 조선시대의 율곡 이이가 와서 공부를 하여 크게 뜻을 이루어 마치 중국 노나라의 공자나 추나라의 맹자와 같이 학문에 대성공을 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자연환경
노추산은 왕산면 대기 1리와 정선군 북면 구절리 사이에 있는 높이 1,322m의 산으로 주위에서 제일 높은 봉이다.
현황
노추산의 둘레는 약 40㎞ 정도 되는데 왕산면 대기리와 고단리, 정선군 북면, 구절리, 남곡리에 둘러싸여 있고 산 정상에는 헬리콥터장이 있다. 노추산 남쪽 중턱에 노추산 이성대가 있는데 이곳에 홍유휴 설총과 문선공 이이의 위패를 모시고 지역 유림들이 매년 음력 4월 중정일에 제례를 올린다.
노추산은 험준한 산세를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이용하기 좋은 등산로가 있다.
참고문헌
김기설, 『강릉지역 지명유래(江陵地域 地名由來)』(인애사, 1992)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노추산 [魯雛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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