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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마태복음 6:13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tOwgOevFcWo
여러분이 기도해주셔서 저와 제 아내는 원드비전을 섬기는 목사님들과 남미 비전 트립 잘 다녀왔습니다. 지역의 목사님들과 동행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선교사님들 다섯 분을 만나 그분들의 사역을 보며 너무나 귀한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무지개가 떳네요.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파도 없는 바다는 없습니다. 바다에는 큰 파도든 작은 파도든 쉬지 않고 계속 칩니다. 마찬가지로 파도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보면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파도는 시험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충격에 빠져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시대에 대해서 도전을 주던 젊은 사역자가 돈 문제와 이성 문제로 큰 시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가 왜 그런 시험에 빠진 것일까요? 그것은 유혹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기도 여덟 번째 시간으로 시험에 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시험은 더 정확한 말로 유혹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당하는 시험 중에서 유혹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시험의 종류
본문에 사용된 시험(πειρασμός 페이라스모스)이라는 단어는 세 가지 의미입니다.
①테스트입니다. 이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거나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기 전에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 여부를 시험해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님인데, 직원 중 한 사람에게 회사의 자금을 맡긴다면 아무에게나 맡기겠습니까? 그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먼저 확인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복과 하나님의 일을 누군가에게 맡기시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테스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평소 생활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의 됨됨이를 테스트 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의 테스트에 합격해야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②시련입니다. 시련은 우리를 성장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서 엄마아빠에게 따집니다. “왜 나를 학교에 보내서 놀지도 못하게 하고, 지긋지긋한 공부를 하게 하는 거예요?” 부모는 아이가 싫어하니까 학교에 보내지 않을까요? 아니죠. 아이가 싫어해도 아이를 공부시킵니다. 왜요? 아이를 고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기 위한 목적입니다. 억지로 공부하는 것이 아이에게는 큰 시련입니다. 큰 고난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아이는 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의 성숙을 위하여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보리농사를 짓는 농부는 겨울철에 파릇파릇 싹이 나는 보리를 사정없이 발로 밟아버립니다. 왜 그러죠? 보리는 처음 돋아난 줄기가 그대로 자라면 100알 정도의 낱알을 떠받친답니다. 그런데 농부가 발로 밟아버린 싹은 꺾어져 죽는 것이 아니고 다시 일어납니다. 고난을 통과한 것입니다. 그렇게 시련을 통과하고 일어난 싹은 약 450알을 떠받칠 수 있습니다. 밟힘으로 더 많은 이삭을 맺을 수 있는 강한 줄기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라는 시험도 그런 것입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속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변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환경만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시련은 계속 됩니다. 어쩌면 시련이 더욱 강해집니다. 그 강도로 변화되지 않으니 더 강한 강도의 시련이 오는 것입니다.
못을 벽에 박는데 10의 강도로 망치질을 하니 못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강도를 더 올리지요. 다시 20의 강도로 못을 쳤는데 못이 들어가지 않아요. 그러면 강도를 더 올릴 것입니다. 언제까지 강도를 올릴까요? 못이 박힐 때까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 고난, 연단도 그렇습니다. 시련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변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 끝나는 것입니다.
③유혹입니다. 유혹은 마귀로부터 오는 파괴적인 시험입니다. 유혹은 피해야 할 시험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주는 시험입니다. 랍비 메이어는 “하나님은 우리를 오르게 하기 위해 시험하지만 마귀는 우리를 끌어내리기 위해 시험한다.”고 했습니다. 시험에 관한 적절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테스트 시고 연단하셔서 복을 주시기 원하시고, 마귀는 우리를 유혹해서 멸망시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약 1:13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유혹입니다. 분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시험도 유혹입니다. 우리는 유혹의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 받는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에게 유혹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어느 누구도 유혹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2. 유혹의 근원
사람들은 왜 유혹에 빠지게 될까요? 성경에 보면 대략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사탄, 마귀입니다. 허00목사님이 신학교 다닐 때에 공부를 많이 한 세계적인 학자의 강의를 듣고는 질문했습니다. “교수님 사단은 어떤 존재입니까?” 교수님은 “사탄은 어떤 인격체라기보다는 악을 지칭하는 말입니다”라고 설명을 하더랍니다. 그때 허목사님은 사탄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고 있었는데, 교수님의 답을 듣고는 ‘그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탄이라는 영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사탄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입니다. 그는 모든 불행의 제일 원인입니다. ‘사탄’은 ‘대적한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반항하고 불신앙하고 불순종하게 합니다. 사탄이 곧 마귀입니다. 마귀는 욕심과 거짓 그리고 살인하는 자입니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는 거짓이 충만한 거짓의 아비입니다(요 8:44).
사탄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인류에게 사망이 찾아오게 한 원흉입니다. 마귀는 예수님도 유혹했습니다. 사탄은 가룟 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반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는 돈에 대한 욕망을 부추겨서 범죄 하게 했습니다. 사도들도 유혹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 전파하는 길을 방해했습니다. 마귀는 때로는 사람들에게 거짓 기적과 능력을 보여줍니다(살후 2:9).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신자들의 마음에서 하나님 말씀을 뺏어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가 끄는 대로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마귀의 역사로 성적 노예가 됩니다. 술의 노예, 감정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데 자기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데 자꾸만 끌려 다니는 것이 있다면 마귀의 역사입니다.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간혹 아무것도 아닌데 혼자 시험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집사님이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시험 든 이유는 제 설교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설교 중에 “기독교인은 고상하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했는데, 그분의 반응이 이상했습니다. “그래, 너는 고상하고 나는 고상하지 못하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설교가 시험에 들 설교는 아닌 것 같은데 그분은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귀가 제 설교와 그분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연결시켜서 그분이 제 설교를 이상하게 해석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마귀역사였습니다.
②이 세상 환경입니다. 요일 2:15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 세상은 유혹으로 충만합니다. 보는 것이 유혹이고, 듣는 것이 유혹이고, 먹는 것이 유혹이고, 만지는 것이 유혹입니다. 입는 것이 유혹이고, 거하는 집이 유혹이고, 소유와 재산이 유혹이고, 돈이 유혹이고, 권력이 유혹이고, 명예가 유혹입니다. 세상살이 전체가 유혹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는 것이 세상의 유혹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유혹은 번영하고 잘 살수록 더한다고 하시던데 맞습니다. 돈 많고 잘 사는 나라일수록 사람들의 욕망이 더합니다. 거지의 소원은 깡통에 페인트칠하는 겁니다. 강남 부자들의 소원은 빌딩 사는 겁니다. 의식주가 풍부해도 더 가지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③인간의 부패한 본성입니다. 약 1:14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사람이 가진 욕망은 마치 낚시꾼들의 미끼 같습니다. 물고기는 낚시꾼이 던진 미끼의 유혹에 넘어가서 낚이게 되는 것처럼 사람은 육신의 욕망에 스스로 낚이게 됩니다.
예전에 한 분이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자기가 1천만 원을 헌금하겠다 말했습니다. 그분은 말은 해놓고 헌금을 하지 않았습니다. 헌금은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 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의 표정이 이상해지더군요. 그리고 저를 피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결국 교회를 떠났습니다. 제가 볼 때 1천만 원을 헌금하겠다고 말한 것이 걸림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 그때 그분의 경제사정을 보면 1천만 원 헌금은 큰 부담은 아니었지만 부패한 본성인 욕망 때문에 미혹에 빠진 것 같습니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 육신의 욕망으로 표출될 때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요일 2:16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인간의 욕망이 표출 되는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❶육신의 정욕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생리적인 욕구에 유혹 되는 것입니다. 생리적인 욕구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생리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생리적인 욕구를 영적인 요구보다 앞세우는 것은 육신의 정욕입니다. 육신은 원하는데 영에 반대되는 욕망입니다. 육신은 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시는 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육신의 정욕 때문에 영적인 것을 놓친 대표적인 사람은 에서입니다. 그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그 당시 장자권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어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냥을 마친 후 배가 고픈 상태에서 야곱이 쑨 팥죽 한 그릇을 위하여 자기의 장자권을 판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에서의 행동을 망령되다고 말합니다(히 12:16). 에서는 육신의 정욕 때문에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❷안목의 정욕입니다. 보기 좋은 것에 유혹되는 것입니다. 보기에 좋은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는 눈으로 보기에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보기에 좋으나 그것을 선택하므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반대쪽에 서는 것이 안목의 정욕을 따르는 것입니다.
❸이생의 자랑입니다. 세상의 자랑거리입니다. 대게의 한국 부모들은 자녀가 공부를 잘하면 너도 나도 의사나 판검사 시키려고 합니다. 자기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에서 그럴싸한 직업을 원합니다. 이런 것은 이 세상의 자랑거리에 유혹되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허탄한 자랑거리를 찾고 비교의식에 빠져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프라이드로 삼고 교만해집니다. 내가 이 세상의 자랑거리를 갖지 못했는데 남이 가지고 있으면 부러워하고 열등감을 갖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생의 자랑에 유혹 된 것입니다. 이생의 자랑은 허탄한 자랑거리입니다(약 4:16). 우리의 자랑은 주님 밖에는 없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관련 된 어느 글에 보니 그 책에는 한 젊은이가 이 세상에서의 출세와 성공을 조건으로 사탄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만 준다면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라는 대사가 나오나 봅니다. 세상에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세계적인 스타들 중에는 사탄에게 자기의 영혼을 팔아서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이 있다는 글을 읽었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이 자랑에 유혹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 때문에 영적인 가치를 팔아버려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영적인 가치를 위하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포기해야 합니다.
3. 유혹의 성격
유혹의 성격을 세 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①‘언제나’입니다. 병 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 가난할 때나 부요할 때, 낮아질 때나 높아질 때, 젊을 때나 늙을 때, 실패할 때나 성공할 때 등 마귀는 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유혹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몸에 병이 들어서 수술실에 들어가다가 마귀의 유혹을 받았답니다. 그분은 어린 시절에 너무나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다시는 그런 지독한 가난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고, 자녀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은 그 마음을 알고 수술실에 들어가는 짧은 순간에도 목사님에게 속삭이더랍니다. “너 가난이 무엇인지 알지 않니? 목사도 돈 있어야 사는 거라고 말했잖아. 너 죽으면 네 아내에게 누가 신경 써줄 것 같니? 병들고 죽으면 교인들도 눈 돌리는 거야. 살며시 눈 감고 은근슬쩍 돈 좀 모아놓으라고 했더니, 이제 너 죽으면 아내는 사택을 나가서 전세 한 칸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할래? 후회되지?” 이런 속삭임으로 목사님을 우울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더랍니다. 이때 목사님은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켰습니다. 그리고 “사탄아 물러가라. 지금까지 나는 주책인생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주책인생으로 살아갈 것이다”라고 대적하셨답니다. 그 목사님은 주책인생으로 사셨답니다. 앞으로도 주책인생으로 사시겠답니다. 주책인생이란 어떤 인생인가요? 그 목사님의 해석이 멋집니다. 주책인생이란 ‘주님이 책임지는 인생’입니다. 믿음의 고백입니다. 목사님은 시선을 주님에게 집중시키고 사단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사탄은 이렇게 수술술에 들어가는 목사님을 유혹했던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유혹합니다.
②‘누구에게나’입니다. 마귀는 유혹의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마귀는 성직자든 일반 신자든 가리지 않습니다.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유혹에 빠졌고, 흠을 찾아볼 수 없었던 요셉에게도 유혹이 있었습니다. 마귀는 심지어 예수님마저도 유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했었습니다.
③‘어디서나’입니다. 교회에 있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교회에서도 사람을 유혹합니다. 교회는 도피처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유혹을 받아서 넘어졌습니다. 다윗은 왕궁에서 유혹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가야바의 뜰에서 유혹에 빠졌습니다. 마귀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유혹합니다.
4. 유혹을 이기려면
①자신의 약점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아킬레스건이 있습니다. 사탄은 그 약점을 노립니다. 삼손은 여자에게 약했고, 가룟 유다는 돈에 약했습니다.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사람들의 약점을 노립니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를 너무 사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정에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술을 너무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성에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게으릅니다. 어떤 사람은 잔 머리를 너무 굴립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 조절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감정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냉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의가 강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머리를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의지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입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깁니다. 영적 싸움에 승리하려면 하나님을 알고, 적을 알고 또 나를 알아야 합니다.
②자신을 믿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항상 죄의 법에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③기도해야 합니다. 눅 22:46입니다.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여기서 주님이 사용하신 시험이라는 단어는 분문에 나오는 시험과 같은 단어로 유혹을 말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마귀를 이기는 힘을 공급 받습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 위급한 환자가 생기면 어디로 연락을 합니까? 당연히 119죠. 그러면 구급대원들이 출동해서 위급한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해줍니다. 영적인 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문제를 만났을 때, 혹은 아주 급하게 도움이 필요할 때, 그리고 마귀의 유혹을 받을 때, 기도는 하나님께 119를 누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혹시 ‘내가 지금 시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분이 계시다면 지체 말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모든 유혹을 이기게 하소서. 유혹에서 저를 건져주소서.” 가능하면 교회 와서 기도하시고, 집에서도 기도하시고, 길에서도 기도하십시오. 자동차 안에서도 기도하시고, 일하면서도 기도하시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기도하십시오. 막 9:29입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 외에는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나갈 수 없습니다. 유혹을 이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④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시119:9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마귀를 물리치는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은 우리의 삶의 기준을 잡아주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사는데 가게 주인이 무게를 속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내 손에 정확한 저울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속지 않습니다. 물건을 사는데 가게 주인이 길이를 속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내게 정확한 자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속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한 저울이고 정확한 자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풍성한 사람은 마귀의 유혹을 분별하고 이길 수 있습니다.
⑤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갈 5:16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욕심을 이룬다는 말은 육체 때문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따라 가면 육체의 욕심을 이깁니다. 유혹을 이기려면 성령을 따라 가야 합니다.
이번 비전 트립 중에 우리 팀은 계속해서 선교사님들의 도움을 받았는데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사흘 간 한인 교회 집사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집사님이 다니는 리오동양선교교회에서 주일 설교를 했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코카코바나라는 유명한 해변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마돈나의 공연과 겹쳐서 주변은 굉장히 혼잡했습니다. 한 번은 그 집사님을 따라서 길을 가다가 좌회전을 하는데, 한 사모님이 직진하여 횡단보도를 혼자 건넜습니다. 왜 그 사모님은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직진했을까요? 우리를 인도하는 집사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유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따르지 않으면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게 됩니다. 성령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음성과 성령님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⑥유혹에 빠질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거부해야 합니다. 요즘은 개들이 주인에게 대우를 잘 받아서 그런지 사나운 개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어릴 때는 개들이 주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배도 고파서 그런지 대부분 사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 무서운 개가 있는 집은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 앞으로 가면 그 개가 반드시 짖어대며 덤빌 것이기 때문이었죠. 우리가 유혹에 대처하는 지혜도 그런 것입니다. 유혹에 빠질만한 기회와 장소는 피해야 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피해서 도망쳤듯이 말입니다. 유혹의 자리에 있다가는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기회와 장소는 피해야 합니다.
⑦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제가 이번 여행 중에 [천로역정]을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천성을 향해 가는 여정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는 천성을 향해 가면서 많은 유혹을 만났으나 승리했습니다.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첫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주인공은 천성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둘째는 믿음의 동역자들 이였습니다. 그는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승리했습니다. 셋째는 그의 올바른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믿음과 분별력 그리고 인내로 승리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혹 앞에서 인내하지 못해서 넘어집니다.
히 10:36입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할 때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고, 다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인내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⑧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고전 10:13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어떤 유혹을 당해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유혹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미쁘신 분, 즉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함은 변함이 없으시죠. 변덕부리지 않으시며, 약속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나를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유혹에 넘어져 망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영화는 항상 대본대로 흘러갑니다. 슈퍼 히어로 영화들은 참 재미있습니다. 슈퍼 히어로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면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고약한 악당이 등장합니다. 이 악당들은 끈질기게 주인공을 괴롭힙니다. 둘째로, 위험한 장면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주인공이 여러 번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죽을 고비도 많이 만납니다. 셋째로,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고 승리합니다. 주인공은 함정에 빠지거나 막다른 곳에 이르러도 반드시 살아납니다. 어려운 상황으로 주인공이 곧 죽을 것 같지만 절대 죽지 않고 승리합니다. 결국 악당이 죽습니다. 총알이 아무리 비 오듯 해도 주인공은 요리조리 잘 피해서 살아납니다. 왜 그렇지요? 시나리오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인생 각본도 그렇습니다. 반드시 피할 길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대본을 승리하도록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⑨생각과 관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제가 최근에 소화는 눈과 코부터 시작 된다는 영상을 봤습니다. 위가 약한 분들은 먼저 음식을 3분 동안 바라보며 음식 냄새를 맡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에서 음식이 들어올 줄 알고 소화액을 충분히 준비해서 소화가 잘 된답니다. 공감이 되는 영상이었습니다. 바라봄 즉 우리의 생각과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적인 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을 때 선악과를 바라봤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니 그것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결국 하와는 바라보다가 마귀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사람의 삶은 무엇에 생각과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유혹하는 죄에 관심을 두면 그는 바라보는 죄에 빠집니다. 다윗이 밧세바가 목욕을 하는 것을 유심히 봤습니다. 그는 바라보다가 마침내 음란과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 후 다윗은 죄도 바라봄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시119:37에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생각과 싸우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관심의 초점을 잘못된 것에 더 집중하게 하고 유혹에 더 가까이 가도록 할 뿐입니다. 유혹이 있을 때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 구주이신 예수님에게 두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바라는 것이 실제화 되는 것입니다.
⑩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아버지 안에 거한다. 혹은 성령님 안에 거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 안에 거해야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이 효력이 발생합니다. 비가 올 때 건물 안에 있으면 비를 맞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마귀의 어떤 공격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예수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주님 안에 거할 수 있을까요? 답은 믿음입니다. 요일 4:15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해야 합니다. 예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보장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여!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