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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구역 | 관할 행정리 수 | 관할 리명 |
증평군 | 증평읍 | 20 | 증평리, 신동리, 창동리, 내성리, 초중리, 연탄리, 덕상리, 남차리, 율리, 축리, 남하리, 교동리, 중동리, 대동리, 장동리, 중천리, 송산리, 미암리, 시곡리, 용강리 |
도안면 | 7 | 화성리, 노암리, 연촌리, 광덕리, 석곡리, 도당리 |
2) 증평군의 자연 지리적 환경 및 경작 현황
증평지역은 전체적으로 분지형태의 지형을 띠고 있는데 차령산맥에서 분기된 노령산맥이 남하하여 동쪽으로는 괴산분지를, 서쪽으로는 증평분지와 청주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증평에는 금강수계의 하천인 삼기천, 자양천, 보강천이 율리의 좌구산, 미암리의 두타산, 괴산군의 보광산 등에서 발원하여 흐르고 있다. 이 하천들은 증평읍에 이르러 보강천과 만나 남서쪽으로 흐르다가금강의 미호천과 합류하게 된다.
기후는 금강수계의 비교적 낮은 분지형 지세로 인해 여름철에는 고온다습하고 겨울철에는 한랭건조한 편이다. 평균 기온은 13℃이고, 평균습도는 61%, 연평균 강수량은 1019.8㎜이다.
보강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평야를 이루고 있는 증평은 도안뜰, 질벌뜰이 연이어져 평야를 이루고, 오창으로 이어지는 넓은 들까지 합쳐 반탄평야로 불리웠을 만큼 넓은 들로 유명했다. 이로인해 증평의 주민들 대부분은 넓은 논과 풍부한 수원의 혜택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얕은 구릉지대에서는 인삼, 담배 등의 특산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증평의 경지면적은 2,153㏊로 전체 81.84㎢ 면적 중에 26.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 논의 경지면적은 59.5%이고 밭의 경지면적은 40.5%로 논의 경작비율이 더 높아서, 쌀 생산량이 7,062톤으로 전체 식량작물 생산량의 97.5%로 차지하고 있다. 증평의 질벌, 장뜰 평야는 풍부한 수계로 인하여 땅이 질고 비옥하여 예로부터 여기에서 생산된 쌀이 기름지기로 유명하다. 현재는 ‘장뜰쌀’이라는 브랜드로 전국에 판매되고 호평을 받고 있다.
쌀농사 이외에도 잡곡류, 감자류, 담배, 인삼, 과수작물 등이 생산되는데 이중 담배는 1990년 이전까지 증평연초조합이 있어 주요 농가소득원이었다. 그러나 담배 농사가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요하고 생장여건상의 여러움으로 경작농가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두류(豆類), 조류 등의 잡곡류가 이성산, 삼보산 기슭에서 생산되었으나 점차 감소하고 있는 반면에 장연 대학찰옥수수의 유명으로 옥수수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다.
과실류로는 주로 사과, 복숭아, 배, 포도 등이 생산되는데 총 58㏊ 면적에서 928톤이 생산되고 있다. 이 중 특히 사과의 경우 전체 과실 생산량의 77.2%를 점하며 약 717톤 정도가 생산되고 있다. 증평지역은 사과가 생육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예부터 그 맛이 뛰어났는데 현재에는 외국으로까지 수출되고 있다.
3) 증평군의 특산물
증평군의 대표적인 특산물로 ‘증평의 명품’이라고 불리는 인삼을 빼놓을 수 없다. 주로 증평군을 둘싸고 있는 중산간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는데 타지역 인삼보다 사포닌 함량이 높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증평지역이 이렇게 인삼이 유명하게 된 것은 담배인삼연구소가 생긴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60년대 후반 토질조사에 의하면 증평지역이 인삼을 생육하기에 양질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담배인삼연구소가 설치되었다. 이후 충북인삼협동조합과 충북인삼유통센터, 인삼 가공 업체인 한삼인 등이 설립되면서 인삼의 고장이 되었다. 현재는 충청북도와 증평군의 중점산업으로 육성되고 있으며 인삼을 주제로 테마관광이 사철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매년 9~10월경에 ‘증평 인삼골 축제’가 개최되어 성황을 이룬다.
한편, 증평은 인삼과 관련해서 ‘홍삼포크 삼겹살’도 유명하다. 1955년부터 37사단이 증평에 주둔하면서 군부대 잔반으로 사육된 돼지의 육질이 우수하기로 유명했었는데 이후 증평의 특산물인 6년근 인삼을 가공하면서 생기는 홍삼부산물을 사료에 첨가하여 사육한 ‘홍삼 포크 삼겹살’이 웰빙 먹거리로 각광을 받고 있다.
3. “장뜰”이라는 지명의 유래
‘장뜰’은 현재의 증평읍 장동리(莊洞里) 일대를 부르는 말로, 장동리 일대를 달리 장평(莊坪)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증평지역을 부르는 옛 명칭인 ‘장뜰’의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괴산군지》에 따르면 옛날 나무꾼 청년 둘이 장치기를 하던 벌판이라고 해서 ‘장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장동(莊洞)이라는 마을 이름은 중국의 장자(莊子)를 상징하는 뜻이라고도 한다.
1970년 한글학회가 펴낸 《지명총람》(충청북도 편)을 보면 이곳이 시장이 섰던 곳이라는 데서 ‘장뜰(莊坪)’이라는 명칭이 유래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증평군지》에서는 ‘장치기’라는 민속놀이가 근처 모든 동리에서 놀아진 것이고, 또 이 지역에 시장이 들어선 것은 1923년 5월 충북선 열차가 개통 된 이후라는 점을 들어 앞의 두 가지 기원설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다만 이 지역의 들판이 넓었기 때문에 ‘넓다’라는 의미의 장(張, 長)과 들판의 ‘들’이 합쳐져 ‘장들’ 또는 ‘장뜰’이라고 불렸고, 이것이 1914년 일제가 지명을 정리하면서 장평(莊坪)으로 고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장뜰은 윗장뜰과 아랫장뜰로 나뉘어 불리기도 했는데, 현재의 교동과 장동일대를 윗장뜰이라고 했고, 신동일대와 창동을 아랫장뜰이라고 불렸다.
또다른 의견으로는, ‘장뜰’의 ‘장(莊)’가 사실은 베풀장(張)자를 써서 ‘베풀어주는 뜰’, ‘넓은 농야지대’라는 의미가 있는 듯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처럼 ‘장뜰’의 어원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넓은 뜰’이라는 의미를 지니면서 지금의 증평읍 교동리, 장동리, 신동리, 창동리 일대를 아우르는 옛 명칭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2002년 증평읍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두레놀이보존회를 구성하면서 자연스럽게 옛 지명이었던 ‘장뜰’을 붙여 ‘장뜰두레놀이보존회’라고 명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Ⅱ 증평장뜰두레놀이의 기원
1. ‘장뜰두레놀이’ 개요
‘장뜰두레놀이’는 충청북도 증평군 일원에 전해 내려오는 놀이로,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 날에 마을 단위 두레꾼들에 의해 풍장치기, 상머슴뽑기, 술과 음식 나눠먹기 등의 행사를 중심으로 놀아진다.
이러한 놀이가 백중에 놀아지는 것은 과거 농촌마을에서 두레를 조직해 마을 사람들간의 단합을 꾀하고 논농사의 효율성을 도모하던 전통과 관련있다. 논에 모내기를 한 이후 크게 세 번 정도 풀을 매주는데, 백중 무렵이면 마지막으로 논에 들어가 김을 매는 세듭매기가 끝이 나게 된다. 그리고 나면 약 보름 정도는 크게 힘들만한 논농사일이 없어 농부들이나 머슴들은 며칠간의 휴식을 갖게 된다. 이를 자축하기 위해 세벌매기가 끝나는 백중을 기해 두레를 통해 함께 작업을 해왔던 농부들이나 머슴들은 풍장을 치며 술과 음식을 나눠 먹고 춤과 노래를 즐기며, 가장 일을 열심히 한 ‘상머슴’을 뽑아 소나 가마에 태워 풍장을 올리며 동네를 돌려 축하해주기도 했다. 이러한 풍습으로 인해 백중은 전통적인 농촌 마을에서는 ‘농부들의 휴가’, ‘머슴들의 생일’로 인식될 만큼 중요한 명절이었다. 지금 증평에서 백중날을 맞아 ‘장뜰두레놀이’를 벌이는 것이 전통적인 농촌마을의 소중한 두레와 백중 명절의 전통을 잇고자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장뜰두레놀이’는 장뜰두레놀이보존회의 주도로 일년에 두 번 6월과 8월에 행사를 갖는다. 6월 행사는 증평군이 주최가 되어 진행하는 ‘장뜰들노래나들이’로서,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증평민속체험박물관에서 개최된다. 이 행사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지신밟기와 용왕굿을 시작으로 논에서 모를 찌고, 모내기하는 과정은 물론, 논매기, 보리타작, 보리방아찧기까지 모두 시연하며 그 과정을 찍는 전국규모의 사진찍기 대회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또 관객들의 모심기 체험, 우렁잡기 체험 등의 각종 부대행사까지 마련되어 있어 큰 규모로 진행된다.
위의 행사와는 별도로 8월에 백중(음력 7월 15일)을 맞아 ‘장뜰두레놀이’가 벌어진다. 장소는 6월 행사와 마찬가지로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민속체험 박물관에서 개최된다. 6월의 ‘장뜰들노래나들이’가 관(官)의 주도이고 전국규모 사진대회와 관객들의 체험 행사까지 있어 그 규모가 큰 편이라면, 8월에 벌어지는 ‘장뜰두레놀이’는 두레놀이보존회 회원들과 인근 마을 사람들이 여름 농한기를 맞아 풍장과 소리, 춤과 먹거리 등으로 자축하고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백중놀이에 가깝고 규모도 소박한 편이다.
‘장뜰두레놀이’ 행사는 보통은 음력 7월 15일 백중날 오전 11시경에 시작해서 오후 3~4시 경에 끝이 난다. 축제는 크게 길놀이, 세듭매기, 호미씻기, 샘고사, 성황고사, 상머슴뽑기, 인절미와 삼곳 나눠 먹기축제의 순서로 진행된다.
먼저 남하 2리에 위치한 전통가옥의 앞에서 흥겨운 가락의 길놀이로 시작한다. 이후 전통가옥 앞에 있는 논으로 이동해 세듭매기를 하고 세듭매기가 끝나면 논에 설치해 놓았던 용두레 등의 기구를 거두어 집으로 돌아와 농기구를 깨끗이 씻어 창고에 정리해 놓는 ‘호미씻기’ 행사를 한다.
‘호미씻기’가 끝이 나면 이후로는 농부들이 백중을 맞아 흥겹게 먹고 마시고 노는 행사가 이어진다. 풍장을 울리며 마을을 돌며 흥을 돋우고 이동 중에 만나는 우물과 서낭에 간단하게 고사도 지내면서 춤판도 벌이며 ‘상머슴’으로 뽑힌 사람을 지게로 만든 가마에 태워 동네를 한 바퀴 돌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떡메를 쳐서 인절미를 만들어 나눠먹고, 아침 일찍 땅속에 뜨거운 돌과 함께 묻어두었던 돼지고기와 감자, 옥수수, 고구마 등의 음식물을 술과 함께 참가자 전원이 나눠먹으면서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장뜰두레놀이’는 어찌보면 관객에게 화려한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공연이라기보다는 행사를 주최한 장뜰두레놀이보존회 회원들이나 구경온 관객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즐기며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앞서 밝힌 대로 이 축제가 과거 농촌에서 백중을 맞아 힘겨운 농사일에서 벗어난 것을 자축하는 농부들이 자신들의 생일, 자신들의 휴가를 자축하는 의미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나라 대부분의 농촌사회에서는 두레가 존재했고, 백중 명절을 중요시했으며, 어느 농촌에서나 풍장과 논농사요가 풍성하게 연행되었었다. 그렇지만 현재 대부분의 농촌에서 더 이상은 두레가 구성되지 않고 백중 명절이 잊혀졌으며, 풍장과 논농사요만이 극히 일부 농촌 지역에서 공연 형식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재까지 ‘두레’라는 조직을 복원하려고 노력하면서 ‘두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논농사를 재현하고 백중 명절의 의미를 되살리려는 ‘장뜰두레놀이’는 남다른 점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남다른 ‘장뜰두레놀이’를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 ‘장뜰’ 지역의 두레 전통, 백중 풍속, 풍장과 소리에 대한 고찰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2. 증평의 두레 전통
1) 두레-집단적 노동․민속예술 공동체 조직
두레는 전통적인 농촌 마을에서 농번기에 부족한 일손을 보충하고 효율적으로 공동작업을 하기 위한 집단적 노동 공동체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레패를 만들어 풍장을 울리고 공동으로 노동하고 함께 참을 먹고, 노동이 끝난 뒤에는 다시 농악을 치면서 함께 어우리는 과정을 통하여 농경 생활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두레’는 효율적인 노동을 위해 결성된 전통적 노동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농악과 논농사 소리를 연행하고 전승하는 민속예술 연행체가 된다. 과거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두레와 같은 노동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은 곳은 드물었다. 특히나 들이 넓어 일거리가 많은 곡창지대에서 두레 조직이 더 활성화될 수밖에 없었고, 아울러 그 두레 조직을 통한 풍장과 소리도 함께 발달할 수 있었다.
2) 증평평야
충청북도는 산지가 많아 경작지가 20%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논농사에 불리한 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증평은 이렇게 논농사 여건이 좋지 않은 충청북도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예로부터 맛있는 쌀이 생산된 것으로 유명했다. 증평 지역에서 쌀농사가 대단위로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증평군이 좌구산, 두타산 등으로 에워싸져 있지만 증평군 중앙으로 흐르는 보강천과 삼기천 양쪽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넓은 들 덕분에 증평군의 경지면적은 26.3%로 충청북도 평균치를 6%이상 웃돌며, 특히 논의 경작비율이 59.5%에 이르러 충북전체 평균인 44.6%를 훨씬 뛰어 넘는다. 이로인해 증평의 이 넓은 들은 인근의 미호평야, 충주평야, 진천평야와 함께 증평평야로 불리며 충청북도의 주요한 쌀 생산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들이 넓었던 증평지역에서 두레가 활성화되고 더불어 풍장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3) 두레짜기
전통적인 농촌마을에서 그랬듯이 증평에서도 논농사의 시작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두레를 짜서 진행했다. 보통 논 한 마지기(200평)를 매려면 품이 2명이 들기 때문에 5마지기 논을 매려면 10명, 15마지기 논은 30명의 품이 필요하다. 그래서 두레는 작게는 10명 내외에서 많게는 4~50명씩 짜서 일했고 보통은 20명 내외로 움직였다.
보통 논농사를 짓기 위해 짜여진 두레의 우두머리를 ‘좌장어른’이라고 했는데, 나이가 가장 많으면서 통솔력이 있는 분이 좌상을 맡게 된다. 두레의 구성원들은 좌장 이외에도 영기(令旗), 농기(農旗), 용기(龍旗), 마을기 등을 드는 사람, 북, 장고, 징, 꽹과리를 맡아 연주하는 사람, 여기에 일의 능률을 높여주는 선소리꾼, 그 이외 일꾼 등으로 구성된다.
두레를 짜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마감하는 것은 논농사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모찌기’부터 시작해서 ‘벼타작’까지이다. 그렇지만 두레는 1년 내내 계속된다고도 할 수 있다. 한 해가 시작되는 정월에 각 집마다 머슴이 정해지면 정월 보름쯤이면 대체적인 두레 구성원의 윤곽이 이미 짜진다고 할 수 있다. 정월에는 별다른 농사일이 없기 때문에 한 달 동안 논다고는 하지만 두레꾼들은 정월 보름을 기점으로 마을의 지신밟기, 2월에는 용왕제, 3월에는 산신제 등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면서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두레 구성원들간에 결속을 다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또한 가을 추수가 끝난 후에도 ‘초가집 이엉얹기’나 겨울의 ‘보리밟기’, 마을에 초상이 났을 때 ‘상여나가기’ 등도 모두 두레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두레가 농번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예전 증평에서는 일년 내내 두레가 운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다만 정월 대보름과 2, 3월에 마을의 안녕을 위해 진행되는 지신밟기, 용왕제, 산신제 등은 대체적으로 한 마을 단위로 그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두레의 성원을 구성한다면, 농번기 때의 두레는 필요에 따라 마을의 범위를 벗어나 인적 구성을 이루기도 한다.
4) 두레입문
두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근력이 있으면서 농사일에 능숙해야 한다. 따라서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15살은 넘어야 한 몫을 쳐주는 일꾼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 장뜰두레놀이 보존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신 분들을 면담해본 결과, 연영모 어르신은 15살에 농사일을 다 배우고 16살부터 품앗이를 다녔고, 전철용 어르신은 17살에 두레에 들어갔으며, 연규태 어르신은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배워 15살에 논 20마지기를 물려받아 혼자 도맡아 농사를 지었다고 하신다. 그렇다고 15살이 넘은 사람 모두가 두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5살이 넘었어도 두레에 한 몫을 받는 성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벼 한 가마니를 지거나 똥장군을 멜 수 있어야 한 몫의 일당을 받을 자격이 되었다. 그래서 처음 품앗이를 받는 일꾼이 되면 이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술이나 닭으로 두레꾼들을 대접하기도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품삯이 헐했다. 나무 한 짐이라고 해봤자 쌀 2~3되 밖에 되지 않았으며, 만약 쌀 한 말(●㎏)을 얻어 먹으면 4~5일은 남의 집 일을 해주어야 했고, 일년 머슴의 품삯이 쌀 7가마니(3섬 반)에 불과했다. 때문에 농사지을 땅이 작거나 없는 사람은 몹시 살기가 어려웠다. 보통 두레에는 한 집에서 한 명이 참가해서 구성되었는데, 각자마다 농사거리가 다 같은 것은 아니어서 두레를 통해 서로 품앗이를 하는 것이 형평에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농사거리가 많은 사람은 농사거리가 적은 사람을 배려해 품삯을 더 쳐주기도 했다.
5) 두레싸움(기싸움)
두레를 짜서 일을 하러 갈 때는 반드시 맨 앞에 영기 2개, 농기 1개, 용기 1개, 마을기 1개, 두레기 1개 등을 내세워 들로 나갔다. 한편, 증평지역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라고 쓰인 농기를 세로가 아닌 가로로 다는 특징이 있으며, 용그림이 그려져 있는 용기는 깃대 끝에 꿩깃털이 달린 꿩장목에 매단다. 또 한때는 태극기를 농기와 같은 깃대에 매달기도 했었다고 한다.
<사진 : 농기와 용기사진>
예전에는 기싸움이 심해서 서로 다른 두레패가 일하러 나가는 논길에서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기싸움을 했다고 한다. 기싸움의 종류로는 상대편의 깃대를 먼저 꺾어 버리거나, 풍물자랑, 기돌리기 자랑, 기를 손에 올리고 균형잡기 등등 다양하게 행해졌다.
영기, 농기 등의 기는 농부들의 농사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기 때문에 무척 소중하게 다뤄졌다고 한다. 두레패가 그날 일할 논에 도착하면 먼저 말뚝을 박고 지지대를 만들어 기를 잘 세워놓은 후 논에 일하러 들어갔다고 한다. 이처럼 소중한 기를 받치는 깃대는 굵고 튼튼한 대나무로 만들어서 보통 힘쓰는 사람이 아니면 기를 드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레패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 기를 들고 앞장서서 일을 나갔고, 다른 두레패와의 기싸움 승패에 따라 정말로 사기가 오르기도 하고 꺾이기도 했다고 한다.
기싸움은 보통 농번기 일을 하러 가다 길목에서 다른 마을 두레패를 만나면서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정월에 기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정월에 각 집마다 머슴이 정해지면서 이에 따라 두레도 거의 짜지게 되는데, 이 두레패들을 중심으로 정월대보름 놀이를 하면서 마을별로 내기 놀이를 해서 이기는 마을이 봇물을 먼저 대는 등의 혜택을 누린다고 한다. 이때 씨름이나 줄다리기와 함께 기싸움 등이 내기 놀이의 주요 종목이었다고 한다.
6) 두레를 통한 논농사 진행과정
음력 3월 곡우(穀雨) 쯤에 볍씨를 물에 담갔다가 못자리에 뿌려두면 음력 사월 소만(小滿)때가 되면 모가 7~8치 정도 자라 모찌기가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두레를 통해 일이 진행된다.
두레로 일을 하게 되면 당일 일할 논의 주인집에 모여 아침을 먹거나 막걸리나 떡 같은 것을 차려놓고 간단하게 풍년기원고사를 들이고 마당에서 한바탕 풍장을 논 후에 들로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주인집의 형편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각자 자신의 집에서 아침밥을 해결하고 일하러 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음력 5월 망종(芒種)이 되면 모내기를 하기에 알맞은 시기가 된다. 이 시기는 때를 놓치기 않고 모를 심기 위해 두레가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때이다. 망종 때에는 모심기 이외에도 다 익은 보리를 수확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모를 심은 지 한 달 만에 초듭매기를 하게 된다. 초듭매기에서는 호미를 사용해 김을 매는데, 가장 더울 때이어서 가장 힘든 작업 중에 하나이다. 어린 모가 뿌리를 잘 내리도록 하는 작업과 크게 자란 잡초를 뽑아내는 작업이 진행된다.
초듭매기를 한 지 7일 내지 8일이 지나 이듭매기를 하게 된다. 이듭을 맬 때는 호미 없이 손으로 김을 매게 된다. 이듭매기를 하고 논에서 물을 빼서 10일 동안 논을 말린 후 다시 논에 물을 댄다. 논에서 물을 빼는 이유는 모가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면서 동시에 가을 추수 때 논이 질어 발이 푹푹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논을 미리 한 번 굳혀두려는 목적이 있다.
초듭매기와 이듭매기를 할 때가 날도 가장 덥고 풀도 가장 왕성해서 김을 매고 뒤돌아서면 풀이 바로 자라있을 정도이다. 이때는 날도 덥고 김매야 할 노동량도 많아서 농부들에게 가장 힘들고 바쁜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증평의 논매기 소리가 유난히 힘찬 이유는 김을 매러 논에 들어가면 개구리가 뻗어 죽어 있을 정도로 더워 노래가 힘차야 힘을 내서 김을 수월히 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듭매기를 한 후 2~3일 뒤에 세듭매기를 하는데 이때도 호미없이 손으로 김을 매는데 이때는 김매는 것을 달리 ‘왕품뜯기’ 또는 ‘피살이’라고도 한다.
보리베기, 보리타작, 보리방아찧기
음력 6월 15일(流頭)가 되면 유두놀이를 하게 된다. 먼저 콩국수를 해서 조상에게 바치고 취나물을 뜯어 취떡을 해 먹기도 한다. 이날 두레패들은 논에서 솥뚜껑을 엎어놓고 들기름을 쳐서 부침개를 부치거나 솥에 닭백숙을 끓여서 나눠 먹는다. 이때 부침개나 닭백숙을 논의 네 귀퉁이에 잘라서 던지는데 이는 벼멸구 등의 병충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예부터 들기름이 병충해 방지에 효험이 있고, 또 닭은 벼멸구를 잡아먹는다는 점, 또 닭 자체가 열이 많은 짐승이어서 닭이 근처에만 가도 벼멸구가 죽는 점에서 이러한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인 병충해 방지와 풍년을 기원하는 고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음력 6월 30일경부터 7월 15일 백중까지는 ‘보리덤’베기 또는 ‘보리풀베기’를 하게 된다. 보리덤이란 가을에 보리농사를 짓기 위해 보리밭에 깔 거름이 되는 잡풀이다. 그리고 이때 쯤 대부분의 논에는 세듭매기까지 거의 마치게 된다.
음력 7월 15일 백중은 일명 ‘머슴날’이라고 해서 이 날 만큼은 머슴은 물론 모든 농사꾼들이 술과 음식을 대접받으며 쉬게 된다. 또 각지에 백중난장이 서게 되는데 백중돈을 받은 머슴은 물론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백중난장에 나가 각종 볼거리, 먹을거리를 즐기게 된다.
백중 무렵부터 음력 8월 15일까지는 ‘7월 비’라고 해서 적게는 20집, 많게는 50짐까지 풀을 베어 말려 쌓아두게 되는데, 이것은 겨울에 군불을 지피기 위한 것이다.
추석이 지나고 상강(霜降)이 다가오면 논과 밭의 작물을 걷어 들이는 추수철이 시작된다. 벼베기를 시작으로 서리가 내리기 전에 콩과 같은 작물을 수확하느라 일손이 바쁘게 움직일 때다. 벼베기와 벼타작을 끝으로 두레를 통합 본격적인 협업을 끝이 나게 된다.
3. 증평의 백중 풍속
1) 백중, 머슴의 생일날
일명 ‘머슴생일날’이라고 불리며 백중(百中)은 음력 7월 15일로, 세벌김매기가 끝난 후 농부들이 음식과 술을 나눠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 날이다. 백중은 달리 백중(白中), 백중(百衆), 백종(百種), 백종절(百種節), 백종(白踵), 중원일(中元日), 망혼일(亡魂日), 머슴생일 날, 호미씻는 날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국적으로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농부들이나 머슴들은 백중 당일을 포함해서 짧게는 3일에서 길게는 일주일 정도 휴식을 취한다. 백중이 되면 머슴들은 주인집에서 차려준 술과 음식을 먹고, 주인집에서 마련해 준 새옷을 입고 백중장에 가서 유흥을 즐기며 휴가를 즐긴다. 이와 같은 백중 풍습은 이른 봄부터 시작된 고된 논농사가 유두(流頭)를 지나 백중 무렵이 되면 세벌매기까지 끝이 나고 며칠 동안 쉬는 일종의 여름 휴가적 성격을 지닌다.
2) 백중날 아침 풍경
농부들이나 머슴들은 6월 30일을 전후로 세벌매기를 하고나면 7월 15일 백중까지 ‘보리풀베기’를 해서 보리농사를 위한 거름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 또 머슴들은 특별히 이 기간이면 밤마다 멍석을 짜서 백중날 놀기 위한 용돈을 마련하기도 한다. 멍석은 하루 저녁(초저녁부터 자정무렵까지)을 꼬박 짜면 한 뼘 정도를 짜게 되고, 보름 정도면 하나를 완성할 수 있다. 백중날이 되면 머슴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소가 며칠 동안 먹을 만큼의 소꼴을 두둑하게 베어놓고, 보름동안 짠 멍석을 마당에 펼쳐 놓으면서 주인에게 “다 뗐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주인은 “수고했다”고 하며 새 옷과 약간의 쌀을 멍석값으로 주는데, 이것이 백중휴가 비용이 되는 것이다.
백중날 아침 소꼴을 비어다 놓고 멍석까지 팔고 나면 정말로 5일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휴가를 받게 되는데 주인집에서는 닭을 잡아 백숙을 끓이고 인절미까지 해서 밥상을 차려 머슴에게 대접해준다. 밥을 잘 얻어먹은 머슴은 주인이 마련해준 새 옷을 입고 오랜만에 집으로 휴가를 다녀오거나 백중장에 가서 여러 가지 구경도 하며 휴가를 즐겼다.
한편, 동네에서는 가장 일 잘하는 상일꾼을 뽑아 상도 주고 소를 태워 풍장을 치며 동네를 한 바퀴 돌게 해 주기도 했다.
3) 백중의 특별한 풍습-‘꼴두각시 놀이’와 ‘초립동이 색시 삼기’
증평의 백중 풍습 중에서 ‘꼴두각시 놀이’와 ‘초립동이 색시 삼기’ 등이 특기할 만하다.
전철용 어르신이 제보해주신 ‘꼴두각시’놀이는 보통 백중난장 등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모의결혼식 놀이라고 볼 수 있다. 길게 댕기를 땋은 16살~17살 정도의 사내아이를 신부로 꾸미고 늙도록 장가를 못 간 총각을 신랑으로 꾸며 서로 가짜로 결혼을 시키는 놀이이다. 이때 신부는 버선을 손에 끼고 신랑은 저고리는 다리에, 바지는 팔에 껴서 거꾸로 옷을 입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은 장가 못 간 없는 집 총각이나 머슴들을 놀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웃음으로 시름을 달래주는 해학적인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또다른 풍습으로는 초립동이 색시 삼기’가 주목된다. 과거 머슴들은 살림밑천도 없고 세경도 박해서 경제적 기반을 잡아 장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워 늙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는 머슴들은 동네에서 역시 형편이 좋지 않은 10살에서 12살 사이의 남자아이 초립동이를 가짜 마누라로 삼아 함께 사는 경우가 있었다. 머슴은 남의집살이가 끝날 때까지 초립동이 남자아이와 함께 살면서, 옷도 해 주고 공부도 시켜주고 용돈도 주면서 뒷바라지를 해 준다. 특히 정월 대보름 때와 백중 때가 되면 세경이나 백중돈으로 아이에게 새 옷을 해 입히고 백중장에도 데리고 나가 놀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백중 때에는 이처럼 형편이 어려운 머슴들을 위해 풍물 등을 통해 추렴을 해서 그 살림밑천을 모아 주기도 했다고 한다.
4) 백중난장
백중하면 증평지역 어르신들은 무엇보다도 백중난장이 가장 볼만했다고 증언한다. 증평지역과 그 인근에는 증평장, 남하리 약수장(일명 ‘신초정’), 초정약수장, 청안장 등과 같은 5일장이 있었는데, 백중이 되면 이 5일장 규모가 훨씬 더 커지고 흥성했다고 한다. 또 백중에는 이러한 5일장 이외에 보강천 백사장이나 도안 움발이다리 백사장 등에 별도의 백중난장이 크게 벌어졌다고 한다.
백중난장에는 갖가지 먹을거리는 물론 씨름, 노름, 춤판, 풍장, 상수돌리기, 팽이치기, 말타기, 무등타기(상좌), 그네타기 등이 함께 벌어지게 되는데, 보통 5일에서 일주일 정도까지 장이 서게 된다.
백중난장에서 가장 볼만한 것으로는 씨름대회를 꼽을 수 있다. 지금의 초등학생 정도가 참여하는 애기씨름, 20대에서 50대 정도까지가 참여하는 중씨름, 전국에서 힘깨나 쓴다는 장사들이 참여하는 전국장사씨름대회 등이 벌어졌다. 시상품으로는 전국장사씨름대회 우승자에게는 중소 한 마리, 중씨름 우승자에게는 송아지 한 마리, 애기씨름 우승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상품을 주었다고 한다. 또 풍물을 겨루는 행사도 있어서 우승팀에게는 역시 중소 한 마리가 주어졌고, 그네뛰기 우승자와 2, 3등에게는 금지환 3돈부터 5돈까지 시상했다고 한다.
백중난장의 놀거리 중에는 놀음도 빠질 수 없다. 팽이놀음, 물레놀음, 총놀음, 화투 등등이 벌어지는데 일부 머슴들은 약간의 용돈으로 받은 백중돈은 물론이고 선불로 받은 세경까지 다 털어먹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백중난장은 젊은 남녀의 연애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젊은 총각이나 머슴들은 백중돈이나 선세경으로 음식과 술을 사먹고 놀음이나 씨름 등에서 호기를 부렸다. 또 젊은 처녀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백중장을 구경하거나 그네뛰기대회에 참가하여 즐기는 와중에 젊은 남녀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연애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년에 한 번, 여름 농한기에 일주일 정도 벌어졌던 증평의 백중난장은 일년 내내 농사에 매달려야 하는 농부들이나 남의집살이를 하는 머슴들에게는 일종의 여름휴가를 맞아 힘든 노동을 잊고 마음껏 즐기는 해방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용돈으로 받은 백중돈으로 난장에서 필요한 물건도 사고, 마음에 들었던 처녀와 자연스럽게 어울려보기도 하며 각종 놀음이나 풍장, 말타기, 씨름 등의 유흥거리로 시름을 풀어보기도 했던 흥겨운 축제마당이었다.
4. 증평의 두레 풍장과 논농사 소리
1) 증평의 풍장
장뜰두레놀이는 논농사를 짓는 과정을 모의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적인 측면, 북, 꽹과리, 장구, 징 등의 사물과 태평소 등의 민속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적인 측면, 논농사 과정에서 일의 효율성을 높여주기 위해 불려지는 소리적인 측면이 한데 어울려 구성된다.
증평의 풍장은 충청북도 일대의 농악 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증평의 풍장이 유명한 것은 그 고장에 토박이 농악이 존재하고, 특히 지역적 특색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고유성이 풍장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현되었는지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한 연구 과제이다.
증평의 풍장은 기본적으로는 강원도, 경상북도, 충청남도의 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 지역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도 지니고 있다.
증평의 풍장 가락은 3채가락과 길군악7채가락이 기본적 골격을 이룬다. 이 가락을 중심으로 하는 농악이라고 하는 점에서 충청도 가락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길군악7채가락이 진풀이나 행진가락에서 쓰이는 것이 다른 농악의 거리에서 확인된다.
또한 진풀이 역시 충청도 일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구체적인 명칭이나 내용이 서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칠채오방진과 사통배기, 멍석말이 등은 구체적으로 서로 일치하는 진풀이로 된다. 그러나 진풀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도 아니다. 이와 다른 진풀이와 장단도 함께 쓰이고 있으므로 이 점 역시 주목해야 마땅하다. 농살풀이와 꽃봉오리 쌍줄배기는 이러한 각도에서 주목할 만한 진풀이이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서 본다면, 증평의 풍장은 대국면에서는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기본적인 가락과 진풀이가 중심이 되고,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대의 농악에서 사용하는 가락과 진풀이를 공유하고 있을 개연성이 있다. 중국면에서는 충청북도 일대의 농악과 강원도의 농악에서 사용하는 진풀이와 가락을 사용하고 있을 개연성이 있다. 소국면에서는 증평의 농악 가락과 진풀이가 고유하게 존재하면서 마을마다 동질성과 이질성을 가지면서 풍장을 전승하였을 개연성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증평의 풍장과 함께 핵심적인 기능을 하는 두레소리의 악곡과 음악적 성격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강원도 지역의 아리랑 후렴구인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와 같은 후렴구가 이 지역 논농사소리에서도 등장하고 혼소박장단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과 후렴에 “대허리야”와 같은 소리가 쓰이는 것이 이 점을 증거하는 구체적인 증거물이다. 소리의 전통이 이러할진대 풍장의 전통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증평의 풍장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전통적인 문화가 각각의 현장에서 우러나면서 붙박이로 자라나 이와 같은 소리문화가 깊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우러난 증평의 풍장은 지역적 혼합성과 다양성을 견지하면서 한 고장의 소리문화로 정착되고 뿌리를 내렸을 개연성이 있다. 농악과 소리는 두레라고 하는 결집체를 만나면서 이와 같은 증평의 소리로 구현되었다.
2) 증평의 논농사 소리
증평의 논농사와 관련된 소리는 논에 물을 대면서 하는 소리, 모내기를 하면서 하는 소리, 보리타작을 하면서 이를 양식으로 빻는 소리, 논매기를 하면서 하는 소리 등이 있다. 소리의 양상은 대체로 전국적으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세부적인 양상을 하위분류하여 정리하게 되면 다음과 같다.
기초 분류 | 물푸는 소리 | 심기(모내기) | 찧기 | 가꾸기(논매기) | ||
모찌는소리 | 모심는소리 | 보리타작소리 | 보리방아찧는소리 | 논매는소리 | ||
1차 분류 | 물푸는소리 | 모찌는소리 | 모심는소리 | 보리터는소리 | 찧는소리 | 논매는소리 |
존재유무 | ● | ● | ● | ● | ● | ● |
2차 분류 | 고리질소리 | 이모자리 뭉치세 | 아리랑소리 | 개상질소리 | 디딜방아소리 | 초듭매는소리- 아시매는소리, 이듭매는소리- 논뜯는소리, 세듭매는소리, 마무리소리 |
| 호작모소리 | 자리개질소리 | 절구방아소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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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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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리하 허리허리 한 허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아라송아(호작모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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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아호소리, 어하슬슬대허리야, 흥게방게가논다 |
물푸는소리는 논에 물을 대면서 하는 소리를 지칭한다. 이 소리는 고리질소리, 파래소리, 용두레질소리, 가래질소리 등으로 서로 같은 양태를 보이면서 소리의 기본적 면모와 특징은 물을 푸기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고장에서는 ‘고리질’이라고 하는 명칭으로 발달하였다. 선후창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소리의 기본적 장단은 자진몰이 장단으로, 3소박 4박자의 자진몰이 장단이다.
심기 소리는 크게 본다면 모찌는소리와 모심는소리로 갈라진다. 모찌는소리는 이른 바 “뭉치세”의 뒷소리로 된 뭉치세소리로 되어 있다. 자진몰이와 형태가 같은 3소박 4박자이고, 선후창의 형식으로 된 것이 이 심기 소리의 형태이다. 이와 달리 모심는소리가 있다. 이 소리는 모찌는소리와 가창방식과 장단이 동일하지만, 후렴이 자진몰이 두 장단으로 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찧기 과정의 소리가 있는데 이는 논농사의 중간에 하는 것으로 주목할 만한 특징을 가진 소리이다. 두 가지 소리가 있다. 하나는 이른 바 보리타작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보리방아찧는소리이다. 이 두 가지 소리는 가창방식과 장단에 있어서 일정한 차이를 가지고 있어서 앞의 심기 단계 소리와 일정한 차별성을 유지하고 있다. 보리타작소리는 선후창의 방식으로 되어 있지만, 자진몰이 한 배를 선창자인 봉잽이와 후창자인 후잽이가 서로 나누어서 하는 것이 기본적 양태인데 각기 3소박 2박자와 3소박 2박자로 된 것을 합쳐 부르기 때문에 이른 바 장단의 절반씩 나누어서 하는 것이 기본적 면모이다.
가꾸기 과정에서 하는 것으로 이른 바 논매는소리가 있다. 논매는소리는 두레의 형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국적으로 세 번에 걸쳐서 논매기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증평에서는 세 번에 걸친 논매기를 초듭매기-이듭매기-세듭매기 등으로 지칭해서 특유의 토박이 말이 선명하게 살아 있다.
세 번에 걸쳐 논매기를 할 때 부르는 이 세 소리는 일정한 조직 속에서 우러난 것이므로 선후창의 방식을 핵심적으로 하면서 일정한 도구적 연마를 겪은 뒤에 이에 대한 생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한 소리의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 세 가지 소리는 모두 3소박 4박자의 장단으로 이루어진 점이 돋보인다.
증평 고장에 전승되는 논농사 소리는 두레 소리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인접한 지역의 여러 가지 소리의 양상을 함께 보여주는 경계면적 소리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특히 논매는소리의 양상은 증평을 시발점으로 강원도, 경상북도 문경, 충청남도와 경기도 여주・이천 등지의 소리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증평소리의 경계면적 복합성을 이로써 알 수가 있겠다.
3) 장뜰 두레풍장소리의 음악적 특징
장뜰의 두레와 풍장소리는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두레는 문화적 조직이고, 소리는 문화적 창조물이면서 두레에 의해서 운용되는 소리는 관념의 표현이다. 소리는 도구를 활용하면서 이루어지는 기술의 집약이다. 이 문화적 창조물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농악이고, 다른 하나는 소리이다. 농악은 이 고장에서 풍장이라고 한다. 이 토박이 말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 소리의 중요성을 말하는 증거이다.
두레풍장의 순서와 가락을 중점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 두레풍장의 순서는 인사굿으로 시작하여 여러 거리로 구성된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일단 여러 농군들이 함께 춤을 추면서 노는 춤장단이 있다.
다음으로 두레기와 영기를 중심으로 해서 노는 농기놀음이 있다. 농기놀음은 기고사와 같은 신대를 받는 전통에서 비롯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농기놀음은 농기와 영기의 중심으로 여러 가지 놀이를 벌이는 형태를 지칭한다. 농기놀음을 중심으로 해서 보이는 일련의 놀이가 매우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꽃봉오리 쌍줄배기가 있다. 두줄배기를 이 고장에서 달리 일컬어서 쌍줄배기라고 하는데, 이 소리의 전통이 풍장의 꽃이 되는 점을 이로써 알 수가 있다. 풍장과 두레를 노는데 있어서 갑자기 생길 줄 모르는 이른 바 살을 풀어내는 굿거리로 농살풀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오방에서 길군악7채 가락을 연주하면서 오방의 순서를 놀리는 이른 바 칠채오방진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진풀이로 긴요한 것이 바로 여러 가지가 더 있는데 십자걸이, 사통배기, 멍석말이 등이 있다. 굿판에서 물러나면서 하는 퇴장굿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이것이 긴요한 순서는 아니지만 소리의 전체적 얼개를 이루는 마무리 가락이다.
삼채 : 3소박 4박자
쇠1 | 갠 | - | 지 | 갠 | - | 지 | 갠 | - | 지 | 개 | 갠 | - |
재 | 재 | 그 | 재 | 재 | 그 | 갠 | - | 지 | 개 | 갠 | - | |
쇠2 | ||||||||||||
징 | 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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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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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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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 | 덩 | - | 따 | 쿵 | 따 | - | 덩 | - | 따 | 궁 | 따 | - |
북 | 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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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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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 |
| 둥 |
| 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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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채연결가락(쩍쩍이) : 3소박 4박자
쇠 | 갠 | - | 지 | 갠 | - | 지 | 갠 | - | 지 | 갠 | - | 지 |
징 | 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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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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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 | 덩 |
| 따 | 쿵 |
| (따) | 덩 |
| 따 | 쿵 |
| (따) |
북 | 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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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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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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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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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모리 : 2소박 4박자
쇠1 | 갠 | - | 갠 | - | 갠 | 지 | 갠 | - |
쇠2 | 개 | 개 | 갠 | - | 개 | 개 | 갠 | - |
징 | 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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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 | 덩 | - | 덩 | - | 쿵 | 따 | 쿵 | - |
북 | 둥 |
| 둥 |
| 둥 |
| 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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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거리 : 3소박 4박자
쇠 | 갠 | - | 지갠 | 갠 | 갠 | 지갠 | 갠 | 갠 | 지갠 | 갠 | 갠 | 갠 |
징 | 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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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 | 덩 | - | 따 | 쿵 | 따 | 따 | 궁 | 궁 | 따 | 궁 | 따 | - |
북1 | 둥 |
| 두 | 둥 |
| 두 | 둥 |
| 두 | 둥 | 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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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2 | 둥 | 둥 |
| 둥 |
| 두 | 둥 |
| 두 | 둥 | 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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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뜰두레놀이의 발굴과정 및 연혁
1) 장뜰두레놀이보존회 탄생 배경
증평은 그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 보강천과 삼기천 양쪽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넓은 들을 효율적으로 경작하기 위해 증평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두레’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협업이 이루어져 왔다고 한다.
그러나 증평에는 82년에서 85년 사이에 이앙기가 들어와 노동력을 대신하면서 점차 마을 단위의 노동공동체 조직인 두레가 와해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두레가 깨지면서 풍장과 논농사 소리도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비단 증평지역만의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레를 통해 주로 연행되던 풍장과 논농사 소리는 개인의 취미활동이나 잔칫날 혹은 야유회 등에서 여흥을 위한 활동으로 전락해 버려 간헐적으로만 연행될 뿐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처럼 장뜰의 전통적인 풍장과 논농사 소리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이다.
2002년 당시 증평소방대 풍물패는 제9회 충북민속예술경연대회에 증평대표로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회까지는 채 일주일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증평문화원은 조진국씨의 지도하고, 현 장뜰두레놀이보존회 회장님이신 양철주씨가 중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증평 새마을협의회 풍물패에게 참가를 권유하게 된다. 증평 새마을협의회 풍물패는 이 제의를 수락하고 급히 증평지역의 ‘장뜰두레놀이’를 구성해 3일 정도 연습해서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그런데 이 처음 참가한 대회에서 ‘장뜰두레놀이’가 두레의 전통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2등을 차지하게 되고, 이듬해인 2003년 충북예총 주관의 제10회 충북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는 대상까지 수상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또 마침 2003년이 증평군이 괴산군에서 분리해 독립된 자치군이 된 해인 것과 맞물려 ‘장뜰두레놀이’는 증평군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닌 민속예술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장뜰두레농요를 보존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장뜰들노래보존회가 결성되고, 두레농요를 테마로 매년 6월이면 “장뜰 들노래 나들이” 축제를, 8월에는 “장뜰두레놀이축제”를 개최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장뜰두레놀이보존회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도 양철주 회장님의 자기를 아끼지 않는 헌신, 두레가 우리 전통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확고한 소신,그리고역량이 주요했다. 또 1980년대 영농의 기계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두레에 참여한 마지막 세대였던 지명현, 최해근, 이완재 등과 같은 지금의 5~60대 장년층들의 두레와 풍장, 소리에 대한 열정과 사랑도 한몫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들 모두는 두레, 풍장, 소리를 과거의 낡은 것이 아니라 잊지 말아야 하는 귀중한 전통이자 조상의 지혜로 가슴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장뜰두레놀이보존회를 앞장서 창립하고 활발히 참여하면서 전승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2) 장뜰들노래보존회 연혁 및 수상 내역
Ⅲ 증평 장뜰두레축제 진행과정
1. 사전 준비(오전 6시 30분~10시 30분)
1) 음식준비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두레놀이 보존회 회원들은 양철주 두레놀이보존회 회장님 필두로 하여 축제 준비로 부산했다. 회원들이 초가집에 마당에 모여서 밥과 국 등의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장작 등을 이용해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장작에 불이 붙자 불구덩이 속에 ‘삼굿’을 위한 돌들이 던져지고 그 위에는 육개장을 끓이기 위해 솥이 걸렸다.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쑥, 구절초, 연잎을 깔고 돼지고기,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을 넣고 다시 쑥 등으로 덮고 그 위에 달궈진 돌들을 올려놓고 구덩이를 만들면서 퍼냈던 흙을 덮어 단단하게 다지면서 삼굿을 마무리해 두었다. 양철주 회장님은 삼굿을 하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띠었는데 축제가 끝나갈 즈음이면 이 안의 음식들을 꺼내 모두 나눠 먹는 마무리 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 맛을 기대하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사진> 장뜰두레축제 사전 준비 모습
2) 두레놀이 준비
7시를 전후해서 두레놀이보존회 회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면서 짚신과 두레복으로 복장을 갖추고 각자의 악기들을 점검하였다. 악기 이외에도 길놀이에 참여하는 농부 분장에 소용되는 소품인 광주리, 도롱이, 삿갓 등을 숫자에 맞춰 준비하는 등 분주했다. 한편에서는 별도로 보관 중이던 영기(令旗)와 농기(農旗), 용기(龍旗), 마을기를 꺼내어 깃대에 매다는 등 두레놀이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사진> 장뜰두레축제에 사용되는 영기(令旗), 마을기, 농기(農旗)
2. 미륵당 제 올리기(9시 30분~10시 10분)
두레축제를 위해 보존회 회원들이 악기, 복장, 음식 등의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미륵당에 제를 올리러 가야 한다면서 바쁘게 움직이셨다. 증평 장뜰두레축제는 남하2리에 위치한 두레놀이전수관과 그 앞에 전통농가 형태로 재현해 놓은 초가집을 중심으로 해서 진행된다. 이 남하2리에는 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모셔온 미륵당이 있는데 장뜰두레축제를 하기 전에는 반드시 축제가 진행되는 장소의 오랜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 미륵당에 제를 올려 축제의 성공을 기원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이완재 이장님 부부가 두레패에서 마련한 떡, 배, 사과, 밤, 대추 등을 트럭에 싣고 두레놀이전수관 왼쪽 편 언덕에 위치한 미륵당으로 제를 올리러 가셨고 축제에 일찌감치 참여한 청중 몇몇도 함께 동행했다.
미륵당은 남하 2리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남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미륵당에는 모두 세 구의 미륵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왼편에는 3.5m로 가장 키가 큰 미륵상이 모셔져 있고, 오른편으로는 각각 1.3m, 1.5m 높이의 작은 미륵상 두 개가 모셔져 있다.
3. 장뜰두레축제 진행
1) 축제의 시작(10시 42분~11시 10분) : ●●●
보존회 회원들이 모두 모여 악기와 소도구, 음식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친 후, 일부는 마당에 흩어져 각자의 악기를 두드리거나 불면서 소리를 점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명현 상쇠가 꽹과리를 ‘당당당당당당당당’하고 8번 두드리자 회원들은 조용하면서도 일사분란하게, 짜여진 듯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한바탕 흥겨운 풍장을 치기 시작했다. 흩어져 있던 두레꾼들은 상쇠를 중심으로 초가집 마당에 둥그렇게 모여 한동안 신나게 풍장을 쳤는데, 영기(令旗) 2개, 장뜰 두레기 2개, 농신기(農神旗) 1개, 징 2명, 북 2명, 꽹과리 2개, 장구●개로 이루어져 있다. 약 15분 정도 진행된 이 풍장의 가락을 이 분들은 ‘모여라 가락’이라고 부르는데 풍장칠 사람들을 모으고, 몸도 풀면서 소리도 맞춰보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그동안 서로의 생업으로 바빴던 회원들이 다시 모여 음악도 맞춰보며 당일의 컨디션도 조절하고 동시에 축제준비로 산만했던 회원들의 집중력도 높이면서 또 동시에 그날의 행사를 잘 치러보자는 무언의 의기투합을 위한 리허설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축제에 모인 청중들의 집중을 끌어들이면서 이제 축제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의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약 15분 정도 진행되었던 풍장은 꾕과리가 ‘당다다당 당당’이라고 끝장단 소리를 치면서 끝이 났다.
<사진 : 풍물패의 사진>
2) 호미씻기(11시 10분~11시 40분)
(1) 용두레 거둬들이기
양반이 물꼬를 보는 도구인 살포를 들고 앞장서고 그 뒤에 지게와 호미 등 연장을 든 농부, 물동이와 음식 함지 등을 인 아낙들의 순서로 논으로 이동한다. 논에 도착한 풍장꾼과 농부들은 본격적으로 논번기 농사를 갈무리 짓는 시연을 시작한다. 일부 농부들은 호미를 내려놓고 봇물에서 논으로 물을 대기 위해 논두렁에 설치해 놓았던 용두레를 거두어 지게에 싣는다. 이는 이제 세벌매기를 기점으로 더 이상 논에 물을 댈 일이 없음을 의미한다. 즉 장뜰두레축제가 진행되는 백중날은 볍씨 뿌리고 모심고 논매는 힘들었던 농번기의 일이 끝이 나고 이제 얼마 동안의 휴식을 갖고 다가올 추수를 준비하는 분기점이 되는 날인 것이다.
<사진 : 논으로 이동하는 사진 or 용두레는 지게에 싣는 사진>
(2) 세듭매기
논에 도착한 후 양반은 논둑에 머물고 농부들은 일제히 논으로 들어간다. 선소리꾼의 세듭매기 선소리에 맞춰 농군들은 “어허슬슬 대거허리”라고 후렴을 하면서 논에 자라난 피와 잡초들을 뽑는 세듭매기를 한다. 세듭매기를 하면서는 크게 자린 ‘피’나 ‘왕품(왕풀)’을 뽑거나 뜯는 노동이 주로 이루어진다. 세듭매기가 끝나자 논에서 일하던 농군들은 일제히 허리를 펴고 두 손을 번쩍 들고 크고 즐거운 함성을 지른다. 이는 그동안 힘겨웠던 전반기 논농사 일이 훌훌 벗어던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이제 백중의 휴가를 맞이하는 것을 자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 : 갓과 도롱이를 던지는 사진>
(3) 논에서 초가집으로 이동
피살이가 끝나고 농부들은 논에서 나와 각자가 가지고 왔던 연장을 봇도랑 물에 씻고, 또 일부는 지게에 실린 용두레를 짊어진 후 다시 초가집으로 이동한다. 이처럼 백중 무렵에 이르러 그동안 사용했던 호미나 써래, 쟁기, 가래, 용두레 같은 농기구들을 논 근처의 시냇물이나 마을 입구의 샘가 등에서 깨끗이 씻어 헛간이나 창고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는 것을 ‘호미씻기’라고 한다. ‘호미씻기’를 통해 초봄부터 시작해서 주로 호미 등의 연장을 사용해 일하던 전반기 논농사가 끝이 났음을 알 수 있다. ‘호미씻기’ 이후로는 백중부터 추수직전까지의 짧은 농한기를 가진 후 논일에서 주로 낫을 사용하게 되는 수확기가 시작된다.
<사진 : 논에서 초가집으로 돌아오는 사진>
3) 점심시간(11시 40분~12시)
‘호미씻기’ 행사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이어졌다. 풍장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물론, 외지에서 축제를 구경 온 사람들, 인근 마을 주민들, 축제를 참관하러 온 증평군 소속 공무원들, 축제를 취재하거나 조사하러 온 사람들이 모두 한데 어울려 보존회 회원들과 부녀회에서 준비한 비빔밥과 부침개, 수박과 포도 등을 막걸리와 곁들여 먹으면서 휴식을 취했다. 특히 부침개의 경우 커다란 가마솥 뚜껑을 엎어놓고 장작불을 때서 즉석에서 부쳐주는 것으로 맛이 좋고 청중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사진 : 가마솥 부침개>
4) 샘고사(12시 3분~12시 15분)
점심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풍장꾼들은 상쇠(지명현)의 징소리를 듣고 둥그렇게 대오를 이루며 풍장이 시작되었다. 풍장 가락은 “휘모리-삼채-삼채 연결가락- 휘모리(쩍쩍이)”로 이어지면서 신명나게 한바탕 놀았다.
이어 초가집에서 약 50미터 정도 떨어진 우물까지 삼채가락으로 풍장을 치면서 이동한 후에 풍장꾼들은 우물을 빙 둘러쌓다. ‘개개갱 개개갱 갱개개갱 개개갱’의 휘모리가락으로 아주 강렬하고 힘차게 풍장이 연주되는 가운데 선소리꾼이 부정을 물리치는 내용의 샘고사 덕담을 불렀다. 이에 맞춰 풍장꾼들은 ‘뚜르세 뚜르세 물구녕만 뚜루세’라고 후렴을 힘차게 부르며 한동안 풍장과 덕담이 이어졌다. 샘고사 덕담이 다 불려지고 나면 풍장꾼들이 함께 절을 세 번 하는 것으로 샘고사가 끝이 났다.
샘고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징과 꽹과리 소리가 귀를 찢을 정도로 강렬하고 힘찼는데 이를 지켜보던 동네 어르신들은 귀신을 쫓기 위해 풍물을 크게 친다고 말씀하셨다. 또 상쇠의 증언에 의하면 예부터 부엌이나 장독, 우물 등과 같이 사람이 먹고 마시는 음식물과 관련된 장소에 고사를 드릴 때는 쇳소리를 시끄럽게 내서 잡귀잡신과 병충해를 물리쳤다고 한다.
<사진 : 우물고사 드리는 장면>
5) 서낭고사와 뒤풀이(12시 15분~50분)
우물고사를 마친 풍물패들은 서낭고사를 하기 위해 다시 삼채가락으로 풍장을 치면서 논길을 따라 마을 입구의 왼편 공터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로 이동하였다. 느티나무에 도착한 두레패의 일부는 나무 아래 마련된 상에 제를 올릴 음식을 차렸고, 나머지 사람들은 느티나무를 둘러싸고 삼채와 삼채 연결가락으로 풍장을 치면서 제상이 다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제상이 다 마련되고 남하2리 이완재 이장님이 잔에 술을 부어 서낭신께 올리고, 선소리꾼(정달훈)이 “금일길시(今日吉時) 성황당님(城隍堂任) 풍년농사(豊年農事) 기원(祈願)이라~”로 시작하는 축문을 구송했다. 축문이 끝나고 제상에 올려졌던 술을 나무에 부면서 서낭고사가 끝이 났다.
<사진 : 서낭고사 지내는 장면>
서낭고사가 끝나고 둘러선 풍장꾼들이 제상에 오려졌던 술을 함께 음복한 후 이어서 본격적으로 뒤풀이(신명풀이)가 벌어졌다. 제를 올렸던 느티나무 옆 공터에서 풍장꾼들은 삼채-굿거리-삼채-삼채 연결가락으로 이어지는 풍장을 신나게 치면서 각자 자신의 장기인 소리를 하거나 춤을 추면서 흥겹게 놀았다. 특히 지명헌 상쇠는 여러 곡의 민요를 불렀고, 양반 복색을 한 양철주 두레놀이보존회 회장님은 양반춤을, 풍물에서 북을 담당하고 있던 최해근 어르신은 해학적인 춤을 추면서 분위기를 흥겹게 이끌었다.
<사진 : 지명현 or 양철주 or 최해근 세 분의 노래 부르거나 춤추는 모습>
6) 휴식(12시 50분~1시 50분)
아침부터 부슬 부슬 오던 비가 갑자기 장대비로 변해 모두들 초가집으로 이동해서 휴식을 취했다. 빗줄기가 너무 세서 천막이나 정자, 초가집 안까지 물이 튀기도 했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빗줄기가 약해지면 풍물패들은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너 명씩 마당에 나와 풍물을 치면서 흥을 풀기도 했다.
<사진 : 처마 밑에서 쉬고 있는 모습>
7) 상머슴 가마에 태워 놀리기(1시 50분~2시 20분)
지역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흔히들 ‘머슴들의 날’이라고 여겨지는 백중날에 한 해 동안 가장 일을 잘 한 상머슴을 뽑아 격려차원에서 상을 주고 가마를 태워주는 일은 백중날에 빼놓을 수 없는 행사이다. 장뜰두레축제에서도 이러한 것을 재현하기 위해 지게를 사용해 가마를 만들었다. 두레꾼들은 지게 두 개를 맞대어 눕혀 새끼줄로 단단히 묶어 상머슴을 태울 지게가마를 완성했다. 두레꾼들이 이날의 상머슴으로 뽑힌 서진하(●●●)씨의 머리에 어사화를 꽂아주고 네 명이 지고 있는 가마에 태운 후 수고했다는 의미로 술을 따라 주었다. 이후 상머슴을 태운 가마는 초가집을 나서 삼채가락으로 풍장을 치면서 함께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두레관으로 이동했다. 두레관 앞마당에서 풍물패와 상머슴이 탄 가마가 원을 그리며 돌면서 삼채 ‘연결가락-휘모리’로 이어지는 풍장을 치면서 흥겹게 놀았다. 상머슴을 가마에 태운 채 한참을 놀고 나서 상머슴이 가마에서 내리자 이번에는 가마를 맸던 두레꾼들이 풍장소리 맞춰 빈 가마를 놀리면서 흥겹게 춤추고 놀았다.
<사진 : 상머슴 가마 태우고 놀리는 모습>
8) 터주고사(2시 20분~2시 47분)
‘상머슴 가마태우기’가 끝나고 풍장꾼들은 두레관 안으로 이동하여 대오를 정렬하고 일명 ‘고사후렴가락’이라고 하는 ‘개갱갱개 개갱갱개 갱개개갱 갱개’가락에 맞춰 풍장을 치면서 터주고사를 시작했다. 두레관 무대 앞에 바가지에 술을 부어 떠놓고 고사소리가 불러지는 가운데 마을어른, 상머슴 등이 차례대로 절을 올린다. 특히 이날의 경우 비가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상머슴 가마태우기’가 끝이 나고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풍장꾼들이 초가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두레관 안으로 비를 피하게 되면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터주고사는 우물고사, 서낭고사와 마찬가지로 주로 정월달에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이러한 의례를 장뜰사람들은 언제고 두레가 논으로 나가고 들어올 때 마주치게 되는 서낭이며 우물 등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반드시 인사를 올릴 겸 간단하게 술과 음식을 올리고 절을 하고 지나간 것과 같은 맥락이다. 비록 비를 잠시 피하기 위해 들린 두레관이지만 그곳에 그냥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지키는 터주에게도 간단하게나마 인사를 차리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풍습을 통해 옛 조상들이 돌 하나, 나무하나, 우물하나, 터 하나도 배려하고 존중하던 상생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 전수관 안에서 고사지내는 모습>
9) 떡메치기, 떡 나눠먹기(2시 47분~3시)
비가 오락하는 원래 장뜰두레놀이 계획상 놀이의 마지막 뒤풀이 장소로 예정되었던 초가집으로 이동하지 못했다. 두레회원들과 부녀회 사람들이 초가집에 마련되어 있던 떡판과 떡메를 전수관으로 가져오면서 두레꾼들, 구경꾼들이 번갈아 떡을 쳐서 콩가루를 묻혀 인절미를 만들어 나눠먹었다. 이 과정에서 구경꾼들이 자발적으로 떡메치는 일을 거들고 나서면서 장뜰두레축제의 소박하지만 하나로 융화되는 훈훈함이 느껴졌다.
<사진 : 떡메치는 모습>
10) 삼굿 나눠 먹기(2시 56분~3시 35분)
떡메치기가 끝나고 두레패와 구경꾼들이 모두 초가집 마당으로 이동해 삼굿 둘레로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삽과 손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겉에 있는 흙을 걷어내고 연잎 등을 들추자 연잎, 구절초 등의 향이 짙게 밴 감자, 돼지고기, 고구마, 옥수수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구경꾼들은 일제히 탄성을 지르며 너나 할 것 없이 음식들을 꺼내 서로 나눠먹으면서 흥겨웠던 축제가 막을 내렸다.
<사진 : 삼곳을 들추는 모습과 함께 나눠먹는 모습>
11) 단체 사진 찍기(3시 35분~3시 45분)
<단체사진>
Ⅳ 증평 장뜰두레축제의 특징과 의의
전통적인 농촌의 노동공동체 조직인 두레는 1980년대 들어 농기계가 사람의 일손을 대신하면서 점차 사라져 지금은 예전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예전 두레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인원을 구성하고 농사행위를 모의적으로 보여주면서 두레와 함께 놀아졌던 풍물(풍장)을 함께 곁들인 공연 형식의 두레놀이는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포통진두레놀이, 세도두레풍장, 부천●●두레놀이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레놀이’들은 기계의 영농화가 이루어지면서 거의 사라졌다가 지방자치시대가 되면서 각 지역의 축제와 함께 활성화되었다. 그렇지만 현재의 두레놀이는 축제 마당에서의 공연이나 혹은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다듬어진 형태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증평지역의 ‘장뜰두레놀이’도 그 시작은 민속경연대회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장뜰두레놀이는 그 환경지리학적 상황과 예능적 측면에서 남다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두레, 두레풍장, 논농사 소리 등은 논농사가 대규모로 지어지던 경기지역과 전라남도 등과 같이 곡창지대에서 활발히 전승되고 있다. 이에 비해 장뜰두레놀이는 환경 ․ 지리적으로 논농사가 대단위로 이루어지기 힘든 충청북도 지역의 한 가운데인 증평에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이는 증평이 충북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그 중심지에 평야가 발달해 쌀농사를 대단위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증평은 들이 넓었기에 그만큼 일손이 많이 필요했고 그 일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두레조직이 필수적이다. 또 그 두레를 중심으로 협업하는 과정에서 일의 능률을 높여주는 풍장과 노동요가 발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가 만나는 ‘장뜰두레놀이’, ‘장뜰두레소리’가 결코 어느 한 순간에 생겨난 것이 아닌 유구가 역사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다시말해 증평이 충청북도의 여느 지역보다 풍장과 소리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껏 ‘장뜰두레놀이’, ‘장뜰두레소리’로 풍부히 전승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처럼 논농사가 활발히 경작될 수 있었던 환경지리적 여건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지리적 여건에서 탄생하고 전승되었던 증평의 두레와 풍장, 소리의 전통을 오롯이 되살리고 있는 장뜰두레축제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장뜰두레축제의 중심에는 풍장과 소리가 있다. 다른 지역의 축제에서 농악, 즉 풍장이 지역의 농산물이나 유형문화제를 홍보하기위한 부차적인 요소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장뜰두레축제에서는 풍장과 소리가 축제의 전반에 내세워지고 축제 전체를 이끌어간다. 이는 증평 장뜰에서 두레패의 역할과 그들이 연주하고 부르는 풍장과 소리에 대한 자부심과 역량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장뜰의 풍장과 소리는 증평이 북부권인 서울과 경기도, 동부권인 강원도와 경상도, 남부권인 충청남도와 전라도의 길목에 위치한 까닭에 복합적이고 조화로운 중원문화권의 음악적 색채를 띠고 있다
둘째, 장뜰두레축제는 순수하고 소박한 전통민속예술축제의 본모습을 지니고 있다. 지방자치화 시대가 되면서 각 지방, 지역마다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많은 축제들에서 명목은 지역의 문화와 특산물을 알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그 지역과 특별한 관련이 없는 머드 행사, 장어잡이 행사, 먹거리 행사 등을 무분별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에 비해 장뜰두레축제는 말 그대로 옛 두레의 풍습을 오롯이 재현하여 농사짓는 과정과 농사일의 흥을 돋구던 풍장과 소리만을 중심으로 증평지역의 옛 백중 풍습의 모습을 순수하게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때문에 두레와 백중에 대한 옛기억이 없는 우리들은 장뜰두레축제를 통해 농부들의 잔치날이었던 백중의 옛 풍습을 만나게 된다.
셋째, 증평장뜰두레축제는 열려진 축제이다. 예전의 백중놀이가 교통이나 문화적 폐쇄성으로 인해 한 마을, 또는 그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끼리만 어울려 놀던 것이었다면 지금의 장뜰두레축제는 누구나 참여해서 즐길 수 있다. 두레꾼들의 흥겨운 풍물에 맞춰 어깨도 들썩여 보고, 두레패를 따라 논으로 나가 피살이하는 것도 구경할 수 있으며 그 놀이 사이사이에 곁들여 제공되는 소박한 농부들의 새참 밥과 부침개, 막걸리도 맛볼 수 있다. 또 예전 백중 때처럼 인절미도 함께 만들어 먹고, 삼굿으로 익힌 돼지고기 수육과 감자, 고구마, 옥수수도 너나 구분없이 함께 나눠 먹으며 하나가 되는 재미와 감동이 있다.
이처럼 장뜰두레축제는 중원문화권의 풍장과 소리를 중심으로 한 순수한 형태의 민속예술축제이면서 더불어 두레와 백중의 옛 전통과 풍습을 제대로 살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백중두레놀이라고 할 수 있다.
Ⅴ 부록
1. 삼굿에 대한 고찰
삼굿은 여름철에 농촌에서 베옷의 재료가 되는 삼을 대량으로 삶으면서 그 남은 불에 감자나 옥수수 등을 구워먹는데서 유래한 전통적 먹거리 행사이다. 지금은 농촌에서조차 삼을 삶지 않기 때문에 그 전통이 사라졌고, 일부 농촌에서만 관광객 체험 행사를 방식으로 남아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장뜰두레축제에서는 이 삼굿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행사의 일부인데, 두레 전통을 체험하러 온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2010년 8월 29일에 진행된 장뜰두레축제에서도 이 삼굿 행사를 진행했는데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준비과정을 처음부터 취재할 수 있어서 그 자세한 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장뜰두레축제의 공식적인 시작은 11시였는데 장뜰두레놀이보존회 회원들은 이미 6시 30분쯤부터 모여들어 각종 깃발과 악기를 챙기고 음식준비를 하는 등 축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축제 준비 과정에서 빼놀 수 없는 것이 삼굿이었는데 초가집 마당 한쪽에서 먼저 불을 피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커다란 장작을 모아 불을 피우고 그 불구덩이 속에 미리 준비한 커다란 돌들을 집어넣었다. 돌들의 크기는 성인 남자의 두 주먹 정도의 크기였다. 돌이 달궈지는 동안 초가집 마당의 다른 쪽에 깊이 30cm, 너비 80cm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에는 쑥, 구절초, 연잎을 넉넉히 깐 후 날것의 돼지고기,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을 넓게 펴서 넣었다. 약 1시간 정도 지나 불 속에 던져졌던 돌들이 뜨겁게 달궈지자 삽을 이용해 돌을 불 속에서 꺼내 돼지고기, 감자 등이 준비되어 있던 구덩이에 넣고 다시 쑥 등의 잎을 그 위에 덮은 후 마지막으로 구덩이를 만들면서 퍼냈던 흙을 덮어 단단하게 다지면서 마무리해 두었다.
<사진> 완성된 삼굿의 모습
이후 5시간 정도 축제가 진행되었다. 축제의 모든 행사가 끝이 날 무렵 두레놀이보존회 회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하나 둘씩 삼굿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관람객들도 보존회 회원들의 안내에 따라 삼굿 주변으로 모여 삼굿 주변을 동그랗게 에워쌌다.
삽을 들고 봉긋하게 올라온 삼굿 꼭대기의 흙을 조심스럽게 치우자 열기와 수증기에 누렇게 색이 바랜 연잎, 구절초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 삽을 들고 삼굿을 개봉하려는 정달훈 어르신의 모습
다시 연잎과 구절초, 쑥 등을 걷어내자 김이 모락모락 오르며 잘 익은 감자며, 옥수수, 고구마, 마지막으로 돼지고기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 향기와 먹음직스런 모습에 “와”하는 탄성을 지르며 아직도 뜨거운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 등을 손으로 집어 서로 나눠 먹었다.
<사진> 삼굿 속에 있던 감자의 모습
돼지고기는 거다란 쟁반에 담겨 작은 조각으로 썰어 참가자 전원에게 배분되었는데 구절초 등의 향기가 배인 돼지고기는 그 맛이 일품이어서 적지 않은 양이었는데도 순식간에 동이 났다.
<사진> 삼굿에서 익혀진 돼지고기를 나눠 먹는 모습
장뜰두레축제에서 삼굿은 맨 마지막의 대미를 장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농부들의 생일날이라고 할 수 있는 백중을 맞아 음악과 놀이, 춤과 소리를 마음껏 즐기고 그 마지막에 농부들과 관객이 하나로 어울려 아무런 경계도 없이 어떠한 도구도 없이 서로 음식을 손에서 손으로 나눠 먹으며 음식으로도 모두가 하나가 되는 즐겁고 감동적인 경험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2. 장뜰두레소리 대표곡들
1) 고리질소리
고리질소리는 용두레나 고리를 이용해서 논에 물을 대면서 부르는 소리이다. 용두레질은 논옆에 봇물이 고정적으로 흐르는 상황에서 논턱에 고정시켜놓은 용두레를 이용해 혼자 논에 봇물을 퍼담는 일이다. 고리질은 고정적으로 흐르는 봇물이 없는 논에 물기가 많은 곳을 깊이 파 물을 고이게 했다가 긴 줄을 묶은 고리를 이용해 2명이서 논으로 물을 퍼 올리는 힘든 과정이다. 용두레를 이용하든, 고리를 이용하든 두 과정 모두 고리질이라고 한다.
고리질소리는 선후창 방식으로 불리며 후렴은 “고리야 두레야”이다. 고리질 소리의 가사 내용은 대부분 고리질 행위에 대한 묘사와 사해용왕이 논에 물을 풍족해 대 줄 것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후렴 : 고리야 두레야
가사 : 오뉴월 가뭄 지속되고/ 고리를 들고 물푸러 가세/
오늘 물대는 논자리는/ 열닷 마지기 셋다랭이라/
본답부터 중당상답/ 본답 둠벙 물량이라/
만오천고리 물량이라/ 양줄을 쥐고 뚝으로 올라/
허리를 굽혀 줄을 놓고/ 앞줄을 당겨 허리를 펴고/
앞줄을 놓고 뒷줄을 들어/ 빈고리가 내려가고/
또 한고리가 올라오고/ 내려가 텀벙 올라와 출렁/
봇물처럼 번져나가/ 봇두렁 물처럼 번져나가/
중턱고리도 소리에 맞춰/ 세턱고리도 물이 출렁
사만사천 용왕님들/ 이둠벙에 청수를 주고
자비용왕 호계용왕/ 이둠벙에 생수를 주고/
사갈용왕 운음용왕/ 이터전에 물을 주시고/
왕덕용왕 왕염용왕/ 해광용왕 대성용왕/
둔범물이 철철넘쳐/ 무열용왕 난타용왕/
바달다 용왕 미나사 용왕/ 우발라 용왕 물줄기 펑펑/
동해광역 청수용왕/ 남해광역 온수용왕/
서해광덕 금수용왕/ 북해광약 백수용왕/
사대용왕 만년수라/ 강하청택 대소지처/
이둠벙에 수유점수/ 천수답이 옥답이라/
고리질일군 잘도품허/ 용두레도 잘도품어
뒤로당겨 물을 담아/ 앞으로 밀고 물을 넘겨/
뒤로당겨 물을 담고/ 앞으로 밀고 물을 던져/
뒤로당겨 물담아 텀벙/ 앞으로 밀며 물소리 출렁/
2) 가래질소리
가래질은 논에 물을 댄 후 가래를 이용해서 논을 갈아엎으며 부르는 소리이다. 가래에는 맞가래와 오목가래가 있다. 건답은 보통 3명이 협동작업을 하는 맞가래질로 가는데 줄꾼 두 사람은 앞에서 당기고 장치꾼은 선소리를 하면서 장치질을 한다. 논을 갈아엎는 가래질은 “가래질 밥 먹어 봤냐고?”할 정도로 노동의 강도가 세고 힘이 드는 노동이다. 따라서 가래질 소리는 가사의 길이를 짧게 반복하면서 그 내용은 노동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후렴 : 당겨라 부치고
가사 : 가래질 당겨라/
당겨라 힘내어/
앞줄 놓고/
뒷줄 놓고/
3) 모찌기소리
모찌기소리는 모내기를 하기 위해 모판의 모를 뽑아 한 묶음씩 묶는 과정에서 불려지는 노래이다. 후렴은 “뭉치세 뭉치세”로 모를 뽑아 묶는 행위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곡우(穀雨)때 볍씨를 소금물에 담갔다가 모판에 뿌려두면 망종(芒種) 전후로 7~8치쯤 자라 모내기가 가능하게 되므로 모를 찌게 되는 것이다. 가사 내용은 ●●●
후렴 : 뭉치세 뭉치세
가사 :
4) 모내기소리
모내기소리는 모판의 모를 논에 옮겨심는 과정에서 불러지는 소리이다. 증평지역에는 일제시대 말기부터 줄모를 냈고, 그 이전에는 막모를 냈는데 모내기소리는 두 경우 모두에서 불려졌다고 한다. 후렴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라고 해서 강원도 아리랑과 음악적인 맥이 닿아 있다.
한편, 증평지역 역시 수답(水畓)에 모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형이나 토질, 수계의 영향으로 건답(乾畓)에 모내기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건답에 모를 내는 경우는 ‘탄파(嘆播)한파(?)모내기’라고 하고 그때 불려지는 모내기소리는 ‘호미모소리’라는 해서 그 가사를 보면 가뭄과 흉작에 대한 한탄이 많이 표출되어 있다.
후렴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가사 :
5) 초듭매는소리
초듭매는소리는 모를 심고 한 달 만에 처음으로 호미를 가지고 논에 들어가 풀을 맬 때 부르는 소리이다. 초듭매는소리는 다른 지역에서 ‘초벌매기소리’, ‘아시매기소리’라고 부르는 논매기소리의 일종이다. 초듭매기는 가장 더울 때에 하는 가장 힘든 논농사일 중에 하나이기에 노래의 흥이 없이는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장뜰두레놀이보존회의 모든 분들은 초듭매기소리를 가사의 내용도 좋고 매기는 소리와 받는 소리의 호흡이 딱딱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가장 신명나는 소리로 꼽는다. 후렴은 ‘에헤라 방아호’라고 해서 중원지역의 초벌매기소리들과 맥을 같이 한다. 논을 거의 다 매어갈 때 쯤이면 자진가락으로 넘어가 활달한 느낌이 한층 더해진다. 가사 내용은 ●●●
후렴 : 에헤라 방아호
가사 :
6) 이듭매는소리
이듭매는소리는 두벌 논매기할 때 부르는 소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장뜰에서는 ‘논뜯는소리’라고도 부른다. 모를 심고 한 달 만에 초듭매기를 하고, 다시 8~9일이 지나면 호미없이 손으로 풀을 뜯는 이듭매기를 하게 된다. 후렴은 “홍게방게가 논다”이며 가사 내용은 주로 풀을 뽑는 작업에 대한 내용과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후렴 : 홍게방게가 논다
가사 :
7) 보리방아찧는소리
모심기를 전후로 보리를 수확하게 되는데 이 때 수확한 보리는 쌀을 추수하기 전까지 중요한 식량이 된다. 수확한 보리로 밥을 짓기 위해 절구나 물레방아, 디딜방아 등을 사용해 도정하는 과정에서 불려지는 것이 보리방아찧는소리이다. 절구를 이용해 보리를 찧을 때는 “쿵덕쿵 쿵덕쿵 절구방아 가운데 동서가 젤 잘찧네”라는 후렴의 소리를 부르며 디딜방아를 이용해 보리를 찧을 때는 “덜쿠덕쿵 쿵덕쿵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밤마실 가나”라는 후렴의 소리가 불려진다. 장뜰두레놀이에서는 주로 디딜방아를 이용한 보리방아찧는소리가 불려지는데, 그 후렴에서는 방아찧을 때 나는 소리와 방아를 다 찧고 밤마실 가고 싶은 아낙네의 마음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놓아서 흥겨움이 묻어난다.
후렴 : 덜쿠덕쿵 쿵덕쿵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밤마실 가나
가사 :
8) 세듭매는소리
이듭을 매고 ●●이 지나 유두(流頭) 전후로 세듭매기를 하게 된다. 세듭매기 역시 호미없이 손으로 논을 매게 되는데 크게 자란 잡초나 벼와 섞여 함께 자라는 피를 솎아내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세듭매기를 달리는 ‘피살이’, ‘왕품줍기’, ‘도사리줍기’ 등으로도 부른다. 후렴은 “어허슬슬 대허리”이며, 가사 초반에는 논에서 잡풀을 뽑는 내용이, 후반에는 유두놀이를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세듭매기 작업의 내용과 세듭매기가 끝나고 이어지는 유두놀이의 진행까지 닮아내고 있다.
후렴 : 어허 슬슬 대허리
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