省齋公 申言置 行狀 - 華海師全 國譯本
휘(諱) 치(言置 )의 자는 행고(行顧)이며, 호(號)는 성재(省齋)로서, 문정공(文貞公) 선생의 동모(同母) 숙렬 대부인(淑烈大夫人)이 낳으셨다. 어려서 선생은 5세에 백운당(白雲堂) 우선생(禹先生)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였는데, 기개(氣槪)와 도량(度量)이 뛰어나게 높았으며, 마음속에 품은 회포가 몹시 깨끗해서 한때는 덕망(德望) 높은 인사(人士)들의 추앙(推仰)을 받았는데, 백씨 선생(伯氏先生)이 언제나 경계의 말하기를,
“사람은 오직 기(氣)가 영특(英特)함을 나타내는 것이니, 아주 부드러우면 지키고 설 땅이 없고, 아주 굳세면 모난 성질이 나타나서 깨끗하게 착해지더라도 끝내는 도리를 헤아림만 같지 못할 것이니, 항상 중용(中庸)을 선택(選擇)해서 추진(推進)한다면 이것이 도(道)가 되느니라. 오직 너의 병(病)은 다만 모난 성격(性格)이 탈이니라.” 하였는데,
나이가 20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31세에 진선(進善) 겸 우문직학사(進善 兼 右文直學士)가 되었는데, 경학(經學)에 밝고 사람을 존중(尊重)하게 생각하니, 정직(正直)하다는 소리가 조정을 진동(振動)하더니, 후일에 찬선(賛善)과 제주(祭酒), 집현전제학(集賢殿 提學), 도평의(都評議), 이부상서(吏部尚書), 보문각대재학(寶文閣 大提學)을 역임(歷任)하였고, 충숙왕 때는 왕삼석(王三錫)이 국내외(國內外)로 정권(政權)을 마음대로 잡아 쥐고서 있으니, 공(公)이 경학을 강론(講論)하는 자리에서 말하기를,
“왕은 남만(南蠻 - 중국 남방의 오랑캐)을 조정에 임용(任用)하여서 정권(政權)을 마음대로 잡고 있으니, 이는 나라의 안팎을 오랑캐가 되게 하는 것으로, 모든 신인(神人)이 노여워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제향(祭享)도 이로 인해서 올리지 못하게 되었고, 각 지방의 백성들은 마음이 달라졌으니 하늘은 반드시 억압할 것이오니, 왕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위하여 아름다움을 나타낼 것이오이까?” 하자, 왕이 말하기를,
“오랑캐란 사람은 누구인가?”
이에 대답하기를
“왕삼석(王三錫)이옵니다.”
여기에서 간관(諫官) 김개물(金開物)이 사물의 줄거리를 굳게 지키면서 왕장(王章)을 아름답게 드날리는데, 왕삼석(王三錫)은 제멋대로 왕명(王命)을 도용(盜用)하여 사사로이 형벌(刑罰)을 가(加)하고 있으나 왕은 이러한 죄를 매우 너그럽게 용서하시니, 이를 고치려 해도 악(惡)은 더욱 심해짐이 이 같을 뿐 아니라, 왕사(王事)는 날로 나랏일이 잘못되어 감이 비할 바 없었다.
또 민지(閔漬)는 문장(文章)을 허무하게 지어서 풍습이 크게 잘못되어 가며, 어진 사람을 의심하고 성리학자(性理學者)를 공박(攻駁)하고 멸시하며 주자(朱子)의 소목(昭穆)의 의리(義理)를 배척하고 물리치며, 권한공(權漢功) 등과 더불어 마음을 이중(二重)으로 품으니, 심술(心術)이 부정(不正)하였다.
또, 류청신(柳淸臣)·오기(吳祁)·윤석(尹碩)·손기(孫琦)·김지경(金之鏡)·배전(裵佺)·박연(朴連)·이군해(李君侅)·김천우(金天佑)·노영서(盧英瑞)·임중연(林中沇)·윤환(尹桓)·권적(權適)·강융(姜融)·채하중(蔡河中)·조신경(曹莘卿)·양재(梁載)·최노성(崔老星)·강윤충(康允忠)·원현(元顯)·노책(盧頙)·채홍철(蔡弘哲)·신예(辛裔)·기철(奇轍)·기삼만(奇三萬) 등이 앞뒤에서 서로 미워하면서, 충숙(忠肅)·충혜(忠惠)·충목(忠穆)·충정(忠定)의 사대 왕조(四代王朝)에 걸쳐서, 벼슬에 나가기도 하고, 고향으로 물러가기도 하다 보니, 장차 업적(業跡)을 이어나가지 못할 것 같으니, 백씨 선생(伯氏先生)에게 욕(辱)이 미치고 화(禍)를 입게 되자, 매양 공(公)의 언사(言辭)가 지나치게 과격하여 화는 점점 치열(織烈)해지자, 몇 번이나 창(槍)에 찔리고, 물에 빠져 죽은 자도 여럿이었다.
충숙왕(忠肅王) 4년 을해(乙亥)에는 아우인 무민자(无悶子)가 사헌부(司憲府)의 대관(臺官)이 되었는데 강융(姜融)과 서로 미워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공이 조정에 나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 동생 군평(君平)이 경술(經術)을 수립(樹立)하고, 소인(小人)들과 친근(親近)하지 아니하여 교지(敎旨)에 서명(署名)하지 아니하다가 파직되었으나, 조야(朝野)로부터는 크게 인심을 얻고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고, 그 탁연(卓然)함을 아까워하여 모든 관료(官僚)들이 진실(眞實)함을 아뢰었고, 삼대(三代)가 특별한 사람이라 하였는데, 박원계(朴元桂) 같은 사람들이 모두 권세(權勢)에 밀려서 교지(敎旨)에 서명(署名)하였으니, 이러한 풍속(風俗)은 바람 밑에 있는 풀(風下之草)이 아니리오? 이로써 권세를 잡은 간사한 자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옥사(獄事)가 얼마나 일어날 것입니까?” 하였는데,
그때, 민상정(閱祥正)이 대언(代言)으로서 홀로 구제(救濟)하려고 힘을 써서 사면(赦免)되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민대언(閔代言)은 참으로 효행(孝行) 있는 사람이로다.” 하였다.
충목왕(忠穆王) 정해(丁亥 1347)에 정승(政承) 왕후(王煦)와 김영돈(金永吨) 등이 원(元)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보고(報告)하기를,
“원 나라에서는 전왕(前王)의 실덕(失德)을 묻기에 신(臣) 등이 대답하기를 ‘선왕(先王)께서는 처음부터 이러하지 아니하였으나, 다만 소인(小人)들이 지도(指導)했기 때문으로 아직도 그 무리들이 남아 있는데, 이들을 제거(除去)하지 아니하면 금왕(今王)도 그르칠 것이라.’ 하였나이다.” 하였는데,
우상(右相) 노책이 옆에서 듣다가 얼굴이 붉어지면서 나가려 하다가 공(公)이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군자(君子)의 좋은 말은 소인(小人)이 자복(自服)한다.” 하면서 그 부끄러움이 기황후(奇皇后)의 일족인 기삼만(奇三萬)의 죽음으로 미치어서 원(元)나라의 명령으로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관원(官員)들이 공(公)과 아우 무민자(无悶子)를 잡아 가두고 다스리며, 공과 더불어 김영돈(金永吨)·왕후(王煦)·안축(安軸)·김광철(金光轍)·백문보(白文寶)·허식(許湜)·전록생(田祿生)·오경(吳璟)·진영서(陣永緖)·안극인(安克仁)·이원구(李元具)·전성안(全成安)·하즙(河楫)·남궁민(南宮敏)·조신옥(趙臣玉)·김달상(金達祥)·노중부(盧仲孚)·이천백(李天伯)·이승윤(李承潤)·정광도(鄭光度)·서호(徐浩) 등의 옥사(獄事)가 전후(前後)해서 번복(翻覆)되고 본국(本國)의 행성이문(行省理問) 하유원(河有源)이 사감(私感)을 끼고 와서 문초(問招)를 하여 반드시 무복(誣腹)을 받고자 하니, 마침내 서호(徐浩)가 거짓 항복을 하게 되자 원(元) 나라에서 진상(眞狀)을 살피기 위해서 사인(舍人)과 절간의 놈들에게 매질을 하고, 정치도감(整治都監)에서는 반드시 죽이고자 하고, 공(公)의 형제도 연계(連係)되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라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몹쓸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몹쓸 사람을 죽이는 것은 법(法)을 맡은 사람이 아니온데, 지금 죽여야 할 것은 기삼만(奇三萬)이 세력(勢力)만 믿고 남의 토지(土地)를 빼앗아서 자기가 취득(取得)한 것처럼 불법을 자행하고 있사오니, 나라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원망하고 그를 죽이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있으며,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유원(河有源)은 본국 사람으로서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와서 문초를 할 때, 반드시 거짓 항복을 시키려 하니, 서호(徐浩)가 마침내 죄가 없이 죽게 되고, 매(杖)가 난무(亂舞)하는 속에서 거짓 항복을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천리(天理)이오리까?
대개 도리가 아닌 죄는 사람이 오직 스스로 행하는 것이며, 스스로 짓밟는 것이오이다.” 하였는데, 원(元)나라 사신들이 연속해서 추문(推問)을 한 다음에 제공(諸公)에게 신문(訊問)을 하는데, 모든 것을 공의 형제의 말로써 대질(對質)은 오직 안축(安軸)과 왕후(王煦)·원명원(元命原)이 하였고, 김광철(金光轍)과 이원구(李元具)는 병으로써 매(杖)를 맞지 아니 하였으며, 오직 공의 형제가 가장 심한 고문(拷問)으로 몇 번이나 맞아 죽을 뻔하였다. 공이 이 일로 인해서 벼슬을 버리고 늙음을 빙자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공민왕(恭愍王) 때 왕이 여러 번 불렀으나, 한번 나갔고, 종손(從孫) 시직재(矢直齋 伯淸)와 이유헌(理猷軒 得淸)이 계승(繼承)해서 채홍철(蔡弘哲)을 소(疏)로 논박(論駁)하고, 연속해서 소를 올려 잘못된 틈서리를 추궁(追窮)하면서 더욱 당시의 정치의 득실(得失)을 말하고 과격하게 침(針)을 바로 찌르면서 지극히 미워하였다.
당시는 임자(壬子 1372)년과 을해(乙亥)년의 화(禍) 때 그 가혹함을 함께 입었고, 여흥왕(驪興王)이 강화로 유리(流離)되었을 때, 시직재(矢直齋)는 소장(疏章)을 봉해서 윤왕(允王)의 어전(御前)에 올렸을 때, 소장(疏章)의 초안을 공(公)이 또 하나 만들었으니, 그 때에 시직재(矢直齋)의 소사(疏辭)를 꺼리는 경향이 더욱 극심해서 시직재도 함께 윤망(淪亡)을 입게 되고, 그 소장의 초안이 새어 나감과 동시에 그 유(類)가 멸망의 화로 들어가니 대개 성(姓)은 바꾸어서 계급을 빼앗으려 한다고 지적(指摘)하여 간사한 역적으로 만들어, 아무것도 남김없이 모두 없애려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