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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 열사는 동지를 규합했다. 유관순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주머니들처럼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니면서 병천(竝川), 목천(木川), 천안(天安), 안성(安城), 진천(鎭川), 청주(淸州) 등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음력 3월 1일에 총 궐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종용하여 약속을 얻어냈다.
드디어 거사일로 정한 음력 3월 1일의 하루 전인 2월 그믐날 저녁 용두리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 올렸다. 이 횃불이 내일의 거사 신호이며 밀약된 동지들과의 연락 신호이었다. |
매봉산 정상에 봉화대(사적 제230호) | |
매봉을 중심으로 구밋들 우각산, 강단산, 백전리 돌산, 세성산, 아우내 장터 뒤 갓모봉, 봉화대, 개목산 등 일곱 개의 산에서 불길이 솟아 올랐다. 거의 같은 시간에 광덕산, 덕산, 화산, 진천의 덕유산, 구도산,서림산 동남편의 약사산, 청주방면의 수리봉, 남쪽의 백석봉, 남산, 발산, 망경대, 연기지방의 율산, 서남으로 마산, 장명리의 장산에서 또한 횃불이 치솟았다. 모두 24개소나 타 올랐다고 한다. |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3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유관순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자주 독립 쟁취를 위한 연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이 동하여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했고 감격에 휩싸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고 이 소식을 듣고 온 일본 헌병들은 평화로운 시위를 하는 군중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다.
이날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총공격에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죄없는 주민 3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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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만세 벽화 | |
1920년 상해에서 간행된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상)에도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의 기사가 실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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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군의 병천장에서 의사 김구응이 남녀 6천4백 명을 소집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일본 경찰이 우리 민중의 기수(旗手)를 찌르고자 하자, 기수는 맨손으로 칼날을 잡으니 유혈이 임리(淋璃)할 때에 적이 (기수의)복부를 연거푸 찔러서 치사시켰다. 이에 김구응이 적의 잔인무도함을 힐난하여 변박(辨迫)하니 적은 이치에 굴복하고 말에 궁하게 몰려 문득 그 총으로 자살코자 하더니 도리어 그 총을 김구응에게 발사하니 김구응이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적은 시체가 된 김구응의 머리를 때려 부수고, 시체의 사지를 칼로 난자하였다. 이윽고 김구응의 늙은 어머니가 와서 시체옆에 이르러 혼도(昏倒)하여 쓰러지며 적을 크게 꾸짖으니 적은 또한 그의 늙은 어머니를 찔러 죽였다. | |
아우내만세운동 디오라마(기념관내) | |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6개월이 지난 1919년 9월 29일 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타로가 본국의 육군대신 다나카에게 3.1운동 중의 사상자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를 하였는데 다음은 그 가운데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에서 일어난 시위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
천안군 병천은 소요 당일(4월 1일)수일 전부터 밤마다 읍내 주의의 고지에서는 모닥불을 피우고 만세를 고창하고 또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형세가 불온하였는데 4월 1일은 장날에 해당하여 아침 이래 현저히 다수의 선인들이 들어왔으므로 시장이 심히 잡답하여 매우 불온한 형세가 되었다. 헌병 등은 크게 경계 중 오후 2시경 군집 약 3천 명은 시장에서 한국 태극기를 선두로 5,6백 개의 한국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고창하며 크게 소요하면서 드디어 헌병 주재소로 몰려와 제지를 궁락하지 않았다. 헌병은 부득이 격투를 개시하게 되었는데 중과부적이라 발포하자 일시 사산하였으나 그래도 폭동하여 위험에 임박해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 곧 당시 천안철도 엄호대장이던 키네대위 이하 6명은 자동차를 타고 동지로 급행하였다. 오후 4시경 동지에 도착하였을 즈음 선민은 아직도 사산하지 않고 시장 부근은 크게 잡답하고 있었고 또 폭동선민은 군집하여 주재소를 포위하고 감히 제지를 듣지 않을 뿐 아니라 폭행하여 틈만 있으면 엄습하려는 형세이었다. 이에 있어 출동한 병졸로 하여금 이에 대해 병기를 사용하여 적극 진압에 힘써 겨우 동소에서 사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부근 고지상에는 묵묵으로 산재해 있으나 다시 군집하여 몰려 올 형세는 없게 되었다. 일몰 후 천안으로부터 증원한 상등병 이하 5명을 잔류하고 헌병과 협력하여 경계에 당케하고 타(他)는 천안으로 철퇴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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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탄(파견병만)실탄14발피해의 정황 |
헌병주재소는 구내1면에는 소석이 투입되어 있고 창유리는 파손되고 주위의 조망 담은 전부 파괴되고 또 유치장 뒷벽은 가래로 파괴해 있었다. 우편소 부근에서 전화선이 절단해 있었고 면사무소의 입구에는 미닫이가 약간 파괴되었다. 부상자 선인 61명 그중 18명은 부상 후 사망하다. 대부분 키네대위 도착 전에 지방 관헌이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 |
일제는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축소 보고한 것이다. 실제로는 더 많은 사망자가 부상자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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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아우내장터 장날 풍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