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한국)인의 중국동북에서의 항일독립운동은 조선과 한국의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한장을 차지한다
1.동북이 조선인 항일독립운동의 주요한 현장으로 된 배경과 조건
일본군국주의자들의 대외침략의 예봉을 중국과 조선에 돌리자 중조 량국 인민은 공통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으며 일제가 먼저 조선을 강점하자 조선의 애국자들이 중국,특히 동북을 후방가지로 삼은것은 당연한것이였다. 그때 동북은 다음과 같은 유리한 조건이 있었다.
(1)동북지역은 조선이주민들이 많아 훌륭한 기초가 있었다. 동만을 위시하여 남북만에 이주한 조선인은 20세기 20년대 50만명, 30년대 근 100만명, 40년대에는 150만명에 달하였다. 이는 항일독립운동의 좋은 인적자원이였다.
(2)특수한 력사적환경.
일제침략으로 중조인민은 공동한 운명에 처하였으며 서로 동정하고 지원하게 되였고<<9.18>>사변후에는 련합항일의 길에 들어섰다. 이는 동북만이 가지고있은 특수한 환경이였다.
(3)동북은 조선과 린접하여 국내진출이 편리할뿐아니라 백두산지역과 같은 산악지대는 유격전에 리로웠다.
바로 이와같은 력사적배경과 사회지리적 조건이 항일독립을 위한 조선인의 무장투쟁이 최후의 승리를 취득할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2.의병과 독립군의 동북에서의 항일운동
한국 의병의 동북에서의 투쟁은 일찍 1900년 중국의화단운동이 흥기하던 때 의병장 유인석이 압록강 북안에서 의병을 양성하고 조선국내진공전을 벌리던 때로부터 시작되였다.1908년 홍범도가 장백지역에 의병근거지를 건설하였으며 이 무렵 안중근도 동만과 연해지역에서 의병을 거느리고 조선 국내 회령,경흥 등지에서 일제와 싸웠으며 할빈에 와서 이또히로부미를 격사시킨것도 의병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진행한 의병투쟁의 한부분이라고 할수 있다.
<<3.1>>운동후 독립군투쟁은 분산상태에서 점차 단합의 길로 나아갔으며 1902년 6월의 봉오동전투,10월의 청산리전역과 같은 큰 전투를 치르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3.동북의용군과 련합하여 진행한 항일전쟁
1931년 일제가 동북을 침략할 때 장개석은 부저항주의를 내세우고 30만대군 동북군에게 퇴각명령을 내렸다.그러나 애국심이 있는 동북군장병들은 장개석의 명령을 거역하고 의용군을 조직하며 자발력으로 항전을 진행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의용군투쟁을 적극 지지했으며 의용군투쟁은 한때 크게 발전되였다.
이때 동북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도 의용군과 련합작전을 진행하였다.북만에서 리청천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이 리두, 정초가 지휘하는 의용군부대와 련합하여 아성, 쌍성, 주하 등지에서 일제와 싸웟으며 할빈진공전이 실패하자 동만으로 이동하여 구국군 오의성부대와 련합하여 녕안, 경박호, 동녕 등 전투에 참가하였다. 구국군부대가 실패하고 쏘련으로 넘어가자 리청천은 2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남만에서 량세봉이 령도하는 조선혁명군은 당취오,왕봉각, 등철매가 지휘하는 자위군과 련합하여 신빈, 청원, 통화 지방에서 일본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으며 여러차례 조선국내에 진군하여 일제를 타격하였다. 량세봉이 사망한 후 이 부대는 양정우가 지휘하는 항일련군제1로군에 편입되였다.
의용군투쟁시기 공산당은 많은 간부를 의용군에 파견하여 의용군의 투쟁을 지지하였다. 이때 많은 조선인간부들은 의용군에서 정치사업을 담당하였다. 또 항일유격대가 조직된 뒤 조선인 유격대는 각지에서 의용군과 련합작전을 하였으며 의용군을 단결하여 항일을 견지하도록 도와주었다.
4.중,조가 련합하여 진행한 동북항일유격전쟁
<<9.18>>사변후 중공은 장개석의 부저항주의를 반대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동북에는 로농홍군도 없고 당원은 불과 2100명이였는데 그중 80%가 조선족이고”동만의 1200명 당원중 90%이상이 조선족이였다.그러기에 항일유격대 창건은 조선족지역에서 시작되였다.
먼저 동만에서는 1931년 겨울부터 유격대조직을 위해 당원들이 각지에 파견되여 조선족 애국청년들로 많은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였으며 점차 각현의 유격대가 통일되였다.
연길에서는 1933년 1월,유격대대를 건립하였는데 대대장은 박근, 정치위원은 박길이였다.안도에서는 공청단동만지구 책임자 김일성의 지도하에서 1932년 4월, 항일유격대가 건립되였으며 그해 11월에 왕청유격대와 합병하여 유격대대를 건립, 대대장은 량성룡, 정치위원은 김일성이였다.
화룡에서는 1933년 3월에 유격대대를 건립, 대대장은 장승권, 정치위원은 차용덕이였다.
훈춘은 1933년 2월 유격총대건립, 총대장은 공헌심(한족),정치위원은 박태익이였다.
1934년 3월,각 현 유격대대를 기초로 동만인민혁명군 (그 명칭은 후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또는 조선과 조선족지역에서 활동할 때는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칭함) 독립사를 건립하였다.
남만에서는 만주성위 군위서기 양림의 지도하에 리홍광,리동광 등이 항일유격대를 조직,그후 양정우의 지도하에 항일련군 제1군으로 발전되였다.
밀산유격대는 김백만 등이 조직하였는데 리연록의 항일군과 합병하여 항일련군 제4군으로 되였다.
녕안유격대는 김군 등이 참가하여 조직되였는데 그후 주보중이 지휘하는 항일동맹군에 편입되여 항일련군 제5군으로 되였다.
탕원유격대도 처음 조선족으로 조직되였으나 실패하고 하운걸(한족)의 령도하에 유격총대가 조직되였는데 이는 항일련군 제6군의 전신이였다.
요하에서는 최석천, 리학만의 령도하에 유격대가 조직되였는데 후에 항일련군 제7군으로 발전되였다.
항일련군이 편성된 후에도 조선족이 다수인 제2군은 물론 기타 각 군에도 많은 조선인 정치,군사 간부가 있었으며 그들의 지휘하에 많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조선족 전사들은 싸움에서 용감성을 발휘하여 모범역할을 하였다.
또 항일련군이 간고한 환경에서 장기간 투쟁을 견지하고 최후승리를 거두는데 있어서도 조선족은 골간역할을 하였다. 그러기에 1963년 모택동은 동북항일련군은 실제상 중조련합군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력사사실과 완전히 부합되는것이다.
5.결론
동북에서의 근 40년에 걸친 조선인의 항일독립운동은 조선(한국)의 항일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한장으로 되고있다.
동북조선족은 이 투쟁에서 큰 희생을 냈고 큰 기여를 하였다. 이 투쟁은 또한 중국 조선족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대가정의 어엿한 일원으로 되는 빛나는 력사의 한장이기도 하다.
일제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중에서 많은 조선(한국)인들이 이 땅에서 희생되였다. 오늘 우리들이 이 력사를 회고함은 두 나라 인민들간의 친선을 더욱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함께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는데 있어서 아주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우종 (흑룡강성위 당사연구소 전임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