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새와 아버지
2009-07-21
성기평 씀
나의 아버지는 취미가 참으로 다양하신 분이었다.
난초 기르기, 사진 찍기, 개 기르기, 청소하기, 물건 제 자리에 놓기, 잔소리 하기, 그리고 새 기르기 이었는데 그 중에 압권은 지금은 보기 드믄 종달새 기르기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종달새를 기르고 모시는 모습을 보며 컸는데 어머니와 그 많은 취미 중에서 가장 많이 다투시던 것이 종달새 기르기(모시기) 이었다.
종달새를 기르는 새장은 대나무를 사용하여 만든 장이었는데, 얼마나 연마가 잘 되었던지 나는 그 새장은 그것만 만드는 장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 했다.
우리 집은 성북2동의 전형필미술관 (註; 전형필씨는 19세기말 우리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가 되어있을 당시 큰 부자집안에서 태어나 보성학원을 설립하여 우리 민족을 위한 후진양성을 하였고, 간송미술관을 설립하여 일본으로 무차별적으로 넘어가고 있던 우리나라의 高미술품을 사들여 그것 들의 국내잔류를 도모하였던 민족주의자)을 지나 작은 시내물을 건너는 작은다리 위에 위치한 동네이었는데 집은 약 200평 대지에 기역字 형태의 한옥집이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창덕여중의 미술 선생님이었는데, 하루는 집에 돌아오신 어머님께서 대청끝 서까래에 걸려있던 종달새장을 들어 마당에 던져버리셨다.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께서는 얼굴이 하얗게 되시며 종달새장을 수리하시고 다리가 부러진 종달새의 다리에 빨간약(아까징기)을 바르시고 깨끗한 면으로 기브스를 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종달새의 먹이는 좁쌀이었는데, 좁쌀을 깨끗이 씻어 계란 노른자만 분리하여 섞어서 말려 놓았다가 먹이로 쓰셨다. 그 무렵엔 반찬으로 계란 정도면 훌륭한 수준이었는데, 아마도 아버지께선 어머니의 월급날 그 돈을 가지고 계란을 한판(약 20~30개) 사서 종달새의 먹이를 준비하셨는데 어느날 어머니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종달새에 대한 원한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한 동안 안 보이다가 요즘 어디서나 흔히 보이는 참새들을 보며 종달새에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내가 나이가 들어, 당시의 아버지 나이를 훌쩍 지나고 보니 그 옛날 아버지와 종달새에 얽힌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한 줄 끄적 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