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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에서 일어난 반일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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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림교(영막전)사건
반일민족독립운동인 청림교사건때 나는 17살로서 광명중학교 4학년 졸업반 학생이였다. 1944년 12월 10일 제1차검거에서 아부지 박두학, 삼촌 박두공과 함께 룡정헌병대에 체포되여 1945년 3월 6일 제1차공개재판때 석방되였다. 그러나 줄곧 헌병대의 주요한 혐의대상으로 몰려 공포속에서 살다가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였다. 청림교사건으로 하여 나의 아버지와 삼촌은 끝내 일본놈들에게 목숨을 빼앗기고말았다.
청림교는 동학혁명후 남정이 건립한 동학계의 종교이다. 남정은 동학혁명후 포교에 종사하다가 청림교를 내왔는데 1904년 남정이 사망된후 청림교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였다. 1920년 한병수, 태두섭, 김상설, 리옥정 등이 서울에서 청림교를 재조직하고 교회활동을 펴나갔는데 그때의 교주는 한병수였다. 1922년 청림교는 충청남도 륜산군 두마면 두서리에 본부를 옮겼다. 재조직된 청림교는 남정의 "정감록"가운데 있는 "리조가 망한후 정도령이 나타나 충청나도 공주군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왕으로 군림한다"는 반일기재를 신앙내용으로 첨가하고 아울러 선도적색채를 표면화하여 설교하였다. 청림교는 내관과 외관으로 나뉘였는데 한병수가 사명된후 2세교주 태두섭이 통현사로 되여 내관과 외관을 통솔하였다.소하 7년에 청림교자신도 88명이 서울종로경찰서에 검거되였는데 그중 7명이 보안법위반죄와 사기죄로 판결받고 그외 81명이 무죄로 석방되였다. (범인들의 성명과 판결년한은 뒤에 서술하기로 한다)이 사건이 있은후 교주 태두섭아래의 조선국내 청림교도들은 친일파로 나아갔으며 청림교활동은 조선국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청림교가 가장 흥성하던 시기에는 그 교세가 조선팔도와 만주의 길림, 북간도방면까지 뻗어나가 42개의 지부와 50여개의 활동점에 신자 30여만명을 가지고있었다.
연변에서도 한오를 교주로 리몽필, 리천권, 림창세, 신석주를 골간으로 하는 청림교활동이 빈번하였다. 한오는 룡정에 총부를 건립하고 국자가에 총지부를 두어 리천권이 책임지도록 하였으며 화룡현은 신석주가 책임지고 연길현의 세린하와 동불사일대는 림창세(갑돌이라고 불렀음)가 맡아 설교활동을 하게 하였다.
1919년 "3.13"반일운동때 청림교도들은 반일시위에 적극 뛰여들었다가 일제놈들에게 검거,진압당하였다.
1920년초에 연길현 세린하와 동불사일대에서 청림교를 책임졌던 림창세는 교주 한오와 리몽필을 떠나 "대성유교"를 신봉한다고 표방하면서 겉으로는 유고를 선전하고 리면으로는 정천자가 조선왕으로 군립한다는 남정의 주장을 덧붙이면서 단군교를 돌출히 하고 조선민족독립을 선양하였다. 그리고 청림교 교리중의 선도적색채를 배제해버리고 북두칠성님께 일제의 멸망과 신도들의 행운을 기도드리는 내용을 덧붙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림창세는 신포, 오석영, 김광숙, 윤좌형, 현기정, 지창욱, 임방혁 등을 중견으로 반일무장야단을 조직하였다. 자료기재에 따르면 "90여자루의 무장을 가진 야단성원들이 북로군정서의 기모자진과 련합하여 항일할것을 합의하고 사령은 김좌진이 맡고 군사고문은 림창세가 맡았다"고 하였다. 김정병씨가 쓴 "명치백년총서"에는 야단과 대한 군정서가 합병하여 항일할때의 야단총재 림창세의 선언문이 기재되였는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민족의 번영과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 독립운동단체의 련합이 절실히 필요하다.따라서 본단은 전 민족이 신뢰하는 대한 군정서와 합병하기로 하니 전체 단원을 분렬하지 말라. 1920년 5월 2일 야단총재 림창세."
그리고 야단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병력과 군복 등을 지원한 사실을 반영한 력사기재도 적지 않다. 도문철도분국 심계과 과장 최태욱의 회억에 따르면 야단이 전이한후 그의 아버지 최홍수와 박영관, 현원극 등은 간도에 나아 야단의 군자금을 모으다가 일제놈들에게 검거되였는데 무기를 가졌던 두사람은 서울서대문감옥에 압송되여 최홍수는 7년도형에 언도되고 박영관은 5년도형에 언도되였으며 무기를 가지지 않은 현원극 등은 뭇매를 맞고 석방되였다 한다.
1920년에 청림교도들은 제2임교주 현기정과 신자 박영관 모친이 조선팔도와 연변일대를 일주하면서 받은 의연금에다 신자 석화준이 수십쌍의 수전을 팔아 마든 돈을 합하여 룡정시가지에 고구려특색을 띤 2층벽돌집을 짓고 대성중학을 세웠다. "대성유교"라는 간판을 내건 청림교에서는 유교신봉자인 중국정부 간도최고관원인 연길도윤 도빈의 허락을 받고 1921년 7월 11일에 정식으로 개학식을 올렸다.
교주 림창세는 림방혁을 학장으로, 현기정을 경제후근책임으로, 강훈을 학감으로 임명하고 또 7명의 민족주의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였으며 학생 160명을 모집하였다. 학과로는 조선어, 조선력사, 조선지리르 중심으로 수학, 한어, 고대한어(대학, 론어, 맹자 등임), 외국어(일어, 영어)등을 설치하였다.
왕청현에서도 청림교도들은 1922년 4월에 감자촌에 4년제인 명신소학교를 짓고 학생 80명을 모집하였다. 학교에서는 조선어와 조선력사, 조선지리를 배워주면서학생들에게 민족주의사상을 주입시켰다.
이 학교의 반일민족독립사상영향은 부근의 룡암평 동성학교에까지 미치였다. 1932년 4월 6일 일제토벌대놈들은 이 마을 군중들이 반일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죄명으로 수많은 청림교도들을 포함한 무고한 백성들을 마구 살해하고 마을과 명신학교를 불태워버렸다.
1930년 10월, 대성중학교의 지하당조직과 청림교도들의 노력으로 부속소학교-무산아동학교가 창설되였는데 리혁, 석희만 등 5명의 교원들이 150여명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4년 이 소학교는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동흥소학교와 합병하였다가 1935년에 일제놈들에 의해 페교당하였다.
1939년 6월 15일에 일제놈들은 대성중학을 완전히 접수하고 동만성립 룡정제2국민고등학교로 고쳐버렸다. 대성중학교는 창립되여서부터 접수될 때까지 18년간에 14기에 걸쳐 476명의 학생을 졸업시켰다. 졸업생들가운데는 저명한 항일렬사 김정렬, 리환 등 동지들이 있었고 동북항일련군 제7군 3사 정치부주임 리일평, 항일련군 제1군 제1사 참모장 리민환 등 항일간부들도 있었으며 조선중앙의 고위지도자인 박성철, 한국의 저명한 문학가 박계주 등 세계적인 인기인물들도 있었다.
간도에서의 청림교 활동상황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백두산에 올라 조선개국신왕 단군제를 지내면서 일본놈들이 멸망할것을 바라는 기도를 드렸다. 이것은 매우 의의가 있는 활동이였다.백두산에서의 단군제는 1920년부터 1935년 영막전을 짓기까지 15년동안 그치지 않았다. 매번 제사때마다 단군님께 드리는 제물준비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청림교신자 가족들에서는 벼를 손절구에 찧어 귀가 떨어지지 않은 쌀알들을 저가락으로 골라서 진지감으로 하였다. 그다음 향불 대신으로 백지를 태우면서 신왕의 령혼을 청하고 천지물을 떠놓고 제물을 차렸으며 3층제단에 올려놓고 림창세, 현기정, 지창우 등 사람들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제를 지냈다. 망국노의 설음과 의분에 북받친 눈물이 그들의 흰두루마기를 15성상이나 적시였다. 개척도 되지 않은 백두산으로 700리 길을 톺아오르며 소발구에 제물과 식량을 싣고 비바람을 맞아가며 15년간 단군제를 지냈다는것은 실로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해마다 음력 정월 초이레날과 칠석날이 되면 청림교도들은 꼭 가족들을 모아놓고 북두칠성에 기도를 드리군 하였다. 청림교도들은 북두칠성을 극진히 믿으면서 호인상제 등 신도가족대사에 발벗고 나서서 서로 돕고 부조하면서 사이좋게 지냈다. 청림교는 반일성격을 띤 비밀결사였으므로 그 성원다수가 서로 친밀한 친척관계인것도 사실이였다.
림창세는 신도들에게 교회를 "사회"라고 부르라고 하면서 사람지간의 평등을 몹시 강조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교주"로 부르는것을 꺼리면서 "림선생"이라 부르라고 하였는데 그가 청림교를 다시 일궈세웠다는 의미에서 존경의 뜻을 담아 "림청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림창세는 현기정을 제2호 인물로 정하고 그를 "현장의"라 불렀고 임방혁을 "임학감"이라 하고 지창우가 사숙선생을 한 경력이 있다 하여 "지선생"이라 불렀다. 그리고 또 리준기를 "리도유사", 박창을을 "박희장", 장섭을 "방회장"이라 불렀다. 당시 기타 종교와 마찬가지로 청림교도 룡정 경찰특무과의 감독하에 활동을 진행하여야 하는것만큼 일어와 한어에 능한 방회장은 지도성원들과 함께 특무과에 가는 일이 퍽 많았다.
청림교에서 주장하는 생사관은 이러하였다. 즉 사람은 죽으면 모두 조상의앞에 보이게 되는데 조상들은 자손들이 생전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면 기뻐한다. 저승의 조상들은 늘 현세의 자손들을 위해 노력을 다한다. 때문에 반드시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극진히 지내야 한다. 가정에서도 효행을 모든 행실의 근본으로 삼았는바 자식의 불효한 행위는 부모들의 엄격한 단속을 받았다. 청림교도들이 읽는 책은 흔히 베껴쓴 "두운집"이나 "룡비어천가"같은것들이였다.
1935년 림창세는 부호들인 석화준, 남홍윤, 박두학을 동원하여 자금을 모아 룡정 동산기슭에 벽돌과 기와로 영막전(永幕殿)을 지었다. 전각에는 위장물로 첫줄에 일본개국신 천조대신과 서울총독부에서 공개적으로 걸던 조선말대황제 고종황제초상을 일부러 모시고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초상 그리고 조선개국왕들인 단군왕, 고주몽동명왕, 박혁거세왕, 리성계왕의 비석과 각 왕조의 애국명장들인 을지문덕, 온달, 강감찬, 김유신, 리순신장군의 비석을 모셨다.
영막전에는 전문경비를 맡아보는 리종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매번 기도활동이 있을때마다 그는 밖에서 망을 보면서 일본놈들의 동정을 살피곤 하였다. 1935년부터 1944년 체포에 걸리기전까지 9년동안 청림교도들은 달마다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에 200여차에 단군제를 지내면서 일본놈들의 멸망을 빌고 또 빌었다.제사때마다 림창세가 외운 주문은 이러했다. "영명하신 개국신왕 단군님과 선왕님들 그리고 애국충신들이여, 망국노 3천만 백의동포를 가엷이 여기시여 강도 왜놈을 하루속히 멸망시키고 우리 민족의 국권을 회복시켜주옵소서..."
1942년 청림교도들은 룡정 토성포에 중국고대개국군주들인 3황5제와 주무왕의 청석비를 세웠다.이것은 일본놈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것으로서 청림교는 일본, 조선, 중국의 모든 개국왕들을 다 숭상한다는것을 표방물로 한것이였다. 이를 드러내놓은 리유로 청림교는 3황5제 비석앞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면서 "조선에도 3황5제와 같은 성인들이 나타나 자기 나라를 다스려주옵소서"하고 빌었다. 이러한 거동들은 또 지방 한족지식인들의 호감도 사게 되여 청림교와 지방의 유교계 인사들과의 련계도 밀접해질수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자 림창세는 "일제는 잠시나마 인도 지나반도와 남해군도, 싱가포르 등지를 점령할수 있으나 결국에는 큰코 다쳐 패전하게 되며 동북삼성을 고스란히 중국에 바치게 된다"고 예언하였고 일제의 "검속", "강제징병", "근로봉사"등 악독한 정책을 폭로하면서 청림교도들에게 "나라를 사랑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왜놈들과 대항하여 싸울것"을 호소하였다. 이를 위해 림창세는 대오확장에 전력을 다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림창세를 비롯한 중견들은 즉시 행동하여 뜻이 맞는 한패의 사람들을 물색하여 청림교에 가담시켰다. 새로 들어온 청림교도들은 영막전에서 "조선개국선왕님과 애국충신들의 뜻을 이어 목숨 바쳐 조선독립을 위하여 싸우겠습니다..."라고 선서하고 림창세에게 큰절을 올렸다.
태평양전쟁이 고조기에 들어선 때 림창세는 천문과 주역을 보더니 "련합국이 승리하고 왜놈들이 망한다. 조선은 3국정립의 형세(두개 조선, 해외조선인)를 이룰것인바 해외병마가 자퇴하여야 통일이 가능하다. 자퇴하더라도 자칫하면 10리에 한호도 남기 어렵다", "하늘이 불과 물로 선악을 가려내니 부디 착한 일들을 많이 하라"는 예언을 나기였는데 그에 대한 리해는 교포들마다 달랐다.
1944년 6월 림창세는 50여명 교도들을 룡정서남쪽에 있는 간도총령사관을 곧바로 마주한 대포산에 올라 일본제국주의패전기도제를 지내고 교도들에게 일제히 일떠나 조선독립의 봉화를 지필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기도에 응한 사람들의 명단을 불렀는데 3천명이였다. 이 명단은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내가 깨끗이 정자체로 베낀것이였다.
이 사건을 탐지해낸 일본헌병대는 혈안이 되여 미쳐날뛰였다. 1944년 여름에 일본놈들은 속이고 협박하고 돈으로 매수하는 등 수단으로 사실의 진상을 아는 일부 사람들을 정탐으로 내세워 제1차검거를 펴나갔다. 일본헌병대는 5만원의 거액을 검거에 써가면서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고 기회를 노렸다. 사건의 진상을 거의 파악한 뒤 간도헌병대장 와세가와는 간도성 경찰청장 나까무라와 협의한후 1944년 12월 10일 밤에 돌연습격으로 일거에 청림교도 70여명을 체포하였다. 나도 이날 놈들에게 검은 헝겊으로 눈을 싸매인채 아버지 박두학과 함께 룡정헌병대에 끌려갔다. 고문취조과정에 놈들은 때리고 또 얼리면서 광명중학교 사생들에게 무슨 반일선전을 하였는가를 캐여물었다.모른다고 고집하는 나를 어떻게 때렸던지 나는 오른쪽 두번째 갈비뼈가 부러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반일선전을 한일이 없고 아버지가 한 일은 전혀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이리하여 광명중학교 교원이나 동창생가운데 나로 하여 헌벙대에 체포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1945년 3월 8일경에 고급법원에서는 연길법원에 내려와 공개재판대회를 열었는데 당사자가족이 참석한 군중석에 나도 끼여 앉았다. 공개재판결과 림창세를 사형에, 임방혁을 무기형에, 박두학을 20년유기형에, 최진형을 15년유기형에,리준기 등 3명을 10년 유기형에, 박일관 등 4명을 7년유기형에, 현원길 등 3명을 5년유기형에, 리종률을 3년유기형에 각각 언도하였다. 그외의 사람들은 무죄로 풀려나왔으나 일본놈들의 주요혐의대상에 들려 그 구박이 비일비재였다.
1945년 5월 10일에 간도헌병대는 화룡현의 두도구, 동성구, 광성구, 서성구 등지에서 제2차검거를 벌려 40여명의 청림교도들을 붙잡았다. 놈들은 체포된 교도들을 두도경찰서에 집중시키고 화룡현경무과장과 두도구경찰서장의 사회하에 한바탕 훈계를 퍼붓고는 모두 석방하였다.
이 사건으로 하여 나의 삼촌 박두공은 제1차검거에서 놈들에게 시달림을 받은 미열로 병이 들어 석방된지 일주일만에 세상을 뜨고말았다. 아버지 박두학은 "8.15"광복을 맞아 쏘련홍군에 의해 해방되였으나 감옥의 모진 고문에서 얻은 병으로 끝내 저세상 사람이 되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