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연곡과 평창의 경계에 비만 오면 땅이 질어진다고 해서 지명이 된 진고개, 해발 960m의 고위평탄면에 세워진 진고개휴게소에서 길은 오대산 노인봉과 백두대간 동대산으로 나뉜다.
진고개에서 노인봉까지 3.9km, 계절은 다르지만 네 번째 같은 길을 걷는다. 언제나처럼 초입의 목초지대는 나른한 안락감을 준다. 널따랗고 풍성한 초록융단은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워서 어쩜 지루하단 생각까지 들게 한다.
“평화가 지루하다고?”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사치스런 사고방식을 지녔군.”
그다지 평화를 느껴보지 않은 사람에게 마냥 지속되는 평화는 과연 평화롭기만 할까. 동창산악회의 절친한 친구이자 산우인 동익, 남영, 영만과 한담을 나누며 천천히 걷는데 누군가 등산화를 툭 건드린다.
물기 머금은 풀잎이며 자기색깔 뚜렷한 야생초들이 외지에서 온 손님들을 시끌벅적 반기는 것이다. 산이 아니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넉넉한 외갓집과수원을 둘러보는 기분이다. 뒷산오솔길처럼 혹은 파란 잔디 풍성한 공원길처럼 다감하기 이를 데 없다.
멀리 물결구름 아래로 한가로운 정원 같은 황병산이 눈길을 잡아끈다. 가던 걸음이 자꾸만 멈춰지고, 멈춰 서서는 눈길 돌려 사방을 둘러보게 하는 곳이다. 걸으면서도 누군가 곁에서 보호해주는 느낌을 갖게 하는 곳이다. 그런 느낌을 받으며 사부작사부작 걷다보면 어느새 노인봉 정상이다.
해발 1338m의 노인봉은 높지만 전혀 수직적 높이를 인식하게 하지 않는다. 여느 산들처럼 솟구쳐 뻗어올라 고개 치켜들어 가야할 길 헤아리게 만들지도 않는다.하늘은 여지없이 맑고 푸르다. 그 아래에 산객들과 친숙해진 다람쥐 몇 마리가 반기는 노인봉이다.
정상에 우뚝 솟은 화강암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백발노인을 연상시킨다 해서 노인봉이라고 이름 지었단다.
“우리나라 산들은 이름도 참 쉽게 짓는 거 같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백운산, 청계산, 가리봉, 비로봉, 노적봉, 천왕봉……. 동명이산, 동명이봉이 너무 많아.”
때론 정겹기도 하지만 최근 주소지를 재정비한 것처럼 관할중앙부처가 지자체와 머리를 맞대 전국의 산과 봉우리, 폭포, 산길 등의 명칭을 정비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산의 우열을 가려 100대 명산을 구분 짓는 열성이면 어렵잖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되잖을 일에 오지랖 넓히지 말고 가자. 철철 물길 소금강으로.”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려는 요원한 바람을 버리고 하산채비를 한다. 백발성성한 노인이 되어 걸음걸이조차 버거울 때면 여기 노인봉이 더욱 그리워지겠지. 평화스러운 진고개는 얼마나 아른거릴까.
“아직 먼 훗날의 일 염두에 두지 말고 가자. 물소리 우렁찬 청학동으로.”
물 흐름 이명이 사라지지 않는 청학동
오대산국립공원에 속하는 소금강은 원래 청학산이었다. 율곡이 ‘청학산기靑鶴山記’에서 그 모습이 금강산과 흡사하여 작은 금강산, 즉 소금강이라고 표현한데서 유래되었다. 산세의 수려함, 눈에 비치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금강산에 두고 율곡은 표현했겠지만 소금강은 눈에 차는 것뿐 아니라 귀에 담기는 것, 피부에 와 닿는 것, 거기에 더해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까지 후련하게 하는 에너지를 내뿜는다. 소금강은 올 때마다 그런 에너지를 흡입하게 해준다.
정상 바로 아래로 노인봉대피소가 있는데 아마도 계곡물이 불어 하산이 불가능할 때를 대비해 만들어놓은 듯하다. 대피소 안은 넓지는 않아도 바람을 차단하여 겨울이면 언 몸을 녹이며 쉬었다 가기에 적절할 듯싶다.
여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낙영폭포를 보게 된다. 가뭄 탓인지 소금강계곡 최상류의 낙영폭포 물줄기는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많이 가늘어졌다. 노인봉에서 계속 허리 굽혀 내려서야 하는 한여름 소금강은 계곡에서건 나무숲에서건 옹골찬 푸름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 긴 하산로에서 거리 가늠할 틈 없이 여기저기 눈 돌리다보면 어느새 가슴은 뻥 트여 있고 귀에서는 물소리가 이명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낙영폭포가 그 시발점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끼니를 때우고 가자.”
낙영폭포 지나 물 많고 골 깊은 곳에서 바리바리 싸온 걸 꺼내먹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다. 산길 내려와 골을 트는 실바람이 후련하다. 출렁출렁 암반 적시는 계곡물은 더욱 후련하다. 생기 돋는 녹색수풀 지나 골을 트는 실바람 맞으며 쉬고 나니 후련하고도 날아갈 듯 개운하다.
노인봉에서 발원하는 연곡천의 지류인 길이 13km에 달하는 청학천으로 맑은 물과 급류, 폭포, 암반, 암벽이 이어진다. 마의태자가 은거하여 망국의 한을 풀고자 쌓았다는 아미산성을 비롯해 구룡연, 비봉폭, 무릉계, 옥류동, 만물상, 선녀탕, 망군대, 십자소, 세심폭 등의 절경은 금강산 못지않아 찾는 이들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이들 장소를 포함한 소금강일대 23㎢는 오대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5년 전인 1970년에 이미 명승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아직도 싱싱한 약관의 틀에 사는 것 같은데
멀 것만 같던 불혹 진작 지났고
지천명 유수 같은 흐름도 곧 폭포수에 휩쓸리겠지만
암팡진 골산 오르면서도 무르팍 아직 바람 새들지 않으니
맘만 달리 먹으면 나이는 오히려 방부제일 수도 있지 않겠나.
아무리 힘줘 붙든다고 손아귀에 잡힐 세월이던가.
외곬 세월흐름이지만 유연히 편승하는 게 정중동,
자연의 무쌍한 변화마다 수용하는 심산고봉의 모습 아니겠나.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어디선가 똬리 틀고 기다릴 낯선 그림자의 눈길,
무시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행복은 호주머니 속 보석처럼
손쉬운 점유물이 아니겠나.
그렇지 않음 귀하디귀한 앞으로의 여정이 아이들 들뜬
소풍길은 고사하고 지팡이에 의지한 혼돈 속 겨운 고행이
될 것 같지는 않은가.
봉우리 위 자수정처럼 부서지는 햇빛 유혹에 흠뻑 빠져
금방이라도 푸른 물 쏟아낼 듯한 녹음,
수채화 병풍처럼 넓게 펼쳐진 단애
노을 검붉게 물들면 물든 대로,
자락마다 어둠 깔리면 깔린 대로,
세상 움직이는 그대로 푹 빠져드세.
여기가 어디던가. 청학동, 거기서도 금강산에 버금간다는
소금강 아니던가.
너른 기와집 주춧돌 되지 않았으면 어떻던가.
비록 넉넉하진 않지만 진정 사랑하는 벗,
의義와 정情으로 굳어진 우리네 함께 하는데
시름에 붙들릴 겨를 어느 새라 있을 텐가.
모래밭 조약돌 무리에조차 끼지 못했으면 어떻던가.
보이는 것마다 바위,
딛고 걷는 길마다 옥수 흐르지 않던가.
그렇게 편안하게,
그렇게 안위하며 받아들이다보면
가쁜 숨 몰아쉬어 세상 밝히는 일출처럼,
혹은 숨죽여야만 바라볼 서녘 황홀한 일몰처럼
어느 덧 다가올 마지막 그림자마저
짜릿한 오르가즘처럼 넉넉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더욱 젊어져서 산을 내려오다
광폭포와 삼폭포를 지나고 철제난간의 긴 다리를 건넌 다음 그보다 더 긴 다리를 또 지나 백운대에 이르러서야 또 한 차례 숨을 돌린다. 바위에 걸터앉아 물살 잔잔한 계류에 지친 발을 담그면 물고기들이 몰려들어 발가락을 간지럽힌다. 휴식을 취하기에 최적의 장소인 널찍한 암반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했는데 도미노처럼 머리는 더욱 편안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세월 흘러 늙어지고 노쇠해지는 건 맞닥뜨려 싸워야할 대상이 아니리라. 늘 배낭 짊어지고 집을 나설 때처럼 편안하게 대하다보면 언젠가 다가올 죽음마저 보듬어 맞아들이지 않겠는가. 다 살았으므로 편안하게 그 순간을 맞이하고, 남겨진 이들도 훌훌 먼지 털어내듯 가벼이 잊는 게 순리에 맞지 않을까싶다. 한줌의 뼛가루가 얼마나 가벼운 건지를 깨달으면 무거워 호된 삶도 편안하게 여겨지기에.
등산화 끈을 조이고 다시 계곡을 내려가는데 주변암벽을 두텁게 휘감은 소나무수림이 울창하기 그지없는데도 부피와 무게를 다 털어버린 것처럼 가볍게 보인다. 붉은 빛깔의 침봉들이 높이를 다퉈 하늘을 찌르지만 하늘은 푸근히 감싸 안는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귀면암과 눈인사를 나누고 향로암, 일월암, 탄금대 등 기암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만물상을 내려서서 구룡폭포에 이른다.
구룡소에서 나온 아홉 마리의 용들이 제1폭 상팔담에서 9폭 구룡폭까지 폭포 하나씩을 차지했다니 아마도 어미용으로부터 균등하게 상속을 받은 모양이다. 8폭 하단에는 조선조 우의정을 지낸 미수 허목이 구룡연九龍淵이라고 멋지게 휘갈겨 새긴 전서체 글씨가 남아있다.
다시 마의태자가 군사훈련을 시키며 밥을 먹고, 율곡 이이가 고향인 강릉에서 공부하러 여기까지 왔다가 끼니를 때웠다는 널찍한 암반의 식당암도 주변풍치가 무척 아름답다. 그들 모두 식사를 마친 즉시 소화시켰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귀면암의 머리숱이 많이 빠지긴 했어도 아직은 정정해 보인다
“계곡의 수석이 깊이 들어갈수록 기이하고 눈이 어지러워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곳 소금강을 거닐며 율곡이 했던 말처럼 소금강은 계곡을 꺾어 접어들 때마다 다양한 기암이 현란하게 펼쳐진다. 자꾸 바라보다가 돌아서서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비구니사찰인 금강사는 깊은 참선에 잠겨있는지 마냥 고요하다.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 자기마음이 참 부처인지 알지 못하고, 자기성품이 참 진리인지 모르고 있다.”
고려 때의 승려 지눌이 지은 수심결修心訣의 한 구절이 적힌 금강사 문에서 작은 영혼이 더 작아지고 만다. 인근 영춘대 계곡에 큼지막한 바위가 하나 세워져 있다. 거기 솔과 글에 능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이능계二能契의 글자가 암각 되어 있고 계원인듯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그 오른편에 율곡이 썼다는 ‘소금강’이 한문정자체로 새겨져있다.
“자연훼손이야.”
“종이가 귀해서 그랬겠지.”
자연훼손을 벌하는 자연공원법이 발효되기 전이라 그랬던 걸까.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자연의 여백만 보면 낙서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나보다.
5분 여 내려가면 일곱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고 화장까지 곱게 해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연화담이다. 천연기념물 산천어가 살 정도로 맑고 찬물이 담긴 이곳에 물이 불어나면 이름 그대로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이라고 한다.
화강암계곡이 열십十자 모양으로 갈라진 십자소의 생기 넘치는 푸른 물을 보고 무릉계를 지나 청학산장까지 내려서자 어느덧 긴 소금강물길을 모두 지나왔다.
역시 충전시킨 에너지 덕분인지 피로감은 전혀 없이 몸도 마음도 말끔하게 정화된 느낌이다. 소금강물살에 세월을 띄워 흘려보내고 나니 더욱 젊어진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