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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3.29. 한일강제병합 이후, 1910.12.일제 조선인 105인 사건을 일제의 주장에 따라 아래와 같이 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판을 통해 허위 날조된 사건임이 밝혀졌다.
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되고 초대 조선총독으로 데라우치가 부임한다. 그로부터 4개월 뒤 1910.12 데라우치가 서북지방을 시찰한다는 소식에 독립운동가들은 그를 기차역에서 암살하려 한다. 하지만 일제의 삼엄한 경계 속에 결국 사건은 미수에 그치고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된다. 105인의 암살자, 조선총독을 노리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강제병합 이후 조선 총독부 초대총독이죠,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 발생했던 그날로 이야기를 시작해 봤습니다.
이윤석/방송인: 기차역 하니까 아무래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가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류근/시인: 배경도 계획도 많이 비슷하긴 하네요. 그런데 사실 저런 사건이 있는 줄을 몰랐어요. (이토 히로부미 와 데라우치 쌍둥이 같은 사건).
최원정: 미수라고 그랬으니까 총독이 죽은 건 아니잖아요, 어떤 사람인가요?
심용환/역사 작가: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을 당하잖아요. 이토 히로부미의 후임으로 왔던 사람이다 라고 얘기할 수 있고, 정식 이름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입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內正毅 (1952~1919)-일본 육군출신 초대 조선총독), 육군 장성출신이고 당시 육군성이라고 해서 일본내의 중요한 지위가 있는데 육군성의 육군상, 요즘으로 말하면 국방부의 국방부 장관격이 됐던 인물인 거죠. 이 사람 같은 경우는 조선의 식민지를 강력하게 주창했던 강경파 였구요. 그의 뜻대로 강제병합이 이루어지게 된 거고, 그 결과로 조선 초대 총독으로 오게 된 거죠.
이윤석: 이토 히로부미도 처음에는 식민지를 반대하는 척은 했잖아요. 그런데 데라우치는 노골적으로 대놓고 침략의 야욕을 보이는 그런 사람이에요. 어떻게 보면 이토보다 더 한 사람으로 나타난 거죠.
신주백/한림대학교 HK연구 교수: 사실, 데라우치는 이토와 달리 즉각적으로 병합을 하자 그래서 조선을 우리가 지배하자고 주장했던 사람이거든요. 조선 총독이 되어서 당시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조선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사람인데 총독은 입법, 사법, 행정을 하나로 해서 본인이 다 권력을 장악한 자리에 있었고요. 그만큼 이상이 높았던 거죠.
최원정: 이 사람이 취임사에서 조선인은 일본통치에 복종하거나 죽거나 한 가지를 택해야 한다 라는 얘기를 했다면서요?
신주백: 이 사람은 조선을 발판으로 만주까지를 일본의 손아귀에 넣어서 같이 통치할려고 하는 원대한 구상을 하고 있던 야망이 큰 제국주의자였습니다.
최원정: 무시무시한 놈이 왔어요. 당시 조선인들은 정말 제거하고 싶은 1호 대상이었을 거예요.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그래서 우리가 강제병합 당한지 얼마 안돼서 데라우치 암살사건이 일어납니다. 1910년 12월께 그때 데라우치가 압록강 철교를 준공하는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평안도 쪽으로 올라가요. 이걸 서쪽을 순방한다해서 서순(西巡)이라고 하는데,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이 데라우치를 암살하기 위해서 계획을 짰다는 겁니다. 시찰예정일이 12월 27일 경이었고 선천이라고 하는 곳을 지난다 이런 정보를 입수해요. 그래서 150명의 동지들을 규합해서 미리 준비 해논 총70정을 나누어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이윤석: 선천역으로? 지금 하얼빈 역이 떠오르는데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게 연상이 되는데 이번엔 워낙 대규모니까 이건 무조건 성공하지 않을까 이런 예감을 해봅니다.
이익주: 그런데 문제는 데라우치가 선천역에 내리지를 않아요. 거길 그냥 지나갑니다. 그래서 12월 28일날 1차 시도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최원정: 대규모로 기획한건데 그러면 이제 2차, 3차 시도는 해야될 거 아녜요?
신주백: 그래서 이분들이 다음날 데라우치가 선천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선천역에 설거다 라고 생각해서 다시 한번 계획을 재차 시도할려고 하는데 또 마침 너무 경비가 삼엄해서 이걸 뚫고 들어갈 수가 없게 되는 거죠. 그러다가 바로 사건이 새나가면서 검거 되어버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윤석: 그러면 지금 2차에서도 시도도 못해 봤다는 얘기네요.
신주백: 네, 네
이윤석: 그러면, 결국 아무 것도 해본 게 없는 아무것도 벌어진 게 없네요.
신주백: 그렇죠.
류근: 아까 150명이 검거 됐다고 그랬잖아요. 하얼빈을 생각해 보면 그때는 3명이 1조지만 안중근 의사 1명이 들어가 잖아요. 제가 볼 때는 150명 정도면 암살단 규모로는 부자연스럽지않나요? 이건 웬만한 군사작전 규모란 말예요.
심용환: 너무 많다.
최원정: 인해전술을 쓸만한 어떤 상황이 아니잖아요?
이윤석: 독립운동가 분들이 암살직전에 기념 촬영하잖아요. 윤봉길 의사가 1932년 거사 3일전 폭탄을 들고 찍은 사진, 이 사진이 이렇게 남아 있는데, 이럴 때 보면 거의 혼자 하시거나 많아야 거의 2~3명인데 150명이 지금 출동을 했다는 것은 발각 위험만 높이는 꼴인데, 이건 저도 이상하기도 해요.
최원정: 지금 총을 쏜 사람도 하나도 없는데 일본경찰은 어떻게 암살기도가 있었다는 걸 알았는지, 또 누가 범인인지 150명을 어떻게 추려냈는지? 굉장히 궁금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닌데요.
류근: 더군다나 이상한 게 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이윤석: 아마 용한 일제 헌병이 척보면 아무니다 무슨 일이 이써 시무니다 하고서~
최원정: 척 척 가려내서 너범인 너범인~
류근: 네가 범인이로구나~ 그렇죠. 모르면 아주 모를 수도 있는데 혹시 누군가 지레 자수를 했거나 그 안에 혹시 밀정이 포함됐던 게 아닐까요
최원정: 내부 고발~?, 내부고발이 제일 무섭잖아요
이윤석: 일제가 심어 놓은~
심용환: 잠시만요~, 그 시작이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권총 한 자루~ (가방을 열어보니 현금이 다발로 들어 있었다)
류근: 돈이다
------------암살미수가 발각된 건 돈 때문이다--------------
최원정: 시작이 이거부터 였다구요?
심용환: 네,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배경사건이 하나 있는데요. 안명근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안명근이 누구냐?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입니다. 이 안명근이 1910년 황해도 안악지역에서 조선인 부호들을 상대로 모금활동을 벌입니다. 서간도에다 무관학교를 설립하니 자금을 대라고 얘기를 하는데 협력을 안합니다. 협력을 안하니까 권총으로 막 위협을 하면서 질책도 하고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힘을 안써주냐고 하면서 일종 흥분도 하고 행동도 했는데 이후에 그런 사건을 경험했던 조선인 부호 중의 누군가가 밀고를 하게 됩니다. 결국은 안명근이 강도사건의 범인으로 검거가 됐고 이 사건을 안악사건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요게 데라우치 암살미수 한달 (1910.11) 전에 일입니다.
이윤석: 총으로 협박당했던 저 사람이 밀고를 한 거 같은데~ (류근 시인을 향해) 지금 나라가 망했는데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는 거 아녜요? 권총으로 라도 막아야 해~(일동 웃음)
류근: 내가 아니라니깐요, 난 민족시인이에요.
일동: 류근 시인도 우리 민족이었어.
류근: 그러니까 이제 이 돈가방이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이었다. 정말 일제총독부가 발칵 뒤집힐만한 일인 것 같애요.
심용환: 더군다나 안중근의 사촌동생이~
류근: 겁났겠네요~
최원정: 총독부가 발칵 뒤집힐만한 일인데 그 돈이랑 지금 우리가 처음에 얘기하는 데라우치의 암살미수 사건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예요? 어떤 연결고리인가요?
신주백: 당시 이 사건을 경무 총감부가 조사를 해보니까 처음에는 이게 군자금이라고 해서 잡아들였다가 추궁을 계속해 보니까 이게 무관학교 설립이 아니라 총독을 암살할려는 자금이었다 라는 거였죠.
류근: 그러니까 닭인 줄 알았는데 꿩이었다 란 건가요? 결국은 무관학교 설립보다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을 더 크게 해야겠다 라는 말이죠? 우연한 기회에 데라우치 암살시도를 포착하게 됐다 이렇게 되는 거네요?
이익주: 그래서 그 두 사건을 연계를 시킵니다. 암살모의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을 검거해서 조사를 하는데 이게 굉장히 큰 일이잖아요. 총독을 암살하려고 했다 이거는 한 두사람이 모의해서 될일이 아니다 자기들이 주장을 한 거예요. 그래서 조사를 해보니까 배후에 뭔가 조직이 있는데 그 조직이 신민회 라는 비밀결사였다 이렇게 발표를 해요 그래서 총독암살의 배후에 신민회가 있다 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는 거죠.
류근: 신민회가 이때 등장하는 군요.
심용환: 한국독립 운동사에 거목 중의 거목 안창호(安昌浩)[신민회를 창립]를 단정하고요. 당시 시기로 돌아가면, 안창호 선생은 미국에 계셨습니다. 1907년 2월달에 5년만에 귀국을 합니다. 귀국하자마자 뒤에 사람들이 따라 붙습니다. 요시찰 인물인 거죠. 일제의 감시대상 1호. 그가 돌아왔으니 이제 그가 무슨 짓을 하는지 보자 하는 건데 안창호 선생이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서 비밀결사단체로 세운 단체가 바로 신민회입니다.
이익주: 비밀결사잖아요. 그래서 이 존재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어요. 정말 비밀입니다. 그런데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신민회 라는 이름이 처음 노출이 된 거예요. 그것뿐 아니라 수사과정에서 암살의 배후다 그러면서 신민회의 조직과 규모 이런 것들이 속속 밝혀지기 시작한 겁니다. 여기서 문제는 신민회에 대한 기록이 전부 일제가 남긴 기록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기록을 지금도 얼마나 믿어야 할지~???
류근: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신민회 라는 것은 실체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라는 얘기인가요?
이익주: 실체는 분명히 있어요. 중요한 것은 신민회가 과연 총독암살을 모의했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일본식의 기록만 있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는 거죠.
이윤석: 애초에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베일에 가려진 단체가 아니겠습니까. 비밀로 해서 모르는게 많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애요.
최원정: 신민회 회원은 지도부가 아닌 이상은 딱 두명 밖에 모른데요. 그러니까 나를 소개해 준 사람~, 내가 소개시켜 주는 사람~,
류근: 말 그대로 점 조직~
최원정: 그렇죠, 점 조직인 거죠.
이익주: 안창호가 미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대한신민회 취지서 라고 하는 글을 써놓은 게 있는데 그걸 보면 신민회를 조직해서 하고자 했던 여러가지 활동의 목표들이 분명히 드러나는데요. 거기 보면 굉장히 눈에 띄는 게 있습니다.
-----------------해외에 독립군 기지건설-----------그러니까 우리가 국내에서는 더 이상 독립운동이나 국권회복운동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면 활동공간을 외국으로 옮겨야 될 게 아니냐. 해외에 우리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만주, 간도 이런 지역에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하자 이런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고 하는 거예요.
류근: 아까 말한 서간도 무관학교 설립자금과 통하는 면은 있는 거네요.
신주백: 신민회를 우리가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국가의 주인은 民이다. 그가 말하는 民은 새로운 상황에서 각성하는 民, 대한이라는 것을 자신의 어깨에 매고 나아갈 수 있는 民, 그것을 新民이라고 본 거고, 그 新民을 상징하는 뜻에서 新民會 라는 단체를 지었던 거죠. (안창호 삼선평 연설 中-국가는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요. 우리들 어깨에 대한(大韓)이란 두 글자를 각자 붙이고 있으니--중략). 선구적이고 선도적인 시대적 전환기에 적절하게 대안을 제시한 단체가 신민회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이윤석: 신하 臣자 아니라 새로운 新자다.
최원정: 새 나라에 새 주인이 되자! 이런 아주 깊은 뜻이 있는 건데 이 신민회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에 어떤 역할을 한 건가요?
심용환: 데라우치 암살사건의 수사를 담당했던 쿠니토모 라는 사람입니다. 기록인데 신민회는 경성에 본부를 두고 각지의 수령이 경성에서 회합해서 암살의 방침을 결정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류근: 본부도 있고 지부도 있었다. 완전히 내란사건의 몸통 및 배후세력으로 딱 찍힌 거네요.
이익주: 그래서 이 사건이 일어난 뒤 9개월 뒤에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마침 안창호는 그 전에 있었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때문에 이미 한국을 떠나서 중국으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이 조사를 받지는 않아요. 그런데 신민회 회장이었던 윤치호를 비롯해서 신민회 간부였던 양기탁 임치정 등 이런 사람들이 주모자로 검거가 되어서 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때 검거된 사람이 무려 700명이 됩니다. 700명이나 검거를 하고 수사를 해서 그 가운데 105명이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습니다. 그래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105인 사건이라고 우리가 부르게 되는 거죠.
류근: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늘 신민회와 105사건 이렇게 세트처럼 외웠잖아요. 그게 왜 그렇게 된건지 이제야 30년만에 이해가 좀 됩니다.
최원정: 이런 걸 참 그 동안 숫자로만 역사를 공부해 왔다는게 부끄러워요. 자, 이렇게 해서 105인 사건에 대한 재판 진행이 되는데 이때 검거된 구속된 사람만 봐도 김구 선생도 포함되었지요. 신민회 지도부 뿐만 아니라 많은 그야말로 민족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또 연설을 좀 잘 하십니까. 재판과정이 굉장히 치열했을 걸 같은데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이 남아 있다고요.
------------------심용환: 여기 죄수들의 사진입니다. 하얀 죄수복 차림의 사람들은 우리가 여태까지 얘기했었던 데라우치 암살기도혐의로 구속된 피의자들입니다. 이 사진은 재판을 받으러 가는 길에 찍힌 모습들입니다. 이 사건의 정식재판은 피의자를 구속한지 9개월째 되는 1912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리게 됩니다. 이 사건에서 검거된 사람은 700명, 그리고 재판을 받게된 사람들, 즉 기소된 사람이 123명입니다.
이윤석: 강제병합 이후에 최대 규모의 구속사건이잖아요. 이 재판에 대해서 세간에서도 관심이 아주 높았을 것 같애요.
심용환: 엄청났구요. 재판에 대한 흥분, 혼란 이런 것들이 재판정을 감돌았다 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죄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지요. 죄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씌운 통이 있습니다. 이 통을 뭐라고 하냐면 용수라고 부릅니다. 용수를 쓴 죄수들이 이런 모습으로 방문객들 사이를 지나서 10명 단위로 그룹을 지어서 재판정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취하게 됩니다.
류근: 요즘도 피의자를 인권보호 차원에서 얼굴도 가리고 수갑도 가려주고 그러잖아요. 일제가 그런 의도로 저렇게 가려 주었을까요?
신주백: 죄수가 감옥을 벗어날 때 항상 씌웠던 건데 용수라고 말하기도 하고 통로라고 말하기도 하는 갓의 일종입니다. 죄수의 입장에서는 모멸감 내지 무력감을 심어주는 거고 죄수를 바라보는 사람한테는 공포심, 두려움을 심어주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거죠.
류근: 무죄추정의 원칙은 전혀 무시한 처사네요. 저건 처음부터 죄인이 아니거든요. 재판도 끝나기 전에~
최원정: 그것도 그렇고 저 많은 인원이 재판정에 들어갈려면 공간이 나왔을 까요.
류근: 한꺼번에 123명을 재판을 할 수 있나요?
심용환: 그렇죠, 좋은 지적입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충격적인 행동을 벌입니다. 뭐냐, 7000엔 이란 돈을 들여서 123명을 세울 수 있는 임시건물을 만들게 됩니다. 1910년도를 기준으로 해서 7000엔은 일본 본토에서 쌀 63톤을 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인데 소위 세기의 재판 이벤트를 벌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윤석: 어떻게든 한데 모아가지고 재판을 해서 유죄를 때리겠다~
심용환: 첫공판이 시작이 되는데 처음부터 단연히 피고인들하고 재판부 사이에서는 설전이 오가면서 팽팽한 긴장관계가 유지됩니다. 재판정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진이 다 말하지 못한 그날, 다음 이야기는 스튜디오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최원정: 저렇게 큰 돈 들여서 재판정을 다시 만든 걸 보니까 일본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 같애요.
이익주: 첫 공판에서 개별심문을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재판장이 한사람 한사람씩 심문을 하게 되는데, 맨 처음 나선 사람이 신효범이란 사람입니다. 재판장이 질문을 합니다. 재판장: 총독 암살을 신민회가 주도했고 신민회의 회장이 윤치호냐? 물어봅니다, 신효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런 대답이 나온 거예요. 재판시작부터 법정이 술렁이게 됩니다. 재판장: 왜 경찰에서는 모든 사실을 시인했느냐? 다그쳐요. 그러니까 (이윤석을 향해 이익주 교수) 큐~???
이윤석/신효범役: 그것은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소.
류근: 두 분이 사전에 뭔가 모의를 하신건가요?
최원정: 이런 팀워크입니다. 그냥 척~척~~
심용환: 지금 폭로가 이루어진 거지요.
최원정: 고문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니까요.
류근: 방청석은 당연히 술렁거릴 수 밖에 없는데~
이윤석: 이런 생각이 드는거죠. 고문이 도대체 얼마나 가혹했길래~ 이런 생각이 드는거죠.
신주백: 말로만 할 수는 없으니까~ 괜찮으시면 이윤석씨와 같이 장면을 연출을 해보고 싶습니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고문 도구들~ 이렇게 만져 보시면 진짜 못이예요. 기록에 보면 여기 피의자들을 눕혀놓고 고문하기도 하고, (고문방법사례-널빤지에 못을 박아 그 위에 눕게 하는 방법),
이윤석: 사람을 못을 박은 널빤지 위에 눕혔다구요?
신주백: 네, 네
이윤석: 누우면 몸에 못이 들어와 박힐 것 같은데요.
신주백: 그만큼 잔인했던 거죠.
이윤석: 제가 직접~
신주백: 아, 그러시면 안됩니다. 잡아 드릴게요. 보는 제가 떨려 가지고~
이윤석: 살짝 궁댕이를 갖다 대기만 했는데도 못이 옷을 뚫고 들어와요.
신주백: 사실은 이런 고문을 했던 장면이 일제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가 나온 적이 있어요. (물을 뿌리고 못을 이용 일본의 대표적인 고문법), 날카로움으로 따지면 저거에 못지않게 개인으로 고통을 주었던게 이 도구를 활용하는 건데 이걸 가지고 사람한테 찌르는 거죠 (또 다른 고문도구중 하나인 대나무 못), 그냥 찌르는게 아니라 손톱사이 발톱 사이에다 이걸 그냥 놔 두는 거죠. (고문방법사례-대나무 못을 손톱과 발톱 사이에 박는 방법).
류근: 저 드라마가, 백범 김구라는 드라마인데 당시 일제의 잔인한 고문 장면을 그대로 재연해서 논란이 일기도 했거든요. (잔인한 고문재연-논란이 된 드라마 김구), 지금 보기만 해도 끔찍한데, 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싶어요. 시청자 여러분들도 사실 보면 괴로운 것 같아요. (역사의 진실이라고 하니까 좀 견디면서 보자구요).
이윤석: 아까 상자 안의 못도 물을 계속 뿌리는게 혹시라도 기절해 버릴까봐 그러는가요?
신주백: 그런 것도 한 방법이기도 하고 물뿌리는 고문만 따로하는 경우도 있어요. 사람을 옷을 다 벗겨서 추운 곳에서 찬물을 훅 부어가지고, 얼음 기둥을 만드는 그런 방식도 있고, (고문사례방법-가장 추운 날 옷을 벗긴 후 찬물을 끼얹어 얼음 기둥을 만드는 법),
최원정: 도대체 고문이 왜 그렇게 다양해요?
신주백: 기록에는 72가지 라고 해요. 엄청난 거죠.
이윤석: (고문의자에 앉으면서) 이거는 사실 많이 봤던, 충신들 앉아있으면 이 인두로 막 지지고~,
신주백: 그냥 사람의 피부에 대면 상처가 그대로 남겠죠. 그렇게 하면 수준이 낮은 기술인 거예요. 그래서 일제가 고안한 고문법은 여기다 기름을 바른 상태에서 이걸 대면 상처는 적게 보이면서, 고통을 더 가혹하게 하는 교활하면서 잔인한 고문방법의 하나가 인두를 이용한 단근질을 통한 고문인 거죠. (고문사례방법-온 몸에 기름을 바른 후 인두와 담뱃불 등으로 단근질 하는 방법),
최원정: 기름을 칠해서 고문의 흔적을 안남기는 거예요?
이윤석: 고문은 과학이다 란 것도 아니고 흔적은 최소화하고 고통은 최대화하고 이런 걸 연구했다는 거 아녜요?
류근: 온갖 엽기적인 것은 일제 때 다 고안된 거예요.
이윤석: 너무 무섭다. 그런 생각 자체가 고문인 것 같애요.
신주백: 72가지 고문 가운데 고문 당했던 사람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고문이 바로 지금 들어온 이것입니다. 한상 잘 차려진 밥상이다. 진수성찬인데~
류근: 배 터지게 먹이는 건가요?
신주백: 아니예요. 고문도구예요.
이윤석: 음식에 독 같은 게 발라져 있어가지고 먹으면~?
최원정: 상한 음식?
이윤석: 이럴 수 있어요. 혹독하게 고문한 다음에 따뜻한 밥 한끼 먹이면서~ 자백하면은 계속 이렇게 먹을 수 있다는~
신주백: 사실은 사람이 당하는 고통에서 가장 힘든 고통이 재우지 않는 것과 두번째로 먹는 것과 관련된 고통입니다.
이윤석: 제가 한번 먹어보고 고문을 체험해 보겠습니다.
신주백: 아녜요, 먹는게 아녜요.
이윤석: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지요?
신주백: 고문 당해서 몸은 힘들고 배는 고프고 가장 힘들어했던 고문방법의 하나가 밥상을 자기 앞에 놔 두는 것입니다. 심지어 경찰이 그 밥상에 앉아서 고문 피해자를 놔두고 먹는 거예요. 먹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어요.
심용환: 밥을 안줬다는 그 얘기군요.
신주백: 그럼요, 고문이니까 (허기와 농간으로 고통을 느꼈을 독립운동가들),
이윤석: 고문한 사람들 앞에 앉혀놓고 밥이 넘어가나요?
신주백: 기술자니까,
이윤석: 인간 이하의 발상이예요~
이익주: 인간이 아니죠.
신주백: 그러다 보니까 어떤 일까지 벌어지느냐 하면 저런 고문을 당했던 사람이 자기가 입고 있던 옷 있잖아요. 옷 안에 있는 솜을 꺼내서 먹는다든지 자기가 누워있는 자리에 지푸라기를 먹는다든지 이런 걸로 해서 그런 고통을 감내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다보니까 심지어 16일이 지난 다음에 똥을 누는 사람도 생겨요. 그 기간 동안에 몸 무게가 70kg 이었던 사람이 44kg 으로 줄어들 정도로, 아주 잔인한 고문이었죠.
최원정: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잔인 무도한 짓을 할 수 있을까요
류근: 얼마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저런 식으로 당했을까 생각하면 정말 치가 떨리는 일이예요.
최원정: 이 사건이 9개월 만에 재판을 받았다니까 그 기간동안 계속 고문에 시달렸다는 얘긴데~
심용환: 당시 사건을 진두 지휘했었던 경무총감 아카시 라는 사람이 그 전에 러시아에 근무했던 사람이에요. (아카시 모토지로 明石 元二郞-조선총독부 경무총감), 그는 제정 러시아 시절에 러시아가 폴란드를 비롯해서 소위 말하는 제정 러시아의 식민지를 관할하면서 식민지에서 저항하는 사람들, 혹은 식민지 민족을 바로 이런 방식, 고문을 활용해서 통치를 했었던 것을 보고 배워왔던 거죠. 실제로 이 당시에 조사과정에서 정희순을 비롯해서 4명이 고문으로 인해 죽게 되고 3명은 정신이상까지 걸립니다.
류근: 왜 안그렇겠어요. 정말 그 잔인한 고문마저 모방을 해서 발전까지 시키는 놈들이군요. 실제로 그 데라우치 총독암살기도가 있기는 있던 거예요? 갑자기 의심이 들어요.
이익주: 있긴 뭐가 있겠어요. 유일한 증거가 자백이었어요. 자백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 당시 사건을 조작하고 심문을 한 일본경찰은 계속 연습을 시켰어요. 암기하도록 연습을 시키고 못외우면 또 고문하고 이래서 아주 철저하게 이야기를 꾸며 나갑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일본경찰이 짜놓은 각본에 맞추어서 다 외워서 허위사실을 자백하도록 만들었던 거죠.
이윤석: 자, 데라우치 암살미수 사건이라는 것하고 또 배후가 신민회라는 것들이 일제에서 날조 조작된 기획사건이었다 지금 이런 거죠?
최원정: 고문으로 만들어진 희대의 조작사건
류근: 고문얘기를 들으니까 고문기술자 이근안이라는 이름이 자동적으로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 현대사에서도 고문을 통한 허위자백으로 공안사건 날조하던 시대가 있었거든요. 가만 보니까 저 105인 사건 때부터 시작된 거 같애요. 당했던 피해자들이 줄줄이 나도 고문당했다 라고 나오게 되고 결국은 고문 때문에 허위사실을 자백할 수 밖에 없었다 라고 나오니까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가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잖아요. 검사측이 뭐라고 하냐면 자백을 번복하기 위한 번복일 뿐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윤석: 신효범이란 분에게 너무 감사하고 대단한게 그렇게 고문을 받았지만 법정에서 진실을 얘기한 것인데요. 그분이 얘기를 안했으면 우리는 지금도 조선총독암살미수사건이란 역사적 사실을 아마 사실처럼 믿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얘기했기 때문에 조작이라는게 밝혀지기 시작한 거죠.
이익주: 네, 고문에 의해서 날조된 사건이란 것이 거의 분명한데 그런데도 그 당시 고문을 받은 사람들은 훨씬 더 불리한 상황에 있었어요. 일제가 꾸며낸 것이라고 하는 것을 거꾸로 증명해야 되는 이런 어려움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이때 결정적인 증언이 등장합니다. 재판장으로 한번 가보시죠.
------------------익숙한 얼굴/재판장役-이상협 아나운서 등장----------------
<기소장>
12/26 평양에서 하루를 묵고
12/27 동지들과 선천역으로 옴
재판장: (이윤석을 향하여) 안태복 회장, 데라우치 총독이 선천역을 방문하던 날 총독암살을 시도하기 위해서 30여명을 이끌고 평양에서 선천까지 왔죠? 사실입니까?
류근: 잠깐만요, 여기서 누가 안태복 이에요?---------어리둥절-----------
이윤석: (재판장을 향하여) 어디 쳐다 보는 거예요?
재판장: 가운데, 당신!
류근: 고문당한 당신!
이윤석: 아, 제가 고문당했으니까 제가 안태국役 하겠습니다.
이윤석/안태국役: 교수님, 제가 범행현장인 선천에 있었던게 맞습니까?
신주백: 당시에 재판정에서 판사가 안태국에게 야! 피의자 당신, 선천에 있었어, 없었어? 라고 추궁을 하고 그랬을 때 안태국이 아니다 라고 말을 함과 동시에 이거를 꺼내듭니다.
이윤석: 아, 이런게 있었네요. 고맙습니다, 교수님. 자, 그러면 지금부터 제가 저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최원정: (이윤석씨를 향해) 눈빛이 달라졌어요.
안태국役: 자, 데라우치 암살미수사건이 있기전 12월 26일 날 재판장은 나 안태국이 평양에 있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뭔지 아십니까. 이게 바로 12월 26일날 서울 명월관 요리집에서 내가 직접 계산한 영수증이 올씨다.
최원정: 바로 전날에 있었던 영수증이니까 하루만에 선천까지 가기 힘들잖아요.
류근: 아니 평양에 있었다고 했는데 이건 뭐가 좀 문제가 있긴 있는데~
이윤석/안태국役: 내가 무슨 도깨비도 아니고 손오공도 아니고 어떻게 동시에 평양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을 수가 있겠소!?
심용환: 증거가 나온 거네요.
일동: 그러니까요,
이익주: 바로 그거예요. 그러니까 안태국이 평양에 있었다고 일제가 주장한 12월 26일날 서울에서 사용한 요리대금 영수증이 발견된 거죠 (결정적 증거1). 게다가 암살미수사건 당일날 안태국이 광화문 우체국에서 전보를 친 기록까지 나와요 (결정적 증거2). 그러니까 범행장소인 선천역에 안태국이 있지 않았다 라는 것이 분명히 증명이 된 거예요.
류근: 알리바이가 확실한 거네요. 거짓 재판 물러가라! 물러가라!
이윤석: 재판장! 설명을 해주시오!
재판장: 신성한 재판이오! 안태국이 30여명을 인솔하고 선천역에 들어갔다고 안태국 본인이 자백하지 않았소?
안태국/이윤석役: 그것은 혹독한 고문때문이오!
재판장: 당신이 선천역에 도착했을 때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진술했는데 사실이오?
이윤석/안태국役: 아이구, 이거 오늘, 교수님이 저를 도와 주셔야 되겠습니다.
신주백: 정주 헌병대장이 진술한 내용에 보면, 경비가 굉장히 많았다. 두번째는 선천역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전부 가방 소지품 검사를 했다. 그래서 연필을 깎는 자그마한 칼조차도 발견이 되면 다 회수했다. 총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은 도저히 불가능한 거예요.
최원정: 우리 변호사 잘 쓰셨네.
안태국役: 들었소? 총은 무슨 총을! 연필 깎는 칼도 지금 못가져가는 형편인데 이 모든 것은 일제에 의해서 날조된 사건입니다! 답해 보시오!
심용환: 질문 하나 또 있습니다. 안태국이 30명의 사람을 데리고 왔다 라고 얘기를 했는데 철도국 직원이 그날 왔던 사람을 검토해 봤더니 총 승강자수가 9명 밖에 없다는 거예요.
최원정: 증거가 차고 넘치네(결정적 증거3)
재판장: 정숙! 지금 안태국이 제출한 모든 증거물을 기각한다!
류근: 이건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구먼!
재판장: 조용 조용! 재판을 더 진행할 수 없으니 휴정 하겠소 (재판장 급히 퇴장함).
최원정: 저런 증거들은 결정적인데 저걸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진짜 너무 한 거 아닙니까.
류근: 영화 “변호인”에 보면 배우 송강호씨가 이런 말을 해요. “이 사건은 온통 엉터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진술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가혹행위, 즉 고문이 있었죠? 고문한 적 없다구. 이 사건은 온통 엉터리로 가득차 있습니다.--영화 <변호인>中--.어떻게 허술하게 끼워 맞출 생각을 했을까요?
최원정: 변호인에서 사건도 완벽하게 조작된 사건이었잖아요.
이익주: 재판정에서 안태국은 이런 말을 해요. “이 안태국은 서도 죄요 앉아도 죄냐”
이윤석: 답정너 라는 말 아시죠?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해! 정답을 정해 놓고 편파적인 재판을 하는 거,
심용환: 당시 재판을 지켜보던 사건 책임자였던 쿠니토모 경사와 아카시 경무총감은 그 자리를 황급히 도망칩니다.
최원정: 사실 그들은 굉장히 망신스러웠겠죠.
이윤석: 당황한 것 같애요. 저 사람들! 날조하면 넘어 갈 줄 알았는데~, 진실이 폭로가 되니까
최원정: 분위기는 참 무죄인데요~
이익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심 재판부는 재판을 강행하고 일방적으로 검사가 구형한 형량을 그대로 선고합니다. 그래서 105명에게 유죄를 선고하는데 이 105명에게 내려진 형량을 다 합치면 648년 정도됩니다.
류근: 이런 억울한 재판이 세상에 또 어디 있습니까!
최원정: 이렇게 무리하게 날조하게 된 이유가 있었을까요? 이 105인 사건이 일제에겐 꼭 필요한 뭔가 있었던 얘기예요.
이윤석: 왜 이렇게 까지 하는 거예요?
이익주: 그 당시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그리고 식민지를 막 만들었잖아요? 그 과정에서 한국인들 저항이 의병의 형태로 폭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의병 대토벌로 제거를 하죠. (남한 대토벌-1909년 일제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펼친 군사작전). 또 어느 정도 제거가 됐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안악사건이 벌어지고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니까 굉장히 큰 충격을 받은거죠. 여기에 대해서 뭔가 대응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런 사건을 조작을 하게 한 것입니다.
류근: 일제 입장,에서는 이 사건을 빌미로 해서 아예 독립운동의 씨를 말려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 같애요.
심용환: 105인 사건을 통해 기소됐던 123명의 면면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자, 보시면 일단, 선천군이 위치한 평안북도에 살았던 사람이 89명 72% 정도로 퍼센티지가 되고요 평안남도가 27명, 황해도가 2명, 그리고 서울이 5명입니다. 대부분이 지금 서북지방이죠. 지리적인 독특성이 딱 드러나는 거죠.
류근: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서북지역에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겁니까?
심용환: 아주 특이하죠. 실제로 강제병합을 전후해서 의열활동과 암살 등 이런 시도들이 많이 이루어지는데, 여기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출신이 어디냐 황해도입니다. 두번째 이완용 살해미수사건 인물 이재명 의사 기억하시죠. 이분이 바로 평안남도 출신입니다. 그리고 또 한명 예전에 친일파 스티븐스를 암살했던 사람 장인환 의사도 평안남도 출신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서북지방 출신이라는 것이 우리가 눈여겨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최원정: 아주 재미난 우연의 일치네요. 안창호 선생님도 평안남도 출신이죠? 김구 선생도 황해도 출신이구요. 왜 그랬을까요?
신주백: 일본이 정말 기독교 세력에 대해서 부담스러웠다는 것은 사실은 교회와 교회 간에 연결되어지는 네트워크가 항상 있었다 라는 것이죠. 그 연결 네트워크가 서북지방이 강했고 그들이 사실은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활을 할 우려가 있으니까 사전에 막아야 된다 라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눈의 가시 같은 존재로서의 서북지역의 기독교 세력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걸 정리하는게 우선이었고,
이익주: 실제로 안창호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을 때도 국내는 활동기반이 없잖아요. 그런데 바로 이 기독교계와 연결이 되어서 활동을 합니다. 상동교회인데요. 상동교회 청년회를 발판으로 안창호가 활동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보면 우리 3-1운동 때 이 기독교가 독립운동에서 구심점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이때부터 시작이 되었던 거고, 그런 만큼 기독교는 일제에서도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던 거죠.
신주백: 기독교가 민주나 자유나 이런 서구적 가치를 옹호하고 그걸 지킬려고 하는 측면이 있어요. 그걸 가장 많이 추구했던 집단이 평안도를 중심으로한 기독교 세력이었던 것인데 그 기독교 세력들의 결집체 중의 하나가 YMCA (기독교 청년회)예요. YMCA의 부회장을 맡은 사람이 윤치호고 윤치호는 당시에 일본이 보기에 신민회 회장이고 따라서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할려고 하는 사건을 만들어내면 서북지역의 기독교 세력들을 탄압하는 것과 동시에 그 기독교 세력의 배후에는 사실은 선교사들이 있었던 거죠. 미국 쪽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의 기를 꺾어놓을 수 있다. 1910년 8월 이후 식민지 초기에 빠른 통치의 안정, 지배 효율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라고 일본측은 생각을 했던 거죠.
-------------------------다시 보는 사건의 전말----------------------
일본경찰국장: 골치 아픈 불령선인들을 정리할 좋은 기회다.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 신민회 회원과 지식인, 반일 사상가들의 명단 있지?
경찰: 무슨 죄명으로 체포할까요?
경찰국장: 데라우치 총독께서 압록강 철교준공식을 하러 신의주가셨다. 그들은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던 것이다.
심용환: 약간 다른 각도에서 흥미롭게 지켜볼 게 있는데 일제의 정세 인식이 조금씩 바뀌어요. 경무총감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가 강제병합 직후사정에 대해서 본인이 썼던 기록이 있는데 조선의 정세는 대체로 보아 폭도들에 의한 무장봉기의 시기는 지났고 이제 더욱 어려운 것은 위험한 비밀결사의 발생이다. 신민회 같은 비밀결사의 발생 같은 것들을 심각하게 주시하고 있었던 거죠.
류근: 그러니까 이제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저항의 DNA는 이어질 것이다 라는 얘기를 했다는 뜻이군요.
이익주: 그렇죠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고 있었어요. 무슨 회 무슨 회, 그런데 이렇게 많은 모임이 만들어지는 가운데 신민회는 해외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자, 이런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걸 그냥 두면 앞으로 정말 커다란 화근이 될 것이다 라는 판단을 그 당시 총독부가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윤석: 이제 조금 감이 잡히는 것 같애요. 왜 그렇게 고문까지 하면서 105인 사건, 즉 조선총독암살미수사건을 날조를 했는지가, 뭔가 한방에 정리할려는 무모한 욕심이 있었어요. 서북지역의 기독교 세력, 그리고 안명근 안악사건에 관계된 해외독립운동세력, 그리고 비밀결사인 신민회, 그리고 미국의 기독교 선교사까지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일망타진 할려다 보니까 너무 무리를 한 거에요.
신주백: 요점정리를!
류근: 전문적인 용어로 일타사피 라고 합니다.
최원정: 선교사를 잘못 건드리면 비밀외교분쟁으로 갈 수 있는데~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되는 부분 아닌가요?
신주백: 네, 맞습니다. 사실은 일본이 가장 조심했던 게 외국의 시선이었고 종교인들에 대한 탄압이었는데, 선교사들이 사실 했던 역할 중에 105인 사건이 일어나자 언론이라든지 미국에 있는 인사들에게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걸 알리는 역할을 했구요. 그러다 보니까 해외에서 주목할 때는 기독교 탄압사건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더 강하게 되었어요.
류근: 그런 일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아닙니까.
신주백: 그러다 보니까 외국인 기자들도 법정에 와서 많이 취재를 했던 거죠.
최원정: 기독교 탄압 프레임으로 가니까 세계인들의 집중이 되면서 사실 일본 입장에서는 더 부담스러워진 거예요.
류근: 미국선교사들을 엮어서 축출할려고 했던건데 그게 오히려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게 됐네요.
이익주: 세계적인 이목, 이것이 이제 두려운 거죠. 외국기자들이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하러 오니까 재판정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렇게 아주 혹독하게 고문하고 재판을 했었는데 2심 부터는 일단 재판관부터 온건파로 물갈이를 하고 2심과정을 취재한 외신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죄수들이 법정에서 모셔졌다. 안내 받고 들어왔다 ushered in 이라고 하는 표현을 합니다. 수갑도 채우지않고 간수들이 호위를 하고 또 잘 다려진 깨끗한 옷을 입고 들어오는 장면을 연출해요.
심용환: 보는 눈을 의식하네요.
류근: 그런데 그게 사실 가증스럽죠, 다 아는데.
신주백: 그렇게 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나도 너희들만큼의 문명국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거예요.
이윤석: 그래서 재판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심용환: 재판결과가 2심서 뒤집어집니다. 1심에서는 105인 사건 105명을 유죄로 선고했다면 2심에서는 신민회 지도부로 유명했었던 양기탁 윤치호 등 6명 한테만 유죄로 인정하고 무려 99명이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납니다.
신주백: 그런 재판은 없어요.
류근: 그래도 어쨌던 신민회는 유죄다 이걸 끝까지 유지하고 있는 거잖아요. 당초 검거했던 700명에서 1%에도 못미치는 거 아닙니까. 이쯤되면 105인 사건이 아니라 이름을 바꿔야 하는거 아녜요? 조선총독부 날조실패사건! 조선총독부 대굴욕사건-뭐 이런 식으로 바꿔야 될 것 같애요.
이윤석: 아니면 두 개를 합쳐서 조선총독부 날조 대굴욕 사건해서 조날대사!
신주백: 발음이 좀~
심용환: 인상적인 건 어찌됐던 재판을 통해서 이 문제를 처리할려고 했다는 시도가 좀 인상적이란게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나름대로 자기들이 문명국이다 이거죠. 실제로 재판을 열어보니까 아까 봤던 증거불충분으로 시작해서 여러가지 문제들이 폭로가 되면서 소위 말하는 동양의 유일한 문명국이라고 불리는 일본의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폭로가 되어 버리니 정말 뜻하지 않은 결과로 사건이 귀결됐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류근: 그런데 오늘 저는 얘기를 하면서도 문득 이런 노래 가사가 떠올랐거든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일제의 폭압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들의 용기와 지켜낸 진실-----,
최원정: 결국 아쉽지만 신민회 이후의 활동은 접죠? (일제의 성과-105인 사건 이후 신민회 해체).
신주백: 일본의 입장에서는 성과를 거둔 측면은 있는 거지요. 이 사건을 조작하는데 주도했던 아카시는 나중에 대만 총독이 됩니다. 출세를 다시 한 거죠. 일본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탄압함으로 인해서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할 수 있는 조직적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게 좀 어려워지는 상황이었고 종교세력들을 위축시켜서 통치의 안정을 기하는데 효과를 거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윤석: 만약에 이걸 영화로 치면 기획단계에서는 암살조작 픽션 이었는데, 개봉하고 나니까 고문폭로 다큐가 된 거예요. 이렇게 까지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뭘까 생각을 해보면 이렇게 날조를 해서라도 소탕을 하지 않는다면 안될 만큼 우리의 독립의지가 일제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던 것이 아닌가. 그만큼 우리 선조들의 독립을 향한 의지가 식지 않고 지속이 됐다는 걸 느낄 수 있고 숙연한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이익주: 중요한 건 신민회일텐데 이 신민회가 갖는 의미가 뭘지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지금까지 의병전쟁과 자강운동을 이야기했는데 (한말 항일운동의 노선: 의병운동 vs. 자강운동), 의병이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자강운동하던 사람들이 그것을 폭도라고 이야기 했었잖아요. 그런데 이 신민회는 의병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좀 더 효과적이고 장기적인 무장투쟁을 계획했다는 점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죠. 해외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만들고 독립운동을 양성하고 이때까지 두 갈래로 진행되어 오던 항일독립운동의 두 흐름이 신민회에서 하나로 합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최원정: 이후 전개되는 독립운동에 신민회는 시작점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오늘 강제병합 이후 가장 대규모로 행해진 탄압 사건 105인 사건을 같이 얘기나눠 봤구요. 다음시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오늘 함께 하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5화, “105인 사건”에서 정리)
①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자, 그의 후임으로 1910.8.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內正毅 (1952~1919)가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 그는 육군 장성출신이고, 요즘으로 말하면 국방부의 국방부 장관격 인물, 조선의 식민지에 강경파, 조선 총독은 왕과 같이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행사, 그는 취임사에서 조선인은 일본통치에 복종하거나 죽거나 한 가지를 택해야 한다 라고,
② 당연히 그는 제거대상 1호, 1910.11. 안악사건이 터지자 조사과정에서 신민회 이름등장, 신민회 와해를 위해 두 사건을 병합, 데라우치 암살사건으로 연결조작, 그럴듯하게 날조 700명 검거하고 123명 기소, 1심 105명 유죄판결, 재판에서 신효범에 의해 잔인한 고문으로 허위 조작 드러나자, 2심 99명 무죄, 신민회 해체 위해 끝까지 5명 데라우치 암살기도혐의 유죄판결,
③ 신민회 창설자 島山 安昌浩는 기독교인, 인격자, 영특함, 정직과 성실의 대명사, 나라의 미래를 보고 務實力行 주장, 미국인들도 존경, 신민회는 도산 안창호가 1907년에 귀국해 만든 단체, 일제 감시대상 1호, 일제의 감시망 피해 도산이 비밀결사로 세운 단체, 신민회는 지도부가 아닌 이상은 딱 두명만 알수 있음, 나를 소개해 준 사람과 내가 소개시켜 준 사람, 1910.12월,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신민회가 처음 등장, 일제 당연히 충격과 당황,
④ 신민회는 나라의 암울한 시기에 선구적 선도적 대안제시, 국가의 주인은 民이다. 안창호가 말하는 民은 새로운 상황에서 각성하는 民, 大韓이라는 것을 자신의 어깨에 매고 나아갈 수 있는 民, 그것을 新民이라고 본 거고, 그 新民을 상징하는 뜻에서 新民會 라는 단체를 지음, 국가는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고 모든 民의 소유다,
⑤ 데라우치 암살기도혐의 사건재판 피의자를 구속한지 9개월째 되는 1912. 6. 28. 경성지방법원, 검거된 사람 700명, 기소된 사람 123명, 첫 공판 개별심문 맨 처음 신효범에게, 재판장: 총독 암살을 신민회가 주도했고 신민회의 회장이 윤치호냐?, 신효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재판시작부터 법정이 술렁, 재판장: 왜 경찰에서는 모든 사실을 시인했느냐? 신효범: 그것은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다. 일제는 인간의 탈을 쓰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희대의 잔인한 고문자행,
⑥ 데라우치 암살미수와 배후가 신민회라는 것은 모두 허위고 거짓, 증거는 없고, 잔인한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뿐, 허위자백을 안하면 죽인다는데 살기 위해 허위 자백 할 수 밖에 없는 극한상황, 자백을 시키는 방법은 각본에 따라 심문과정에서 잠을 안재우고, 계속 연습시키고, 암기하게하고 못외우면 또 고문하고 아주 철저하게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 나갔던 것,
⑦ 新民會는 의병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더 효과적이고 장기적인 무장투쟁을 계획했다는 점에 아주 중요한 의미,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하고 무관학교 만들고 독립운동 양성하고 두 갈래로 진행되어 오던 항일독립운동을 신민회가 하나로 통합한 역할, 이완용을 응징한 이재명 의사가 도산 안창호를 스승 이상으로 따랐던 걸 보고 데라우치 암살기도는 일제의 허위 날조 증명,
⑧ 일제 40년 식민지 암울한 시기, 나라와 민족을 대표하는 많은 독립운동가 중 이승만 김구 안창호 서재필 네 분이 대표적인 인물, 나는 특히 安昌浩와 徐載弼은 우리나라가 영토가 작아서가 아니라 국민의 실력이 부족해 일본에 유린당했다고, 먼 미래를 보고 민중의 實力培養에 힘쓰신 분들, 이승만과 김구는 현실주의적이나 安昌浩와 徐載弼은 미래 지향 先見之明이 있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