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 공포, 인간 잔혹사의 대명사, 아우슈비츠 수용소!
집회 장소인 체코 Ostrava에서 1시간 남짓 떨어진 이곳을
이 아브라함 선교사님의 안내로 방문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었다.
2차 대전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된 수용소를 바라보며 온몸에 느껴오는 것은 섬뜩한 ‘전율’ 바로 그것이었다.
과연 이런 일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었는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곳에서는 ‘절대 웃음 금지’이다.
수용소 입구
수감자들이 노동에 동원되어 출입하였던 문.
정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일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세상에 이처럼 성경의 말씀을 악용한 말이 있을까?
히틀러도 성경을 알고 있는 자였다. 진리의 목적은 아는 것에 있지 않고 추구함에 있다.
추구하는 진리는 악용된 적이 없지만 지식적 진리는 악용된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과연 수감자들의 마음에 이 글귀에 어떻게 다가왔을까?
수용소 전경
안내해 주는 이 아브라함 선교사
빅터 플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 책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삶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유럽 각지에서 수송열차에 가득 실은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들어온다.
아우슈비츠는 유럽 중앙에 위치해 각지에서 유대인들을 수송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열차에 내린 유대인들.
그들은 급히 가장 소중한 귀중품들만 모아 작은 보따리에 넣어 왔다. 그리고 이곳까지 가슴에 움켜쥐고 왔다.
그러나 그 일은 곧바로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만다. 수용소엔 빈 몸으로 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입고 있던 옷도 2분 내로 수감자 옷으로 바꿔 입어야 했다.
유대인들로부터 빼앗은 금,은,보석이 커다란 창고에 쌓아 놓기가 부족해 다른 곳 창고에 넣어두어야 했다.
그 창고 이름은 캐나다 1,2였는데 당시 호황을 누리던 캐나다의 금광을 빗대어 지었다 한다.
기차에서 내린 유대인들이 할 일은 첫 번째로 남녀와 아이들의 구분이었다.
이때부터 가족의 이별은 물론 불과 지척간에 있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생사를 알 수 없었다.
고급 구두를 신고 있는 아이들
부유한 옷차림의 유대인들
그들이 겪는 첫 번째 단계는 ‘충격’ 그것뿐이다.
독일군이 가리키는 손가락. 오른쪽, 왼쪽 가르침이 어떤 무서운 의미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 손가락 하나에 의해 삶과 죽음이 갈렸다. 일할 능력이 없어 가는 특별한 수용소.
그곳은 가스실로 폴란드의 회색 하늘 위로 붉은 불기둥이 뿜어지고 있었다.
수감자들에게 주어지는 번호.
그 때부터 수감자들은 그 번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가 유명한 의사라 해도. 그가 유명한 교수라 해도.
유명한 정치인이라 해도 전혀 의미가 없다. 단지 주어진 번호의 인간일 뿐이다.
길게 뻗어 있는 몇 겹의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 감시탑, 탐조등.
가스실, 화장터, 대학살. 목적지 없이 황량한 길을 질질 끌려가고 있는 초라하고 누추한 사람들이 행렬.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고함소리와 호루라기 소리. 추위와 굶주림. 눕기는커녕 쭈그려 앉아 있을 자리도 없음. 나흘 동안 빵 한 개.
모두가 충격뿐이다.
‘죽음의 수용소’ 책 첫머리에 나오는 이름은 카포이다. Capo. 우두머리란 뜻이다.
빅터 박사는 카포는 같은 수감자임도 불구하고 독일 감시병보다, 나치대원보다 더 가혹하고 악질적이다 증언하고 있다.
이것이 그에겐 큰 충격으로 기억된 것 같다.
우리도 일본 앞잡이. 공산당 앞잡이. 이런 자들의 만행이 일본인들보다 공산군보다 더 악질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두 번째 겪는 단계는 어떤 환경에도 적응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명이나 들어갈 공간에 1500명이 구겨 넣어짐. 9명에게 배당된 담요는 2장. 몸을 꼭 붙인 채 비비며 잔다.
혹독하게 춥지만 그럼에도 잠이 밀려온다. 이를 닦을 수 없다. 비타민 결핍증. 그럼에도 건강하다.
반년 동안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셔츠를 입고, 수도관이 얼어 세수는커녕, 손도 제대로 못 씻음에도 불구하고
찰과상을 입고도 상처가 곪는 경우가 없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깨는 예민한 사람이 동료의 몸 위에 엎어져 코를 골고 깊이 잔다.
가스실.
지독한 수용소에 수감자들은 보통 자살을 생각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 한번쯤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지는 일은 발생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살아날 가능성은 28명 중 1명꼴로 희박했다. 그런데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자살을 보류케 하였다.
“매일 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하더라도. 그러면 더 젊어 보일꺼야. 뺨을 문지르는 방법도 혈색을 좋아 보이게 하는 한 방법이지.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이 방법 밖에 없어. 발꿈치에 물집에 생겨도 똑바로 걸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꾸부정하게 걷거나 아프다고 호소하면 갈 곳은 뻔하니까. 이렇게 한다면 더 이상 가스실이 두렵지 않게 될꺼야.”
당시 가스실에 사용된 가스통
가스실에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유대인들이 아닌 관람객)
사형대(총살을 행하던 장소)
일이 없는 날엔 수용소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 모두 밖으로 나와 이렇게 하루종일 서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날 더 많은 자들의 희생자가 나왔다. 자신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죽곤 했다.
수용소에서의 하나의 무서운 것은 무감각증이다.
처음엔 동료가 기합을 받는 장면도 외면 하고 더더욱 주먹질 당하는 광경은 차마 보지 못하지만
나중엔 옆에서 동료가 쓰러져 죽어도 아무런 감각이 생기기 않는다.
또 하나의 무서운 것은 방금 쓰러져 죽은 사람 앞에 그가 먹다 남은 감자를 서로 낚아채 간다는 것이고 그의 신발을 바꾸어 가고, 외투를 벗겨가고, 구두끈마저 가져가며 이제서 제대로 신을 신게 됐다고 좋아 한다는 것이다.
수용소에도 행복이 있는가?
물론 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상대적 행복이다.
고된 일에 배치 받지 않고 덜 고생스런 일을 맡았을 때, 악독한 감독을 피했을 때, 국에 감자 덩어리가 들어있을 때,
이런 것에서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반대로 지독한 불행도 느낄 수 있다.
논산 훈련병 시절 무슨 일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가장 늦게 신발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작은 훈련화 하나와 가장 큰 훈련화 하나가 남아있었다. 작은 훈련화는 발에 꽉 끼었고 큰 훈련화는 아무리 끈을 조여매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헐렁했다.
그날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불행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