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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고령주독 강의안
끝이 없는 이야기
<모더니즘의 승리-2/추상표현주의>
강사 박윤배
'미술'이라는 말이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뜻을 지닌다. 예를 들어, 아시아에서는 서예가 여러 '예술들' 중에서도 가장 높이 인정받는 분야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미술가가 작품을 너무 훌륭하게 만들어서 그의 솜씨에 감탄한 마너지 그 작품이 본래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잊게 된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일이 점점 더 광범위하게 회화에서 발생했다고 말했다. 만약 회화라는 것이 단지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는 것을 의미한다면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한 채 이것이 행해지는 방식만을 경탄하는 감식가들이 있을 수 있다. 과거에도 화가의 물감을 다루는 방식이나 힘찬 붓놀림, 섬세한 필선들이 높이 평가되긴 했으나, 일반적으로 전체적인 관범에서 그것에 의해 성취되는 효과를 평가하였던 것이다.
<도판 260>
그림에서 루벤스가 목신의 수염을 그릴 때 얼마나 정확한 필선을 구사했는지 살펴보자. 혹은 중국 화가들이 번잡함 없이 아주 미묘한 농담으로 비단 위에 붓으로 그려낸 그 기교를 보라. 필법의 완전한 숙달이 가장 많이 논의되고 평가를 받았던 곳은 특히 중국이었다. 시인이 즉흥적으로 시를 휘갈겨 쓰듯이 영감이 아직 생생할 때 영상을 단번에 화폭 위에 옮겨놓을 수 있도록 붓과 먹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 중국대가들의 야망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사실상 중국인들에게 글과 그림에는 공통의 요소가 많았다. 나는 단지 중국의 '서예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중국인들이 찬사를 보내는 것은 결코 글자의 형식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모든 필획마다에 충만해야 하는 달인의 느낌과 영감의 경지다.
바로 이것이 유럽 회화가 다루어내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내적인 동기나 목적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물감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붓놀림에 의해 생겨나는 흔적에 관심을 가진 이러한 경향을 '타쉬즘'이라 했는데 이는 '타슈',즉 얼룩이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말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물감을 바르는 새로운 방법으로 흥미를 유발시겼던 사람은 바로 미국인 작가 잭슨 폴록(1912-56)이다. 폴록은 초현실주의에 빠져 있었으나 점차 그의 그림에 주로 등장하던 괴이한 이미지를 버리고 추상 회화를 실험허게 되었다. 이전의 틀에 박힌 방법에서 벗어나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물감을
뚝뚝 떨어뜨린다거나 또는 화면에 붓거나 뿌려대는 등의 방법으로 놀라운 형상을 만들어냈다.
도판393, 잭슨 폴록
<작품 No. 31>, 1950년
초벌칠 안한 캔버스에 유채와 에나멜. 269.5 X 530.8 cm
아마 폴록은 이러한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그림을 제작했던 중국화가들이나 주술적인 목적으로 모래에 그림을 그리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경우를 기억해냈던 것 같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생기는 엉킨 선들은 20세기 미술의 양립하는 두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시켜준다. 하나는 어린아이들이 형태를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유치하게 그려대는 낙서와도 같은 그림들에 대한 기억을 연상기켜주는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자발적인 것에 대한 동경이며, 다른 한 가지는 그와는 반대로 '순수회화'의 문제들에 대한 복잡하고 고답적인 관심이다. 이리하여 폴록은 '액션 페인팅'즉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ism)라고 알려진 새로운 양식의 주창자들 중의 하나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다 폴록의 이러한 그단적인 방법으로 작업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는 자발적인 충동에 따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중국의 서예처럼 이런 종류의 그림은 재빨리 그려져햐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미리 계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분출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한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 반드시 그의 이론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다. 추상 표현주의의 작품을 여러 점 볼 수 있는 참을성과 관심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이 중 어떤 작품을 좋아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작가들이 추구했던 문제를 점차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프란츠 클라인, <하얀 형태들> 1955년
캔버스에 유채, 188.9 X 127.6 cm
피에르 술라주,<1945년 4월 3일> 1954년
캔버스에 유채, 194.7 X 130 cm
미국화가인 프란츠 클라인의 작품과 프랑스의 타쉬스트인 피에르 술라주의 작품을 비교해 보자. 클라인이 자신의 작품을 '하얀 형태들'이라고 부른 것이 특이하다. 그는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선뿐 아니라 그 선들이 바꾸어 놓은 캔버스의 여백에도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가 그려낸 선은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그 결과 화면의 하반부가 중앙을 향해 후퇴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공간 구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술라주의 작품이 더 흥미롭게 보인다. 그의 힘찬 붓질로 이루어내는 농담법은 3차원의 인상과 물감의 아름다운 발색을 이루어내므로 더 마음에 든다.
현대의 작가들을 매료시키는 것은 바로 사진을 통해서는 나타낼 수 없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이다. 그들은 너무도 많은 것들이 기계로 제작되어 규격화된 세상에서 자신들이 직접 손으로 만든 작품을 진실로 유일한 것으로 느끼고 싶어한다. 어떤 이들은 그 크기만으로도 충격을 줄 수 있는 거대한 캔버스에 작업을 한다
끝이 없는 이야기 <모더니즘의 승리-1/비평가의 어려움 /다다이즘> 나날의 사건들은 후세의 발전에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 알기 위해 충분한 거리를 두었을 때야만이 비로서 '이야기'로 엮어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가장 최근의' 미술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북하게 여긴다. 가장 최근의 유행과 글을 쓸 당시에 각광을 받게 된 사람들에 대해 기록하고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가들이 진정으로 '역사화'될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으며, 대체로 비평가들은 형편없는 예언자임이 과거에 증명되곤 했다.편견이 없고 성실한 1890년대의 한 비평가가 '최신'의 미술사를 쓰려 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림 : 쿠르트 슈비터스 <보이지 않는 잉크>,1947년
종이에 콜라쥬, 25.1 x 19.8 cm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그 당시에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던 세 인물들이 반 고흐와 세잔, 그리고 고갱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첫번째 인물은 먼 남프랑스 지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중년의 미친 네덜란드 인이었고, 두번째 인물은 전람회에 그림보내는 일을 이미 오래 전부터 중단한 채 혼자 생계를 꾸려가던 은퇴한 신사였으며, 세번째 인물은 뒤늦게 화가가 되어서 곧 남태평양으로 떠나버린 주식 중개인이었다. 문제는 비평가각 이러한 사람들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가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겠느냐는 것이다. 현재가 과거로 됨에 따라 무엇이 발생하는가 하는 것을 경험할 만큼 오래 산 역사가라면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윤곽이 변화하는 방식에 대해 들려줄 이야기를 갖고 있다. 내가 초현실주의에 대해 글을 쓰고 있던 무렵에, 훗날 더욱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될 초로의 망명자가 영국의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었다.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쿠르트 슈비터스(1887-1948)인데, 나는 그를 1920년대 초기의 호감 가는 별난 사람들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는 버려진 버스표, 신문에서 오려낸 것,누더기 조각 등 잡다한 여러 잡동사니들을 접착제로 함께 붙여 아주 멋지고 재미있는 것들을 만들어냈다. 전통적인 안료와 캔버스의 사용을 거부하는 그의 태도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취리히에서 시작된 극단적인 예술 운동과 관련이 이었다. 나는 이러한 '다다'그룹을 원시주의와 관련지어 논의할 수 있다. 이 다-다라는 유치한 음절은 그러한 장난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되고자 하는 것과 예술의 진지하고 과장된 태도를 경멸하려는 것은 틀림없이 이러한 미술가들의 바램이었다. 나는 이처럼 어린아이의 마듬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이 미술 작품과 다른 인공품 사이의 차이를 얼마만큼이나 모호하게 만들게 되었는지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프랑스 출신의 미술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은 그 자신이 '레디메이드'라고 부른 그와 같은 일상 사물을 취해서 거기에 자신의 서명을 하여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었고 글보다 훨씬 나이 어린 독일 출신의 미술가 표제프보이스는 자신이 '이술'의 개념을 확장시켰다고 주장하며 뒤샹의 뒤를 따랐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를 완독하며
무언가를 표현하기에 그림만큼 이해하기 쉽고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단지 보이는 대로 느끼면 되고, 그 안에서 감동을 만끽하면 된다. 아름다운 풍경화가 그러하고, 색감 있는 인물화가 그러하다. 비단 그림만이 아니라 정교한 조각에서부터 미술의 한 장르로 표현해도 무색하지 않을 웅장한 건물들까지. 직접적으로 전시회나 여행을 통해 실물을 볼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는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물론 아무 지식 없이 예술작품을 접하면서 즐거움과 감동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 작품의 깊이 있는 의미나 가치를 모두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 작품을 느끼고 작가와 같이 호흡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이나 작품의 제작 기법, 작가의 심정 등 다양한 정보들을 알아야할 필요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서양미술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올바른 길잡이라 할 수 있다.
서양미술사는 고대 원시부족에서부터 현재의 모더니즘까지 길고 긴 서양미술사의 변천과정을 다양한 관점을 통해 상세하게 알려줌으로써, 우리가 접해볼 다양한 작품들에 깊이 있게 빠져들게 만든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더 잘 알기 위해서, 서양미술사의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함으로써 시대적 작품들의 관계적 배경과 숨겨진 이야기들을 통해 더 많은 즐거움이 따라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번쯤 읽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양미술사는 우선 총 2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오래전인 원시시대부터 미술사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다. 첫 번째 장은 신비에 싸인 기원으로 선사시대의 실용적 미술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두 번째 장은 영원을 위한 미술로 이집트,메소포타미아,크레타에 대한 내용으로, 가장 큰 특징은 이집트 미술의 내세관이나 권력자들의 힘을 알 수 있도록 표현하면서, 감상을 위한 미술이 아닌 영원을 염원하는 목적으로 작품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장은 자유를 향한 위대한 각성으로 기원전 7세기에서 5세기까지의 그리스를 이야기 하고 있다. 석조신전의 건축양식부터 그들의 과학 및 철학, 민주주의의 발전 시기들을 설명하고 있다. 네 번째 장은 아름다운 세계로 기원전 4세기에서 서기1세기 그리스이며, 그리스 미술의 범세계적 발전에 이은 헬레니즘 시대로 불리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다섯 번째 장은 세계의 정복자들로 서기 1세기에서 4세기까지 로마, 불교, 유태교 및 기독교 미술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정복과 전쟁이 많았던 만큼 미술의 주제도 위대한 영웅이야기를 즐겨서 표현하였다. 여섯 번째 장은 기로에 선 미술로 5세기에서 13세기까지의 이야기다. 기독교를 국교화하려는 콘스탄티누스의 영향에 따라 미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 종교적 이상을 구현하는 도구가 되도록 강요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모자이크화가 발달하게 된다. 일곱 번째 장은 동방의 미술로 2세기에서 13세기 이슬람과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덜번째 장은 혼돈기의 서양미술로 6세기에서 11세기 유럽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이 때를 미술사의 암흑시기로 분류하였으며, 통일적 양식이 없어, 서로 다른 양식들로 인한 갈등으로 혼돈상태를 많이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홉 번째장은 전투적인 교회로 12세기 노르망디의 윌리엄공이 영국을 정복하며 로마네스크 양식이 전파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열 번째 장은 교회의 승리를 다룬 13세기이다. 이 시기에 나온 고딕양식의 건축물들은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느낌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열 한번째 장은 귀족과 시민으로 14세기를 말한다.
13세기가 거대한 대성당의 시기였다면, 14세기는 장대한 것보다는 세련된 것을 추구하여 고딕양식의 장엄한 외관과 장식적인 화려한 요소를 가미한 건물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열두번째 장은 현실성의 정복으로 15세기 초를 말한다. 르네상스 운동이 확산되는 시기로 고트 반달족에 의해 붕괴되기 이전의 위대했던 로마를 부흥시키려는 운동을 말한다. 열세번째 장은 전통과 혁신1로 15세기 후반 이탈리아를 설명하고 있으며, 이 시기 화가들을 통해 단축법, 원근법, 오행감 등에 대한 탐구와 정확한 소묘, 빛의 효과 등에 주목하고 강조하게 된다. 열네번째 장은 전통과 혁신2로 15세기 북유럽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시기의 북유럽 미술가들은 미술의 새로운 요구와 종교적 목적을 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열다섯번째장은 조화의 달성으로 16세기 초 르네상스가 가장 발달한 시기였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거장들이 많이 나온 시기이다. 열여섯번째 장은 빛과 색채로 16세기 초 베네치아 북부 이탈리아, 열일곱번째 장은 새로운 지식의 확산으로 16세기초 독일과 네델란드, 열여덜번째 장은 미술의 위기로 16세기 후반 유럽상황을 이야기하면서 16세기를 정리하고 있다.
다음으로 열아홉번째 장 발전하는 시각세계와, 스무번째 장 자연의 거울은 17세기의 이야기로 가톨릭 국가를 중심으로 바로크시대가 열리는 내용과,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생동감있고 실제 사진같은 초상화나 풍경화 정물화 등에 대한 발전이 컸던 네델란드를 소개한다. 스물한번째 장과 스물두번째 장은 권력과 영광의 예술1,2로 17세기 후반 18세기의 눈부시고 화려한 장식의 표현들이 유행을 하게 된다. 스물 세 번째 장은 야성의 시대로 18세기 영국과 프랑스를, 스물네번째 장은 전통으로 단절로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의 영국, 미국, 프랑스를 설명한다. 바로크 양식이 절정에 달하고 이후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이 성행하는 내용들이 담겨있다. 이어 스물 다섯 번째 장은 끝없는 변혁으로 19세기 산업혁명에 따른 대량생산 시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인상파 화가들이 나오게 된 배경들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스물 여섯 번째 장은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로 19세기 후반 빅토르 오르타와 아르누보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스물일곱번째장은 실험적 미술로 20세기 전반 초현실주의 미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마지막 최종장에는 끝이 없는 이야기 모더니즘의 승리로, 왜 근대이후 미술사에서 모더니즘이 살아남게 되었는지 그 요인을 분석하고, 현재 진행중인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야기로 길고 긴 이야기를 마무리 정리한다.
많은 내용의 방대한 역사이야기들과 예술에 대한 해박한 해석들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새로 알게된 사실을 토대로 앞으로 감상할 미술작품들에 대해 새로운 관점과 해석을 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많은 즐거움이 앞선다. 앞으로 많은 기회속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접하고 느끼는 새로운 감정들을 통해,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의 나를 돌아보면서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발전적인 경험을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더욱 예술을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