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이 서술하는 ‘이신칭의에 선행하는 성화’
朴埰同 (2020.12.22.21:21)
염지웅 목사님이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이신칭의론을 문제시하신 까닭은 중생 시 “의의 주입”과 중생자에게 “내재하는 의”라는 용어 때문이었습니다. ㅡ이 두 가지 용어는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신학을 연구하신 정부홍 목사님께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이신칭의론을 다루면서 쓰신 용어였습니다.ㅡ 그리고 ‘이신칭의에 선행하는 위로부터 태어남,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태어나는 중생’을 생각하셔야 했음에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칭의] <제1항>에 적힌 구절 “이 칭의는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만을 내세우는 오독誤讀으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이신칭의론을 이단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12월 14일에는 {페북} 자신의 담벼락 글 <칭의는 오직 법정적 선언이다.>를 {개혁주의 마을}에 올리셨습니다. {개혁주의 마을}에 올리신 글을 옮깁니다.
칭의는 오직 법정적 선언이다.
JiWoong Yeom (2020.12.14.07:43)
1. 본성, 성향, 기질, 선호, 추세 … etc 그 어떤 명칭을 붙이든지, 칭의 이전에, 존재적 변화를 전제하는 칭의 교리에는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의문의 여지가 없이 칭의는 순수하게 법정적 선언(forensic declaration)이다.
2. 회심에서야 비로서 아담과 연합이 끊어지고, 예수님과 연합이 이뤄지기 때문에, 중생에서는 생명의 원리를 부여받지 거룩성이나 사랑의 성향을 부여받지 않는다.
3. 0.1%이든지 99.9%이든지, 칭의 이전에 존재적 변화가 있다고 가르치면, 로마 카톨릭과 동류가 된다. 믿음이 필요한 급박한 상황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영지주의자들이 철학적 추론에 의해 성향의 변화가 있다라는 잘못된 주장를 한다.
‘염지웅 목사님’과 ‘염지웅 목사님 글들에 “아멘.”으로 화답하시는 염지웅 목사님 페친 분들’과 ‘{개혁주의 마을}’만 모를 뿐,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을 저격하며 염지웅 목사님이 쓰신 글들 거의 모두가 ‘이단성’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 ㅡ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을 연구하신 신학 교수님들을 두고 염지웅 목사님이 쓰신 정죄의 단어를 빌려 말하면,ㅡ “영혼을 죽이는 도살자”의 글로서 ‘이단성’ 있는 글입니다. 우리 속담을 빌려 말하면, “선무당이 사람 잡는” 글입니다. 중생에 담긴 의미, 중생 시에 주시는 거룩함을 모르는 나머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하신 신학자들’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이단시하신 글입니다. 짧은 신학으로 수많은 개혁신학자들을 이단시한 “정이철 류”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함을 염지웅 목사님 스스로 증명한 글입니다.
저는 지난 여름에 ‘확정성화를 이신칭의 뒤에 두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칭의] <제1항>에 적힌 구절 “이 칭의는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만을 내세워 “조나단 에드워즈 이신칭의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벗어났다.”는 염지웅 목사님 주장’을 두고, <조나단 에드워즈 이신칭의론은 그릇됐는가? ⑤ : 확정성화는 이신칭의에 선행한다.>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0장; 유효한 부르심] <제2항>에 적힌 고백,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하고 새롭게 된 연휴에 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가 있게 되며”를 내세워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이신칭의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밝혔습니다.
다음은 지난주에 읽은 글로서, ‘존 페스코 {역사적, 신학적 맥락으로 읽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신윤수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327쪽~330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제 페친 분들 가운데 ‘염지웅 목사님이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이신칭의론을 이단시하시는 일, 불의한 거짓 음해’에 동조하시는 분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옮깁니다.
참고로, 본문에 적힌 인물 “에드워드 리”(Edward Leigh, 1602년~1671년)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윌리엄 펨블(1591년~1623년) 목사님을 지도 교수로 삼아 공부한 이른바 “평신도 신학자”이십니다. 영국 의회 의원 자격으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한 분이십니다. 굵은 글씨는 강조하려고 제가 굵은 글씨로 씁니다. 배경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화에 대한 칭의의 우선성이라는 문제 외에도 에드워드 리는 자신의 스승 윌리엄 펨블과 존 다우네임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펨블은 성화가 칭의에 선행한다고 믿었고, 이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이 논쟁의 정확한 성격은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거의 사라진 범주들, 즉 주입된 은혜의 소질(infused habit of grace)이라는 개념과 관련돼 있다.69) 펨블은 유효한 부르심을 통해서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은혜를 그 안에 담고 있는 은혜의 보편 또는 일반 소질”이 신자 속에 “주입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다우네임은 펨블이 유효한 부르심을 성화와 혼동하고 있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윌리엄 에임스(1576~1633)와 로버트 롤록도 중생과 성화를 혼동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에드워드 리는 이 논쟁이 다음과 같은 구별을 도입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화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거룩함을 만들어 내는 역사를 가리킬 때는 믿음과 칭의에 선행한다. 따라서 사도는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서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해 성화를 칭의 앞에 둔다. 그러나 성화가 심령과 삶의 교정과 관련한 거룩함의 훈련을 가리킬 때는 본질상으로는 칭의를 뒤따르고 시간상으로는 칭의와 동시에 결합한다. 사도는 로마서 8장 30절에서 부르심을 칭의 앞에 두고, 이것은 부르심이 첫번째 성화 또는 중생과 동일한 것임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26장 18절을 보라.
에드워드 리의 요지는 성화를 넓은 의미에서 거룩함의 소질 주입으로 보는 경우에는 이 주입은 한 사람의 유효한 부르심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칭의에 선행하는 반면에, 성화를 좁은 의미에서 거룩함의 훈련 또는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으로 보는 경우에는 성화는 칭의를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략)…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효한 부르심을 성화의 일부로 볼 것인가, 아니면 황금사슬에서 독자적인 한 요소로 볼 것인가를 두고서 얼마간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은 “유효한 부르심을 받아 거듭난” 자들은 “계속해서 성화된다.”고 말함으로써 에드워드 리가 언급한 논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중략)…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75문답>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와 다른 모든 구원의 은혜 씨앗”을 “그들 마음”, 즉 택함받은 신자들 마음에 “두신다.”고 말함으로써, 유효한 부르심과 성화의 관계를 설명한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이 ‘주입된 소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신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스콜라적이고 학문적인 용어에 대한 언급을 피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대교리문답}의 이런 진술, 특히 “그들 마음에 두신 …… 회개의 씨앗”이라는 표현 배후에는 그런 개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사무엘 러더퍼드는 그리스도께서 ‘대속 형벌’을 당하심으로써 택함받은 죄인들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만족하게 하셨다고 설명하지만, 또한 “죄의 물리적인 내재성과 본성”이 어떻게 제거되는지를 묻고서 “죄가 그 주체로부터 축출되고 정반대의 형태, 즉 내재의 의와 성화의 온전한 소질과 거룩함이 도입됨으로써 죄의 진정한 본성은 의나 거룩함과 반대되는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제거된다.”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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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언어가 결정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를 다루고 있다고 잘못 주장했다. 결정성화는 존 머레이(1898년~1975년)가 전개한 범주이지만, 사실은 칼빈이 먼저 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