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란 특수한 장르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면서 발전했다. 그것은 하위문화로서 민중들의 요구에 의해 생겨났다. 그 원인은 물론 유신과 독재라는 불합리한 정치상황이었다. 80년대 접어들면서 정치현실은 더욱 폭압적으로 바뀌어갔고, 그에 따라 민중가요도 조직적으로 창조되었다. 1. 1970년대 정치적 암흑기와 함께 등장한 민중가요 민중가요의 시작은 1970년대 후반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 시기 민중가요에 속해 있던 노래의 태반은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노래들이다. 대중가요의 가사를 바꾸어 부르거나, 구전가요, 찬송가, 가곡, 민요 등이었다. 그 유명한 [아침이슬]조차도 민중가요의 의도로 만들어진 곡이 아니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고쳐 장기 독재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고 시민들은 들고 일어섰다. 학생운동도 이 시기 본격화되었는데,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알려지면서 전국 대학교를 중심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집회들이 열렸다. 이 시기 집회 현장에서 불린 노래들은 학생들 사이에 구전되던 [해방가], 김지하가 노랫말을 지었다는 [탄아탄아], 60년대부터 불렸다는 [농민가] 정도였다. 2. 1980년대 본격적인 노래운동의 시작 ● 5월 광주의 트라우마가 반영된 비장(悲壯)미
70년대 후반 이후 조직화하고 체계화 한 학생운동 및 민주화운동은 노래에 대한 인식도 변화시켰다. 그 중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5월 광주는 신군부의 잔인성이 적나라하게 표출된 비극적인 사건이며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내상이었다. 광주의 충격은 민주화운동을 더욱 견고하게 조직화했다. 민주화운동의 방법 중 하나로 노래는 사회적, 집단적 영향력에 주목받고 본격적인 노래 운동이 시작되었다. 개인의 차원에서 소규모로 만들어지거나 기존 대중음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던 70년대의 상황과는 달리 80년대 민중가요는 노래 운동으로서 집단에 의해, 집단의 개인에 의해 창작되었다. 80년대 초반은 5월 광주의 트라우마로 인해 비극적 정서를 내포한 단조선율에 좌절을 딛고 투쟁적 역동을 표현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전진가], [전진하는 새벽], [선봉에 서서], [광주 출전가], [오월의 노래]등이 비장(悲壯)하면서도 힘찬 분위기의 곡이며, 그 중 백기완의 시를 황석영이 다듬고 김종률이 작곡한 [임을 위한 행진곡] 이 곡은 광주에서 함께 죽은 한 남자와 여대생의 영혼결혼을 시켜주는 내용으로 여러편의 노래와 간단한 대사, 문병란의 시, 영혼결혼을 시켜주는 굿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넋풀이>에 나오는 노래이다. (석지현, “대학가의 나타난 노래경향연구”, 석사학위논문, 숙명여대, 1991) 은 대표적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비장한 노래들과 함께 흔히 서정가요라고 부르는 유장한 가곡풍의 노래도 단조의 어두움과 비장함을 표현하면서 이 시기에 등장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양성우 작시, 박해경 작곡), [이 산하에](문승현 작사, 작곡), [타는 목마름으로], [민중의 아버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단조의 비장함을 강조하는 노래들은 1980년대 초반의 상황을 묵시적으로 표현하기 적합했으며 가사는 현실 사회에 대한 직접적 투쟁을 종용하기 보다는 투쟁에 나아가기 전에 개인의 결단과 의지를 주로 표명하고 있다. ● 노래운동 집단의 탄생 이런 비장한 노래들은 대학가를 감동시키고 격분시켰다. 이런 흥분은 1984년 이후 노래운동을 촉발시켰다. 노래모임 <새벽>을 중심으로 한 창작, 공연 활동이 활발히 이어지고, 무크지『노래』편집을 중심으로 한 이론과 비평 활동이 이뤄지는 가운데 노래운동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새벽>은 1984년 만들어졌으며 서정가요가 민중가요의 중심으로 들어서는 현상을 반영했다. 김준태 시, 이미영 곡 [부서지지 않으리], 곽재구 시, 김제섭 곡의 [코카콜라]등이 창작되었다. 70년대 포크 음악인들도 한국 전통 민요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었는데 80년대 접어들면 이런 관심이 전문적인 행동 실천으로 나타나게 된다. <민요연구회>는 노래운동으로서 민요운동을 시작한 집단이다.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예술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액멕이 타령], [질꼬내기],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양성우 시, 김용수 곡), [우리 것이다](신경림 시, 김석천 곡), [광주천](박선욱 시, 이정란 곡) 등이 발표되었다. 80년대 중반 학생운동이 대중화됨에 따라 이전의 긴장감과 결단을 요하는 투쟁적 성격의 노래는 조금 편하고 선율적인 멜로디로 변화한다. 이는 대학가의 운동권 노래가 서서히 그 수용 대상을 넓혀 대중들이 원하는 취향의 노래들을 만들고 부름으로 민중가요의 대중적 확산을 가져왔다. [그 날이 오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등의 노래는 이후 80년대 후반 합법적 음반화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민중가요와 음악운동의 새로운 입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토대를 이루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속에 사무쳐 오는 갈라진 이 세상에 민중의 넋이 주인 되는 참세상 자유 위하여 시퍼렇게 쑥물 들어도 강물 저어가리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얼지마라 참살아래 네가 살아서 만나리라 -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안치환 작사, 작곡 80년대 초 중반 대학가의 민중가요는 고급음악과 대중음악의 경계에 위치한 다양한 양식을 나름대로 표출해 내었으며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지식인들의 노래로서 그들 특유의 열정적인 정서나 취향이 나타나나 일반대중, 특히 기층 민중인 노동자들의인식과 정서 등 이들 생활 자체의 모습을 노래에 반영하지는 못하였다. 3. 노동자 대투쟁을 이끈 노동가요 ● 눈에 보이는 비극에 대해 눈 돌리지 말라 80년대 노동운동은 민중운동의 한 흐름으로, 민주화 운동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봇물터지듯 일어났다. 수많은 대학생들이 노동현장에 뛰어들었으며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연대해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이루어졌다. 한국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현실은 1971년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몸에 불을 붙이고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그가 외친 한 마디는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였다. 한국 경제는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 먹고 자라났다. 70년대부터 본격화된 경제개발계획 5개년 계획은 극심한 이농현상을 일으켰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든 젊은이들은 열악한 상황에서 인격적인 모욕을 받으면서 일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연일 각성제를 복용하고 야근을 치러내야 하는 소녀, 누적된 피로로 기계에 손이 잘리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항상 벌어지는 일이었다. 노래운동은 비로소 노래해야 할 구체적인 대상을 찾게 된다. 5월 광주로 촉발된 노래운동이 비극적 사건에 대한 분노와 비애를 통해 불특정한 정의감에 대해 노래했다면 노동가요는 지금 여기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노동현장에 입성해 노동운동을 조직하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이질감을 희석시키는 요소로 노래만큼 뛰어난 기능을 하는 것은 없었다. 1980년대 후반 노래운동의 대표적 흐름의 하나였던 ‘노동가요’는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전까지는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형성되지 못했었다. 그러나 같은해 6월 시민항쟁과 7, 8월 노동자 대 투쟁은 노동운동의 일반화와 함께 노동가요를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 노동가요의 발자취 70년대 중반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노래들이 꾸준히 만들어져 왔다. 김민기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에 삽입된 곡인 [상록수], [식구생각], [소곰땀 흘리리], 구전민요 [사노라면]은 당시 노동가요의 초창기 모습이고, 안혜경의 작품 [까치길]과 한돌의 [갈 수 없는 고향]같은 노래들이 있었다. 80년대 들어서면 노동운동과 관련된 지식인들이나 민중운동진영과 연대하는 전문 노래 운동단체에 의해 만들어졌다. 많은 노래들이 만들어졌지만 노동자들에게 받아들여진 노래들은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가곡풍의 단조 발라드가 아니라 음악적으로 투박하고 거친 노래들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에게 불리워진 노래들은 그들 현장의 생생한 경험과 직설적인 표현과 정서를 담고 있는 곡들이었다. [파업가],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2], [동지여 내가 있다], [딸들아 일어나라] 등의 행진곡풍 투쟁가요가 대표적이다. 김호철은 노동가요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기존 노래집단이 하지 못했던 노동가요를 창작했다. 동트는 새벽 밝아오면 붉은 태양 솟아온다 피맺힌 가슴 분노가 되어 거대한 파도 되었다 백곡단 구사대 몰아쳐도 꺾어버리고 하나되어 나간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살아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 너희는 조금씩 갉아 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아아 우리의 길은 힘찬 단결 투쟁뿐이다 - [단결투쟁가] 김호철 작사, 작곡 1984년 발표된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의 여파도 대단했다. 노동자의 손으로 노동자의 경험으로 쓴 이 시의 절절한 진정성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감동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하게 했다. 김용수, 김보성, 이건용 등의 작곡가들은 이 시집에 수록된 시로 노래를 만들었다. 그 중 [대결]은 언제나 파업현장, 투쟁현장에서 불리워졌다. ●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가요는 급진적으로 퍼져나갔다. 그만큼 한국 노동자들의 비애는 뿌리깊게 박힌 한(恨)이었다. 이러한 노동가요의 급성장으로 1989년 노동가요를 전담하는 ‘노동자 노래단’, ‘예울림’, 마산의 ‘소리개벽’ 등과 간은 노래 집단이 생겨났다. 이들은 노동생활 속의 노래운동을 추진했고 투쟁현장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불릴 수 있는 살가운 노래들도 만들어냈다. [포장마차], [해방의 나라], [우리들의 사랑은], [고백]같은 노래들은 일상적인 노동가요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호철, 윤민석, 조민하 등의 작곡가들이 활동했다. 향유층이 대학생에 머무르지 않고 기층 노동자 대중까지 폭을 넓힌 노동가요는 진정한 의미에서 ‘민중’가요가 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대중적인 성공은 이런 대중적인 흐름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흰 구름 솜구름 탐스러운 애기 구름 짧은 셔츠 짧은치마 뜨거운 여름 소금 땀 피지 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저 하늘엔 별들이 밤새 빛나고~~~~ 찬바람 소슬바람 산너머 부는 바람 간밤에 편지 한 장 적어 실어 보내고 낙엽은 떨어지고 쌓이고 또 쌓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흰눈이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이면 하얀 공장 하얀 불빛 새하얀 얼굴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공장엔 작업등이 밤새 비추고~~~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사계 : 노래를 찾는 사람들] 4. 개인의 시대를 맞은 민중가요 ● 정태춘을 통해 본 환멸의 90년대 1996년 제1회 ‘자유’ 콘서트는 음반의 사전검열 철폐와 함께 거대하게 개최되었다. 한국 대중음악계의 전환점을 가져온 순간이며 한국 문화운동이 거둔 승리였다. 그 무대의 가장 큰 관심은 단연 서태지였다. [시대유감]으로 사전검열의 문제점을 공론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주인공은 서태지가 아닌 정태춘이었다. 그는 공윤의 사전심의에 대항하는 의미로 1992년 [[19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비합법으로 발매하고 검찰에 기소당했다. 사전심의 철폐는 정태춘이 4년동안 끌어 온 지루한 법정투쟁의 결과였던 것이다. 정태춘은 그렇게 끈질기게 현실의 정의를 위해 싸운 투사였다. 그는 그 날 ‘자유’공연 무대 위에서 이런 표현을 쓴다. “희망의 80년대가 가고 환멸의 90년대가 왔습니다.” 80년대의 정태춘은 민중운동의 한 가운데를 살았다. 장소와 주최를 가리지 않고 집회가 벌어지고 있는 곳에 기타 한 대를 메고 달려갔다. 사람들은 환영했고 그의 노래에서 희망과 의지를 발견해 냈다. 힘든 시대였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런 정태춘에게 90년대는 그야말로 환멸의 시대였다. 환멸의 시대는 92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3당 야합으로 시작되었다. 노동운동계도 환멸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90년 현대중공업의 총 파업이 강력진압 당하면서 노동운동의 굳건한 연대도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87년 시민항쟁의 승리로 변화된 세상을 맞으리라는 희망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 것이다.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80년대 민중운동이 어떻게 환멸을 느껴가는지에 대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다. 또한 90년대는 80년대와는 다른 시대임을 알리는 전 세대의 선언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지만 정태춘은 그렇지 않았다. 90년대를 환멸로 규정하고 스스로 고통받았다. 한국의 80년대는 그만큼 쉽게 다른 가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시대였다. 그래서 정태춘의 고뇌는 참된 진정성이 있다. 그가 환멸의 90년대에 적응하고 변화하게 되는 것은 최근 앨범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에서 이르러서다.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 공원 담장 기와도 흠신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 창에 신호등에 멈춰 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비가 내리면 서쪽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쯤에선 뭐든 다 보일게야. 저 구로공단과 그 아래 북편 산 동네길도 아니 삼각산과 또 그 아래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스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훨- 훠이 훨 훨- 훠이 훨 빨간 신호등에 멈춰서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길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훨- 훠이 훨 훨- 훠이 훨 ([92년 장마, 종로에서]) ● 환멸의 시대를 맞은 민중가요 90년대 초반 압구정동의 오렌지족, 황색언론에 의해서 만들어진 X세대 등의 용어에서도 드러나듯이 소비가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는 시대였다. 80년대 부르짖던 해방, 자유, 노동, 등의 가치들은 정말 거짓말처럼 거리에서 사라졌다. 환멸을 느낄만 했다. 그러나 지독한 소비시대는 80년대의 경직성에 대한 반작용이다. 인간의 욕망은 대단히 맹목적인 것이었다. 80년대가 욕망의 거세하고 조직과 연대를 위해 투쟁하라는 가치를 강요했다면 90년대는 억눌려 있던 욕망이 폭발한 시기이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혹독한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된다. 민중가요는 변화를 모색해야 했다. 듣기 편한 멜로디로 대중화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미치지 못했다. 이 때 등장한 록 음악 담론은 민중음악의 확장된 방향성을 제시하는 듯 했다. 안치환, 천지인, 연영석 등의 민중음악과 록음악의 결합을 시도했다. 또 한 부류의 민중가수들은 솔로로 데뷔해 일상적 노래운동을 실천하게 된다. 노래마을 출신의 이지상, 손병휘, 이정렬이 그들인데, 주류 대중음악 시장과 민중가요씬의 경계에서 묘한 접점을 찾아내며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