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워필드 <‘오순절 성령 강림’ 의미>
라마드 (2013.06.21. 10:14)
그러나 우리가 전혀 다루지 않고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질문 하나가 아직 남아 있다. 우리는 이제껏 구약성경에서 성령의 교리가 풍부하게 발전됐다는 사실을 살펴봤다. 또한 구약은 하나님의 신께서 구약의 전全 시대를 통해 활동하심을 증거해 주고 있다는 사실도 살펴봤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the new dispensation)를 “성령의 시대(the dispensation of the Sprit)”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임하지 않으셨다고 말한(요 7:39)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주님 자신이 보혜사를 약속하실 때 자기가 떠나가서 그분을 보낼 때까지는 그 보혜사가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요 16:7)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말씀하신 뜻은 무엇인가? 성령께서 성령의 시대를 여시려고 강림하신 오순절은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
이것은 성령께서 구약 시대에는 활약하시지 않았다는 뜻일 수는 없다. 이미 우리는 신약성경의 저자들 자신이 성령께서 신약 시대에 활동하심과 똑같이 구약 시대에도 매우 다양하게 활약하셨다고 그분을 묘사하는 것을 살펴봤다. 이에 관한 성구들은 다양한 면들을 다루고 있다고 본다.
어떤 구절들은 특별히 사도들과 그들이 설립한 교회들을 특징짓는 이적적인 은사들을 언급하고 있다. 다른 구절들은 구약에서 과연 약속됐으나 이제야 비로소 실현될 성령의 전全 세계적 사역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숙고해 봐야 할 더 근본적인 개념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구약 시대의 예비적 성격이라는 개념이다. 구약 시대는 예비적이고 따라서 반드시 그렇게 엄격히 취급돼야 한다.
구약 시대에 어떤 영적 축복이 임했든지 간에 그 축복은 미리 맛보기(prelibation) 위한 것이었다. 그 축복들은 많고 다양했다. 성령께서 지금이나 다름없이 그때에도 보편적으로 섭리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때에도 지금과 똑같이 교회 안에 계셨다. 그분께서는 그때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셨다. 지금처럼 그때에도 세상의 모든 선한 것은 다 그분에게 기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교회의 모든 소망은 지금처럼 그때에도 그분에게 뒀던 것이다. 경건한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모든 은혜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그분 사역의 열매였다.
그러나 구약 시대 전체의 목적은 오직 성령께서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지기 위한 준비에 있었던 것이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the remnant)들을 안전하고 성결하게 간수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하심은 그 약속의 씨가 보존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그때에 활약하신 기본 목적이었다. 명실공히 성령의 시대는 준비 시대가 끝나고 성령을 부으시는 날이 와서야 비로소 동트기 시작했다. 그 겨자씨는 오직 성령께서 품어 주시는 보호에 의해 모든 세대를 통해 보존돼 왔다. 이제 그것은 (이미) 심겨있었고 그분의 작용에 의해 온 땅을 그늘지게 하며 공중의 모든 새가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는 거목巨木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말은 그분의 사역이 신약 시대에서는 구약 시대보다 더 실제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새 시대에는 단순히 더 보편적이라는 말도 아니다. 이 말은 성령의 사역이 새 시대에는 다른 목적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즉, 단순히 그 씨를 파종하는 날까지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열매를 맺어 추수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사야 선지자의 비유를 사용해 표현한다면, 구약 시대에는 교회가 마치 막혀 버린 시내(pen-in stream)와 같았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막혔던 것이 무너져 주님의 신께서 그 물을 돌진케 하시는 시내와 같다. 교회가 막힌 시내와 같았을 때 그 교회를 보존하신 분이 성령님이셨다. 바로 그 성령님께서 고여 있던 큰물을 마치 많은 물이 바다를 채우듯이 온 땅에 가득 덮일 때까지 지금 몰아 보내고 계시는 것이다. 한마디로 구약 시대는 성령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억제하신 시대였다. 바야흐로 그 성령님의 위대한 날이 이제 도래한 것이다.
* ‘{구약논문 시리즈 제3권: 구약신학 논문집} 운영탁 역편 {서울: 성광문화사, 6판 1997)’ 138쪽~141쪽에 실린 ‘벤자민 워필드 [구약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이 논문 결론 부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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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개혁주의 마을} ‘구약 성도들에게는 성령에 의한 중생과 이 중생에 따른 성령의 내주가 없었는가?’ 토론 때였습니다. 제가 {개혁주의 마을}에서 강퇴 당하고, {구약논문 시리즈 제3권: 구약신학 논문집}을 교회 도서관에서 빌려 가지고 있었던 저는 벤자민 워필드 목사님 이 글을 {개혁주의 마을}에 올릴 수 없는 상태에서 이 글을 {양무리 마을}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라마드 목사님께서 이 글을 {개혁주의 마을}에 올려 주셨습니다.
{구약논문 시리즈 제3권: 구약신학 논문집}, 이 책은 절판입니다. ‘{구약신학 논문 선집} 윤영탁 역편 (수원: 합동신학대학원, 2012)’에 ‘벤자민 워필드 [구약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이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