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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편지글은 재림때의 새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구약성경은 크게 보아 하나님이 이스라엘민족과 함께하신 이스라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스라엘민족사는 역사일 뿐,
일단 그것이 어떤 경우에도 비유는 아니다. 하지만 그 역사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환상과 계시와 이상 등으로 보이신 대소 예언서들과 잠언 시편
인물전 등이 있는데, 그런 유형의 글에서는 비유비사가 들어있기도 하다.
그런데 역사서이든 예언서이든 비유이든 그 어떤 형식의 기록이든
구약은 하나님이 목적하신 실상이 아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실상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때의 일이다. 구약은 어디까지나 한결같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때에 대한 모형으로 주어진 예언서다.
구약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때에 대한 예언이라는 점에서 빛나는
성경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때에 대한 예언서가 구약이며, 그 예언에
따라서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초림하셨고 오늘날 재림까지 하셨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예언은 이제 다 이룬 셈이다.
이렇게 다 이루어진 예언이지만 구약은 초림과 재림에 대한 예언이므로
과연 그것이 그러한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풀어야할 비유다.
이스라엘민족사 마저도 오늘날 우리들에 대한 예언으로 작용하므로
반드시 풀어야할 비유비사가 되고 있다.
일례로 모세가 이스라엘민족을 영도하여 출애굽한 역사는 초림예수님에
대한 모형(비사)이며, 이스라엘민족이 바벨론에 사로잡혀갔다가 칠십년 후에
고레스대왕의 해방선포에 의해 고국에 돌아와 성전지대를 다시 쌓게 된
스룹바벨이나 해방자 고레스대왕은 재림주를 의미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사마저도 완전히 실상에 대한 모형이며 따라서 비유비사가 된다.
구약필자들은 말씀의 뜻을 깨닫고 기록했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이스라엘민족사를 기록했을 뿐이며, 하나님이 주신 예언을
기록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약은 오늘에 대한 예언으로
작용하므로, 오늘날 풀어야할 비유가 되고 있다는 점이며 그것으로
빛나는 성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신약성경에 수록된 사도들의 편지글이다.
신약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사도들의 복음서신(편지글)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백퍼센트 진리의 말씀이지만 사도들의 편지글은
오류투성이 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백퍼센트 진리의 말씀이어야 하고, 사도들의
편지글은 오류투성이임이 드러나야만
그것이 진정한 진리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중요하므로 다시 말하는데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달리 문제가
있어야만 한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참일 때, 사도들의 서신은 오류임이
드러나야만 그게 올바른 진리의 성경이 되는 이치다. 왜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모두 하나님을 스스로 찾아가지 못하는
죄인이고 예수님만이 진리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율법이 주어진다. 즉 율법과 구원은
한쌍으로 존재한다. 구약은 이에 대한 모형이고, 예수님이 율법과 구원에
대한 실상이다. 초림 때는 율법의 실상이요, 재림 때는 구원의 실상이다.
율법은 무엇이며 구원은 무엇일까?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감추어서 수수께끼처럼 주시는 때이다.
수수께끼를 풀면(율법을 완성하면) 그 상급으로 영생의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이 성경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오신 분으로써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먼저 율법이라고 하는, 수수께끼 같은 비유로 주셔야함을 아셨다.
때문에 예수님은 초림 때 비유가 아니면 한마디도 아니하신다고 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해주신 말씀 하나에서부터 병고침과 귀신을 쫓아내심과
죽은 나사로와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심과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들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모든 신앙의 제도들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흘림과
무덤에서의 부활과 승천까지도 모두 비유였다.
그같은 예수님의 행적들이 그 당시에 사실적으로 일어났고 그대로
기록되었으나, 그것들은 모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으로 이루어진
공관복음으로써 오늘날에 이루어질 비유라는 점이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예수님의 행적들과 비유의 가르침들을 우리가 스스로
풀어낼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다시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즉 우리가 말씀을 스스로 깨달았다면 스스로 구원을 이루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만한 위인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했으며, 다시 오셔서 비유로 봉한 성경을 풀어주신다고 했으며,
따라서 영생의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만이 초림 때는 비유를 주시고 재림 때는 그 비유를
창세부터 풀어주심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오지 못하는
죄인임과 동시에 하나님(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시는 것이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정하신 시나리오이며, 그것이 곧 율법(초림)과
구원(재림)이 된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주신 비유를, 예수님(하나님)이 아닌 인간들이
풀어내었다면 인간은 죄인이 아닐 것이며, 하나님의 의는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며,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신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나리오와 모략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인간은 아무도 예수님이 주신 비유를 알아내지 못하였고 오늘날 예수님이
재림 때 창세부터 드러내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편지글들은 어떠했는가? 말씀을 깨달았는가?
절대로 아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그대로 믿었다.
비유를 알아내고자 조금도 고민하지도 아니했고 만족해버렸다.
비유의 복음을 만족하게 문자 그대로 믿으며 구원받았다고 태평가를
부르며 안주했다.
즉 복음서신 필자들이 바로 그러했다. 그들은 비유를 깨닫고자 하는
문제의식도 전혀 없이, 복음으로 이미 구원을 다 받은 것처럼
편지글을 남발하고 있었다.
그렇게 비유를 깨닫지 못하고 그대로 믿으면서도, 특히 바울은 말씀을
다 깨닫고 하늘의 비밀을 다 깨달은 것처럼 기록했으며, 심지어
자기를 본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오늘날까지 복음서신 필자들의
기록과 바울의 기록을 옳게 믿고 있으니 그게 문제다.
예수님은 분명히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했으므로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진리로 믿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이 비유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고자 노력하며 헤아려볼 수 있기 때문에
진리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풀어야 할 비유라고 믿을 때
그게 진리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복음서신 필자들은 예수님의 그 비유의 말씀을 깨닫고자 헤아려
보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고, 무조건 문자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그게 혼돈을 발생시켜 문제다.
복음서신 필자들이 초림 때 이미 말씀을 스스로 낱낱이 깨달았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오늘의 재림주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신앙미아들이 된다.
왜냐면 하나님은 신약필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해 초림주를 통해 먼저
비유로 말씀을 주신 후에,
다시 오늘의 재림주를 통해서만 그 비유의 말씀을 해독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그리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창세부터
작정하신 창조의 프로그램이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예수님이 풀어주시지 않는 것을 스스로 풀어서
율법을 완성할 수 있단 말인가? 바울, 베드로 등 신약필자들도
그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도 당연히 예수님이 주신 비유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비유로 된 복음을 문자 그대로 믿었으며
그것을 구원이라고 기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복음서신 필자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는 그 점이 정상이다
그리하지 아니했다면 성경의 전체논리는 엉터리가 된다.
즉 예수님이 비유로 주신 복음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다 깨달은
것처럼 기록했다는 점에서는 문제이지만, 그런 문제를 유발한 인간이야말로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은 그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므로 그게 곧 정상이라는 점이다.
그게 곧 진리의 성경말씀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중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공관복음)은 진리로
받아드리고, 바울 등 복음서신(사도들의 편지글) 필자들의 기록은
오류임을 참작해서 읽어야 한다. 복음서신 필자들은 말씀을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마치 다 깨달은 것처럼, 그리하여
이미 구원을 다 받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런데 요즘에 한참 유행하고 있는 "예수는 없다!" 교파들이
번창일로에 있다. 그들은 왜 "예수는 없다!" 는 구호를 외칠까?
그들은 예수님 대신 사도바울을 믿기 때문이다.
즉 바울은 이미 예수님의 비유의 복음을 완전히 꿰뚫어 깨달은
진리의 선봉자가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오늘날 말씀을 풀어주실
오늘의 예수는 전혀 필요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면 다시 오신다고 했으며, 봉한 성경을
풀어주시리라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오순절 다락방에 불의 혀처럼
갈라져내린 성령은, 그 당시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하도록 주신 방언의 능력이었다. 그 방언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루에 삼천명까지 전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어떤가?
그 방언 성령이야말로 그 때 이미 예수님이 재림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바울은 그 재림의 영을 받아서 하늘의 예루살렘교회를 세웠다고
주장한다. 만일 바울이 재림주의 영을 받아서 하늘의 예루살렘교회를
세웠다면 바울이야말로 육체로 오신 재림주가 되어버린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신봉이 집요하다.
바울이 재림주의 영을 받아서 하늘의 예루살렘교회를 세웠으므로,
그 이후로 우리인류는 계속 구원을 받아왔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악으로 범람하고 사망과 질병은 지천으로 널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천국을 이루고 이미 구원을 받아왔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질문을 해보면, 아무 대답도
못하면서도 무턱대고 바울에 대한 집착과 신격화로 고조되어 있다.
바울은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죽이는 앞잡이었다. 스데반을 사형장으로
이끌어낸 일등공신도 바울이었다. 바울은 또 다시 사람들을 잡아죽이기
위해 다메섹 언덕을 가던 중에 예수님의 음성과 함께 빛을 보고
눈이 멀어서 꼬꾸라졌다. 눈이 멀어서 가던길을 계속 갈수 없었기
때문에 전향할수 밖에 없었던 자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바울의 눈을 멀게한 그 빛이야말로 신유와 능력의
빛이요, 지혜와 깨달음의 빛이요, 하늘의 비밀문을 열어젖힌
완성의 빛이요, 신령한 하나님의 소리라는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바울의 눈을 멀게 함으로써 악한 살인자의 노릇을 중단시킨 하나님의
그 무서운 채찍의 광선을 사상초유의 득도의 광선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바울처럼 그 가시적인 빛을 보기 원하며 바울처럼 음성듣기를
원한다.
그리고 성경의 비유풀이는 한낱 흙이라고 주장한다. 즉 성경을 아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바울처럼 하나님이 보여주는 빛만이 신령하다고 주장한다.
그 빛을 보고 음성을 듣는 것이 성경을 깊이 깨달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
바울이 뭐길래, 바울에 빠져서 살인자 바울의 눈을 멀게 했던 그 빛을
보아야만 하고, 하늘의 예루살렘도 바울이 세워서 구원을 베푼다고 하는가?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나 할수 없는
극악무도한 자가 살인자다. 바울은 예수믿는 사람들을 무차별 잡아죽인
살인자인데, 그리고 깨닫지도 못한 성경을 그 때 마치 다 깨달은 것처럼
우쭐대기도 한 죄인인데, 그러한 바울을 사모하고 신격화하는 배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일 바울이 옛적에 이미 재림주의 영을 받아 말씀을 다 깨달았다면,
그리고 그가 하늘의 예루살렘교회를 세워서 사람들을 구원시켰다면,
세상은 이처럼 악할 이유가 없고, 죽음도 질병도 전쟁도 눈물도 기아도
폭력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을 사모하고 신격화하는 그 배경은
악한 마귀의 속임수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예수님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면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바울시대는 복음이 중동 이스라엘에 머물러 있던 때가 아닌가?
그럼에도 이미 그 때 예수님이 재림해서 바울을 통해 하늘의 예루살렘
교회를 세워서 구원했다면 그것은 완전히 마귀의 속임수가 된다.
하긴 "예수는 없다!" 교파들은 성경기록을 모두 믿는 자들이 아니고
(성경기록을 흙이라고 함)
바울에 대한 자화자찬의 기록을 믿고, 특별히 바울의 눈을 멀게한
그 광선에 대한 기록을 신령하다고 믿는 자들이니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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