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대표 회의
상하이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각지의 여러 임시 정부를 하나로 통합하여 단일 정부로 수립되었지만 독립 운동의 방법론은 둘러싸고 여러 갈래의 대립이 일어났다.
이는 임시 정부의 지도급 인사들 개개인의 정치적 성향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일제의 억압을 피하여 그 동안 전개해 온 독립 운동의 방향과 방법 및 독립 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 그들의 독립 국가에 대한 기대가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또, 통일된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각지의 지도자들이 사전에 충분한 협의나 일치된 견해를 도출 할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일시에 하나의 조직으로 망라한 것이었으므로 대립과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독립 운동의 방법론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는 외교 독립론 과 무장 독립 전쟁론 이었다. 외교 독립문의 대표적인 인사는 대통령 이승만이었고. 무장 독립 전쟁론의 대표자는 국무 총리인 이동휘였다. 또, 이승만이 제기한 국제 연맹 위임통치론은 독립의 방법론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인 것이며. 이동휘의 사회주의 활동은 민족주의 자들과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이 두 가지의 논쟁은 결말이 나지 않았으며, 임시 정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 정부를 개편하고 독립 운동의 방략을 논의하기 윈한 국민 대표 회의를 소집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특히 , 이승만을 불신하면서 대표회의 개최를 강력히 주장한 사람들은 베이징의 신채호, 신숙, 상하이의 안창호, 반은식, 민주의 여준, 김동삼 등이었다. 이리하여 1923년 각 지방의 70여 단체 대표 100여 명이 모여 국민 대표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김동삼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기존의 임시 정부를 개편하자는 개조파
와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나뉘어 격론을 벌였으나, 결말이 나지 않아 회의는 결렬 되고 말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임시 정부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무관 학교의 설립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약한 독립 운동 단체들은 사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중견 장교의 양성에 힘썼다. 연해주에서는 권업회를 조직하여 1913년부터 동북 만주에 위치한 나자구에 사관 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였다. 무장 곡립론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동휘 등 권업회의 간부들에 의해 설립된 사관 학교는 표면으로는 대전 학교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한민족 독립 운동 사상 최초의 사곤 학교였다. 한편, 서간도의 부민단이 확대 개쳔된 한족회는 신흥 무관 학교를 운영하여 1920년까지 장교와 하사관을 비홋하여 3천5백여 명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북간도의 북로 군정서에서도 사관 연성소를 설립 하여 소장 김좌진과 교관 이범석 등이 훈령을 담당하였으며, 이들이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정예군으로 활약하였다.
한인 애국단의 활동
상하이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지도자로 활약중이던 김구를 중심으로 조직된 애국단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민족의 원수인 일본인 요인을 처단하고 식민지 통치에 이용되는 기구를 파괴하기 위한 비밀 단체였다. 애국단의 활동 가운데 가장 대표 적인 것은 1932년 1월에 일어난 이봉창 의사가 동경에서 일본 국왕을 폭사시키려던 일과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인 장성과 주요 인물들을 제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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