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믿음:
‘거룩’하신 ‘성령’의 내주에 따른
‘중생(성화聖化)’은 ‘믿음(회심)’에 선행先行한다.
존 머레이 (2021.01.20 01:03)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한일서 3장 9절)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한일서 5장 11절)
‘거룩하신 성령’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씨’(요일 3:9)를 심으셔서 살리시는,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명’(요일 5:11)을 주셔서 살리시는 중생(거듭남)이란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태어나는 일입니다. 중생 시에 주시는 생명이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 거룩한 생명’임을 부정하면, 이는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참람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존 칼빈 선생님께서는 {고린도전서 주석} <1장 30절 주석>에서 중생을 설명하시면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거룩함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우리 곧 본성이 불의한 우리가 그분 성령聖靈으로 거룩하게 거듭나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생의 신학자”, “청도교 신학의 황태자”, “청교도 신학의 완성자”로 높임을 받으시는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께서는 중생을 설명하시면서,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 예장 합동 모 목사님 말을 빌려 말하면, “성향적 구원론”을 가르치셨습니다.
다음은 ‘노병기 {거룩한 구원}(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07)’ 358쪽~359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본문’을 밝힌 각주는 생략합니다.
에드워즈에게 거듭남이란 성령의 부으심이요, 놀라운 변화를 초래하는 신적인 역사다. 에드워즈 정의에 따르면, “거듭남은 사람이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회심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사람 속에 일어나는 위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또한 “사악한 자로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386)을 의미한다.
사람이 거듭날 때 먼저 성령이 주입되는데, 이때 성령께서 내주하시며 새로운 본성을 주신다.387) 이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움에 대한 ‘마음의 감각’을 주시는 데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387) 이러한 신적神的인 믿음으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칭의를 얻게 된다.
“신적神的인 믿음”의 “신神”에서 우리는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공유의 속성”,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 인간과 공유하시는 속성, 아담과 공유하셨고 중생자와 공유하시는 속성인 거룩성’을 읽어야만 합니다. 즉, 이 믿음은, 불결한 믿음이 아니라, 유다서 가르침대로 “지극히 거룩한 믿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부정하면 이 역시 신성모독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유다서 1장 20절)
그런데 루이스 벌콥 목사님 역시 중생을 설명하시면서 이른바 “성향적 구원(중생)론”을 가르치셨습니다. 루이스 벌콥 목사님께서 ‘{조직신학} 권수경 이상원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718쪽에서 “중생은 성령께서 새로운 삶의 원리를 사람에게 심으셔서 영혼의 지배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일로서 하나님만의 사역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개혁 신학은 ‘성령의 내주에 따른 중생(성화, 거룩)은 믿음(회심)에 선행先行함’을 가르칩니다.
다음은 ‘노병기{거룩한 칭의}(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15)’ 447쪽~448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5. 칼뱅은 회심 때 일어나는 근본 성화를 강조했다.
칼뱅 이후 약 400 년 동안 개혁주의는 시간이 갈수록 순간적 거듭남 체험 대신에 점진 성화만 가르치는 경향을 지니게 됐다. 칼뱅이 거듭남을 일평생의 회개(성화)로 설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점진 성화 필요성 못지않게 근본적 거듭남 체험을 매우 강조했다. 그는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성령의 내주가 있으며 거룩한 삶의 열매가 동반된다고 가르쳤다.
…(중략)…
칼뱅은 거듭난 자는 죄를 이기는 삶을 산다고 했다. 그는 요한일서 3장 10절 주석에서 이렇게 썼다. “요한은 의롭게 살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부르시는 모든 사람을 그분의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칼뱅은 거듭남을 일평생의 회개로 말하기는 했으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성령의 내주와 죄를 이기는 삶이 있음을 분명히 가르쳤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칼뱅 이후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칼뱅의 이러한 근본 성화에 대한 가르침은 상실되고, 칭의 이후의 점진 회개(성화)의 가르침만 남게 됐다.
그러나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인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년~1975년)는 성화에는 점진 성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회의 확정 성화(Definite Sanctification)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확정 성화-칭의-점진 성화’※) 구도를 말했다. 그는 성도는 거듭남과 동시에 확정적으로 “죄의 지배(dominion)에서 벗어나고” 또한 “죄의 오염으로부터 해방”된다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는 분명히 개혁신학 발전이다. 칼뱅도 거듭난 자 근본 성화를 많이 가르쳤다. 그것이 그동안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다음은 ‘노병기 {거룩한 칭의}’ 460쪽~461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7. 칭의에 앞서는 성화의 문제: 습관적 거룩함은 칭의 이후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한 자질(holy qualification)이 칭의에 앞선다고 했다.727) 이에 대해 혹자는 ‘에드워즈가 성화를 칭의 앞에 두지 않았는가?’ 하고 의문을 제시할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율법적인 방식에서 의롭다 하심은 사람이 실제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어떤 시점까지 계속 거룩함을 행하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복음의 방식에서는 거룩한 행실이 마무리되기 전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실로 그는 거룩함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의 거룩함의 여정에서 첫 지점, 첫 단계에서 그의 거룩함이 시작되자마자 그 순간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728)
또 그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설명했다. “복음의 칭의에서는 사람이 어떤 습관적(habitual) 거룩함을 가지거나 행동의 어떤 확립된 원리로서 거룩함을 가지기 전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729) 에드워즈에 따르면, 칭의 이전에 거룩한 성향은 반드시 있다. 그러나 습관적인 거룩함은 칭의 이후에 온다.730)
8. 결론적 정리
하나님의 주권적 성령의 부으심으로 회심을 체험한 조나단 에드워즈는 칼뱅과 같이 구원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령의 부으심으로 믿음을 주신다. 그런데 이때 믿음은 그 자체의 가치나 도덕적 적합성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의와 기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를 누리게 된다. 에드워즈 신학은 여러 가지 점에서 칼뱅의 신학과 유사하다.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심화했다고 볼 수 있다.731)
다음은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177쪽~178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3) 중생과 성화의 관계: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 두 가지는 동일하다. 앞으로 보겠지만, 성화는 단회(definitive)적이다. 단회(확정) 성화는 한순간에 일어난다. 어떤 특정한 한순간에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죄 없는 완전한 상태로 살 수 있게 됐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죄의 영역과는 철저한 결별을 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이 같은 의미로 성화를 이해할 경우 중생과 성화는 동일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성화는 평생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성화를 이해하게 되면 중생이란 성화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중생은 과정이 아니라 한 기점이다. 그러나 성결과 순종 안에서 성장의 삶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성장은 성화의 많은 축복에서 하나다. 이런 뜻에서 중생은 점진 성화의 첫번째 단계다. 이 두 가지는 최초의 새로움과 그 후 계속되는 새로움이란 측면에서 서로 연결된다.
우리는 당연히 “새롭게 하심”에서 ‘거룩하게 하심’을 읽어야 합니다. 특히, “개혁(장로) 교회 목사”라 하면서 이를 독해하지 못하면, 그 목사는 ‘국어 공부’를 다시 해야만 합니다. 국어 공부를 다시 한 뒤 ‘아, 정이철 목사와 똑같이 내 독해력만이 아니라 내 신학이 무척 짧았구나!’ 반성하며 ‘개혁 신학 중생론 공부’를 다시 해야 합니다.
길게 쓰면 가독성이 떨어지니, 오늘은 이 정도로 줄입니다.
================
※) 원문에는 “칭의, 확정 성화, 점진 성화”로 적혀 있으나, 제가 “‘확정 성화-칭의-점진 성화’”로 교정했습니다. “중생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제10장 유효한 부르심]에서 “새롭게 된 뒤에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가르친 ‘논리상 구원의 순서’가 ‘중생 시 성화-회심-칭의-점진 성화’이기 때문입니다. ㅡ우리는 당연히 “새롭게”에서 ‘거룩하게’, ‘성화聖化’를 읽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에서 ‘회심(믿음+회개)’를 읽어야 합니다.
첫댓글 이 글은 ‘조나단 에드워즈 칭의론이나 중생론’ 텍스트를 읽지 않은 채 ‘조나단 에드워즈 칭의론과 중생론’을 이단시하셨던,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 예장 합동 염지웅 목사님이 ‘조나단 에드워즈 {원죄론}’ 텍스트도 읽지 않은 채 ‘조나단 에드워즈 {원죄론}’까지 “사탄이 고안해 낸 철학”으로 이단시하시자, {개혁주의 마을}에 별명 ‘존 머레이’로 올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