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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2일 일본의 요구대로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은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넘기는 병합문서에 조선통감 데라우치와 함께 서명했다. 그 직후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치, 그는 자신들을 방해하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다. (포고문 1910.8.29)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1대 총독]
그의 포고문에는 식민지 조선을 완벽히 복종시키겠다는 야욕이 담겨 있었다. 그 목적을 위해 일제가 도입한 것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 “조센징은 때려서 다스려라”-일제 무단통치.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식민지 조선의 이것이 도입된 날로 시작을 해 봤습니다. 지금 보시는 저 태형대가 일제가 강제병합 이후에 저걸로 조선을 다스렸다는 얘기잖아요. 가까이서 보니까 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기에서 수치스러운 과정을 거쳤을까. 마음이 안좋지 않아요?
이윤석/방송인: 복종하지 않으면 때리겠다, 일제의 본색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애요.
류근/시인: 태형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이렇게 나와요. 태형[笞刑]-대표적인 신체형으로 전근대적인 처벌. 근대국가로 오면서 대부분 폐지된 법률 이렇게 나오거든요. 당대 동양 최고의 문명국가를 자처했던 일본이 저런 형벌을 도입한다는 자체가 자가당착 아닙니까?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말씀 하신대로 전근대적인 형벌이예요. 조선시대 태형,장형 이런 것들이 있었잖아요. 실은 1907년에 대한제국에서 이를 없앨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때 다름아닌 통감부가 반대해서 없애지를 못합니다.
최원정: 일본에도 태형이 있었어요, 우리가 있었던 것처럼~?
박찬승/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네, 일본에도 태형이 있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 1882년에 일본에서는 태형을 폐지했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그 태형을 그대로 유지를 한 겁니다. 1912년에 조선통감부는 조선 태형령이란 걸 발표를 했는데 조선 태형령에 의하면 조선인만 여기에 해당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에 와있는 일본인이나 외국인 중국인은 전혀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심용환/역사작가: 이런 유행어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많이 하던 말인데 약간 익숙한 말일 것도 같애요. 조선인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 한다
최원정: 너무 듣기 싫은 말인데~ 실제로 있었던 얘기예요, 그렇죠?
류근: 그런데 그런 저질의 마타도어가 변형되어 가지고 최근까지 여자와 명태는 사흘에 한번씩 패야 한다 이런 얼빠진 소리가 이어져 온 거 아닙니까.
최원정: 정말 냉정하게 얘기를 나눠봐야 될 것 같애요. 조선인에 대한 태형은 어떻게 집행이 되었는가요?
심용환: 규정이 있습니다. 기록을 토대로 만들어 봤습니다. 이게 실제 매입니다. 길이 55cm 너비가 0.8cm,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대나무고요. 대나무를 잘라서 몸체를 만들고 삼베로 감았습니다 (조선태형령 시행규칙 제11조 태는 대나무 조각으로 만들고 (중략) 삼으로 세로 방향으로 싸맨다),
이윤석: 전 회초리 같은 걸로 생각을 했는데 단단하고 굵고~ 겹쳐놨네~ 대나무를~
이익주: 태형집행에 대해서는 규정이 만들어져 있었어요.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구금에 처해야 할 자, 또는 100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료에 처해야 할 자에게 그래서 태형을 집행하는데 1일에 태 한대, 또는 1원당 태 한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가만히 보면 조선시대하고 거꾸로 되어 있어요. 아무리 전근대적인 형벌이라고 하더라도 돈으로 대신 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거든요. (贖銅-돈으로 태형을 대신하는 제도), 이건 오히려 돈을 받아야 할 때에서 돈을 받지 않고 매를 때리는 거니까 오히려 조선의 태형과 장형을 비교할 때 거꾸로 간 거죠.
최원정: 말이 태형이지 형벌이 아니라 구타잖아요~
이익주: 구타예요.
심용환: 죄목도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제가 그 당시에 기사에 보도된 사례를 한번 모아 왔는데요. 보여드릴게요. 그 당시 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인데,
가로수 꺾음-
집 앞 청소를 게을리함-
덜 익은 감을 팜-
웃통을 벗고 일함-
도살 허가 없이 개를 잡음-
학교림에서 나무를 함-
이윤석: 이 걸로 때려요?
심용환: 네, 다 때렸던데요. 덜 익은 감을 팔았다? 웃통을 벗고 일했다?
최원정: 대부분이 경범죄에 해당하는 것들이예요. 저런걸 가지고 때려~
류근: 나무 벤 걸 때리는 거 말이죠. 정말 적반하장 아닙니까? 저희들은 남의 나라를 통채로 뺏어놓고 큰 도둑이 작은 도둑을 나무라는 꼴이 잖아요.
이윤석: 집 앞 청소를 게을리 함, 이런건 기준도 애매해요. 깨끗하고 더러운 걸 누가 판단하는 거예요?
심용환: 가장 많은 태형, 그러니까 어떤 죄에 제일 많이 맞았을까요?
최원정: 허가 없이 이런 단어가 들어간 것들?
류근: 개 잡는 거?
이윤석: 이건 정말 답은 아닌거 같은데~ 개그계에선 “덜 익은 감을 팜”은 큰 죄네요.
심용환: 덜 익은 감을 팜?
이윤석: 왜 이렇게 감이 없니! 방송에서 덜 익은 감을 팔아?
최원정: 아, 감 떨어지는 소리하면~ 맞는 걸로~
이윤석: 이런 개그하면 태형감이예요.
심용환: 한번 정답을 공개해 보겠습니다.
가로수를 꺾음-5대
집 앞 청소를 게을리 함-10대
덜 익은 감을 팜-80대
웃통을 벗고 일함-10대
도살 허가없이 개를 잡음-40대
학교림에서 나무를 함-50대
최원정: 윤석씨가 맞춘 거예요? 덜 익은 감~
류근: 깜짝 놀랬어요-덜 익은 감 태형 80대?
이윤석: 코미디언식이에요? 이게 80대예요?
류근: 말 그대로 코메디네~우리가 원래 그러잖아요 떫으요?
최원정: 그거는 덜 익은 감이 아니라 해외 토픽감 아닌가요, 어떻게 80대나 맞아요?
이윤석: 깜깜한 시대였네요.
박찬승: 덜 익은 감을 파는 경우에도 기사를 보면 여기 80대를 때렸다고 했는데 어떤 경우는 20대를 때렸다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집 앞 청소를 제대로 안했다 그런 경우에도 10대인데 또 사례는 20대를 때린 경우도 있어요.
류근: 그러니까 자기네들 맘대로네요.
이익주: 정말 저기 게을리 함, 덜 익음 이런 거 전부 명확한 기준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자의적으로 저것이 집행될 수 있는데다가 더 큰 문제가 있어요. 정식재판을 거치지 않고 현장에서 바로 즉결처분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윤석: 그러니까 형량이라는 게 원래 재판을 해가지고 유무죄를 가린 다음에 결정을 하는 거잖아요. 그런 과정이 없는 건가요?
이익주: 1910년대 경찰들이 검거해서 처벌할 수 있는 권한까지를 같이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즉결심판이 되는거죠. 경찰이 수사권 갖고 있고 사실상 재판권을 갖게되는 거고 여기다가 자기들이 직접 처벌까지 하니까 정말 당하는 한국민들 입장에서는 원칙도 없고 기준도 없는 무법지대에서 살 고 있는 결과가 생긴 거죠.
박찬승: 1910년대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은 황당한 기사도 있습니다. 예를들면 몸이 멀쩡한 사람이 일을 하지 않고 남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빌어먹고 산다 이런 사람(백수)을 데려다가 일종의 풍기문란이란 명분으로 태 20대를 단단히 때렸다.
류근: 백수가 범죄라는 얘기네요~?
심용환: 류 시인은 무슨 형일 것 같애요?
최원정: 방송전까지는 사실 이분도 백수였거든요~
심용환: 시쓰기 위해 시상을 막 떠올리는데 갑자기 놀고 있잖아요~, 태형?
이익주: 정말 좋은 때 태어나셨어요.
류근: 어이가 없네요.
이윤석: 심심한 거 같은데~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이제 한번 체험해 보시겠습니까?
류근: 그래도 태형이 어떠한 형벌인지 시청자 여러분들께 전해 드리는 의미에서 한번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원정: 저기서 얼마나 많은 억울한 분들이~ 태형을 맞았는지 한번 보여 주세요.
-----------------태형의 실제 집행 모습은?-----------
이윤석: 널판지에 엎드려서 팔을 뻗고~ 제가 태형 집행전에 시행규칙을 찾아봤는데 양팔과 다리를 묶습니다. 묶어요 그리고 볼기를 노출시키고 그리고 태를 가하는 거죠. 하루에 한번 30대까지만 때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분은 80대니까 3일에 걸쳐서 때리면 됩니다.
류근: 아무리 백수라도 그렇게 3일 동안 때리면 돼요? 일을 시켜야지~ 아야야~
최원정: 소리만 들어도 공포스럽죠~
류근: 아, 진짜~
이윤석: 너무 시끄러울 때는 태형령 집행의 내규가 있어요. 이게 뭐 같습니까? 집행중에 수행자가 비명을 지를 우려가 있을 때는 젖은 천을 입에 물립니다.
이익주: 재갈이네~
이윤석: 이게 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최원정: (류근 시인을 항하여) 고생하셨어요
류근: 근데 이걸(천) 입에 물고 때리니까 맞고~
최원정: 아니, 이게 얼마나 끔찍한 형벌인지 보여드리기 위해서 류근 시인님이 수행자역을 해주셨는데~ 요즘 그런 말들 자주 하잖아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 진짜 일제가 이런 시행령을 촘촘히 만든게 굉장히 디테일 하면서~
잉뉴석: 지금 잠깐 시늉만 한건데도 류근 시인님이 얼굴이 수축해 지셨어요~
류근: (널판지에 엎드려 두 팔을 짝 버리고) 이 자세 있잖아요. 엎드리는 순간 속수무책 자세예요. 이게 어떻게 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예요.
심용환: 자세 자체가 굴욕적이고 무력감을 느껴질 것 같애요.
최원정: 이게 수치심뿐 아니라 실제로 맞으면 살이 찌저지는 고통을 느낀다면서요?
박찬승: 네, 그런 사진도 남아 있습니다. 일동: 충격사진, 아유, 못보겠다!
최원정: 도대체 어떤 모습이기에, 차마 보기 힘든 모습!
류근: 살이 엉망이~, 살이 다 파인 거네요.
최원정: 살이 손바닥 만큼 떨어져 나간 거잖아요.
이윤석: 저는 저 정도 수준일 줄은 몰랐어요.
박찬승: 소설가 김동인이 쓴 태형(1922~1923) 이라는 소설이 있어요. 그 소설에 보면은 3.1운동때 감옥에서 어떤 노인이 있는데 태형을 맞았는데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살점이 찢어져나가면 저게 오염이 돼서 장독으로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익주: 그러니까 아직 1910년대 페니실린(항성제)이 들어오기 전에는 저렇게 해가지고 골므면 저건 치료할 방법이 없어요. 거의 죽는다고 봐야 됩니다. 그런데 저런 사진을 보면 우리도 그런 조선시대에 곤장치고 저렇게 하지 않았느냐 그런 얘기 나올 수 있잖아요. 우리도 민속촌에 가보면 곤장 갔다놓고 옛날에 이런게 있었다고 얘기하는데 조선시대에는 곤장이라는게 없었어요. 이렇게 넓은 곤장은 없었고 이것이 임진왜란 후에 들어오는데 이 곤장을 집행할 수 있는 관리들이 엄격하게 규정이 돼 있습니다. 다 누구냐 하면 군대 지휘관들이예요. 그러니까 군대 안에서만 이것이 형벌로 사용이 됐지 민간인을 상대로 해서 곤장을 친다는 건 조선시대에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너무 조선시대 곤장하고 장독으로 사람죽고 하는 이야기를 상식처럼 알고 있는데 조선은 그런 나라가 아니예요.
류근: 뜻밖이예요.
최원정: 여자들도 곤장맞는 장면을 영화에서 많이 보잖아요.
류근: 흥부전에 흥부가 매를 대신 맞으러 가잖아요. 그건 뭘까요?
이익주: 매가 있어요. 태형, 장형이 있는데 조선시대 태형이라고 하는 것은 아프게 하는 형벌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주는 형벌입니다. 회초리로 때리는 거예요. 장형으로 가게되면 물론 저런 상처가 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곤장, 이것은 조선시대 우리 전통은 아니예요.
최원정: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저렇게 심각하게 매질을 하지는 않는다는 얘기군요.
이익주: 그럼요. 이게 일제 시대 들어와 가지고 일본사람들이 태형을 훨씬 더 강력하게 집행을 한 겁니다.
이윤석: 저는 몰랐네요.
최원정: 코웃음이 나오네요.
류근: 조선을 문명국을 만들고 싶다면 저런 전근대적인 태형부터 없앴어야 하는게 아닐까?
박찬승: 감옥에 가둬두는 것 보다는 태형이 효과가 좋다 이렇게 판단했다는 거죠. 또 감옥 속에 사람을 가둬두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는데 비용이 들고 새로운 감옥을 지어야 되니까 그 비용을 절약한다 하는 차원에서 사실은 태형은 즉결심판 뿐만 아니라 정식재판에서 많이 선고가 됐어요.그래서 정식재판이나 즉결심판 막론하고 태형이 선고된 비율이 전체 형벌중 약 45% 정도 됩니다. 즉결심판과 영치재판에서 받은 그 사람들이 1916년에는 5만여명이 넘습니다.
류근: 지금 예천군 인구가 5만명입니다.
최원정: 예천 군민 전체가 맞았어요. 이토록 잔인한 형벌은 도대체 누가 집행한 건가요?
-----------------심용환: 사진이 말하는 그날, 오늘은 단체 사진 하나 갖고 왔습니다.-------
심용환: 이 단체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우리가 얘기했었던 데라우치 총독의 정책에서 뺄래야 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굴것 같으세요?
류근: 나쁜놈들!
심용환: 일단 왼쪽 간판을 보면 경무부 라고 쓰여 있습니다. 요즘 말하면 경찰서, 경찰들이라는 느낌이 오는데, 오른쪽 간판에는 헌병대 본부라는 말이 쓰여 있습니다. 헌병은 군인이거든요.
류근: 그럼 경찰서와 헌병대가 한 곳에 있다는 건가요? 특이하네요.
심용환: 맞습니다. 이 사람들은 헌병이면서 경찰인 사람들입니다. 1910년대 헌병 경찰들을 의미합니다. 손에 들고 있는게 있습니다.
일동: 칼이요, 칼! 칼!
심용환: 지금 사진을 보면 제복을 입고 칼 하나를 차고 다녔던 느낌 자체가 굉장히 무섭죠.
최원정: 그럼 저 사람들이 태형을 집행했다는 얘기예요?
심용환: 그렇죠, 헌병분대장에게 아까 우리가 얘기했던 즉결심판권을 줍니다.
류근: 전시도 아닌데 군인들한테 민간인을 함부로 때리도록 허용했다는 게 참 어이가 없습니다.
이윤석: 그러게요. 매들때 가만히 있어 안그러면 칼 뽑는다 이런 뉘앙스예요.
심용환: 전국에 설치된 헌병분대 그리고 파출소 경찰서 주재소가 총 몇 개가 있었을 것 같으세요?
이윤석: 글쎄요 8도에 한 10개씩 계산해서 총 80개?
심용환: 1560개가 있었습니다. 전국에 물샐틈없는 문자 그대로 아주 철저한 감시체제가 만들어졌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최원정: 그래요. 꼼꼼하며 촘촘함이 얼마나 디테일해요 악마같다니까요.
이익주: 아카시, 아카시 모토지로[조선총독부 경무총감] 헌병경찰의 우두머리예요. 경무총감이란 자리가 있는데 이 사람이 나중에 자서전을 남깁니다. 이 자서전에 이런 말이 나와요. 이 시기 한반도는 계엄령 같은 상황이었다.
류근: 그렇겠죠.
이익주: 군인들이 저렇게 많이 깔려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반도 전체가 창살없는 감옥 같은 병영국가였다. 본인이 그렇게 회고를 해요.
최원정: 드라마 장면인거 같은데~
이윤석: 일반 백성들 상대로 칼 뽑네~ 왜 저러지요,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헌병경찰~
이윤석: 일단 때리고 보네,
류근: 저 장면 많이 보던 장면이다.
-----------검거부터 처벌까지 헌병경찰의 막강한 권한----------
최원정: 그냥 뭐 부수고 때리고 끌고 가고~
이윤석: (일본 헌병경찰 횡포에) 난동 부리는 건데~
최원정: 고삐 풀린 망아지~
박찬승: 순사들이 항상 칼을 차고 다니니까~ 어떤 순사의 경우에는 술을 마시고 이제 시비가 붙어서 칼을 뽑아서 민간인을 살상하는 사례가 있었어요.
류근: 그 자체로 공포였을 거예요.
류근: 우리 어렸을 적에 늘 저기 순사 온다 하면 울던 아이들이 울음을 그치곤 했어요.
이윤석: 맞아요.
류근: 그 공포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오랫동안 지속했겠습니까
박찬승: 순사가 호랑이 보다 무섭다고 했죠~
류근: 그것 조차도 대표적인 일제의 그림자예요.
박찬승: 1910년대를 무단통치시대라고 우리가 많이 부르는데요. 무단통치라고 하는 것은 결국에 군대와 경찰로 무력으로써 통치를 한다는 그런 뜻이죠. 그래서 당시 조선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했죠.
류근: 한국민족의 저항의지를 말살시키겠다~
최원정: 무단통치를 헌병경찰통치시기라고 부르잖아요.
심용환: 관련사진 하나 또 봅시다. 유명한 사진인데요. 칼을 차는 걸 우리가 패검(佩劍)이라고 말하는데 순사들이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일단 뒤에 보면 어린 아이들이 서 있습니다. 뭘 얘기 하는 거냐면 실제로 순사복장을 하고 있는 저 분들이 학교교사들입니다.
최원정: 교사들이 칼을 차고 있다고요?
심용환: 데라우치 총독이 헌병경찰한테만 칼을 채운게 아니라 교원, 선생님, 심지어 일반 공무원들 전체를 다 패검하는 문화를 정책적으로 유지시켰던 것이죠.
최원정: 학생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이윤석: 칼이라는게 사람을 아무나 찔러서 죽이는 살상무기인데, 왜 그걸 아이들 앞에서 까지 칼을 차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이건 정말 비교육적인게 아닌가요?
최원정: 무인시대네요. 칼이 곧 권력인~,
심용환: 교육이 아니라 반교육적인 행동,
류근: 그런 괴상한 전통을 이어받아서인지 우리 학창시절만해도 일부이겠지만 교사들이 훈육이란 이름으로 엄청때렸었잖아요. 그 폭력도 대표적인 일제의 잔재였습니다.
빅친승: 몽둥이 같은 걸 들고 수업에 들어와서 말 안들으면 학생들 때리고 결국은 사실 어떻게 보면 무단통치시대에 태형의 잔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용환: 제가 중학교 때 당시 유행하던 구두를 몰래 학교에 가지고 갔다가 교문에서 걸린 적이 있어요. 그때 선생님이 따귀 30대를 모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20분 정도 때려서 맞은 기억이 있어요. 그게 선생님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인데 그때는 그냥 선생님이니까 사랑의 매라고 하면서 선생님한테 당연히 맞았거든요. 나중에 대학엘 와서 공부를 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건 이런 문화의 한 부분에는 우리가 일제를 욕하면서도 우리 안에 식민근성이 있다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면서 느꼈거든요.
류근: 진짜 태형의 문화가 내려왔다구요. 지금 말하다 보니까 또 화가 나는 군요. 우리 일상곳곳에 일제의 잔재들이~
이윤석: 요즘 경찰들은 안그렇듯이 요즘 선생님들은 다르거든요. 요즘 교실에서는 절대 없기를~
박찬승: 1910년대에 익산군수를 지낸 박영철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회고록을 쓴 걸 보면은 자기가 익산군수를 할 시절에 데라우치 총독이 익산에 순시를 왔는데 그때 익산군청 직원들이 나가서 인사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때 그 중에 한 사람이 깜짝 잊고 칼을 안차고 나갔는데요. 그랬더니 명색이 총독이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고함을 크게 지르면서 왜 너는 패검을 안했느냐 “칼을 어디다 잊어버렸느냐.” 이렇게 꾸짖었다는 거죠. 그리고 또 박영철이 쓴 걸 보면은 데라우치는 자신은 겁이 많은 사람이어서 자기 관저 밖으로는 거의 나다니지를 못했다고 해요. 그런 사람이 이제 여학교 선생들까지도 다 칼을 차도록 이렇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통치를 하였다고 썼습니다.
류근: 원래 폭력에 대한 콤플렉스가 악마를 만드는 거예요.
이윤석: 칼 차고 무력에 집착했다는 자체가 우리의 저항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라는 반증이죠.
류근: 독재자 일수록 은둔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최원정: 데라우치 총독이 식민지 조선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벌였다고 하는데 과연 무슨 일을 벌였는지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1915년 경복궁 근정전 상공에 비행기 한대가 나타나 관심이 집중됐다. 이 비행기의 출현은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조선물산공진회 행사의 일환이었다.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제 총독부가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대규모 이벤트였다. 여기에 전시된 신문물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경복궁을 찾았다. 찾아온 관람객의 수가 무려 116만명에 달할 정도로 조선물산공진회는 성황을 이룬다.----------
이윤석 연기: 자~자~ 줄을 서세요~조선물산공진회에 오신 여러분, 공진 함께 나아가자 이런 뜻이죠. 共進 일본과 조선이 함께 나아가자 라는 의미에서 일본의 선진문물을 조선의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자, 116만명을 사로 잡은 신식변기 등 히트상품이 여기 있습니다. 자, 바로 이게 고무신 이라는 건데요. 요렇게 요렇게 신어서 푹신 푹신한 착화감 좋은 고무신이예요. 그리고 이게 굉장히 질겨요. 질겨~ 그리고 물에 젖지를 않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에도 신을 수가 있고 또 무엇보다도 이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가죽신발의 3분의 1~ 이쯤되면 거져예요. 짚신하고는 비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 외에도 호랑이나 곰가죽 파인애플 같은 수입 과일 센베이 과자 카스테라 등등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엄청난 상품들이 즐비합니다. 자, 마음껏 구경하시고 소문도 많이 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최원정: 저것 보니까 정말 다 사고 싶네요. 지름심 강림 예간?
이윤석: 사면서도 고무신이 그렇게 신기했을까요?
이익주: 그렇게 가볍고 질기고 물에 젖지 않고 이런 신발을 신어 본 적이 없잖아요. 타이어표 검정 고무신이 있었는데 우리 어렸을 적엔 다 그거 신었어요.
심용환: 타이어표?
최원정: 진짜요, 교수님?
류근: 그럼요, 타이어표, 기차표, 왕자표, 말표 이런거 다~
최원정: 박찬승 교수님은 어떤 표예요?
박찬승: 나는 말표요, 우리나라에서 고무신을 본격적으로 신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이후입니다. 1922년부터 고무신이 날개 달린 듯이 팔려 가지고, 그전에 짚신이나 가죽신을 만들던 사람들이 다 실업을 하게 됐다 이런 게 신문에 나왔지요.
류근: 고무신이 질겨도 너무 질겨요.
최원정: 고무신 같은 건 대량 생산인데, 우리나라에서 생산이 되었어요?
박찬승: 1910년대는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고 1920년대는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자체 생산하죠. 평양에 조선인들이 고무신 공장을 많이 만들었어요. 민족자본으로 주로 많이 만든게 고무신이었어요. 여자들 고무신은 앞에 코가 뾰죽하게 나온게 그걸 조선에서 개발한 거죠. 그래서 백성들 한테 아주 인기가 높았어요.
류근: 코 고무신~
최원정: Made in 조선, 발선이 아주 예쁘게 코가 지는 모양~
류근: (이벤트 참가관중 사진) 저기 지금 인산인해에 입추의 여지가 없잖아요.
최원정: 저라도 가보고 싶었을거 같애요.
류근: 작가 조정래 선생은 말이죠. 그분 소설 아리랑에 보면 그날 그때 물산공진회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일본의 온갖 신식물건들이 조선의 농공수산물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당시 풍경을 압축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박찬승: 그러니까 당시 20개 전시장에서 4만 8000여점이 전시가 됐는데 거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거나 아니면 조선에 와있는 일본인들이 만든 거예요.
이익주: 저 행사 이름이 시정 5주년 이잖아요. 뭐냐 하면 5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을 얼마나 잘 살게 해 주었는지 이걸 보여줄려고 한 거예요. 신식물건뿐 아니라 일본에서 들여온 신식농기구가 전시되고 그 옆에 5년 동안에 한국 농촌에 수확량 증가도표 또 식민지통치 이후에 한국의 보통학교가 얼마나 늘어났나 이런 통계표 것들이 같이 전시가 됩니다.
류근: 자랑하고 싶어가지고요~
박찬승: 통계가 많이 동원이 됐어요. 통계가 많이 동원이 돼서 그걸 선전을 하는 하여튼 선전의 장이었죠.
이윤석: 그런데 말씀 하신대로 도표나 통계 이런 것들이 많이 있으면 구경하러 가고 싶어하지는 않았을 텐데~
심용환: 그렇죠, 조선총독부가 비장의 마켓팅 기법을 준비했는데 뭐냐 하면 여기서 주인공은 경복궁 (근정전)이 아니라 위에 보십시오. 사진의 주인공 비행기,
이윤석: 경복궁 건물 하늘에 비행기다!
이익주: 아니 고무신 파느라고 비행기를 못봤어요~
이윤석: 하늘은 못보고 발만 봤지요.
심용환: 근정전 상공을 날으는 비행기, 실제로 경성 상공에 날아가면 애들은 좋아서 아빠 비행기야 이러는데 이때 1910년대는 지금처럼 비행기 보는게 흔하지 않은 시대잖아요. 그래서 조선총독부가 일본제국비행협회에 어렵게 부탁과 요청을 해서 드디어 한 대를 섭외하게 됩니다. 엄청난 이벤트를 벌인 거죠. 흥행의 주역이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짜잔~(여자 사진),
이윤석: 이 여성분은 또 누구신지~?
최원정: 무희 아니예요 혹시 걸그룹 처럼 그 앞에서 춤추고 그랬어요?
이익주: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당시 기록을 보면 도합 200여명이나 되는 꽃 같은 기생들이 복색을 갖추어 입고 경성시가를 한번 도는 대행렬을 할 터이다. 꽃밭 꽃밭 하니 이러한 꽃밭이야 그 장관이 어떠하겠느냐 (매일신보 1915.9.11 일자) 라고 나옵니다.
류근: 이때는 아이돌 내지 연예인들~
박찬승: 당시 기생들이 요즘 연예인들과 마찬가지로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을 동원하기 위해서 기생들을 이용한 거죠. 그외에 마술을 한다든가 불꽃놀이를 한다든가 이렇게 한 50일동안 공진회를 했는데 행사가 끝날때는 116만명이 찾았다는데 경성에서만 19만명이 찾았다 라고 합니다. 당시 경성 인구가 25만명 이거든요. 19만이면 갈 사람은 거의 다 간거지요. 그만큼 여러가지 흥행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또 동원도 많이 한 거죠. 조선총독부가 동원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류근: 그런데 지금 이상하게 조선물산 공진회 얘기를 계속 듣다 보니까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 나이 또래는 다 기억할텐데 5공화국 군사정권이 광주민주항쟁 1주년이 되고 1981년도에 기획한 국풍81을 봤거든요.
최원정: 국풍81이요?
류근: 들어는 보셨죠?
이윤석: 그럼요.
------1981년 5공화국 군사정권 당시 KBS 뉴스-겨례의 멋과 흥, 國風 ‘81絶頂-오늘, 120만 인파---
(국풍81-전두환 정부가 1981년 5월 28일~6월 1일간 여의도 광장에서 주최한 문화축제),
국풍 81은 남녀노소 각개 각층이 한 마당에 모여서 우리 모두가 한겨레 한문화 한 이웃임을 재확인한 계기였습니다.
류근: 그때 국풍81일 때문에 유명해진 게 세가지가 있어요.
이윤석: 전 한가지는 확실히 알아요. 워낙 유명해 가지고~이때 유명 가수 이용씨가 “바람이려오” 이거 불러가지고 “날개짓 하면서~”
심용환: 난 처음 들어봐~
최원정: 여기서 나이 차이와 세대차이가 나는거 같은데요 심 작가와 저는 교과서에서 한줄도 못본 거 같은데요~
이윤석: 2절까지 알 것 같은데~ 왜 그래요?
최원정: 몰라요 처음 들어 봤어요.
심용환: 저 진짜 처음 들어 봤어요.
최원정: 그때 또 뭐가 유명해 졌어요?
류근: 히트 음식이예요.
심용환: 김밥, 충무김밥, 통영에서 유명한 충무김밥,
류근: 알아요 맞아~
이윤석: 왜 충무김밥이예요?
류근: 거기 풍물시장에 그게 출품이 됐었나봐요 그래 가지고 그때 유명했던 음식이 충무김밥과 춘천 막국수,
심용환: 막국수도
류근: 국풍81 행사때도 동원된 인원이 16만명에 당시 여의도 광장에 입장한 인원만 약 600~1000만명을 헤아린다고 하니까 저 정도 되는 거예요.
최원정: (박찬승 교수에게) 뭐 떠오르는거 없으세요.
박찬승: 저도 여의도 가봤습니다. 그런데 온통 난장판 이어서 한쪽에서는 그룹 사운드가 노래를 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난장판이 벌어져서 먹고 마시고 이렇게 돼서 국풍81이 전혀 분위기가 아주 이상했어요.
류근: 관제행사가 다 그렇죠~ 그런데 당시 신군부 세력이 집권할 때 잖아요. 그러니까 5공화국의 태평성대를 선전하면서 당시 저항세력, 특히 대학생들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목적이 있었던 거죠. 예나 지금이나 정통성 없는 집권세력들의 단골수법인 것입니다.
최원정: 어르신들 옛날 얘기 들으니까 참 어두운 시절을 살아오셨군요.
류근: 저도 어르신이라고?
최원정: 앞으로는 밝은 세상 저희와 함께 살아가시기를~
심용환: 처음 들어보는~
이익주: 잘 대해주세요. 그런데 저 물산공진회에 사람을 많이 끌어모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한 가지가 있어요. 장소입니다. 장소가 다른 데가 아니라 경복궁이었어요.
최원정: 왜 경복궁이예요?
이윤석: 그럴 것 같애요.
이익주: 아무튼 이때부터 경복궁이 파괴되기 시작해서 우리가 지금도 계속 복원 작업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완전한 복구가 안되었어요.
---------------수많은 전각으로 가득차 있던 경복궁, 그러나 공진회 개최를 위해 전각 대부분을 철거한 일제, 그렇게 일제는 경복궁을 파괴해 버렸다.
최원정: 아니 90%가 파괴되었다고 그러니 어느 세월에 그걸 복원을 해요?
류근: 일제는 이 행사를 빙자해서 경복궁을 팔아 먹고 파괴할려고 했던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네요. 이게 야만 아닙니까 이런 자들이 무슨 문명화를 주장하고 있어요?
최원정: 저 경복궁이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복원된 것인데 그걸 저렇게 허무하게 헐었다구요.
박찬승: 아까 근정전에 일장기가 두개 걸려져 있잖아요. 그렇게 한 이유는 뭐냐 하면 당시 공진회 관람코스 중에 하나가 근정전으로 가는 거예요. 조선 사람들이 여러군데 상품지역관을 보고 그 다음에 근정전 앞에 가서 일장기를 보라 하는 그런 뜻이 거기에 담겨져 있는 거예요.
심용환: 조선왕조의 몰락을 뼈저리게 느꼈을 조선 민중들, 아, 이 나라는 이제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구나.
박찬승: 조선 왕조는 완전히 망했구나 그런 걸 실감나게 해주는 거죠~
류근: 정궁을 시장통으로 만든 것 아닙니까
박찬승: 공진회와 관련해서 한가지 말씀드리면 공진회를 연다고 전국의 양반집들에게 가지고 있는 문화재를 출품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상당히 많은 문화재들이 모이게 됐습니다. 그런데 공진회가 끝난 다음에 하나도 되돌려주지를 않았습니다.
최원정: 이런 문화재 먹튀!!
박찬승: 당시 일본에서 온 귀족들이 그걸 나눠가지고 갔고 또 데라우치 총독도 일부 가져가고 나머지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이란 걸 만들어서 거기에 전시를 하게 돼죠.
최원정: 거기에 저렇게 많이 몰려가서 너무 속상하네요. 일제가 선전한 문명화, 강제병합 이후 문명화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됐나요?
박찬승: 그 중에 하나가 학교를 많이 늘렸다 특히 공립보통학교의 숫자를 많이 늘렸다 하는 것이고요. 이것은 사실은 공립보통학교를 조금씩 늘려간 것은 당시 사립학교가 2000여개로 워낙 많았기 때문에 사립학교에 가서 민족교육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한 측면이 굉장히 강해요. 그러나 일반 학부모들은 공립보통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면 거기 가서 일본어 교사한테 일본어를 배우는 것이니까 그러면 일본 사람된다 이래서 아이들 공립학교에 보내는 것을 꺼려했어요.
류근: 그러면 학교를 안보내면 어딜 보내요?
박찬승: 농촌에는 서당이 많았어요. 서당으로 많이 보냈죠.
심용환: 그때 개량서당~
류근: 정말 소신있는 행동아닙니까. 자식을 일본인으로 만들지 않겠다 정말 반일의식이 상당했다는 거예요.
최원정: 총독부가 세운 학교를 다니면 주류가 될 수가 있는데 그 출세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의 우리의 수준을 알 수 있는 거예요.
이윤석: 뿌듯하네요, 아까는 속상했는데~
이익주: 통계를 보면 1910년대에 서당이 늘어납니다. 1910년에 서당의 수가 16,500개였는데, 1916년에 25,400개로 늘어납니다. 학생수도 16만여명에서 25만여명으로 늘어납니다.
이윤석: 데라우치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애요.
류근: 우리가 지금 주체적으로 문명화하고 있는 거잖아요.
박찬승: 개량서당에서 신학문도 많이 가르쳤습니다. 한문만 가르친게 아니고 어떤 경우는 영어도 가르쳤고~ 서당 선생님들이 공립보통학교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에~ 신학문을 배운 사람들이죠. 그렇기 때문에 옛날 우리의 전통시대 서당으로만 볼 수는 없죠.
최원정: 애국계몽운동을 이제 서당을 통해서 암암리에 한 거네요.
류근: 그렇겠죠.
류근: 조선 민중들은 다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명색이 총독부 라고 하지만 정부잖아요. 민생대책을 내놓기는커녕 일본의 외화획득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심용환: 뭔가 민생대책이 나올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면 이건 정말로 충격적인 게 나옵니다.
이윤석: 그 꽃이 왜 충격적이에요? 너무 이뻐서 충격적이예요?
심용환: 이것(양귀비)까지 조선에 들어옵니다.
류근: 그거 아는 꽃인데~ 양귀비다~
최원정: 양귀비를 들여 왔다구요?
심용환: 지금 이게 무슨 꽃이냐 이럴 때가 아니예요~ 왜 들여왔느냐가 중요한 거지요.
류근: 아편~ 진짜?
류근: 이건 진짜 악마들이나 하는 짓이지~
최원정: 그러니까~
류근: 아무리 식민지 라지만 어떻게 국가가 마약을 전매를 합니까.
이익주: 아편 전매에 대해서 이완용이 한마디 합니다. 조선 민족을 박멸하는 방책이다. 친일파였던 이완용 마저도 이렇게 말할 정도로 조선에 아편을 들여오는 이것이 정말 조선을 문명화시키겠다고 식민지를 만들었던 일본의 주장이 허구였다 는 걸 보여주는 아주 대표적인 사례가 되는 거예요.
이윤석: 강재 병합 당시에 일제에 기대한 사람도 있었을 거에요. 정말 우리를 잘 살게 해주는게 아닐까 그런데 오늘 얘기를 들어보면 매질에, 쌀값은 폭등하고, 심지어는 아편을 들여오고, 이것만 봐도 일제의 본색이 뭔가 그들의 진정한 의도가 뭔가 이제는 다 보였다.
최원정: 조선의 문명화와 복지증대는 다 수탈본능을 가리려는 선전문구들이었어요.
이윤석: 그때 사람들도 아마 깨닫지 않았을까 싶어요.
류근: 뭐죠? 식민지 근대화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실 가끔은 그럴 듯 하잖아요. 그럴듯한데 그 기반 자체가 얼마나 허구인가를 알 수 있다는 거죠.
최원정: 그 면면들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류근: 거기서 혜택받은 아주 극소수들이 지금 득세하고 있는게 아닙니까 일제를 어버이 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다는 사실 거듭 기가 막힙니다.
이익주: 1910년대에 일본의 무단통치는 정말 그 당시 많은 식민지가 있었지만 이렇게 악랄한 식민통치가 있을까 하는 거죠. 정말 나쁜 統治 惡政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걸 견뎌내고 심지어 그걸 이겨내기 까지 했습니다. 3.1운동이 바로 그런 거잖아요. 자, 이제 우리가 후손이 된 입장에서 이런 반성 한번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애요. 그 식민통치의 잔재를 우리는 다 청산했는지~ 우리가 모르는 식민 잔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 예를 들어서 한국 사람은 때려야 한다. 이런 말 한국 사람은 단결하지 못하고 늘 분열해서 싸운다. 민도가 낮다. 냄비근성이 있다. 이런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는 이런 이야기가 혹시 이제 일제 사람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 우리 국민학교도 1996년 초등학교로 개정했잖아요. 이렇게 생활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좀더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1910년대의 일제잔재, 찌꺼기를 우리가 스스로 극복할려는 노력을 앞으로 계속 해야 될 것 같애요.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원정: 이제 막 첫 걸음을 내딛는다 생각하고 더 열심히 조국의 길로 가야 되겠습니다. 오늘 얘기 나눈 무단통치가 백성을 크게 자극해서 3.1운동으로 간 거죠. 다음시간에는 민족적 거사 만세운동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8화, “무단통치”에서 인용).
①1910년 일본 데라우치 제1대 조선통감 부임, 조선 식민지 명분 조선 문명화시키고 조선인의 복지 증진 및 동양 평화 유지목적, 그런데, 데라우치는 전국에 1560개 헌병분대, 파출소, 경찰서, 그리고 주재소를 설치, 조선인 물샐틈 없는 철저한 감시체제, 헌병분대장에게 즉결심판권을 주고, 군인들한테 민간인을 함부로 대하도록 함, 헌병경찰 우두머리 아카시 경무총감,
② 1912년 조선통감부 笞刑令 발표, 조선인만 적용, 조선내 일본인 외국인 중국인 해당무. 일본은 1882년 메이지유신 이후 태형 폐지, 그걸 조선 문명화 위해 10년간 시행, 감옥에 가둬두고 먹여주고 재워주면 비용이 들고 감옥을 새로 지으면 비용발생, 고로 비용절약 차원에서 즉결심판과 정식재판에서 태형 많이 선고, 전체 형벌중 약 45% 차지,
③ 1910년대 일제 무단통치는 헌병경찰통치, 한국민족의 저항의지 말살 위해 경찰과 군대로만 통체, 조선사람들 공포와 두려움, 식민통치 협조않는 한국인 온갖 꼬투리 잡아 보복, 즉결심판에 태형집행 비일비재, 계엄령 시대, 데라우치 총독 헌병경찰, 교원, 선생님, 일반 공무원들 칼 차게 佩劍文化정책, 교사 학생들 앞에서 칼 차고 수업 공포분위기 조성, 반교육적 행동,
④ 1915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근정전) 전각 4천여칸 헐어내고 넗은 마당 조성 조선물산공진회 이벤트 행사개최, 조선인들에게 여기가 옛날에 너희들 왕들이 살던 곳이야 너희도 왕이 살던 곳을 구경할 수 있어,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켜 동물원, 일제 조선총독부 조선왕실 흔적 지우는데 기획매진, 무려 116만명이 이벤트 관람 대성황, 본래 경복궁 90% 파괴 현재 복원중,
⑤ 경복궁에서 열린 전시된 신문물을 보기 위해 무려 116만명 인파가 경복궁을 찾아서 조선물산공진회는 성황을 이뤘다. 20개 전시장, 4만 8000여점 출품, 일본 수입품 조선거주 일본인 생산, 신식 물건 신식 농기구, 한국 농촌 수확량 증가도표, 보통학교 증가 통계표, 경복궁 상공에 비행기 한 대 비행, 이는 당시로서 획기적인 볼거리임,
⑥ 데라우치는 전국의 양반집들에게 문화재 출품하라, 많은 문화재 출품, 공진회가 끝난 다음에 하나도 되돌려주지 않음, 당시 일본 본토 귀족들 그걸 나눠가져갔고 데라우치 총독 일부 가져감, 나머지 문화재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만들어 전시,
⑦ 공진회는 식민지배 동안 농업 쌀생산량 증가선전, 생산된 쌀 대량 일본으로 실려감, 조선 쌀 부족사태발생하여 쌀값 폭등현상, 민중들 생활 힘들어지는 상황, 실례로 1917년 쌀값 1석(=144kg)당 14원, 2년 후(1919년) 43원까지 3배 정도 폭등, 이로 인해 당시 도시빈민들 대거 3.1운동참여 계기,
⑧ 조선 사람들 식량 부족 매꾸기 위해 구황식물 감자, 고구마, 옥수수 밭에 재배 일제 그걸 못하게, 대신 외화획득 위해 뽕나무를 강제로 많이 심게, 생사미국수출 위해 뽕나무 잎으로 누에 키워라, 일본 개항 이후 생사수출로 외화 달러획득 경험, 일제 뽕나무 묘목 조선농민들에게 분배했으나 농민들 불만, 3.1운동 때 뽕나무 묘목 면사무소에 일제히 던져 버림,
⑨ 1915년 조선총독부 조선물산공진회 경복궁 대형 이벤트와 1981년 한국 5공화국 여의도 국풍 81은 정통성 없는 집권세력들의 단골수법, 청나라 영국과 아편무역 멸망, 1914년 조선총독부 재정확충 위해 조선에 아편전매방침 발표, 친일파 이완용도 조선 민족박멸방책 반대, 일본 조선 문명화 위해 식민지 삼았다는 주장 허구라는 게 대표적 사례, 일제 수탈본능 은폐,
⑩ 데라우치 무단통치의 상징 헌병경찰제도, 헌병경찰제도의 상징 태형, 1916년 하세가와[조선2대총독] 데라우치 무단통치 계승, 군인들에 의한 계엄통치, 1919년 3.1운동 때까지 거의 10년 무단통치, 惡政 統治로 3.1만세운동 유발, 전국적으로 100만명~200만명 참여, 일본의 악랄한 식민통치, 우리 민족 그걸 견뎌내고 이겨내고 드디어 1945년 해방, 이제 식민통치 일제잔재 청산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