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백(1801: 영광, 참수), 영광 대마 월산리, 양반,
-최여겸(마티아: 복자,1801년 순교, 전북무장출신) 의 제자
복산지 양반 오씨(1801: 영광, 참수), 토반(한 곳에 오랫동안 거주한 양반)
-이우집, 이종집에게 교리를 배움
『여기에 전라도의 몇몇 다른 증거자들의 이름을 덧붙이기로 하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정이
남아있지
않고,
또한
그들이 순교한 정확한 날짜도 보존되어 있지 않으나,
같은 시기에 고통을 당하였을
것이 거의 틀림없다. 이들은 아래와 같은 사람들이다.
李화백 이 사람은 靈光 고을의 양반이요 崔汝謙 마티아의 제자로 자기 고향에서 斬首당하였다. 같은 (최
여겸)마티아의 조카로, 흔히 「금노」라고 불리는 최일안이란 사람은 영광스럽게 신앙을 증거한 후 전주
에서 당한 형벌로 죽으니,
나이는 40세 였다. 靈光 고을 복산지의 양반으로 참수당한 吳氏라는 교우,
끝으
로 錦山 고을 솔티에서 붙잡혀 전주에서 참수당한 元氏라는
또 한 사람의 교우이다.』
(한국천주교회사 上, 샤를르 달레著 522쪽, 천주교 전주교구사 1269쪽, 광주대교구 50년사 64쪽)
「전라도에서
여러 교우들이 치명하였으나 그 행적을 기록하지 못하는 까닭은 참고할 전거가 없기 때문이다.
영광 사는 이화백은 이름 있는 사람으로서 최마티아(여겸)의
제자다. 그는
본 읍인 영광에서 치명하고 최마
티아의 조카 최일안
금노는 전주서
형벌 받아 치명하니 나이 40이며,
영광 복산지 오씨도 그곳에 치명하였
고…(중략)
최여겸은
영광에까지 가서 그곳의 이름 있는 이화백에게 전도하였다. 이화백은
본 읍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조카 최일안의 고향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으나 아마도 최여겸과
같은 무장인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영광
복산지 양반 오씨는 누가 전도하였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최여겸으로 인해서
이화백이 개종했던 것으로 보아 역시 오씨도 최여겸에게서
전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영광에서 순교한 이화백과 복산토반 오씨의 순교터는 영광읍성 남문밖 도동리 석장승 남쪽의 옛날 우시
장 터로 추정된다. 석장승이 1832년(순조 32)에 잡귀, 액, 살등 부정한 것을 막아준는 역할을 하기 위해 세
운 것도 이곳이 순교의 장소였기 때문을
본다.
(1801년 신유박해 영광순교자
고찰 ‘영광지역의 천주교 전파와 박해 및 순교터’ 서종태. 67쪽)
*『한국천주교회사2』(한국교회사연구소刊)<표5> 신유박해때 처형된 사람들- 영광순교자 '이화백' 98쪽
여기에
처형일이 '1801. 7월 이후[월일미상]'으로 나온다.
[고창개갑성지순교지자료]
최여겸 마티아 ‘개갑성지’
고창
향토문화유산 제1호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
복자
최여겸 마티아 순교자는 1763년 고창군 공음면 갑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이다.
진산
땅의 첫 순교 복자 윤지충 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충정도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를 만나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최여겸 마티아는 고향에서 고창, 흥덕, 무장, 영광, 함평 등 서남해안 지역에 전교를 하였다.
최
마티아 복자가 입교시킨 사람은 무장의 최수천(횡성에 유배), 최일안(전주에서 형벌로 옥사),
흥덕의
김처당(청도에 유배), 영광의 이화백(영광에서 순교), 함평의 남중산(평산에 유배) 등
기록에
있는 사람만 28명이다.
신유박해(1866, 음력 4,13 )때 처가인 한산에서 체포되어 무장현으로 압송, 전주 감영을 거쳐
한양에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형조에서는
중죄인은 고향에서 처벌하여 본보기로 삼는 해읍 정법(該邑正法)의 명을 내려
고창군
공음면에 있는 개갑 장터에서 1801(병인)년 장날인 7월 19일(음) 참수형을 받아
38세에
순교하였다.
복자 최여겸 마티아의 전주 최 씨 후손은 심증은 가지만 확실한 물증을
찾지
못하는 분들이 있는데 더 연구할 과제라는 백원철 교수의 얘기이다.
순교자
최여겸 마티아는 2014. 8.16 윤지충 바오로와 함께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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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때인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영광 고을 성씨 조에 오씨
성으로는 해주 오씨 하나밖
에 없었으므로 복산에 살던 오씨는 해주 오씨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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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때인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 영광 고을 성씨 조에 이씨
성으로 밀양이씨, 한산이씨,
전주이씨, 경주이씨, 함풍이씨가 보이고 있으나 이 중에 어느 것이 이화백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종태 박사 논문-'영광지역의 천주교 전파와 박해 및 순교터']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조현범 외, 디자인흐름 간행)에 실림287~320쪽
0 복산(伏山)
약 400년전 진주(晋州)정씨가 성촌하였다는 구전이 있다. 1770년경 부성의 수성최씨가 옮겨 왔으며,
1860년경 상산김씨가 들어왔다. 일제 때는 27호(최씨 13, 김씨 9, 반남박 2, 순천박 1, 해주오 1, 금성11)가
살았으며 6.25때 8명이 죽고 마을 대부분이 소각되었다. 현재 13호(최 6, 김 6, 차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의 꿩이 엎드린 형국(복치)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창성당 최여겸 순교지 자료 중에서
*유의: 고창군 ‘디지털 고창문화대전 인터넷 홈페이지 ‘최여겸 순교지‘에는 ‘이화백’의 漢字가 ‘李和白’으로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