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입헌 국가(立憲國家)의 출발 [읽기 칼럼] 한반도와 일본
[ 일본의 독립과 한반도 ]
동아시아의 지도를 살펴보자.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조금 떨어져 바다에 떠 있는 섬나라이다. 이 일본을 향해 대륙으로부터 팔이 하나 있는 것처럼 한반도가 튀어나와 있다. 이와 같은 양국의 지리적 관계는 오랜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고래로 한반도로부터는 중국 등의 선진 문물이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이 한반도에 미친 적도 있었다. 일본은 중국과 한반도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일본이 고대 율령 국가를 형성한 것도 동아시아 속에서 자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원구(元寇 역주: 일본에 침략한 원)의 거점이 된 것도 한반도였다. 반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한반도에 대군을 보낸 적도 있었다. 에도(江戶) 시대에는 쓰시마번(對馬藩)을 통해 도쿠가와 막부와 조선의 양호한 관계가 계속되었다.
[ 조선의 근대화와 일본 ]
메이지 신정부는 정권 수립 후, 곧 조선과 국교를 맺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의 청조에 조공을 하고 있던 조선은 외교 관계를 맺을 것을 거절했다. 조선을 개국시킨 1876(메이지9)년의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는 그 제1조에서 「조선국은 자주국」임을 표명했다. 이는 청조의 영향으로부터 조선을 분리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청조 이상으로 위협적인 대국은, 부동항을 찾아 동아시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91년 시베리아 철도 건설에 착수하였고, 그 위협은 물밀듯이 닥쳐왔다. 한반도가 동방으로 영토를 확대해 나가고 있는 러시아의 지배에 들어가면 일본을 공격하기에 알맞은 기지가 되므로,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어려워질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이 개국한 후, 근대화를 시작한 조선의 군제 개혁을 도왔다. 조선에서도 시찰단이 찾아와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성과를 배우고자 했다. 조선이 다른 나라에 침범되지 않는 것은 일본의 안전 보장을 위해서도 중요했다.
[ 조선을 둘러싼 일청(日淸) 대립 ]
한편 청(淸)은 동아시아 정세를 다른 시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879년, 오랫동안 청에도 조공을 해 온 류큐(琉球, 역주: 지금의 오키나와)가 오키나와현(沖繩縣)이 되어 일본 영토로 편입된 것은 청조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 후 청불(淸佛)전쟁에서 패하자, 또 하나의 조공국 베트남이 프랑스 지배 아래 들어갔다. 조공국이 잇따라 줄어드는 것은 황제의 덕의 쇠잔을 의미하며,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질서가 붕괴되는 위기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청은 마지막 유력한 조공국인 조선만은 잃지 않고자, 일본을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일본이 일청∙일노라는 두 개의 전쟁을 하게 된 배경에는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가 있었다.
4-3 입헌 국가(立憲國家)의 출발 57 일청전쟁(日淸戰爭)
김옥균 (1851-94년) 갑신사변 후
일본으로 도피했지만, 후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암살되었다.
[ 조선을 둘러싼 일청의 항쟁 ]
일본은 조선이 개국한 후, 그 근대화를 돕기 위해 군대 제도의 개혁을 지원했다. 그러나 1882년 개혁에서 밀려나 냉대받는 데 불만을 품은 일부 조선 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 (임오군란). 청은 이에 편승하여, 수천의 군대를 파견하여 즉각 폭동을 진압함으로써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884년에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떠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한 김옥균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이 때도 청의 군대는 이를 진압했다 (갑신정변). 조선에서의 청과의 싸움에 두 번 패배한 일본은 청과의 전쟁을 예상하여, 급속히 군비를 확장하여 마침내 거의 대등한 군사력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 일청전쟁(日淸戰爭)과 일본 승리의 원인 ]
1894(메이지 27)년 조선 남부에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는 폭동이 일어났다. 농민군은 외국인과 부패한 관리를 추방하고자 하였으며, 한때는 조선반도의 일부를 제압할 정도였다. 미미한 병력밖에 갖추지 못한 조선 왕조는 청에 진압을 위한 출병을 요청했는데, 일본도 청과의 합의를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1) 일청 양군이 충돌하여 일청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터는 조선 외에 만주(중국 동북부) 남부 등으로 확대되었고, 일본은 육상 전투에서도, 해상 전투에서도 청을 제압하여 승리했다. 일본의 승리 원인으로는 신병기의 장비와 더불어 군대가 훈련과 규율에서 우세했던 점을 들 수 있는데, 그 배경에는 일본인 전체의 의식이 한 국민으로 뭉쳐져 있었다는 사실이 있다.
(*1) 1885(메이지 18)년, 일청 양국이 조선에 출병할 때에는 사전에 서로 통지한다는 조약이 양국간에 체결되어 있었다.
사진: 붙잡힌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중앙)
[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과 삼국간섭(三國干涉) ]
1895(메이지 28)년, 일청 양국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고, 청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함과 동시에 일본 정부의 재정 수입의 약 3배에 해당하는 배상금 3억 엔(2억 냥[兩, 역주: 중국의 구식 은화 단위])을 지불하고, 랴오둥 반도(遼東半島)와 대만 등을 일본에 양도했다.
「잠자는 사자」라 불리며 그 저력으로 주위를 두렵게 했던 청은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신흥 국가 일본에 맥없이 패함으로써, 고대로부터 지속되어 온 동아시아의 질서는 붕괴되었다. 중국은 순식간에 열강 제국의 분할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간단히 구미 열강과 대등해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 야심을 품은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움직여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랴오둥 반도를 청에게 반환하도록 일본에 압력을 가했다. 이것을 삼국간섭이라 한다. 청은 물리쳤지만, 혼자 힘으로 삼국에 대항할 힘을 갖지 못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일정액의 환부금과 교환하여 랴오둥 반도를 돌려주어야만 했다. 일본은 중국 고사에 있는 「와신상담」(*2)을 모토로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국력의 충실에 힘쓰게 되었다. (*3)
(*2) 장작 위에서 잠으로써 몸을 고통스럽게 하고,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잊지 않으려는 중국의 고사성어.
(*3) 그 때문에 국내 정치에서는 정부와 정당이 협력하게 되었다.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가 헌정당(憲政黨)을 창립하고, 1898(메이지 31)년 처음으로 정당원이 총리대신이 된 오쿠마 내각이 탄생했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스스로 총재가 되어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를 결성했다.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을 인정하며, 조선에서 청나라에 대한 조공 헌상 전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
제4조 청국은 일본 제국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